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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장례식과 세상 인심
06/24/2015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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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식과 세상 인심


장인이 돌아가셨다. 70대 후반, 아직은 많이 아쉬운 연세셨다. 급하게 한국 장례식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평생을 공직에 몸 담았던 장인은 꽤 발이 넓었다. 나름 베풀기도 많이 하셨다. 그럼에도 예상보다 문상객은 적었다. 올 만한 사람, 와야만 할 사람의 얼굴도 보이지 않았다. 뉴스를 도배질하다시피 한 메르스의 위력 탓인지, 야박한 인심 때문인지 애매했다.


 “정승집 개 장례식은 붐벼도 정작 정승 장례식은 썰렁하다더라.” 사람들이 말했다. 씁쓸했다.


15년 미국 생활. 어느새 미국식 장례에 익숙해진 탓인지 한국의 장례식은 많이 낯설었다. 술 마시며, 고스톱 치며, 상주와 문상객이 함께 밤을 새던 예전의 장례식장이 아니었다. 주인공은 상조회사였다. 


한국은 2012년 기준으로 하루 평균 731명이 세상을 떠난다고 한다. 장례 시장 규모는 연간 4조원대에 이른다. 이런 배경에서 우후죽순 등장한 것이 상조회사다. 전국에 수백 개가 되고 유명 탤런트를 모델로 TV광고까지 하는 대기업도 생겼다.


장인은 4년 전 상조회사에 가입하고 매달 얼마씩 회비를 내셨다. 그 덕에 장례의 모든 순서는 상조회사에서 나온 장례지도사가 맡아 했다. 유니폼을 차려입은 30대 젊은이였다. 조문객 맞이, 염습, 입관, 발인, 화장, 납골당 봉안까지 모든 순서를 이끌었다. 


유가족에겐 검은 상복이 제공됐다. 남자는 양복, 여자는 개량 한복 비슷했다. 맏상주에겐 굴건(屈巾), 사위들에겐 완장도 주어졌다. 이 모든 것이 장례 상품 패키지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것도 등급이 정해져서. 


적지 않은 추가 비용이었다. 유족으로선 편하면서도 불편했다. 가장 엄숙하고 가장 진솔해야 할 시간조차 어쩔 수 없이 상업화된 형식과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게 요즘 장례식이다.


빈소는 국화꽃 장식으로 화려하게 꾸며졌다. 최근 한 신문은 요즘 한국의 영정 꽃장식이 100% 일본식이라고 지적했다. 우리 전통장례는 영좌(靈座) 뒤에 병풍을 치는 것이었다. 전통 장례에 사용되는 꽃은 수파련(水波蓮)이라고 해서 상여에 다는 종이꽃이 전부였다. 


상주가 왼쪽 팔에 차는 완장도, 전통 수의(壽衣)로 알려진 삼베 수의도 모두 일제의 잔재라고 했다. 그렇지만 그게 근 100년이 다 돼 간다. 아무리 국적불명이라고 목청 높여 본들 이것이 새로운 한국의 장례 문화가 되고 또 다른 전통이 돼버렸다. 무서운 게 세월이다.


돌아가신지 3일째. 아침 일찍 발인을 하고 화장터로 향했다. 요즘은 화장터라는 말 대신 ‘승화원’이라고 부른다. 죽음의 이미지를 어떻게든 떨쳐내고 싶은 마음들이 만들어낸 이름일 것이다. 


한국은 이제 매장(埋葬)보다 화장(火葬)이 대세다. 2014년 전국 화장률은 76.9%나 됐다(미국도 화장이 점점 늘어 거의 절반에 육박한다). 그래서인지 예약을 했어도 줄을 서야 했다. 복잡한 한국, 평생 줄 서며 살아야 하는데 죽어서도 줄을 서는구나 싶었다.


마침내 순서가 되었다. 진짜 마지막 순간, 자식들은 오열했다. 사위들은 덤덤했다. 한 다리가 만리라는 말이 실감났다. 장인에게 죄송하고 아내에게 미안했다. 그리고 1시간 반. 장인의 몸은 작은 항아리 하나도 다 채우지 못한 채 가루가 되어 돌아왔다.


선산 납골당에 고인을 봉안하는 것으로 모든 장례는 끝이 났다. 돌아오는 길, 끝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이 향토 음식점에 들러 늦은 점심을 먹었다. 몸은 혼곤하고 입은 칼칼했지만 음식은 맛있었다. 방금 망자와 숙연한 영이별을 했음에도 이렇게 잘 먹을 수 있다는 게 비루하고 민망했다.


얼키설키 엉킨 감정들을 뒤로 하고 다시 미국으로, 일상으로 돌아왔다. 아내의 슬픔이 여전히 크다. 아내는 지난 1년 새 4번이나 투병 중인 아버지를 뵈러 한국에 갔었다. 그럼에도 임종은 못했다. 불효다. 그러나 어쩌랴. 그것이 떠나와 사는 우리 한인들의 숙명인 것을. 


아내에겐 침묵으로, 더불어 동일한 아픔 겪는 모든 이민자들에겐 동병상련의 위로를 전한다. (2015.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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