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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다큐 : 새시대의 문을 열다
05/10/2017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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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운명은 역사를 만들어 내고 역사는 그러한 운명들이 모여지면서 필요에 의해서 기록 되어진다. 
운명은 정해져있다고 역술학자들은 말한다. 정해진 운명은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바뀔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며 또한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라서 개개인의 운명은 역사로 길이 남겨질 수도 있다.


여기에 문재인 대통령이 이제껏 살아 온 다큐 영상을 소개한다.
문재인 대통령을 지지하는 분이든 지지하지 않는 분이든 아래의 영상을 한번 보시기를 권해드린다. 

MBN 다큐 - 문재인, 새시대의 문을 열다


[티브이데일리 한예지 기자] 19대 대통령 당선이 확실시 된 문재인 후보의 운명같은 삶이 귀감이 됐다.  

5월 9일 19대 대통령 선거 개표 상황을 방송 중인 종합편성채널 MBN '개표방송-하나되는 대한민국'에는 '제19대 대통령 특집, 문재인 새시대의 문을 열다' 특집이 꾸며졌다.  

문재인은 당선 확실로 19대 대통령 당선인이 됐다. 1950년 흥남부두에서 사상 최대 피난민의 탈출이 이뤄졌던 당시 문재인 부모는 거제로 내려왔고, 3년 뒤 문재인이 출생했다. 문재인 탯줄을 자른 할머니는 당시를 회상했다. 문재인 부모는 타향에서 살아남기 위해 부산 영도로 향했다. 당시 영도는 피난민들의 집결지였다. 지독하게 가난했던 소년 문재인은 그 가난에서 가난한 이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그들이 행복한 세상을 꿈꿨다.  


문재인 후보 모교 선후배들은 "이때도 잘생겼다"며 졸업사진을 확인했다. 그들은 "옛날엔 말도 잘 못하고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동기들이 기억을 잘 못할거다. 유세 보니 많이 늘었다"고 넉살이었다. 문재인은 집에서 공부할 환경이 안 되는 학생들을 위해 운영하는 학교 공부방에서 늘 공부를 하는 학생이었다고. 숱한 소설까지 섭렵한 그는 사회의식이 싹텄다. 경남고등학교 시절엔 의외로 '문제아'였다. 하지만 급우들에겐 잊지 못할 학생이었다. 부산 금정구 해동저수지로 소풍을 가던 시절, 길이 험해 포기를 하려던 동급생은 "친구들이 어느 순간 안 보였다. 둘만 남게 됐을 때 재인이가 나를 업었다. 그땐 재인이도 힘도 없고 조그맸다. 걷다 쉬다 반복하고 나중에 도착했을 때 소풍은 거의 파장 수준이었다. 훗날 그 얘기를 하더라. 자기가 그때 좀 더 힘이 세고 키가 컸다면 나를 마음껏 업어줬을텐데 같이 소풍가자고 말은 했는데 업어보니 힘들고 속으로 울었다고 하더라"고 했다. 

1969년 박정희가 3선 개헌을 추진했고, 전국은 이를 반대하는 시위로 들끓었다. 당시 교련 거부 운동이 한창이었는데 문재인도 그 속에 있었다. 경희대학교 시절, 유신 반대 투쟁에 나섰다. 당시 동료는 "경희대 교복을 입은 단정한 친구가 오더라. 나중에 바로 코 앞에 왔을때 그 인상은 눈이 매우 강렬한 친구였다. 사회 문제점을 풀고 싶지만 풀 수 없는 상태의 답답함, 그러나 앞으로 반드시 풀겠단 욕망, 열망이 느껴졌다"고 회상했다. 

1972년 10월 박정희는 10월 유신과 계엄령을 선포했다. 이를 반대하는 대학엔 탱크를 보냈다. 살벌한 시대였다. 학생들을 비롯한 각계 유신 반대 행동이 벌어졌다. 74년 정초, 대통령 긴급조치로 이를 반대하거나 비판하거나 개정하자고 주장만 해도 징역 15년에 처하는 것이었다. 문재인은 치열하게 유신 반대 투쟁을 벌였다.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구국선언문을 발표한 대학생들이었다. 당시 총학생회장 강삼재가 경찰에 잡혀 나타나지 않았고 학생들이 우왕좌왕 할 때 문재인이 대신 나섰다. 결단과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선택이었다. 인혁당 관계자들이 살해를 당하자 이를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감옥에 갔다. 


유신 반대 투쟁을 함께 한 대학동기는 당시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당했던 과거를 떠올리며 "평생을 우리가 72년도 대학 들어온 뒤부터 평생을 늘 42년을 같은 길을 걸었던거다"라며 눈물을 보였다. 집행유예를 받고 석방됐지만 신체검사도 받지 않은 상태에서 입영 영장을 받고 강제 징집을 당한 문재인은 특전 사령부에 배치받았다. 특전사 동기들은 "군생활을 같이 했다. 차렷 자세를 하다 보면 무릎이 붙어야 하는데 우리 대통령님은 약간 오다리다. 아무리 노력해도 붙을 수 없는 다리였다. 노력했는데 안 붙으니 밤에 잘 때 도복 끈으로 다리를 묶고 자고 그랬다. 밤에 옆에서 자면 조금씩 끙끙 앓는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탁탁 털고 일어났다"고 했다. 당시 부사관은 "군에 징집돼 들어온 사람인데 제가 그걸 안 건 80년인가 사법고시 합격자 명단을 보고 알았다. 그 정도로 과묵했고 사람들에겐 따뜻한 사람이었다"고 회상했다. 동료들이 기억하는 문재인은 특별한 병사였다고. 처음이라 믿어지지 않을만큼 거뜬하게 공중낙하, 수중침투, 폭파과정, 화생방 훈련 특A급 부사였다고. 당시 소속 대대 중위는 "병사들에겐 우등상 안 준다. 직업군인에게만 줬다. 근데 문 대통령을 (다른 병사들이) 따라 갈 수 없는거다. 실제 폭약 터뜨리는데 그 사람만큼 뛰어난 사람이 없으니 간부들이 사정하며 안 줄 수가 없어 이등병에 상을 준거다"라고 했다.  

10.26 사태로 박정희가 총살을 당했고 긴급조치가 해제돼 학교로 돌아간 문재인은 12.12 사태를 주도하다 또다시 구속됐다. 그리고 유치장에서 2차 사법고시 합격 통지를 받았다. 

문재인 부인 김정숙 여사는 대학 2년 후배였다. 재학 중 유신 반대 시위를 주도하다가 최루탄을 얼굴 정면에 맞고 기절했을 때 정신을 차려보니 김정숙 여사가 물을 닦아줬다고. 김정숙 여사는 "제가 남편을 좋아하게 된 것은 아주 커다란, 복잡한 문제가 있을 때 간략하게 정리해주는 논리적인 걸 좋아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한 문재인은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 전력으로 임용에서 탈락해 아내에 미안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오랜 연애 기간, 결혼 후 지금까지 늘 기다리고 견뎌주고 도와주고 그렇게 평생을 함께 살아온 아내라며 미안하고 고맙다고 아내에 대한 사랑을 전하기도 했다. 

대형 로펌을 거절하고 부산으로 귀향한 문재인은 운명적으로 한 사람을 만났다. 변호사 노무현이었다. 두 사람은 합동 법률사무소를 열었다. 이 사무소는 경남 일대 노동인권 사건을 총괄했다. 노무현, 문재인은 지향점은 같았지만 성격은 판이했다고. 1987년 열린 고문 사망 박종철의 범국민 추도대회, 부산에서 연행된 두 사람의 조서는 완전히 달랐다. 과거 법무법인 사무장은 "조서도 완전히 다르다. 노무현 변호사는 투사다. 진술 거부했다. 문재인 변호사는 조목조목 변호사답게 반박했다. 노무현 변호사는 길거리에 드러눕고 싸우고 그러는데 문재인 변호사는 그건 못하겠다고 했다.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도 신사였다"고 했다.  


당시 부산 경남 지역 노동 판례 모음집을 보면 변호사 문재인 이름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그만큼 노동 변론을 많이 하는 사람은 드물었다. 억울한 사연을 토로하는 수많은 노동자들이 그를 찾았다. 당시 무료 법률 상담을 받은 한 이는 "회사가 문을 닫고 투쟁하게 되며 10여 명이 기소되고 몇 분은 구속되는 상황에서 저희가 법적인 것도 모르는데 힘이 되어주던 분이 문재인 변호사였다. 저희 얘기를 끝까지 들어주시고 저희를 위해 변론해주셨다. 기억나는 게 한 아주머니가 같이 올라갔다가 사무실을 내려오며 '우리도 변호사 빽 있다'고 좋아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고 했다. 전 부산양산 해고노동자투쟁 위원장은 "노동자를 아무런 조건 없이 도와주는 것이 정말 감동이었지만, 더 사실 놀란 건 저렇게 하시고도 본인은 그냥 개별 노동자들만 걱정하고 챙겼다. 전국적 사안이나 정치적 이슈가 되는 걸 원하지 않았다. 저 분은 그냥 개별의 사람이면 사람, 노동자면 노동자, 사람이 소중했던 거다"라고 했다.  

인권 변호사로 유명했지만 승소율도 높았다. 당시 동료 변호사는 "법률가로서 상당히 뛰어났지만 마음이 따뜻한 분" "치밀하고 끈기가 있고 사건을 끈질기게 파고 들어가는 분" "억울한 사건, 다른 사무실에서 '도저히 안 된다' '할 수 없다'고 하는 사건은 기꺼이 장시간 상담을 통해 사건을 맡고 이기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하고 실제 상당 부분 성공을 거둔 분"이라고 했다.  

문재인이 변호 맡은 사건 중 가장 큰 사건이 1989년 부산 동의대에서 일어난 5.3 동의대 사건이다. 경찰이 투입됐다가 여러 명이 목숨을 잃었다. 문재인은 공동 변호단을 꾸렸다. 당시 17년만에 복직한 교수는 "모든 걸 재판에 걸었다. 재판 가면 문재인 변호사 용어는 법정 용어가 아니다. 재판부, 검찰, 방청객이 다 감동했다"고 했다.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시절 문재인은 민정수석으로 임명됐다. 전 청와대 홍보수석 비서관은 "정책에 대해 정말 잘 알고 계신다. 이 분이 말씀하시면 안심이 된다"고 했고, 전 청와대 시민사회 수석은 "노무현 대통령, 문재인 비서실장 밑에서 일하는 게 가장 힘들다. 아이디어와 생각 많으신 노무현 대통령과 그 일을 정말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하게 이해해야 일을 진행하는 문재인 비서실장 밑에서 일하는 이들은 정말 힘들기도 했지만, 정말 공부가 많이 됐다"고 했다.  

강원국 전 청와대 연설비서관은 "두 분 공통점이 낯가림이 정말 심하시다. 친한 체를 잘 못한다. 정치인은 악수 잘하고 잘 몰라도 아는 체하고 이런 게 표와 직결되지 않느냐. 그냥 그윽한 눈빛으로 소통하려고 하지 입으로 고맙단 소리를 잘 안 한다"고 했다. 

청와대 시절 문재인은 철저한 자기관리, 주변관리로 유명했다. 그래서 미움도 사고 오해도 받았다. 하지만 어려울 수록 원칙을 지켰다고. 일례로 서울에 올라가야 하는데 비닐봉지에 짐을 싸들고 가는 자세, 일체 청탁 전화를 거절하기 위해 일절 끊은 것, 약간의 타협 얘기를 하면 핀잔을 하는 등 '얕은 수를 쓰지 말고 정공법으로 가자'던 문재인이었다고. 

문재인은 청와대에 들어온 지 1년 만에 치아가 10개나 빠질만큼 격무에 시달리고 민정수석을 사퇴한다. 그리고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못했다. 2004년 3월 12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됐다. 대한민국은 촛불로 물들었다. 노무현을 지키기 위한 국민들의 촛불이었고, 문재인은 급히 귀국해 법정 대응 전반을 조율했다. 청와대로 돌아간 문재인은 시민사회 수석, 민정수석 등 한결같이 노무현 대통령을 지켰다. 둘은 서로가 있어 요동치는 날들 숱한 고비를 넘겼다. 노무현 대통령이 퇴임 후 자연인으로 돌아가 봉하마을에서 평화로운 인생을 꿈꿨고 문재인도 양산 시골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이 찾아왔다. 노무현 대통령과 주변인들에 대한 광범위한 조사가 시작됐고 결국 노무현 대통령은 치욕스러운 검찰 수사를 했고 이를 지켜보던 문재인은 가슴이 타들어갔다고. 하지만 결코 그 고통을 겉으로 표현하지 않았던 그였다.  


참여정부 시민사회수석 차성수는 "너무나 비통하고 원통하고 분하지 않았겠느냐. 화가 하늘 끝까지 치밀었을 거다. 그걸 그렇게 (담담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다 눈물이 나고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르고 그게 표정에 나타나는데 어떻게 저렇게 의연하고 담대하실 수 있나. 그게 문재인이다"라고 했다. 아무도 예상 못했던 비극, 2009년 5월 29일 스스로 삶을 마감한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식장을 책임져야 하는 문재인은 상주로 나섰다. 김경수 전 청와대 비서관은 "직접 우시는 걸 못봤다. 그랬는데 지난 대선 때 영화 '광해'를 관람 하시고 나서 한동안 나오시질 못했다. 떠나가는 가짜 광해를 보고 절을 하는 마지막 장면이었는데 거기서 눈물이 터지시더라. 그걸 보는데 우리는 그렇게 대통령님을 보내드리지 못했는데 대통령님에게 작별 인사도 못한거다"라고 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뒤 그리움과 회한, 미안함이 뒤섞인 오열한 문재인이다. 당시 아직 친구를 보내지 못했던 그였다. 노무현 대통령 서거 이후 몇달 동안 아무리 생각해봐도 참여정부 시절이 새하얗게 생각이 나질 않는다고 말했다던 문재인이다.  

그리고, 문재인은 그의 책 '문재인의 운명'에서도 언급했듯 노무현을 만나지 않았으면 적당히 안락하게 적당히 도우며 살았을지 모르지만, 그의 치열함이 자신을 늘 각성시켰고 고인의 서거로 결국 운명처럼 다시 나서게 됐다고 했다. 또한 고 김대중 대통령의 유언도 있었다. 민주당의 힘만으론 정권교체가 어려우니 범야권이 대통합해야 이룰 수 있다고. 김대중 대통령마저 세상을 떠났을 때 더 이상 운명을 피할 수 없단 걸 깨달은 문재인은 본격적으로 정치의 길로 나섰다. 노영민 전 국회의원은 이를 두고 "운명이라고 하지 않느냐. 그 운명이 친구 노무현의 죽음, 그리고 김대중 대통령의 잇따른 죽음, 그리고 주변인들의 간곡한 권유, 본인이 살아오면서 도망치지 않았던 역사에 대한 책임감 때문이 아닌가 싶다"고 했다.  

2012년 대선에서 실패했지만, 지난 박근혜 정부의 비이성적인 행태들로 인해 문재인은 누구보다 절규하는 국민의 가까이에 있었다. 윤건영 전 청와대 정무기획 비서관은 "진흙탕에 뒹굴어 이미지가 훼손되고 상처받을 수 있지만 당을 바꿔야지만 이길 수 있다는 게 당시 대표님의 말이었다"고 했다. 총선 승리, 반년 가까이 촛불로 타오른 광장에서도 문재인은 촛불속에 늘 광장에서 거리에서 국민들과 함께하고자 했다. 그리고 박근혜 탄핵 국면에 이어 새 시대를 희망하는 국민들의 간절한 염원을 담은 2017년 19대 장미 대선에서 문재인은 대한민국의 19대 대통령으로 당선이 확정됐다.  

[티브이데일리 한예지 기자 news@tvdaily.co.kr/사진=MBN 방송화면 캡처]

원문보기 : http://tvdaily.asiae.co.kr/read.php3?aid=14943482051238697002




【서울=뉴시스】한주홍 기자 =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가 9일 치러진 대선에서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으로 당선됐다. 문 대통령은 10일 오전 취임선서를 한 뒤 본격적으로 청와대 업무를 시작하게 된다. 다음은 문 대통령에 대한 신상 및 간단한 이력이다. 문 대통령의 후보 당시 캠프 자료를 토대로 구성했다.


1. 유년과 소년 시절

문재인은 1953년 1월 24일, 경상남도 거제군 명진리 허름한 시골 농가에서 태어났다. 한국전쟁을 피해 남으로 자유를 찾아 온 부모님이 처음 정착한 곳이었다. 1.4 후퇴 흥남철수 작전 당시, 잠시 중공군을 피한다는 심정으로 별 준비도 없이 서둘러 떠나온 피난길이 한평생 실향(失鄕)의 한으로 이어졌다. 이후 문재인 가족은 북한출신 피난민이 많이 살던 부산 영도로 삶의 터전을 옮겼다. 영도는 고갈산 아래 산복도로를 중심으로 비탈진 언덕에 얼기설기 판잣집이 들어선 대표적 서민 달동네였다. 문재인은 일곱 살 때, 사라호 태풍으로 판잣집 지붕이 날아가 뻥 뚫린 하늘을 올려다보던 기억을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피난민 문재인 가족에게 가난은 천형과 같았다. 끼니를 걱정해야할 정도로 궁핍한 시절, 예닐곱 살 문재인은 커다란 양동이를 들고 신선동 성당에서 나눠주던 구호물자를 받으려 긴 줄을 서야 했다. 문재인은 지금도 자전거를 탈 줄 모르는데 가난한 형편에 자전거 살 돈도 배울 틈도 없었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호남 이곳저곳으로 장사를 나서면 집안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연탄을 배달했다. 어머니가 힘겹게 끄는 연탄리어카를 뒤에서 미는 일은 장남인 문재인의 몫이었다. 좁고 가파른 신선동 언덕길을 오르다보면 숨이 목까지 차오르고 아무리 추운 겨울이라도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언젠가 삐끗 놓친 리어카가 비탈길 아래로 굴러 떨어진 아찔한 사고도 있었다. 당신의 안전보다 깨진 연탄이 안타까워 발을 구르던 어머니의 모습을 문재인은 아직도 서럽게 기억하고 있다. 누구보다 가난했지만 문재인은 결코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문재인은 자서전에서 어린 시절 가난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자립심과 독립심을 키우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고 생각한다. 가난이 내게 준 선물이다. ‘돈이라는 게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라는 지금의 내 가치관은 오히려 가난 때문에 내 속에 자리 잡은 것이다. 아마도 가난을 버티게 한 나의 자존심이었을지 모르겠다. 그런 가치관은 살아오는 동안 큰 도움이 되었다.”

가난을 통해 서민의 아픔을 누구보다 잘 아는 문재인. 하지만 문재인은 가난에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스스로를 단련시켜왔다.

2. 청소년 시절

문재인은 부산 최고 명문 경남중학교와 경남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경남중학교에 입학하면서 처음으로 빈부의 격차를 겪게 된다. 가난한 집안 아이들이 모여 살던 초등학교와는 달리 부유층 자제들이 많이 다니던 경남중학교의 분위기는 사뭇 달랐다. 문재인은 태어나 처음으로 경제적 불평등이 주는 세상의 불공평함을 깨닫게 된다.

방황하는 사춘기 시절 문재인은 독서에 빠져 들었다,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지식에 갈증 난 소년은 늘 책이 모자랐다. 학교도서관에 맨 마지막까지 남아 책을 읽었다. 사서를 도와 도서실 정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마치 일과처럼 되었다. 소설에서 시작된 책 읽기는 차차 영역을 넓혀 같은 사회비평 잡지에 이르렀다. 문재인은 독서를 통해 어렴풋이 사회와 인생을 익히고 우리사회의 아픈 현실과 마주한다.

명문 경남고에 우수한 성적으로 입학하지만 공부만 하는 모범생과는 거리가 멀었다. 운동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렸고 자칭 뜨거운 문학청년들과도 우정을 쌓아갔다. 술도 먹고 담배도 피웠다. 싸움에 말려 친구들과 의리를 지키려다 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고교시절 처음 이름 때문에 붙은 ‘문제아’라는 별명이 나중에는 실제가 되고 말았다. 그 와중에도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아 성적은 늘 좋은 편이었다.

대학 입시를 앞두고 역사학을 공부하고 싶었다. 하지만 부모님과 담임 선생님의 적극적인 권유로 결국 서울대 상대에 응시했지만 낙방하고 만다. 이후 재수 끝에 1972년 경희대학교 법학과 4년 전액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명문대를 마다하고 경희대를 선택한 이유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이었다.

3. 대학시절

문재인이 대학에 입학한 1972년은 박정희 정권의 10월 유신 선포와 함께 민주주의의 억압이 노골화 되던 해다. 유신에 반대하는 대학마다 탱크가 진주할 정도로 살풍경한 분위기 속에서 결국 휴교령이 내려졌다. 학생들은 강의실 대신 술집이나 하숙집에 모여 시국을 개탄하고 울분을 토로했다.

1973년 유신반대투쟁이 본격화되면서 대학생 시위가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개헌청원 100만 서명운동이 벌어지자 박정희는 긴급조치 1, 4호를 발동하여 정면으로 탄압했다. 결국 박정희 독재정권은 1974년 민청학련사건과 인혁당사건이라는 대규모 공안사건을 조작한다. 그 해 문재인은 유신반대 학내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되어 구류처분을 받고 풀려난다.

이듬해 1975년 4월, 인혁당 사건 관계자들이 사형을 당한다. 문재인은 다음날, 사법살인에 항의하는 대규모 학내시위를 주도하다 끝내 구속되고 만다. 그리고 1975년 석방되자마자 징집신체검사와 입영통지서를 받고 결국 강제징집 당한다.

창원 39사단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친 문재인은 특전사령부 제1공수 특전여단에 배치된다. 당시 특전사령관은 정병주 소장, 여단장 전두환 준장, 대대장이 장세동 중령이었다. 이후 12?12 신군부 쿠데타 때 참군인과 반란군으로 갈려 정 사령관은 반란군 총탄에 맞고 이후 강제 예편되어 비극적 삶을 마감한다. 반란군의 수괴 전두환은 5.18 광주항쟁이후 군사독재를 이어가간다.

군인 문재인은 폭파과정 최우수, 화생방 최우수 표장을 받았고, 공중낙하, 수중침투, 천리행군, 고급 인명구조 훈련 등을 거뜬히 치러낸 특A급 사병이었다. 상병 때는 북한이 일으킨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에 대한 대응작전에 투입되기도 했다.

문재인은 군 생활 경험이 이후 삶을 살아가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고 술회한다. 생전 처음 겪는 일들도 도전정신으로 하다보면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군 생활의 경험은 문재인을 훨씬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사람으로 만들어 주었다.

4. 청년시절

1978년 2월, 31개월 만기 제대한 문재인이 맞닥뜨린 현실은 암담함 그 자체였다. 복학의 길은 막혔고 대학졸업장 없이는 취직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고졸로 살아도 좋다는 심정이었지만 평생 고생해 오신 부보님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 와중에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급작스러운 아버지의 사망은 문재인을 사법고시의 길로 이끌었다. 장남으로 집안을 건사해야한다는 책임감과 뒤늦게나마 아버지께 한번이라도 잘되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는 결심 때문이었다.

아버지 49재를 마친 다음날 문재인은 전라남도 해남 대흥사로 들어가 고시공부에 매달린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치열하게 공부한 끝에 1979년 초 사법고시 1차에 합격했다. 다음해 2차 합격을 목표로 공부에 정진하던 중 10?16부마항쟁이 일어났다. 곧이어 10?26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터져 시대는 격랑에 휩싸였다. 긴급조치가 해제되고 복학 논의가 시작되는 한편,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일으켜 정국은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으로 급변했다.

1980년 학교로 돌아 온 문재인은 복학생 대표로 ‘서울의 봄’ 한가운데 선다. 대규모 시위가 연일 이어졌고 문재인은 거침없이 민주화 운동에 뛰어들었다. 고시공부는 뒤로 밀렸지만 아쉽거나 안타깝지 않았다. 그동안 준비한 공부가 아까워 80년 4월 학내시위 와중에 2차 시험을 치렀다. 최선을 다했지만 다음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경험을 쌓아 두자는 생각이었다.

1980년 5?17 확대 계엄 조치가 발동되면서 경희대 운동권 핵심이었던 문재인은 구속되고 만다. 이후 5.18 광주항쟁을 앞두고 수많은 학생, 민주인사들이 계엄포고령 위반으로 군사재판에 즉결 회부됐다. 이때 문재인은 5월 15일 서울역 앞 시위에서 발생한 경찰 사망사건의 참고인으로 조사를 받느라 군사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채 미결수로 남아 있었다. 문재인은 사건과 아무런 혐의 없음이 입증되었지만 경찰은 상부에서 신병 처리지침을 전달받지 못했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석방을 미루며 20 여일이 넘도록 경찰서 유치장에 가둬두고 있었다. 그 때 경찰서 유치장에서 문재인은 2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는 통지를 받는다. 경찰서장은 축하 차 면회를 온 학생처장과 법대 동창회장을 유치장 안으로 들여보내 조촐한 소주 파티를 열 수 있게 해 주었다. 경찰 사상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5. 변호사 시절

문재인의 사법연수원 시절은 평탄했다.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매월 봉급을 받게 돼 경제적으로도 자립할 수 있었다. 이 무렵 7년간 연애해온 김정숙과 결혼했다. 대학 2년 후배인 김정숙은 법대 축제 때 처음 만나, 구속과 강제징집, 고시 공부로 이어지는 7년여의 연애 끝에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다.

작고한 조영래 변호사, 박원순 서울시장, 박시환 대법관, 송두환 헌법재판관, 이귀남 법무장관, 박병대 대법관, 박정규 민정수석과 조배숙 의원, 박은수, 고승덕 전의원 등 연수원 쟁쟁한 동기들 속에서도 문재인의 성적은 발군이었다. 사법연수원 수료식에서 연수원 성적 차석으로 법무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판사를 지망했지만 시위전력으로 임용에서 탈락된다. 문재인 보다 훨씬 성적이 낮은 동기들이 판사로 임명된 것을 보면 납득할 수 없는 결정이었다. 문재인은 변호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한다. 국내 최대 대형로펌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다. 파격적인 보수에 특전이 따르는 조건이었지만 이 모든 제안을 뿌리치고 고향 부산으로 내려갔다. 억울한 사람을 대변하는 변호인으로 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홀로계신 노모를 모시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문재인의 귀향으로 마침내 노무현 변호사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노무현과 문재인, 처음에는 동업자로 만났지만 둘의 관계는 일을 넘어 서로에게 삶의 동반자로 변해갔다. ‘깨끗한 변호사’가 되기로 의기투합한 두 사람은 선후배로 또는 친구처럼 함께 일하며 신뢰를 쌓아나갔다. 처음부터 작정한 것은 아니었지만 각종 인권, 시국, 노동 사건을 기꺼이 맡다보니 자연스레 두 사람은 인권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두 사람의 법률사무소는 부산은 물론이며 인근 울산 창원 거제 등을 망라하는 지역 노동인권사건을 총괄하는 센터처럼 돼 버렸다. 그러다보니 재야운동에까지 깊숙이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문재인은 부산?경남 민변을 창립하고,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천주교 인권위원회와 부산 NCC 인권위원을 맡았다. 부산 YMCA 이사와 노동자를 위한 연대 대표도 맡았다. 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약칭 부민협)를 창립하고, 87년에는 6월 항쟁의 주역이 된 부산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약칭 부산 국본)를 만들어 상임집행위원을 맡았다. 문재인은 노무현 변호사와 함께 한 6월 항쟁의 기억을 살아 온 동안 가장 보람 찬 일이었다고

에서 술회했다.

6. 참여정부 시절

참여정부가 시작되면서 문재인은 민정수석 2차례와 시민사회 수석을 거쳐 ‘마지막 비서실장’으로 재임했다. 참여정부 출범과 마감까지 문재인이 맡은 것이다. 문재인은 지난 참여정부에 참여하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어느 정부든 공과 과가 있기 마련이다. 평가는 공정해야 한다. 그리고 그 정부의 한 축을 담당했던 사람으로서 차분한 성찰과 복기를 통해 오류와 한계는 겸허히 인정하고 성공과 좌절의 교훈을 얻었다.”

문재인의 청와대 시절 누구보다 대쪽 같았다. 고위 공직자의 관행이었던 특혜를 철저하게 내려놓았다. 업무시간 외엔 직접 차를 몰았고 방이 따로 없는 대중음식점에서 식사를 하고 비행기나 기차는 늘 일반석을 이용했다. 그리고 대통령의 지근거리에서 국정 전반을 보좌하다보니 늘 격무에 시달렸다. 청와대 생활 1년을 지내는 동안 과로로 인해 무려 10개의 이가 빠질 정도였다.

과로로 건강을 상한 문재인은 민정수석을 사퇴하고 훌쩍 히말라야로 트래킹을 떠났다. 그러나 휴식은 길지 못했다. 노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한 것이다. 곧장 귀국하여 하고 법적 대응 전반을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다. 이후 탄핵 재판이 끝나자 다시 시민사회수석으로 청와대에 복귀하여 2005년 1월 다시 민정수석으로 자리를 옮긴다. 두 번의 민정수석을 거치는 동안 가장 큰 아쉬움은 고위공직자 비리수사처(공수처) 설치 불발이었다. 제도적으로 권력기관에 대한 견제와 법적감시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 문재인의 생각이었다.

2007년 3월,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의‘마지막 비서실장’이 된다. 문재인은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이 되어 2007년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성사시킨다. 이와 함께 한미 FTA라는 국가중대 협약이 체결되는 과정을 지켜봤다. 국정 전반에 걸쳐 풍부하게 축적된 경험은 다양한 정책조율 감각과 국정운영에 대한 균형감을 키울 수 있는 기반이 됐다.

7. 노무현 대통령 서거 전후

참여정부와 임기를 함께 마친 문재인은 양산 시골집으로 돌아왔다. 다시 보통사람으로 돌아 온 문재인은 소박하고 평온한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세상은 문재인을 내버려두지 않았다.

미국산 쇠고기 수입으로 정권이 흔들린 이명박 정권은 집권안정을 획책하는 탈출구로 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을 시작했다. 노무현 대통령을 비롯한 주변 인물들에 대한 광범위하고 은밀한 조사가 시작된다. 점점 정치보복의 올가미는 노무현 대통령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마땅히 대응할 수단도 사람도 없이 쏟아지는 모든 비난을 고스란히 받아야 했다.

2009년 4월 30일 ‘치욕스런’ 검찰 수사를 마친 노 대통령을 사저에 모셔다 드리고 밤늦게 양산 집으로 돌아온 문재인은 고통스럽게 지난날을 돌아보았다.

“대통령은 어쩌다 그런 곤경에 처하게 됐을까. 나는 대통령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가난했다. 가난이 그를 공부에 매달리게 했고, 가난이 그를 인권변호사의 길로 이끌었다. 그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자신처럼 힘들었던 사람들에게 관심을 갖지 않았을지 모른다.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을 돕겠다고 소박하게 시작한 일이 인권변호사였고, 민주화운동이었다. 정치는 그 연장선상에 있었다. 정치에 대한 그의 진정성이 그를 대통령까지 만들었다.…(중략)… 대통령은 나에게 ‘내 자신만 정치적으로 단련되었지 가족들을 정치적으로 단련시키지 못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 서거 후 상속신고를 하면서 보니 부채가 자산보다 4억 원 가량 더 많았다.”
결국, 이명박 정권의 정치보복은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로 끝났다. 하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노무현 대통령의 장례 과정에서 상주 문재인이 보여준 놀라운 절제력과 의연함이 국민에게 각인되면서 새로운 정치인 문재인이 부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대통령을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불의에 무너지는 정의를 바라보는 상실감이 문재인을 정치에 발을 내 디디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8. 정치입문과 대선도전

문재인이 살아 온 삶은 가장 정치적이었지만 가장 비정치적이었다. 정치인이 되고 싶지 않았지만 정치가 올바르게 나아가야 할 길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문재인은 정치를 하기보다 보통시민으로 바른 삶을 살고 싶었다. 하지만 문재인이 살아 온 바른 삶이 ‘운명’이 되어 그를 정치판으로 불러드렸다. 평범한 사람 문재인의 정의로운 시대를 위한 복무가 시작된 것이다.
문재인은 2012년 4월 부산 사상구에서 총선에 출마했다. 정치신인이 부산에서 출마해 당선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문재인은 노무현이 걸었던 길처럼 좁은 길을 선택했다. 그리고 기적처럼 민주당의 가치를 지키며 민주당을 부끄러워 외면하지도 않고 정면에 내세워 부산에서 당선됐다.

총선승리 두 달 후, 문재인은 마침내 18대 대통령선거 출마를 선언한다. 정치신인으로 현실 정치인이 된지 두 달 만에 정치인 최고의 목표 대통령에 도전장을 내 밀었다. 그리고 국민적 지지를 등에 업고 100만 국민이 참여한 민주당 국민경선에서 정치신인 문재인이 13번 모두 1등을 차지하며 대통령 후보가 되었다.

이후 안철수 후보와 어렵게 단일화에 이뤄내고 심상정 후보와 단일화하면서 야권 단일후보가 됐다. 정치인 되기를 주저했던 정치신인 문재인. 권력욕이 없다고 비판 받던 문재인. 어떤 힘이 이런 결과를 만들었을까? 문재인을 움직인 힘은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권력욕’이 아니었다. 정권교체를 위해 필요하다면 기꺼이 자신을 던지겠다는 소명의식이며 정의로운 세상을 통해 사람이 먼저 인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선한 권력의지’의 발로였다. 문재인은 대통령에 출마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소임을 정권교체, 정치교체, 시대교체 3가지 교체를 통해 우리 사회의 근본적 변화를 추구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하지만 18대 대선 결과, 득표수 1,469만표, 득표율 48.02%로 아쉽게 정권교체에 실패한다. 문재인이 득표한 1400여만표, 득표율 48%는 야권 대선후보 역대 최고의 득표수, 득표율이었다.

9. 대선패배와 새로운 정치의 시작

대선 패배 이후, 문재인은 깊은 반성과 성찰, 그리고 침잠(沈潛)의 시간을 보냈다. 박근혜 정부가 성공할 수 있도록 진심으로 기원했다. 비록 선거에 패했지만 적지 않은 지지를 받았던 사람으로서 국민에 대한 책무이자 도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는 문재인을 그대로 두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이 선택한 길은 오만과 반역의 역사였다. 국정원 대선공작 불법 선거를 오히려 비호하고 두둔했다. 급기야 진실을 덮기 위해 검찰총장을 끌어 내리기까지 했다. 이 마저도 여의치 않자 NLL 포기 논란을 재연하고 정상회담 대화록을 불법 공개하면서까지 국론과 국민을 분열시켰다. 문재인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NLL 포기 발언 논란에는 도저히 침묵할 수가 없었다. 문재인은 2013년 10월 10일, ‘검찰은 짜맞추기 수사의 들러리로, 죄 없는 실무자들을 소환해 괴롭히지 말고, 나를 소환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11월 6일에는 직접 검찰에 출석까지 했다.

2014년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다. 아무 죄 없는 어린 생명들을 잃었다. 정부는 변명하기 급급했고 대통령은 무능하고 야비했다.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기보다 정부가 나서 덮고 은폐하기에 바빴다. 한 맺힌 유족들은 약자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수단인 단식을 시작됐다. 유민아빠 김영오씨의 단식이 길어지면서 생명이 위태로웠지만 정부와 대통령은 외면했다.

문재인은 2014년 8월 19일 김영오씨와 동조단식을 시작했다. 싸움은 국회가 할 테니 목숨을 지켜달라는 간곡한 뜻이었다. 8얼 28일, 김영오씨가 단식을 중단하면서 문재인도 단식을 중단했다. 문재인은 김영오씨가 입원한 병원을 찾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최선을 다하겠다.’고 약속했다.

국회는 참사 후 271일만 인 2015년 1월 12일에 ‘4·16 세월호 참사 피해구제 및 지원 등을 위한 특별법’을 본회의에서 통과시켰지만 채 진상조사도 이뤄지지 못한 채 세월호 특별위원회는 마감되고 말았다. 문재인은 이 모든 국민의 고통이 정권을 쟁취하지 못한 자신 때문이라고 여겼다. 그리고 절망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 다시 일어서야겠다고 다짐했다.

10. 당대표 시절

박근혜 대통령은 국민과 약속한 공약 대부분을 파기했다. 정치적으로는 시간이 갈수록 무능함과 측근 비선실세의 전횡이 드러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가계부채가 눈덩이처럼 커지며 서민경제가 무너지고 있었다. 임금은 오르지 않고 봉급생활자의 유리지갑을 터는 연말정산과 실제 서민증세 인 담뱃세 인상 등으로 국민의 분노는 쌓여가고 있었다. 이와 함께 사회 곳곳에서 권력형 비리가 터지고 있었다. 그러나 박근혜정권의 실정을 견제하고 국민을 대변해야하는 야당 새정치민주연합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지지율은 갈수록 떨어지고 국민의 시선은 차가웠다. 창당 이래 가장 심각한 위기였다.

2014년 12월 29일 문재인은 당대표 출마선언을 한다. 당을 혁신하지 않으면 다가오는 총선은 물론이며 다음 정권교체도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로 인한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의 몫이었다. 문재인은 당을 살리고 국민을 살리기 위해 출사표를 던졌다. 여의도 정치에 익숙한 대부분이 당대표 출마를 만류했다. 당대표 자리는 실익보다 위험이 더 많은 정치적 올가미였다. 자칫 실패하면 정치적으로 사망선고가 될 수 있었다. 누구보다 문재인 스스로 죽을 고비가 될 것이라는 점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문재인은 출마선언에서 3번의 죽을 고비가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정확하게 예견했다.

그럼에도 문재인은 망설이지 않았다. 야권기득권에 안주한 당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누가 대선후보가 된다고 해도 정권교체를 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독배가 될지 모르지만 누군가는 당을 혁신해야 했다. 정권교체에 대한 국민의 뜨거운 염원을 실천해야 한다고 믿었다. 마침내 국민의 힘으로 새정치민주연합의 당대표가 되었다. 이후 기득권을 지키려는 세력과 끊임없이 싸워야 했다. 자신을 흔드는 그 숱한 분란과 내홍 속에서도 문재인은 결코 타협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당 혁신에 자신의 정치생명을 걸고 맞섰다. 당을 흔드는 기득권의 분당과 탈당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당 혁신에 성공했다. 혁신위원회를 통해 공정한 공천 룰을 만들고, 당의 문을 활짝 열어 10만 온라인당원을 입당시켜 당의 내실을 다졌다. 우리사회 각계각층에서 새로운 인재를 영입하여 낡은 당 문화를 젊고 역동적인 당으로 쇄신했다. 이후 당대표를 내려놓고 백의종군으로 전국을 누비며 마침내 총선승리, 제 1당을 만들어 냈다.

11. 대통령 출마

촛불혁명, 불의에 일어 선 정의로운 국민이 박근혜 정권을 침몰시켰다. 불의한 권력과 낡은 권위에 맞선 국민의 도구는 단 한 자루의 촛불이 다였다. 스스로를 태워 어둠을 밝히는 촛불의 희생정신이 마침내 권력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고 있다. 정권교체 적폐청산의 뜨거운 여망을 현실로 만드는 일은 결국 정치의 몫이다. 문재인 기꺼이 국민의 촛불이 되기로 결심했다.

문재인은 자신을 국민의 도구로 써 달라고 간청한다. 지금까지 국민을 도구로 권력을 누려왔던 특권정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정권교체의 삽이 되고, 적폐청산의 벽을 깨는 망치가 되고, 정의로운 반석을 다지는 곡괭이가 되겠다는 것이다.

문재인은 정의로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일을 혼자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아무리 좋은 선의도 혼자하면 독선이 된다.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을 바라는 온 국민의 뜻을 모아 정의로운 통합을 만들겠다고 선포했다.

상식이 상식이 되고 당연한 것이 당연한 사회
정의가 눈으로 보이고 소리로 들리며 피부로 느껴지는 사회
실패해도 재기할 수 있고 성공할 때까지 도전할 수 있는 사회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이 가난에 허덕이지 않게 하고
학연과 지연이 없어도 서러움 겪지 않도록 할 것이며
다름이 틀림으로 배척당하지 않게 만들어
마지막까지 인간답게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약속한다.
맘 편히 아이 낳고, 장애가 장애인지 모르는 나라
든든한 자주국방으로 전쟁의 두려움을 모르는 나라
내 조국 대한민국을 자랑스러워 할 수 있는 나라
좋은 일자리에서 일하며 내일을 꿈꾸고 계획할 수 있는 나라
내 능력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믿음을 주는 나라를 만들겠다고 다짐한다.

문재인이 다짐하는 정권교체의 주체는 국민이다. 적폐청산의 과정도 국민 속에서 함께할 것이며 완전히 새로운 대한민국의 목표도 오로지 국민이다.
【서울=뉴시스】한주홍 기자 hong@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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