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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 게바라 : 1부 아르헨티나 (Che : Part One, 2008)
06/26/2019 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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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세에 총살 당한 체 게바라, 

 그가 혁명의 심볼로 일컬어 지는지를 관찰해 볼 수 있는 영화이다.

영화는 체 게바라가 1965년 아바나에서 인터뷰를 하는 장면에서 시작이 되면서 혁명전과 혁명후의 영상이 오버랩되면서 진행이 된다.

1950년대,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는 군부 독재로 고통받는 민중을 위해 쿠바로 향한다. 혁명을 위해 목숨을 건 게릴라전을 펼치던 체 게바라는 수도 아바나를 점령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산타클라라에서 최후의 작전을 감행하는데…


50년 지나도 꺼지지않는 혁명가 ‘체 게바라’의 삶 !!

본명은 에르네스토 라파엘 게바라 데 라 세르나(Ernesto Rafael Guevara de la Serna). 

산타 페 주 로사리오의 귀족가 혈통을 이어받은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아버지는 제법 큰 병원 원장이었으며 따라서 경제적으로 부족함 없이 잘 자랐다. 

 체 게바라 평전에 의하면 어린 시절 에밀리오 살가리(1862~1911)의 소설들에 빠져 살았는데 이 소설들에서 반제국주의적 사고관을 배우게 되었다고 적혀있다. 사색과 독서를 좋아했다고 한다.

체 게바라는 미숙아로 태어났다. 두 살이었을 때는 아버지의 팔에 안긴 채 차가운 여울을 건너다 천식에 걸려 평생 흡입기를 가지고 다녔다. 그럼에도 학창시절 럭비를 즐겨 하는 만능 스포츠맨이었고, 시가를 즐겨 피웠다. 

체 게바라는 "체" 라는 애칭으로 불려지곤 했는데 훗날 그를 상징하는 본명이 되었다. 체(Che)의 원래 뜻은 이탈리아어 "케 코사 체(Che cosa c'e, 무슨 일이야?)"를 뜻하는 말이었는데, 아르헨티나로 대거 유입해 온 알프스 산맥 지방 출신의 이탈리아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 'c'e'를 '체(Che)'로 바꿔 쓰고 발음하였다. 아르헨티나 북동부와 파라과이에서 통용되는 과라니어에서 '체'는 '나' 또는 '나로서는'이라는 뜻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의 동생이 낸 책에 따르면 아르헨티나 사람들이 체를 상습적으로 써서 별명이 붙여졌다고 한다. 가까운 동지들은 체 말고도 엘찬초(El Chancho)라는 애칭으로도 불렀다 한다.

체 게바라(왼쪽)과 피델 카스트로(오른쪽)

동지들과 함께 행진하는 체 게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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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나무위키에서 발췌한 체 게바라의 삶에 관한 글이다.

유년기

전통 가우초 복장을 하고 당나귀를 탄 5세 게바라, 1933년

1928년 6월 14일, 아르헨티나 로사리오의 바스크-아일랜드 혈통 관련 중산층 가정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생년월일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6월 14일로 기록되었으나, 이는 당시 보수적인 아르헨티나 사회에서 게바라의 부모가 혼전 임신을 숨기기 위한 조치였다. 결혼 이후의 정상적인 임신을 알리기 위하여 1개월 늦게 출생등록을 한 것이다. 아버지 에두아르 라파엘 에르네스토 게바라 린치와 무신론자였던 어머니 셀리아 데 라 세르나 Y 죠사는 사회주의자는 아니었으나 진보적 사고를 갖고 있었다. 또한 1824년에 시몬 볼리바르, 안토니오 호세 데 수크레 등 라틴 아메리카 해방군과 아야쿠쵸에서 싸운 페루 부통령 호세 드 라셀나의 후예이고 경제적으로 풍족한 가정이었다.

미숙아로 태어난 게바라는 폐렴에 걸려 2살 때 심한 천식을 앓는다. 체 게바라의 부모님은 아들의 건강을 우선시해서 천식 치료에 좋은 환경을 찾아 몇 번이나 이사를 했다. 어렸을 때는 경련을 동반하는 천식 발작에 위기에 빠진 적도 많았으며, 그 때마다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여 회복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럭비같은 격렬한 스포츠를 사랑했으며, 발작할 때는 산소 흡입기를 사용하며 경기에 돌아오곤 했다. 게바라의 중증 천식은 그를 평생 괴롭혔다.

대학 생활

17세의 게바라, 1945년

부에노스아이레스 대학교에서 의학을 배웠다. 재학 중이던 1951년에 나이 많은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와 함께 오토바이로 남미를 돌아 방랑 여행을 경험하였다. 이 때 남미 각 나라들은 우익 쿠데타 정부가 들어서면서 비약적인 경제발전을 경험했지만, 빈부의 격차와 노동착취가 매우 심했으며, 부유층은 최상의 삶을 누리는 반면, 서민층은 극도로 빈곤한 삶을 살아야했다. 이러한 상황을 견문하면서 아메리카 대륙에서 나타난 민중에 대한 억압과 착취의 현실에 대해 눈을 뜨게 되었으며, 마르크스 주의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 (이것은 《오토바이 남미 여행 일기》에 기록되어 나중에 이것을 원작으로 한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도 제작되었다). 이 여행을 계기로 게바라는 평범한 의사에서 혁명가로의 첫 의식 변화가 이루어졌다.

1952년에 볼리비아 인민운동에 참가하여 외국자본의 유치와 산업 민영화에 반대하였다. 1953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의학대학을 졸업한 후 25일만에 친구 카를로스 페레로와 함께 다시 남미 방랑 여행을 떠난다.

청년기

후안 페론의 독재정권 하에 있던 아르헨티나를 떠나 당초 베네수엘라 구라나도를 방문할 예정이었지만, 볼리비아 혁명이 진행되는 볼리비아를 여행하면서, 그때까지 억압을 받아왔던 인디오가 해방되어 그 어느 때보다 자유로운 분위기가 감돌고 있는데 큰 충격을 받았다. 그 후 페루, 에콰도르, 파나마, 코스타리카, 니카라과, 온두라스, 엘살바도르를 여행하고 하코보 아르벤스 그스만 시대 포프리스모(사회주의로 보는 견해도 있다) 정권 하에 있는 과테말라에 도착했다.

과테말라

22세의 게바라, 1951

과테말라에서 의사를 계속하다가 조국 페루에서 쫓겨나 과테말라에 망명하고 있던 여성운동가 《일다 가데아》와 만나 교감하여 사회주의에 급속히 눈을 뜨고, 그녀와 결혼한다.

1950년 10월의 선거로 성립된 과테말라 아루벤스 정부는, 스페인 식민 시대부터 지속된 구조화된 수탈과 오랜 독재 부패 정권에 의해 유린된 사회의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미국기업(유나이티드 프루츠사)의 착취에서 경제적 독립을 달성하고, 과테말라의 농업 자본주의 경제 확립을 위해 마야계 인디오의 복권을 시도하였다. 그때까지 착취만 당하였던 소작농에 대한 농지 분배 등 과테말라 혁명이라 불릴 정도의 급진적인 개혁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루벤스 정권이 유나이티드 프루츠 사의 사유지에 손을 쓰면서 미국 정부는 과테말라를 맹비난 하였다. 게바라는 이 정부의 활동을 "라틴 아메리카에서 가장 자유롭고 민주적인 나라" 평했다. 그러나 군부의 배신으로 CIA가 밀어준 반정부 세력 '까스띠요 아르마스'에 의해 아루벤스 정부가 전복되면서 (PBSUCCESS 전략), 민주 선거로 선출된 과테말라 정통 혁명 정권은 붕괴되었다. 이 사건이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게바라는 무력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 혁명을 진심으로 지향하게 됐다.

멕시코 망명

그 후 새로 집권한 아르마스 정권에 의해 게바라의 암살령이 내려졌기 때문에, 아내 가데와 함께 실망과 분노를 안고 멕시코로 망명했다. 1955년 7월 이곳에 망명 중인 반체제 쿠바 지도자 피델 카스트로와 만난다. 7월 26일 쿠바 후르헨시오 바티스타 독재 정권 타도를 목표로 동료들을 인솔하고 있는 카스트로에 공감하게 되었다. 게바라는 이때, 하룻밤 사이에 반 바티스타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를 결심했다고 한다. 이렇게 스페인 내전의 공화파의 생존자였던 알베르트 바요중령에 의한 본격적인 군사 훈련을 받고, 쿠바 상륙 준비를 진행하고 있었다.

쿠바 혁명가

말을 탄 게바라, 1958년 11월

그는 아내와 딸 이루디다를 멕시코에 남겨두고 혼자서 쿠바로 향한다.

1956년 11월 25일, 피델 카스트로를 반군 지도자로 하여 총 82명이 8인승 레저 보트 "데셈바르코(그란마)"에 탑승하였다. 그러나 너무 많은 사람이 타서 위생 등의 환경이 열악하였다. 또한 눈에 띄지 않기 위해, 폭풍 속에 출발했기 때문에 7일 후 12월 쿠바에 도착했을 때 많이 지쳤고, 사기도 떨어져 있었다. 반군의 상륙 계획을 카스트로가 미리 발표하였기 때문에 그 내용이 쿠바 정부에 유출되어 반란군은 도착 직후부터 정부군의 습격을 받아 괴멸 상태가 되었다. 결국 살아서 도착할 수 있었던 사람은 82명 중 게바라, 피델 카스트로, 라울 카스트로, 카밀로 시엔푸에고스, 루이스 크레스포, 호세 모얀, 훌리오 디아즈, 카리스트 가르시아, 카를로스 베르데무스 등 12명뿐이었다. (생존자가 17명이라는 설도 있다.)

당시 카스트로는 혁명에 실패하여 감옥살이를 했었는데, 재판 당시 피델 카스트로는 판사 앞에서 〈역사가 나중에 나를 다시 평가할 것〉이라는 유명한 말을 한다. 체 게바라등의 동지들의 참여로 다시한번 혁명에 도전하여 친미성향의 바티스타 독재정권을 붕괴시킨다.

상륙 후, 반군은 시에라 마에스트라 산맥에 잠복하여, 산골 마을을 전전하면서 군 재건을 도모했다. 이후 쿠바 국내에서 활동하던 반정부 세력과 합류에 성공하여 반군 세력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당초 부대에서 게바라의 역할은 군의관이었지만, 혁명군의 정치 방송을 하는 라디오 방송국(라디오 레베르데)을 설립하는 등 정부군과 전투에서 그 인내심과 성실, 상황 분석, 냉정한 판단력,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하여 점차 반군 지도자의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도착 1년 후 병력 증가에 따른 부대 개편 시, 카밀로와 라울 등을 그대로 두어, 카스트로부터 제 2군(이름은 제 4군) '코만단테'(사령관, 지휘관 아래에 분대와 분대를 지휘하는 "대장"이 있다)에 임명되어 지휘권과 소령의 계급을 받아 카스트로에 이어 명실상부한 반군 2인자가 되었다.

1958년 12월 29일에 제 2군을 이끌고 쿠바 제 2의 도시 산타클라라에 돌입한다. 많은 시민의 가세로 적들을 제압하고 수도 아바나로 가는 길을 열었다. 1959년 1월 1일 오전 2시 10분 후 풀헨시오 바티스타가 도미니카 공화국에 망명하자, 1월 8일 피델 카스트로가 아바나에 입성하여, 쿠바 혁명이 달성되었다. 투쟁적인 업적과 헌신적인 작업으로 쿠바 시민권을 부여받아 쿠바 새 정부의 각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정치인

체 게바라, 1959년 1월 2일
체 게바라(왼쪽)와 피델 카스트로 (1961년)

그는 쿠바혁명 승리 후 쿠바 공산당과 쿠바 혁명정부의 중요직책에 있으면서 쿠바혁명에서 얻은 것들을 지키며 혁명을 더욱 전진시키기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여기서는 사형제를 부활시켜 친미 또는 반혁명세력 약 14,000명을 죽였다. 쿠바혁명 승리 후 얼마간 아바나의 라 까바니아 요새수비대 사령관으로 있다가 산업성장을 조종하는 책임자로 있었으며 동시에 토지개혁의 준비에 참가하였다. 1959년 11월∼1961년 2월에 쿠바국립은행총재, 1961년 2월부터 쿠바산업상도 함께하였으며 1962년에 쿠바통일혁명조직 전국지도부 및 비서국에서 일하여 '쿠바의 두뇌'라 일컬어졌다.

사망

그는 쿠바에서 많은 일들을 했음에도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일을 찾아 떠났다. 1965년 4월, "쿠바에서는 모든 일이 끝났다"라는 편지를 남기고 행방이 묘연해졌다.이 때 쿠바를 벗어나 볼리비아로 투쟁무대를 옮겨 바리엔토스 정권을 상대로 게릴라전을 벌였으나, 1967년 10월 9일 미국이 가세한 볼리비아 정부군에게 잡혀 총살당했다. 그의 나이는 39세였다. 총살 후 그의 시체는 정부에 의해 언론에 공개되었으나, 체 게바라를 하찮은 인간으로 보이게 하려는 의도와 달리, 그의 모습이 예수와 비교되면서 다시 많은 이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다. 그의 시체는 30년후 볼리비아에서 발굴되어 그가 혁명가로 활동했던 쿠바에 안장되었다.

볼리비아군이 게바라를 처형하고 이튿날 주검을 외신에 공개하고 있다.볼리비아군이 게바라를 처형하고 이튿날 주검을 외신에 공개하고 있다.


[체 게바라에 관한 추가 관련글]

50년간 이어진 게바라 신화는 과연 허구일까? 

출처: 중앙일보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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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바의 근대 정치사를 얘기하자면 호세 마르티를 빼놓을 수 없으며 호세 마르티하면 관따나메라라는 노래를 빼놓을 수가 없다. 

영화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 에서 주인공 세군도가 “나무를 심을 것, 아이를 낳을 것, 책을 쓸 것.” 이라는 호세 마르티의 쿠바인의 세 가지 의무를 얘기하는 장면이 말해 주듯이 쿠바인들 사이에 호세 마르티는 오래도록 국부로 존재하고 있다.

호세 마르티

쿠바에는 체 게바라와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하기 훨씬전인 1800년대 말 호세 마르티 (Jose Marti :1853년 1월 28일 ~ 1895년 5월 19일)라는 독립운동가이자 문학가인 영웅이 있었다. 그는 혁명가였지만 그가 남긴 시(詩)와 글들은 아직도 많은 이들에게 사랑을 받고있으며 쿠바의 국부로 존경 받고있다. 평생을 독립운동을 하다 42세의 나이로 그가 “관타나모”에서 전사하기전 마지막으로 남긴 시에다 쿠바 전통 멜로디를 붙여서 불려지던 노래를 1966년에 Joseito Fernandez가 편곡 정리한 곡이 바로 쿠바를 대표하는 관타나메라라는 노래다.


아래는 전통 멜로디에 보다 가까운 오리지날 노래로 1966년판 Joseito Fernandez 가 부른 Guajira Guantanamera 이다.

노래 제목인 관따나메라(Guantanamera)는 쿠바 동남쪽의 한 시골 항구마을인 “관따나모의 여인”이라는 뜻이고 후렴에 나오는 과히라(Guajira)는 농사짓는 시골 여인네를 뜻한다.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나는 진실한 사람
야자수 무성한 고장 출신

죽기 전에 이 가슴에 맺힌 시를 노래하리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내 시는 화창한 초록색
내 시는 불타는 선홍색

내 시는 상처 입은 사슴
산 속 보금자리를 찾는

이 땅의 가난한 사람들과 더불어
이 한 몸 바치리라

골짜기에서 흐르는 시냇물이
나는 바다보다 더 좋아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관타나메라 과히라 관타라메라


아래는  Pete Seeger 가 호세 마르티(Jose Marti)에 관한 그의 육성 설명과 함께 부르는 Guantanamera 라는 노래이다. Pete Seeger 의 육성 설명은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가사를 쓴 호세 마르티는 쿠바의 국민영웅이며 독립운동가이다.그는 1853년 쿠바 산티아고에서 태어났는데 당시 침략자 스페인에 대항해서 독립전쟁을 적극적으로 이끌었다. 17세 되는 해에 스페인 총독에 의해 추방 당하고 남미의 여러나라를 전전하다가 12년 간 뉴욕에 정착하면서 평소 문학에 조예가 깊었던 재능을 살려 시와. 소설. 평론. 등 70여권의 저서를 발간한다. 뉴욕에서도 계속 망명운동을 한 그는 42세 되는 해 1895년 미국의 도움을 받아 혁명군을 모집하여 스페인군에 결사 항쟁했지만 애석하게도 고향땅인 산티아고 시 동쪽에 위치한 “관타나모”에서 전사하고 만다.

마르티는 조국해방의 큰뜻을 가슴속에 묻은채 세상을 떠났지만 그는 조국에서 역사상 가장 추앙 받는 혁명가와 문학가로 길이 색이면서 쿠바를 비롯해 전 남미가 애창하는 민요 “관타나메라”라는 작사를 남겨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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