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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언론의 낚시 제목
01/29/2013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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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 인플레 시대의 신문

 

신문사엔 편집기자라는 게 있다. 기사의 경중을 따져 제목을 달고 지면에 배치하는 일을 하는 기자들이다. 20여년 전 처음 편집을 배울 때였다. 제목을 뽑아 가면 선배는 내가 단 제목을 붉은 사인펜으로 사정없이 죽죽 긋곤 했다. 가장 많이 지적 받았던 말이 ‘사상 최대’최초’ 같은 과장성 단어였다.

 

언어 인플레가 심하다 보니 조금만 앞서가도 ‘최첨단’이고 남보다 약간만 빨라도 ‘초고속’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햇다. ‘~을 정복했다’는 말이 나오면 ‘약간 알게 됐다’는 정도로 받아들여라, ‘획기적’은 아직 검증이 되지 않았다는 말이고 ‘국내 최초’라고 하면 외국 것을 처음으로 베꼈구나 생각하면 정확하다는 말도 들었다. 당시에는 정말 그럴까 싶었지만 얼마 지나니 않아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철퇴’니 ‘혈안’ 같은 제목도 어김없이 야단을 맞았다. 철퇴란 단 한 방에 몸이 으스러져 죽고 마는 무서운 무기다.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써서 되겠느냐는 것이었다. ‘혈안’도 눈이 벌겋다는 것을 한자로 옮긴 것으로 신문이 쓸 말은 아니라고 했다.

 

선배는 시인이었다. 아름답고 고운 우리말을 골라 쓰는 것은 기자의 의무이자 책임이어야 한다는 것이 지론이었다. 이전 편집기자들 중에는 이런 생각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분투에도 언어의 인플레는 잡지 못했고 오히려 내성이 생겨 점점 더 강도 높은 단어로 독자를 유혹해야(?) 하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기름을 끼얹은 것이 인터넷이다. 포털이나 한국 언론사 웹사이트에 한 번이라도 접속해 본 사람은 얼마나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단어들이 난무하는지 다 안다. 군소 언론, 내로라하는 메이저 언론 차이가 없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이런 세태를 꼬집는 웹사이트를 하나 발견했다. ‘충격 고로케(hot.coroke.net)’라는 사이트인데 어떤 언론이 가장 많은 낚시성 제목으로 독자를 기만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곳이다. 거기서 흔히 쓰이는 낚시성 제목으로 뽑아놓은 단어는 ‘충격’ ‘경악’ ‘헉!’ ‘알고 보니’ ‘숨막히는’ ‘이럴 수가’ 같은 것들이었다. ‘깜짝’ ‘발칵’ ‘앗!’ ‘폭탄’ ‘대박’ ‘기적의’ ‘결국...’ 같은 말도 속아넘어 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이들 단어의 뜻풀이를 새로 해 놓은 것도 눈길을 끌었다. 일례로 ‘충격’이라는 단어다. 원래 뜻은 ‘물체에 급격히 가해지는 힘’ 또는 ‘슬픈 일이나 뜻밖의 사건 따위로 마음에 받은 심한 자극이나 영향’을 말한다. 하지만 이 사이트에서의 풀이는 전혀 다르다. ‘부디 꼭 클릭해달라고 독자에게 간곡하게 부탁하거나 독자를 낚아보기 위해 기사 제목에 덧붙이는 일종의 주문’이라는 것이다. 이를 보면서 처음엔 뜨끔했고 나중엔 부끄러웠다.

 

인터넷은 클릭 수로 승부가 난다. 기사의 내용과 수준에 상관없이 클릭 수에 따라 영향력도 생기고 수익도 늘어난다. 종이신문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자면 어떻게든 독자를 자극하고 호기심을 자아내서 읽게 만들어야 한다. 요즘 언론이 어쩔 수 없이 ‘제목 장사’에 매달리는 이유다.

 

하지만 제목에도 지켜야할 선이 있다. 세월이 달라져 제목에 멋과 맛까지는 못 낸다 해도 거짓과 억지는 없어야 한다. 기사 내용과 전혀 다른 제목으로 독자를 끌려는 것은 과장과 허위를 넘어 사기요 기만이며 독자를 우롱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매체의 춘추전국 시대다. 그 속에서 옥석을 가리는 일은 독자의 몫이겠지만 결국 언론의 수준을 결정짓는 것은 영혼을 팔면서까지 기사를 팔지는 않겠다는 저널리즘 정신이다. 치열한 미디어 전쟁시대에 여전히 그런 고민으로 기사를 쓰고 제목을 뽑는 기자들은 과연 얼마나 될까. (2013.1.29)

 

                                                                               * *  *



 
오바마 대통령 취임식날 지면.
인터넷으로 신문을 보면 이런 식의 기사 배치와 제목이 주는 묘미를 느끼지 못한다는 한계가 있다.
 
 


편집팀장을 맡은 후 처음 제작한 지면.
제목 위치에서 여백을 살려 기사의 주목도를 높이려 했다. 
 


 
경제섹션 1면.
변형광고가 위로 올라오는 바람에...광고를 패러디해서 제목을 뽑아봤다.
보통 기사 아래에 깔리는 광고와 달리 이렇게 특정 위치를 지정해서 싣는 광고는 당연히 광고료가 비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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