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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이 도대체 누구이기에
06/06/201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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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으로 인해 역사를 새로 잡아야

 

韓半島(한반도) 韓民族(한민족)이 대한민국과 북한으로 나눠진 가장 큰 원인을 따진다면 그야 조선말기 王政(왕정) 紊亂(문란)에 따른 亂世(난세)를 겪었기 때문이고, 大韓帝國(대한제국)이라도 우뚝 서게 했다면 6.25한국전쟁까지 이끌게 했을 것인가?

정권다툼의 틈을 타 청나라와 일제는 虎視耽耽(호시탐탐) 한반도를 유린하려 했고 한반도의 썩은 政客(정객)의 후손들은 일제에 나라까지 팔아먹으면서 자기들 배를 채우기만 급급한 때문에 해방이라는 단어를 쓴 기간은 한 달도 지나지 않았고 한반도는 남북으로 쪼개지고 만다.

이념싸움의 시작에 따라 민주주의와 공산주의로 분리됐다고 하지만 그 속내에는 가장 무서운 정권욕심에 따른 다툼 때문 아니었던가!

국가와 국민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보다 권력자들의 一身(일신)榮達(영달)만을 위해 권력을 잡아야 자신들 맘대로 휘두를 수 있었기에 국민은 안중에도 없었고, 입으로만 국가와 국민을 위한다면서 시간만 허용되면 떠들고 다니던 시절을 역사는 그대로 적고 있었는데 권력자들은 그 역사까지 바꿔가면서 권력의 시녀가 돼 국가는 衰落(쇠락)시키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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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눠 먹기식 권력자들이 協勢(협세)를 형성시키면서 해방 이후 남쪽에는 친일 세력들이 활발하게 움직일 수 있는 틀을 미군정이 보호해주고 그 세력을 결집시키는데 이승만의 영어실력이 한 가닥 힘을 발휘하고 있던 시절은 슬픈 대한민국으로 변하게 된다.

민주주의를 형성하게 한 것까지는 좋았다고 치지만,

이념에 엇나가는 세력에게는 너무나 지나치게 단호했던 그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게 했던가?

일제가 망해가고 있을 때(19458월 이전) 대한민국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현상금을 걸고 혈안이 된 日警(일경)들의 활약에서 독립운동가들은 물론 김구 선생을 비롯한 현상금이 붙어 다니던 인물들 索出(색출)에 협조했던 비열한 같은 한민족(친일파)들의 태도를 어떻게 形容(형용)할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지금도 빨갱이云云(운운)하며 색깔론은 펴는 지금의 정치꾼들에게 국민들은 친일파라며 인정해버리고 마는 형국인 것이다.

참으로 더러운 역사를 지닌 한받도 아닌가?

이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으면 정치하는 사람들부터 제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아직도 색깔론을 펴지 못하면 상대를 제압할 수 있는 기틀조차 없는 자유한국당(자한당)의 허접한 정책이 안쓰럽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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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산 김원봉은 100만원 김구 선생은 60만원의 현상금이 붙었고 그 외 독립군들을 색출하기 위해 친일파들이 활약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던 그 시절을 우리들이 어떻게 그대로 이해하며 피부로 느낄 수 있을 것인가?

이승만의 욕심이 조금만 덜 했다면 해방 이후 노덕술 같은 위인들이 판을 치고 다닐 수 있었을 것인가?

김원봉은 죽지 않으려고 북한으로 몸을 피하기 위해 방향을 틀었지만 북한 김일성도 이용만 하고 처단했다.

김원봉이 누구인지는 시사IN이 상세히 적었기에 같이 하기로 한다.

 


시사IN

약산 김원봉 욕보이는 빨갱이 프레임이라는 제하에,

조선의열단을 창단한 약산 김원봉은 조선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였다. 그러나 그는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로 낙인찍혔고, 북에서는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었다. 약산의 삶과 비참한 가족사를 추적했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 가운데 여전히 남북에서 잊힌 이들이 있다. 의열단 단장 약산(若山) 김원봉 선생이 대표적이다. 약산의 독립운동이 오랜 금기를 깨고 조금이나마 알려진 것은 영화를 통해서였다. 2015년과 2016년 잇따라 개봉한 영화 <암살><밀정>은 뒤늦게나마 후세가 약산의 독립운동 공적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는 창이었다.

약산은 조선총독부가 가장 두려워한 독립운동가였다. 일제가 백범 김구 선생에게 내건 현상금 60만원보다 많은 100만원을 내걸 정도였다. 1919년 조선의열단(의열단)을 창단한 약산은 크고 작은 무장 독립투쟁을 벌였다. 1930년대에는 백범과 독립운동의 양대 거목으로 불릴 만큼 조직화된 항일 무장투쟁에 매진했다. 조선의용대장, 민족혁명당 총서기,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장 등을 역임했다. 자력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분투했지만 기회를 갖지 못한 채 광복을 맞았다. 그가 마주한 현실은 친일파가 득세하는 분단된 조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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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 경찰 노덕술, 약산 취조하며 뺨 때려

 

19472월 약산은 친일 경찰로 악명 높았던 미군정 경찰 노덕술에게 끌려가 뺨을 맞는 등 치욕을 겪었다. 약산은 비참한 현실에 울분을 토하고 월북을 택했다. 비운의 서막이었다. 그는 남북 양쪽으로부터 버림받았다. 남에서는 월북한 빨갱이로 낙인찍혔다. 북에서는 1958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되었다.

약산이 북으로 간 뒤, 집안은 멸문에 가까운 참화를 당했다. 남은 가족 대부분이 예비검속이라는 이름으로 총살당했다. 당시 여고생이던 막내 여동생 김학봉씨(224일 작고)는 고문과 연좌제를 겪으며 살아남았다. 그녀의 세 아들 중 한 명인 김태영씨(63)가 조선의열단 창단 100주년을 맞아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발족을 서두르고 있다. 약산의 조카 김태영씨는 1982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30년 넘게 미국에서 틈틈이 중국을 오가며 삼촌의 행적을 추적했다. 오는 11월 의열단 창단 기념일에 맞춰 약산 김원봉 기념사업회를 발족하겠다는 김태영씨를 만났다.

 

1898년 경남 밀양에서 태어난 김원봉은 밀양공립보통학교에 입학했다. 일본 국경일인 천장절(일왕 히로히토의 생일)에 일장기를 변소에 버렸다. 이 사건으로 학교를 떠나야 했다. 이후 열다섯 살에 그는 서울의 중앙학교로 편입했다. 중앙학교는 계몽운동가들이 후진 양성을 위해 설립했다. 열아홉 살이던 1916년 중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3·1운동을 진압한 일제의 만행을 접하고 더 이상 평화적 방법으로는 독립을 실현할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다. 항일 비밀결사인 의열단은 이렇게 탄생했다.

의열단은 1920년 봄 처음으로 국내에 공작조를 보냈다. 실패로 돌아갔다. 일제에 모두 체포당하는 과정에서 이름이 공개되었다. 이어 9월과 12월에 부산경찰서와 밀양경찰서에 각각 폭탄을 투척해 독립운동사에 한 획을 긋는다. 1921년에는 조선총독부에 폭탄을 던졌다. 1922년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일본군 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하면서 활약상이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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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통치는 갈수록 강고해졌다. 1926년 약산은 항일 군대를 양성해 조직적인 독립투쟁에 나서야 한다는 쪽으로 생각을 전환한다. 암살투쟁이라는 의열단의 한계를 인식한 결과였다. 그는 의열단원 24명과 함께 황포군관학교 생도로 입교했다. 군사전략을 배우고, 장제스와 저우언라이 등 중국 항일운동의 주요 지도자들과 교분을 맺었다.

약산은 민족주의자였다. 1927년에 장제스가 국공합작을 깨뜨리는 쿠데타를 일으켰다. 약산의 대원들 대부분은 공산당 지역에 남아 일제와 싸웠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이념을 넘어 누구와도 합작할 수 있다는 신념을 밝히고 공산당에 가입하지는 않았다.

만주사변 후에는 국민당 장제스의 협력을 받아 1932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를 세웠다. 시인 이육사 선생도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출신이다. 이 학교 출신을 바탕으로 조선의용대를 만든 약산은 조선민족혁명당을 발족했다. 독립을 위해 범민족적 단체들이 모여야 한다는 취지였다.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등 총 9개 정당과 단체가 참여했다. 193810월 중국과 일본의 전투가 한창일 무렵 조선의용대는 중국의 항일전을 도왔다. 1944년에는 충칭 임시정부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을 역임했다.

 

해방 후 고국으로 돌아온 약산은 좌우 대립이 첨예해지자 좌익 계열 연합단체 민주주의민족전선공동의장에 선출되었다. 이때부터 김원봉은 친일파와 우익 정치 깡패의 집중 표적이 되었다. 그는 19473월 전국노동조합평의회의 총파업 배후로 의심받았다. 미군정은 친일 경찰 출신 노덕술을 시켜 약산을 체포했다. 노덕술은 약산을 빨갱이 두목이라고 부르며 뺨을 때리는 등 갖은 수모를 안겼다. “외삼촌은 그 수모를 당하고 풀려난 뒤 의열단 동지 유석현 선생을 만나 사흘을 꼬박 울며 여기서는 왜놈 등쌀에 언제 죽을지 모른다라고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약산은 1948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협상에 참여했다가 서울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대해 김태영씨는 가족들만 간직해온 기억을 꺼내 약산의 월북 전후 사정을 들려주었다. 1947719일 몽양 여운형 선생이 서울 혜화동에서 한지근의 총탄을 맞고 서거했다. 약산은 장례위원장을 맡았다. 몽양 장례식 후 약산은 다음 차례는 자신이라는 제보를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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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초기, 형제·사촌 9명 총살당해

 

고향 집에서 지내다 하루는 가족을 불러 모았다고 한다. 다급한 전화를 받은 뒤였다. “그때 외숙모님은 둘째를 낳은 지 며칠 지나지 않았지만 심상찮은 외삼촌의 채근에 아이를 보자기에 싸서 집 떠날 채비를 서둘렀다고 한다. 약산은 떠나기 전 동생들을 모두 불러 모아놓고 앞으로 누가 물어보거든 절대로 약산의 동생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라고 신신당부했다. 외삼촌이 떠난 뒤 사복 차림의 무장대가 담을 뛰어 넘어와서 총을 쏘아댔다. 집을 뒤지더니 외삼촌 행방을 대라고 가족들을 고문하기 시작했다.”

 

약산은 19488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이 되었고, 9월에는 국가검열상에 올랐다.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 등 고위직을 두루 역임했다. 그러다 195810월 모든 직책에서 해임되고 숙청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납북된 조소앙·안재홍 등과 함께 중립화 평화통일 방안을 주장하면서 김일성 주석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다. 약산은 장제스와 맺은 친분이 국제간첩 혐의로 둔갑되어 숙청됐다고 한다.

 

남한에 남은 약산의 가족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 한국전쟁 초기 형제·사촌 9명은 김원봉의 가족이라는 이유로 군경에 총살당했다. 약산의 부친은 외딴곳에 유폐되었다가 굶어 죽었다. 간신히 총살을 면한 약산의 다섯째 동생 김봉철씨는 19604·19혁명으로 이승만 정부가 무너지자 형제들의 유골을 수습해 장례식을 치렀다. 그는 책임자 처벌과 유족 보상을 요구했다. 하지만 5·16 쿠데타로 김봉철씨는 특수반국가행위자로 구속되었다. 형제들의 묘지는 파헤쳐지고 비석은 산산조각 났다. 김봉철씨는 1심에서 무기징역, 2심에서 징역 10년형을 선고받았다. 56개월가량 복역하다 출소했지만 화병을 앓다 1986년 숨졌다.

 



여동생 김학봉씨는 중앙정보부 감시 아래 살았다. 직장에서 쫓겨나 거리를 전전했고 자녀들을 고아원에 맡겼다. “외할머니가 생전 몰래 보관한 외삼촌의 유품을 어머니에게 물려주고 돌아가셨다. 장제스 총통이 외삼촌에게 선물한 족자 4개와 의열단원과 찍은 흑백사진들이었다. 중앙정보부의 감시가 삼엄해 어머니는 혹시나 자식들에게 화가 미칠까 봐 장 총통이 선물한 족자 4개를 불태웠다. 사진만 보관하다가 나에게 물려주었다.”

 

고아원에서 자란 김태영씨는 어린 시절 외삼촌을 원망했다. 약산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는 40년이 걸렸다. 남쪽에 남은 가족이 겪어야 했던 끔찍한 경험 때문이었다. “약산은 아무리 친일파가 득세해도 이승만에게 협조하는 척하면서 남한에 남아 있을 수도 있었다. 북으로 가는 바람에 남은 형제자매가 다 죽는 고초를 안겼다는 원망이 들었다. 중국 내 독립운동 흔적을 찾아다녀보니 친일파를 적으로 보고 평생 싸운 그분의 성격상 그것은 불가능했을 것 같더라.”

 

그는 연좌제의 사슬을 피해 1982년 미국으로 떠났다. 약산의 동지였던 유석현씨가 당시 민정당 고문이라 도움이 되었다. 김태영씨는 미국에서 자수성가해 사업체를 일궜다. 1990년대 초부터는 약산의 행적을 찾아 중국을 드나들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에서는 김원봉의 이름을 꺼내는 것조차 금기였다. 월북한 북한 고위층이었다는 이유였다. 사회주의 계열 독립운동가에 대한 재평가가 시작된 것은 노무현 정부 때다. 약산에 대한 건국훈장 추서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유족은 2007년 약산의 독립운동 자료를 국가보훈처에 제출하며 서훈을 요청했지만, 거부당했다. 약산이 자발적으로 월북한 데다 북한에서 장관급 이상을 지냈다는 이유에서였다.

영화 <암살>로 약산의 독립운동이 얼마간 베일을 벗으면서 그를 바라보는 분위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2015년 김태영씨는 당시 야당 대표이던 문재인 대통령을 찾아갔다. 약산을 다룬 영화 <암살>이 나왔다고 알렸다. 당직자들과 영화를 본 문재인 대통령은 약산의 조카를 직접 만났다. 약산은 정말 치열하게 무장투쟁을 한 분인데 해방 후에 북으로 갔다가 숙청되었다. 남에서도 북에서도 설 곳이 없었다라고 기자들에게 말하기도 했다.

 

친일파가 아직도 떵떵거리며 사니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가보훈처 자문기구인 국민중심 보훈혁신위원회는 약산에 대한 독립유공자 선정을 권고했다. 보수 진영은 강력히 반발한다. ‘약산이 골수 사회주의자인 데다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다는 이유를 댔다.

약산은 독립을 위해서라면 좌우를 넘나들었던 독립운동가였다. 필요하다면 중국 국민당과도, 공산주의와도 손을 잡았고 또 아나키즘에 심취하기도 했다. 좌우합작을 추진하던 몽양 피살 이후 신변 안전을 위해 반강제로 월북하게 된 시대적 배경과 맥락도 봐야 한다. 더구나 북에서는 자본주의 진영 장제스와 내통한 국제간첩으로 몰려 숙청당했다.

 

 


올해도 약산에 대한 서훈은 쉬워 보이지 않는다. 김태영씨는 이러한 현실이 여전히 답답하다고 했다. 친일파들이 아직까지 떵떵거리며 사니까. 빨갱이를 계속 만들어내거나, 빨갱이 프레임을 덧칠해야만 유지되는 듯한 대한민국 보수의 정치철학이 유감이다.

<저작권자 시사IN (http://www.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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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념을 따지는 이들은 진보계열보다는 보수주의라고 하는 가짜보수 세력들이 더 심하게 따지고 덤벼든다는 것을 우리 서로가 알아야 한다.

이승만의 민주주의 사상이 아니면 대한민국이 이처럼 발전할 수 없다는 것만 내세우려고 하는 그들의 자세부터 같은 국민들에게 憤痛(분통)을 터뜨리게 한다는 것을 이해하면 되는데 목에 힘주고 권위의식만 앞세우는 태도에 치를 떨게 한다는 것을 왜 이해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과거 이승만 정권과 북한 김일성 공산주의 체제로 변하고 있을 때처럼,

우리는 激化(격화)하려고 한다는 것도 가짜보수들의 右傾(우경) ()가 극열하기 때문이다.

70여 년의 세월이 지났으면 뭔가 달라져야 할 것이 건만 가짜 보수 세력들은 달라진 게 없는 것처럼 더 과격하게 변하고 싶어 하는 것을 왜 아니라고 할 것인가?

분명 문재인 대통령은 이념을 뛰어넘자고 하는 말을 전제하고 있는데,

꼬부라질 데로 꼬부라진 가슴만 내보이면서 색깔론을 앞세우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가짜 보수들의 현실!

이승만과 박정희가 왜 독재를 했는지 알면 그렇게 심하게 변하지 못할 것 같은데 莫無可奈(막무가내)로 덤벼들고 있다.

이념을 앞세워 국위가 宣揚(선양)될 수 있다고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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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세력에 따라 한반도가 일본으로 넘어가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정권만을 잡겠다고 싸우다 일본을 이용해서 권력을 잡는 게 아니라 결국 나라까지 팔아버렸던 과거를 왜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일제가 魔手(마수)의 손을 뻗고 있기는 했지만 우리가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에 완전히 당하고 말았으며 그로 인해 미국과 소련이 연방국에 가담하게 되고 결국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단시키는 방법을 취했고 김일성과 이승만의 욕심이 나은 6.25한국전쟁으로 치닫게 하여 약산은 결국 북한으로 방향을 틀었던 것 아닌가?

이승만이 빨갱이로 몰지만 않았다면 독립군의 최후가 비굴하게 끝나고 말았을까?

조상들의 권력 싸움으로 후세들까지 권력싸움에 말려들고 김원봉 같은 이는 이념의 제물이 돼 한민족 어디에도 섞이지 못하고 외톨이로 둬야 할 것인가?

이승만과 박정희는 정권을 잡기 위해 緣坐(연좌)제까지 활용하며 국민들을 괴롭혔고 그 뿌리는 지금껏 이어지며 나라를 슬프게 하는데 국민들을 아직도 깨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 아닌가!

대한민국 국민들이 완전히 깨어날 수 있는 날은 언제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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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보기

https://news.v.daum.net/v/20190606204956730?f=p

https://www.sisain.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34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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