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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의 잊혀진 계절과 시인 박건호
09/23/2016 13: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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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교적 젊은 나이에 고인이 된 작사가이자 시인이 였던 박건호씨의 삶과 작품세계를 그와 가까웠던 지인들의 글들을 인용해서 소개해본다.

시인이자 작사가 박건호씨는 강원도 원주에서 1949년에 출생하였다.
일찍이 고인은 시인이 될 꿈을 안고 상경했다가 1972년 박인희씨의 노래 '모닥불'을 발표하면서 작사가가 됐다. 이후 '내 곁에 있어주' '잊혀진 계절' '아! 대한민국' '빙글빙글' '환희' '모나리자' '어젯밤 이야기' '오직 하나뿐인 그대' '슬픈 인연' 단발머리, 당신도 울고 있네요 (김종찬), 그대 모습은 장미(민해경), 그녀에게 전해주오(소방차) 등 3천여 곡을 작사하며 당대 최고의 작사가로 활동했다.
작사가 이전에 시인을 꿈꿨던 그는 문인으로서도 활발한 활동을 벌였다.
1969년 불과 스무 살 나이에 미당 서정주 시인의 서문이 실린 '영원의 디딤돌'이란 시집을 펴낼 정도로 글재주가 좋았던 그는 작사가로 명성을 얻은 후에도 초심을 잃지 않고 다수의 가사집과 시집을 펴냈다.
시집으로 '영원의 디딤돌' '타다가 남은 것들' '고독은 하나의 사치였다' '추억의 아랫목이 그립다' '기다림이야 천년을 간들 어떠랴', 가사집 '모닥불' '콩나물에 뿌린 물빛사랑' 에세이 '오선지 밖으로 튀어나온 이야기' 등 10여 권을 펴냈다.

대중가요 작사가로 탄탄대로를 걷던 중 불행하게도 그는 지난 1989년 뇌졸중으로 시작된 언어 장애와 수족마비 시신경 장애라는 병마와 싸워야 했고 그길 터널의 끝에서 만성 신부전 말기 증세로 신장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될 만큼 사경을 헤매기도 했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그는 1994년 5월 신장이식 수술을 받았고 그후 다행스럽게 건강이 회복되어 새 생명을 얻은 각별한 심정으로 시작(詩作)에 몰두해 오면서 여러권의 공저를 발간 했으며 수차례의 시와 음악이 있는 시 낭송의 무대를 마련해서 주위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아 왔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자꾸만 건강이 웬지 그리 좋지는 않았었다. 
그러던 중 2007년 여름에 설상가상으로 발을 헛디뎌서 다리가 골절되는 일이 생기면서 이상하게도 그에게 뜻하지 않게 위장 출혈이라는 괴병으로 2007년 9월말 연대 세브란스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약 70여일간의 투병 속에서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오뚜기 같은 육신의 삶이 12월 9일 밤 11쯤 끝내 58세로 생을 마감하게 된다.

고인이 되기전 세브란스 병상에서 쓴 "모자이크"라는 시는 해탈한 듯한 그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있다.


모자이크 / 박건호


- 심장병동에서  


얼마 전에 가슴 뼈를 톱으로 자르고  
심장으로 통하는 두 개의 관상동맥을 교체했다
옛날 같으면 벌써 죽어야 했을 목숨
그저 황송할 따름이다
어릴 때는 생각이나 했던가
팔이 부러지면 다시 붙듯
목숨은 다 그런 것인 줄 알았다
사금파리를 딛어 발이 찢어졌을 때는
망초를 바르고
까닭없이 슬퍼지는 날이면 하늘을 보았다  
그러나 나는 커가면서 계속 망가져 갔다  
오른 쪽 수족이 마비되고  
언어장애가 일어나고
아무 잘못도 없이 시신경이 막히면서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었다
설상가상
어릴 때부터 아파오던 만성신부전이 악화되어
콩팥도 남의 것으로 바꿔 달았다
누구는 나를 인간승리라고도 하지만
이건 운명에 대한 대반란이다
신이 만든 것은 이미 폐기처분되고
인간이 고쳐 만든 모자이크 인생이다
그렇다고 나를 두고
중세기 성당 벽화를 생각하지는 마라
모자이크가 얼마나 눈물겨운 것인지
너희들은 모른다
신촌 세브란스병원 심장병동에서
톱으로 자른 가슴뼈를 철사줄로 동여매고
죽기보다 어렵게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을
구소련 여군 장교같은 담당 간호사도 모른다
밤새 건너편 병실에서는
첨단의학의 힘으로 살아나던 환자가  
인간의 부주의로 죽어 나갔다  
나는 급한 마음에 걸어온 길을 돌아다본다
그러나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영원의 디딤돌'이란 시집을 출간하고도 이름 앞에 '시인'이란 타이틀보다는 '작사가'로만 알려져 왔던 박건호씨.
그가 가사를 쓰고 이범희 씨가 곡을 붙인 '잊혀진 계절'은 이용씨가 불러 오늘날까지 널리 사랑받고있는 가을 노래이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체질인 그가 소주 두 홉짜리 한 병을 거의 다 비운 것은 어느 해 9월 부슬비가 내리는 밤이었다. 그는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사랑을 느꼇던 그녀와 헤어지기로 속마음을 다지고 나온 터였기에 그날 밤의 비는 더욱 공허했다고 한다. 만나면 항상 버릇처럼 '쓸쓸한 표정'을 짓는 그녀가 부담스러워지기 시작할 무렵 그는 '오늘밤 그녀와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면서 대취했다는 것이다. "이분 흑석동 종점에 내리게 해주세요..." 그녀는 취한 박건호씨를 버스에 태우며 안내양에게 이렇게 당부하더란다. 그러나 그는 다음 정거장에서 바로 내려 버렸다. "여긴 흑석동이 아니예요. " 안내양의 제지를 뿌리치고 , 그는 버스가 오던 길로 뒤돌아서 내달렸다. 뭔가 '할말'이 있는 것 같았다. 아니, 말도 하지 않고 헤어진다는 것에 뭔가 죄를 짓는 것 같은 자책감도 들었다. 동대문에서 창신동으로 꺾어지는 지점쯤에서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보였다. 급하게 뛰어온 그는 숨도 고르지 않은 채 그녀 앞으로 달려가 '마라톤 항의 전령' 처럼 외쳤다. "정아 씨! 사랑해요." 그 한마디를 던지고 오던 길로 다시 뛰었다. 왠지 쑥스러웠고, 그녀의 그 다음 말이 두려웠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아쉬운 이별.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 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1982년 초가을 무렵, 박건호씨는 '그날의 느낌'을 새겨 넣은 가사를 이범희 씨에게 넘겼다. 그가 이 가사를 쓸 무렵은 마음이 몹시도 춥고 외로웠다고 한다. 그에겐 차라리 '잊고 싶은 계절'이었다. 젊음의 열병과 사랑의 시련. 그리고 현실적인 장벽이 그의 섬세한 감성을 한없이 짓밟았던 것이다. 그는 그 당시의 심정을 "쓰러지기 직전까지 골을 혹사했다"고 그의 시 왈에서 표현했다.

"나는 유행가 가사를  썼다
 돈이 될 것 같아서
 첫사랑의 여자를 어디론가 보내버리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골을 혹사했다"
 
이 노래는 당시 무명의 신인 가수였던 이용 씨가 취입해 그를 부동의 스타로 올라서게 했고, 작사가였던 그에게는 그 해 KBS 가요대상(작사부문)과 가톨릭 가요대상(작사), MBC최고 인기상 등 상이란 상을 모두 휩쓰는 영광을 안겨 주었다. '시월의 마지막 밤'이란 노랫구절은 "구월의 마지막 밤" 이란 원래의 가사를 레코드 발매 시기에 근접시키느라 시월로 바꾼것이라고 한다.


지금도 기억하고 있어요
시월의 마지막 밤을
뜻모를 이야기만 남긴 채
우리는 헤어졌지요

그날의 쓸쓸했던 표정이
그대의 진실인가요
한마디 변명도 못하고
잊혀져야 하는 건가요

언제나 돌아오는 계절은
나에게 꿈을 주지만
이룰 수 없는 꿈은 슬퍼요
나를 울려요.


이용


아이유 버젼


[영어버젼]

I STILL REMEMBER THAT LAST DAY WE HAD 

WHAT DID WE SAY THAT MADE YOU SAD? 

I CAN'T REMEMBER ALL WE SAID THAT DAY. 

I ONLY KNOW YOU'RE GONE AWAY! 
I STILL CAN SEE THAT LOOK UPON YOUR FACE. 
TELL ME THE REASON! TELL ME WHY. 
LOVE CAN CHANGE! 
LOVE HAS ITS HIGHS & LOWS! 

LIKE THE SEASONS COME & GO I KNOW. 

I DREAM SOME SEASON 
YOU'LL RETURN TO ME. 
I TRY TO DREAM I REALLY TRY 
BUT UN - REAL DREAMS ARE SAD AND SORRY DREAM 
MAKER ME WANT TO CRY

조영남 영어버젼

잊혀진 계절이 전편이라면 후편에 속하는 노래는 [당신도 울고 있네요] 라는 노래일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당신도 울고 있네요.


당신은 울고 있네요
잊은 줄 알았었는데
찻잔에 어리는 추억을 보며
당신도 울고 있네요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을
그 누가 알았던가요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듯이
당신도 울고 있네요


한 때는 당신을 미워했지요
남겨진 상처가 너무 아파서
당신의 얼굴이 떠오를 때면
나 혼자 방황했었죠


당신도 울고 있네요
잊은 줄 았았었는데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듯이
당신도 울고 있네요

옛날에 옛날에 내가 울듯이
당신도 울고 있네요

김종찬의 당신도 울고 있네요(1988)


다음은 마경덕님의 오늘의 시인 편에서 발췌한 글이다.

시인 박건호


 박건호 시인

 강원도 원주 출생으로 1969년 시집「영원의 디딤돌」을 출간했고「타다가 남은 것들」「물의 언어로 쓴 불의 시」「추억의 아랫목이 그립다」「고독은 하나의 사치였다」「기다림이야 천년을 간들 어떠랴」「나비전설」「딸랑딸랑 나귀의 방울소리 위에」등 열 권의 시집이 있고, 산문「오선지에서 빠져나온 이야기」「너와 함께 기뻐하리라」「시간의 칼날에 베인 자국」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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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과 깃발 / 박건호


깃발이 바람을 만나면
춤을 추었고
깃발이 깃발을 만나면
피가 흘렀다

 

끝내
어느 한 쪽은 찢어져야
안심할 수 있는
우리의 산하

 

하늘에는
두 개의 깃발이 있었다
별들이 펼쳐 놓은 이야기는
하나 뿐인데

 

사람들은 가슴속에 활화산을 숨겨 놓고
천둥소리를 숨겨 놓고
우주질서에 대항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념과 사상이
피보다 진했던 우리의 반세기
어지러운 소용돌이 속에서

 

깃발이 바람을 만나면
춤을 추었고
깃발이 깃발을 만나면
피가 흘렀다

 

                                                               
오리고기 앞에서 / 박건호


숯불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오리고기를 보면서
세 명의 평화주의자가 군침을 흘린다
생명의 존엄성을 얘기하면서도
속으로는 상추에 싸서 먹을까
얇게 썰어 놓은 무에 싸서 먹을까
그냥 소금에 찍어 먹을까
아주 탐욕스런 계획들을 하고 있다
그들의 양심은 고기가 익으면서 끝나고
모든 누명은 술이 뒤집어쓴다
이 거룩한 사나이들은
눈동자에 피빛 노을이 물들면
절벽에 몸을 던진 삼천궁녀를 그리워한다
목숨을 끊으면서 항거했던 울분은
강물에 씻겨갔나
한 나라가 망한 것을 천년 뒤에
슬퍼하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오로지 절벽으로 몸을 던진
삼천 명의 궁녀들만
숯불 위에 지글지글 익어가는
삼천 점의 고기가 되어
군침이 흐르게 할 뿐이다 

 

 

게의 속살을 파먹으며 / 박건호


게의 속살을
파먹어 본 사람은 안다
단단한 것일 수록
쉽게 허물어진다는 것을
속살을 보호하기 위한 껍질은
무엇인가에 부딪치면
균열이 생겼다
균열의 틈 사이로 들어와
누군가 나를 파먹는다
단단한 껍질을 믿었으나
단단한 껍질은 믿을 것이 아니었다
부딪치고 깨어지는 연습도 없이
나는 허물어졌다
허물어지고 허물어졌다
게의 속살을
파먹어 본 사람은 안다
단단한 것일 수록
쉽게 허물어진다는 것을
그리고 사랑이 아닌
어떤 제국의 힘으로도
우리의 속살은
보호할 수 없음을

 

 

             

  왈 / 박건호

 

나는 유행가 가사를  썼다
돈이 될 것 같아서
첫사랑의 여자를 어디론가 보내버리고
쓰러지기 직전까지 골을 혹사했다
그 사이 여러 명의 신인가수가 탄생했다가 은퇴를 했고
먹고 사는 데야 지장은 없지만
그렇다고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다 
가사를 써 준 사람들 앞에서 침을 겔겔겔 흘리다 보면
무엇인가 자꾸 더러웠다

더러워서 더럽지 않은 곳을 찾다가 그만 똥을 밟았다
그때 어떤 시인이 왈                                                               
내가 쓴 시는 요즘 쓰는 다른 시의 경향과 다르고
시대적 감각이 뒤진다고 말했다
나는 독창적인 방법으로 다시
유행가 가사를 썼다
작곡가들이 너무 시적이라고 한다
다시 시를 썼다
시인들이 너무 유행가 가사적이라고 한다
젠장 

짖어라

[출처] 박건호 시인의 시 5편 |작성자 마경덕


아래는 석광인 닷컴의 석광인님의 글에서 발췌한 내용이다.

  

거무튀튀한 얼굴에 뚝배기 깨지는 소리를 지녔지만 언제나 구수한 인상을 풍기는 전형적인 감자바위. 이렇게 촌스럽게 생긴 남자에게 무슨 매력이 있는지 가수들은 그를 만나지 못해 안달이다. 뚝배기 보다는 장맛이라고 이 남자가 뜻밖에도 외모와는 달리 언제나 신선하고 세련된 노랫말을 만드는 놀라운 재주를 갖고 있어, 운이 좋으면 근사한 가사를 하나 얻을지도 모른다는 욕심 때문이다.

그는 우리 가요계에서 정말 보석과도 같은 존재이다. 복제인간의 생산이 가능하다면 가요계에서 제일 먼저 복제인간의 원본으로 추천할 사람이 바로 그인지도 모른다. 대한민국의 가수들이 모두 그에게 가사를 써달라고 매달릴 정도로 작사요청이 쇄도하지만 혼자의 몸으로 다 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쓰기도 참 많이 썼다. 이제 나이 오십 밖에 안된 사람이 3천 가지가 넘는 노랫말을 만들었다니 놀랄 수밖에 없다. 그렇게 많은 가사들을 들춰가며 트집을 잡아보려고 해도 흠을 찾기가 어렵다. 그래서 외모나 목소리를 가지고 자꾸 시비를 걸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국내 가요계에선 오래 전부터 대중가요의 가사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다. 가사, 즉 노랫말의 중요성이 간과되어 온 것이다. 덕택에 요즘에도 인기 가수나 인기 작곡가는 많아도 인기 작사가를 찾기는 어려운 실정이다.

세계의 대중음악계에 일대 혁명을 일으키며 불멸의 존재가 된 비틀즈 음악의 위대함도 사실은 가사에서 시작되었다. 평범한 일상용어를 구사하면서도 상상력이 풍부하고 재기 넘치는 존 레논의 가사가 아니었다면 비틀즈의 위대한 음악도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가정이 평론가들의 일반적인 견해이다. 비틀즈의 음악에서 차지하는 가사의 비중이 그만큼 크다는 얘기다. 외국의 예까지 들지 않아도 인기 작사가는 별로 없다는 얘기가, 곧 유능하고 훌륭한 작사가들이 별로 없다는 말은 아니다.

우리 가요계에는 반야월, 유호, 전우, 한산도, 월견초, 정두수 씨 등 기라성 같은 훌륭한 작사가들이 많았다. 전문 작사가가 없었다는 얘기는 우리 가요계가 가수나 작곡가들처럼 작사가들을 올바르게 대접하지 않았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작곡가들이 작곡할 때 가사를 함께 쓰는 경우도 많고 전문 작사가가 아니라도 쉽게 가사를 만들 수 있다는 작품조달의 용이함 때문에 가사의 중요성을 알면서도 전문 작사가에게 대한 투자와 처우가 소홀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급하면 꿩대신 닭이라고 노랫말 만드는 일을 안이하게 생각하는 풍토가 전문 작사가의 출현을 가로막았다는 주장도 있다. 이렇게 열악한 조건에서 박건호 씨가 인기 작사가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신기하다는 가요계 인사도 있다. 개천에서 용이 난 것처럼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그가 해냈다는 칭찬이다. 그의 작사가로서의 재능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고, 가요환경이 전문 작사가라는 직업인으로서의 활동을 허락치 않았는 데도 외곬수로 노랫말 만들기에 매달려 해내고만 그의 뚝심을 칭찬하는 말이다.

그렇게 유명한 작사가라면 돈도 억수로 벌텐데 대체 무슨 뚱단지 같은 소리냐고 묻는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박건호씨 정도의 인기 작사가라면 돈을 상당히 잘 버는 계층에 속한다. 그러나 박건호씨 이전에는 대중가요 가사만 써서 먹고 사는 작사가가 한 명도 없었다. 아무리 가사를 잘 쓰는 사람이라도 먹고 살기 위해 다른 직업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생활을 위해 다른 일을 하면서 취미로, 또는 여가선용으로 가사를 썼거나 부업으로 작사에 덤빈 것이지 가사 쓰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던 작사가는 한명도 없었던 것으로 필자는 알고 있다. 가요계의 전설적인 작사가 전우 씨도 직업은 기자였지 직업적인 작사가는 아니었다. 박건호씨는 그러나 처음 직업 작사가의 길을 걸어 성공을 거둔 인물이다.

그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하는 일은 노랫말을 만드는 것이었고 그 일은 나에게 숱한 어려움을 선사했다. 솔직히 말해서 나는 어떤 목표를 갖고 노랫말을 만든 것은 아니다. 작품을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생활이었다. 상을 받기 위해 노랫말을 만든 것도 아니었고 처음부터 대중가요를 좋아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그의 이러한 발언은 가요계의 인사들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든다. 필자가 모르는 사이에 그가 부업으로 다른 일을 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그의 본업은 처음부터 작사였다. 노랫말 쓰는 일이 유일한 직업이었다. 요즘엔 한국노랫말연구회라는 곳이 생겨 대중가요의 가사만 전문적으로 연구하며 부설기관으로 노랫말 대학을 설치해 작사가를 양성할 정도로 가사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되고 있다. 박건호씨가 작사가로 처음 나서던 무렵은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로 불려야 할 만큼 세상이 달라졌다.

강원도 원주에서 태어나 시인이 될 꿈을 안고 상경했다가 72년 작사가의 길에 들어섰다는 그는 이미 30년 가까운 경력을 지닌 셈이다. 데뷔작은 박인희씨의 '모닥불', 이젠 젊은이들 사이에서 명곡으로 꼽히는 대중가요의 가사가 됐지만 한 편의 시였다.

모닥불 피워 놓고
마주 앉아서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인생은 연기 속에
재를 남기고
말없이 사라지는 모닥불 같은 것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우리들의 이야기는 끝이 없어라

박건호 청년의 미래를 시인이 아니라 작사가로 만들어 놓은 운명적인 노랫말이기도 하다. 그는 이 노래의 가사를 시작으로 '타다가 꺼지는 그 순간까지' 가사를 쓰는 작사가가 된 것이다.

필자는 10여년 전 한 레코드사의 문예부 직원으로 일하던 무렵 박건호씨를 만났다. 아직 인기 작사가로 이름을 날리기 전이었으므로 그의 얼굴이나 이름이 생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누가 우리 두 사람을 소개했다는 얘기는 아니다. 함께 되지도 않은 음악 이야기를 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 사람이 작사가 박건호씨였다는 얘기다.

귀에 거슬리는 목소리를 지닌 남자라는 생각만 했지 가사를 쓰는 사람이라는걸 안 것은 여러번 대면을 하고난 후의 일이었다. 누가 "이 사람은 이수미의 '내곁에 있어주'를 쓴 작사가"라고 소개만 해주었더라도 훨씬 일찍 그에게 반했을 것이다. 어쨌든 못생긴 얼굴이라도 '석형','박형'하는 사이가 돼버렸다. 또 한 사람의 친구, 그가 굉장한 남자라는 사실도 모르고 스스럼없는 사이가 된 것이다. 나중에 누구누구의 어떤 노래는 가사를 쓴 사람이 박모씨라는 얘기를 듣고 화들짝 놀라기도 했다.

음악은 사람들이 말을 만들기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한다. 아기를 보면 말보다 소리가 먼저 나왔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음악은 시보다 훨씬 앞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대중가요에선 가사가 음악에 앞서 만들어진 경우가 상당히 많다. 대중음악에 있어 멜로디와 가사의 관계는 달걀이 먼저냐 닭이 먼저냐 하는 문제처럼 상당히 미묘하다.

데뷔시절엔 가사를 먼저 쓰며 시작했지만 박건호씨는 먼저 만들어진 멜로디에 가사를 붙이는 데도 뛰어난 소질을 보이고 있다. 대개는 먼저 가사가 만들어지고 나중에 멜로디를 붙이는 것이 대중가요의 보편적인 창작 메카니즘이다. 음악이 시보다 신축력이 앞서기 때문인지는 모른다. 멜로디와 가사를 동시에 만든다는 작곡가들도 있다. 이미 만들어진 멜로디에 가사를 붙이는 일이 가장 어렵다고 한다.

박건호씨의 진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미리 완성된 멜로디를 조금도 변경시키지 않고 주제를 돋보이게 하는 귀재로 정평이 났다. 본인이 멜로디에 가사를 붙여 성공을 거둔 예가 설운도의 1983년 히트곡 '잃어버린 30년'. 이해 6월 아직 무명가수였던 설운도는 작곡가 남국인 씨의 '아버님'이라는 곡을 받아 새 앨범의 취입을 준비하고 있었다.

설운도는 어느 날 새벽 2시경 야간업소의 일을 마치고 귀가해 매니저 안태섭씨와 함께 당시 선풍적인 화제를 모은 KBS의 <이산가족 찾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이산가족들의 감격적인 상봉장면에 눈물이 나오는 판국에 갑자기 안태섭씨가 "이거다!"하고 무릎을 쳤다. 안태섭 씨는 설운도가 연습하던 '아버님'의 음악 테이프와 녹음기를 집어들더니 그에게 따라오라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설운도는 엉겹결에 따라나서 안태섭씨의 자가용에 올라탔다. 안태섭씨는 설운도를 옆자리에 태우고 박건호씨의 자택으로 차를 몰았다. 안태섭씨는 곤히 잠든 박건호씨를 깨웠다. 그는 TV를 보라며 30년 만에 만난 이산가족들의 이야기를 주제로 '아버님'의 멜로디에 맞는 가사를 아침까지 만들어 달라고 했다. 
         
설운도와 안태섭 씨는 서너 시간 눈을 붙이고 박건호씨의 자택으로 다시 달려갔다. 박건호씨는 이미 부탁받은 가사를 완성해 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노래가 '잃어버린 30년'이었다. 이미 만들어진 다른 노래의 가사를 버리고 새로 작사해 취입한 설운도의 '잃어버린 30년'은 곧 음반으로 나와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덕택에 무명가수였던 설운도는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었다. 불과 몇 시간만에 멜로디에 딱 들어 맞는 가사를 붙인 작사가 박건호씨의 뛰어난 순발력이 여기에서 증명된 셈이다.

박건호씨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가요의 소재로 삼는다. 생활의 밀착된 끈끈한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꿈과 정서가 그득 담긴 가사들을 만들어낸다. 먼저 써낸 작품이 마음에 안들어 더 좋은 가사를 만들자는 욕심에서 덤벼들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3천곡이 넘었다는 그는 '대중가요는 한편의 드라마'라고 주장하며 특유의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이 글은 고 박건호 선생이 자신의 시집인가, 아니면 에세이집에 실을 원고가 필요하다며 자신에 대해 써달라고 부탁해 내가 썼던 글이다. 1994년에서 1996년 사이에 쓴 글 같은데 이 원고가 실린 그의 책을 분실했기 때문에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1994년 낸 에세이집 '오선지 밖으로 튀어나온 이야기'나, 시집 '물의 언어로 쓴 불의 시' 또는 '추억의 아랫목이 그립다' 등 세권 중 하나에 싣지 않았나 싶다. 내가 스포츠조선 연예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 무척 바쁜 오전이었는데 박 선생이 자신이 낸 책들을 한 아름 안고 와서 던져주고 가버린 일이 있다. 그 때 가져온 책중에 실렸을 것 같은데 바로 챙기질 않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집어가버린 것으로 생각된다.
박건호 선생은 그 때 이미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는 지 모른다. 확실하진 않지만 콩팥이식 수술을 받기 전 후의 일인데 얼굴이 무척 많이 부어있던 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이후 통화만 몇번 했지 더 만난 일이 별로 없다가 2007년 12월 9일 그의 부음을 듣고 말았다.] 

[출처] 작사가 고 박건호 이야기|작성자케이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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