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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4. 인천 상륙작전, 서울 수복, 공산치하의 서울
06/05/2020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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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인천상륙작전, 서울 수복, 공산치하의 서울


9월14일 경, 낙동강전선에서  인민군은 숨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전쟁초기에 미군 지상군은 패퇴하고 있었지만 미 공군의 한반도 전역에 대한 폭격은 인민군의 보급로를 철저히 차단 했다. 철도, 교량, 도로가 파괴되어 보충병, 무기, 군수물자의 수송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한편 미군은 일본과 본국에서 병력과 전쟁에 필요한 무기와 물자가 속속 도착 하고 유엔군이 합류했다. 미군은 점점 실전에 익숙해져서 전투능력이 향상되었다. 


2차대전동안에 공군과 해군이 발달하여 상륙작전이라는 새로운 작전이 실전에 응용되어 인명피해를 최소화하고 짧은 시일내에 적에게 치명타를 줄수 있었다. 노르만디 상륙작전이 좋은 예이다. 맥아더 장군은 7월 초에 Almond 장군에게 상륙작전을 계획하라고 명령 했다. 암호 명은  Blue Hearts 였다. 

한국당, 민주당의 '인천상륙작전 피해보상 추진' 강력 비판

7.10, 7.23 계획이 계속 연기되다가 9.15일에 막강한 미 해병대는 인천에 상륙했다. 인천의 큰 간만의 차이를 극복하고 상륙작전은 크게 성공했다. 전쟁 초기부터 미해군의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던 중국의 저우언라이(주을래)는 미군이 인천에 상륙할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는 김일성에게 10만대군을 동원하여 상륙을 막을 수 없으면 포기하고 후퇴하라고 충고 했다. 북쪽 산악 지대로 유인하여 한판 승부를 보려는 심사였을 것이다. 한국의 급소가 인천만이라는 것은 웬만한 군 작전가라 면 쉽게  쉽게 파악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낙동강 전선과 남쪽에  있던 인민군의 퇴로가 차단되어  동부 산악지대로 숨어 들어가서 북으로 가는 인민군이 대부분이었다.  


1950년 맥아더 전문 “서울 수복하면 군정 없이 바로 이승만에 넘기겠다 ...

미군상륙에 대한 인민군의 저항은 극히 미미했고 큰 어려움 없이 9월28일에 서울이 수복 되었다. 

9월29일 정오에 이승만 부부, 맥아더, 워커등 미군 장성이 국회의사당에 입석한 자리에서 맥아더는 방금 인민군에게서 빼앗은 대한민국정부를이승만에게 넘겨 주었다. 맥아더가 “전 유엔군을 대표하여 귀하의 정부를 회복하여 당신에게 돌려주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하는 바입니다. 대통령 각하, 이제 헌법에 정해진 당신의 임무를 수행 할 수 있게 됐습니다”라고 말하자 이승만은 “나 자신과 대한민국 국민의 당신에 대한 고마운 마음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라고 화답했다. 이승만이 한강 다리를 건너면서 국군의 작전권을 당신이 맡아 달라고 맥아더에게 부탁한지 3개월이 조금 지난 후였다. 


6.28-9.28 공산치하의 서울


253] 공산치하의 1950년 서울의 분위기/'인민재판'과 남겨진 '가족의 ...


6월28일 서울이 인민군에게 함락 되었다. 11시30분, 김일성은 서울 점령식을 거행 했다. 중앙청에 북조선기가 계양되었다. 그들은 이승만이 살고 있던 경무대에서 3일동안 축하 파티를 계속했다. 


그들은 박헌영이 말한 대로 인민군이 남한에 들어오면 남한 전역에 봉기가 일어날 것이라고 믿었다. 박헌영은 남한 주민에게 1.폭동, 2. 폭동, 3. 폭동 을 일으켜야 모두 잘사는 공산주의 국가가 될 것이라고 선전 했다. 인민군은 사흘 동안 남진 하지 않고 봉기를 기다렸다. 딘 장군이 이틀 동안 대전을 사수 한 것을 생각하면 결정적인 실수 였다.  

인민군 장교들은 시내 구경 다니면서 쇼핑을 즐겼다. 인민군은 점령 후 북조선 돈과 남한돈의 교환률을 1:8로 만들어 버렸다. 인민군 장교들의 봉급은 앉아서 3-4배로 오른 꼴이 되었다. 그들은 남한 물건을 정신 없이 사들였다.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어 있던 죄수들을 석방하고 좌익계 인사들과 같이 일 했다.  인민군은 보위대를 조직하고 그들을 앞세워 공무원, 경찰, 군인, 우익인사, 자본가 수만명을 체포했다. 


청년들을 강제로 징집하여 조선인민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전선에 보냈다. 19세에서 38세 사이의 청년들을 마구 잡아 갔다. 무려 40만이 인민군으로 전선에 투입되었다. 일부는 노력대라 하여 노동일을 시켰다. 


붉은 완장을 찬 자치대원이라는 사람들이 가가호호 방문하여 식량을 수거 해 갔다. 

모두 거두어서 나중에 똑 같이 나누어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군인과 당원에게만 식량을 배급했다. 식량을 빼앗긴 서울 시민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 했다. 시민들은 서울에서 시골로 몰래 빠져 나갔다. 서울의 인구는 1/3로 줄었다. 


사변 전에 이승만은 토지개혁을 단행 했다. 그러나 인민군은 토지를 주고 식량을 받아가는 식의 토지개혁을 강행 했다. 


9월말 그들이 서울을 빠져 나가기 직전에 군인, 경찰, 공무원 가족은 어린아이, 여자, 늙은 이 가릴것 없이 모조리 총살 되었다. 점령 초기에 시민의 반이 붉은 기를 들고 인민군을 환영 했다. 그러나 3개월 후에는 거의 대부분의 시민이 공산주의를 혐오하게 되었고 반공의식이 강화 되었다.


다음은 5. 미군 북진과 중공군 개입이 연재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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