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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돈 없으면 거지에요, 거지"
11/11/2014 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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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행복한 나라



#.

버이 살아실 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 /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찌 하리 /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귀에 익은 운율, 나이 들어 뒤늦게 공감, 절감하는 시조다. 조선 선조 때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을 때 백성들을 위해 지었다는 훈민가(訓民歌) 중의 하나다. 훈민가의 마지막 16번째도 노인 공경 시조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

나는 젊었거늘 돌이라도 무거울까 /

늙기도 서럽거늘 짐조차 어이 지실까.


요즘 세상 이런 갸륵한 마음 가진 젊은이들 과연 얼마나 될까.


#.

LA 한인타운을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한 분 있다. 점심시간 한인 식당, 커피숍 등지에서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꼭 보게 되는 분이다. 식당에 들어오면 모든 테이블을 빠짐없이 돌며 김 같은 것을 내밀며 팔아달라고 한다. 하지만 대부분 묵묵부답 외면, 아니면 됐어요라며 거절이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꿋꿋이 옆 테이블로 향하고 다음 식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할아버지를 둘러싼 소문도 무성했다. 엄청난 알부자라더라, 벤츠 타고 출근해 차 세워두고 옷 갈아입고 나온다더라, 당뇨 때문에 걸으려고 일부러 저렇게 다닌다더라 등등. 하지만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본 게 지난봄이었던가? 그런데 얼마 전 한인타운에서 좀 떨어진 패스트푸드점에서 우연히 할아버지를 봤다. 아침 출근길, 커피를 사러 잠시 들렀는데 예의 그 익숙한 몸짓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늘 손에 들려있던 물건은 보이지 않고 그냥 맨손이었다. , 구걸 행각. 그러고 보니 눌러 쓴 모자 밑으로 삐져나온 머리는 전보다 더 하얬고 몸도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처음엔 못들은 척이다. “이제 물건은 안 파시나 봐요라며 한 번 더 말을 붙이니 그제야 짧게 대꾸를 하신다. “교통사고 당했어요. 다섯 달 쯤 쉬었어요. 이젠 그렇게 못 다녀요. 물건 사올 돈도 없어요.” 그리고는 지금은 운동 삼아 이렇게 다녀요라며 말끝을 흐린다.


몇 마디 더 여쭈었다. 올해 80세라고 했다. 미국에 온 지는 35. 이것저것 많은 일을 했었고 지금은 혼자 산다고 했다. 한국에 자식이 있다고 말할 땐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미국은 돈 없으면 거지에요, 거지.” 미국만 그럴까 싶었지만 내색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말을 맺은 할아버지는 다시 발길을 돌렸다. 

 

#.

장수시대다. 축복인 만큼 그늘도 짙다. 더 이상 국가나 사회가 노후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 가족의 부양문화도 사라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남은 것은 별로 없다. 건강도, 돈도, 일도, 가족도, 친구도... 그렇게 준비 안 된 노년을 맞는 사람들은 자꾸만 늘어 간다.

 

우리 주위에도 고달픈 노인들이 많다.  평생을 부지런히 달려왔을 테지만 여전히 쉬지 못하는 몸 고달픈 노인들, 떨치지 못한 노욕 때문에 아직도 영혼 고달픈 어르신들, 내 맘대로 안 되는 자식 때문에 여전히 마음 고달픈 부모님들이 많다. 한국에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뉴스를 보면 오히려 한국은 더 한 것 같다. 노년층의 절대적 지지 속에 출발한 박근혜 정부다. 하지만 노인빈곤, 노인자살률 1위의 오명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지 않은가.

 

나이 들면 서럽다. 사회적, 신체적 쇠퇴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병고(病苦), 빈고(貧苦), 고독고(孤獨苦), 무위고(無爲苦)와 싸워야 한다. 노년의 이 4가지 고통,  병 들고 돈 없고 외롭고 할 일 없는 이 괴로움을 줄여주는 것이 노인문제의 해법일 테지만, 만만치가 않다.


열심히 살아온 어르신들, 하지만 어느새 약자가 되어버린 그들을 좀 더 배려하고 관심 가져주는 사회야말로 우리 모두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노인이 행복한 그런 나라는 어디에 있을까.

 

총총히 맥도널드 문을 나서던 할아버지의 초라한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2014.11.11)

 


JTBC 인기 드라마 '유나의 거리'에서 장노인 역을 맡은 정종준.

노년의 고독과 병고를 실감나게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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