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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2. 미군 퇴각, 딘 소장 3만원에 인민군 포로 되다.
06/03/2020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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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1950.6.25); 2. 미군 퇴각, Dean 소장 3만원에 인민군 포로 되다.


6.24일 저녁, 미군사고문단 장교들은 도쿄에서 매주 토요일 밤에 열리는 부부동반 댄스 파티를 하고 있었다. 미 정보기관이 종종 남침 가능성을 보고 했으나 상위층은 이를 무시했다. 고문관 지휘관이었던 William S. Roberts는 타임즈 와의 인터뷰에서 “남한은 미국을 제외 하고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한국군의 상황을 거짓으로 홍보 했다. 아마도 남한 주둔 미군 철수를 정당화 하기 위해서 였을 것이다. 


미 대사관 본국으로 철수


다음날 새벽 북조선이 38선 전역에 걸쳐서 남침하자 미 대사관은 당황해서 어쩔줄을 모르다가 국무부가 철수 명령을 내리자 직원과 가족들은 수원비행장에서 6.27일 오전 9시에 군용기 편으로 한국을 떠났다. 


당시에 미대사관은 반도 호텔 5층에 있었다. 1500대의 자동차, 2만 갤런의 가솔린, 만 달러 어치의 음식 그리고 4만불 어치의 술이 인민군의 전리품이 되었다. 그리고 대사관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명단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미처 피난가지 못한 사람들은 인민군에게 모두 피살 되었다. 


미국 참전결정


6.27일,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기 위해서 미국이 한국전에 참전 한다고 발표했다. 

같은 날에 한강다리가 폭파 되었다. 6.28일, 소련이 불참한 가운데 유엔 안보리에서 유엔군 파병이 결정 되었다. 맥아더 장군이 유엔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북한과 미국의 전쟁이 시작 되었다. 


미국이 세계경찰 노릇을  처음으로 시작한 것이 한국전 참전이었다. 자유 진영의 리더로서 약소국이 공산주의 국가가 되는 것을 막는 노력의 첫 시도가 한국이었다.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냉전시 초기의 열전이기도 했다. 


2차 대전이 끝난 후에 미국은 전세계 GDP의 70%를 차지 하는 초 강대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미국 국민은 미국의 국제적인 위상도 잘 몰랐고 미국의 새로운 역할에 대한 이해도 부족 했다.  많은 사람들이 태평양 건너에 있는 나라에 가서 왜 목숨을 바쳐서 싸워야 하느냐 는 의구심을 가졌다. 그러나 지구상에서 나쁜나라를 징계할 수 있는 나라는 미국 밖에 없었다. 


1950년 미군은 군복입은 민간인이었다.


지금은 용병제이지만 당시에는 징병제 였다. 일정 복무 기간이 지나면 제대하여 귀향 했다. 따라서 직업군인이 드물었다. 병사들은 민주국가 군인 이었다. 군주국가나 독재국가 군대처럼 무조건 복종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리와 자유를 잘 알고 있었다. 

2차대전에서 승리한 미국은 완전히 평화 무드였다. 국회의원이나 정부는 군대를 전시 때처럼 혹독하게 훈련시키고 군 무장을 완벽하게 하려 하지 않았다. 징병제 였기 때문에 국민여론을 거슬려서 자신의 인기하락을 초래 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전후 미국민의 생활은 크게 향상 되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놀자 판이었다. 군 무장을 소홀히 해서 군 부대 편성 무기가 부족 했다 . 군기가 지나치게 느즌 했다. 전투 훈련을 제대로 시행하지 않았다. 


그러나 트루먼의 공산주의 확산 저지와 미국이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발휘하여 의회와 국민이 참전을 지지하게 되었다.  


Task Force Smith, 오산전투 


미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는 24사단 병력을 남한에 투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전 사단 병력을 한꺼번에 수송할 배가 없었다. 우선 Charles Brad Smith 중령이 지휘하는 400명 가량의 1개 대대 병력과 작은 포병 부대를 부산에 보냈다. 7월5일, 수원과 오산을 잇는 도로 변에 잠복 했다.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 하는 것이 임무였다. 


그들은 인민군에 대한 아무런 정보가 없었다. 병력의 규모나 소련제 탱크의 위력도 몰랐다. 탱크를 파괴할 무기, 포탄과 실탄 모두 부족했다. 전쟁에서 이겨 일본을 점령한 그들은 호화판 생활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구두닦이 가 있었다. 장교들은 개인 가정부를 두었다. 미군 중위 월급이 일본 장관 월급과 같았다. 전투 훈련은 거의 하지 않았다. 그들은 건방지고 무능한 군대였다. 


장교와 병사들은 인민군이 자신들을 보면 겁이나서 도망 갈 것이라고 할 정도로 인민군을 얕잡아 보았다. 한편 부산 시민들은 그들이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 할 것이라고 믿고 대환영 했다.  


수 많은 T34 소련제 탱크가 나타나자 호비츠 포와 기관총을 쏘아 댓으나  아랑 곳 없이 저지선을 통과 하여 남쪽으로 진격했다. 탱크 뒤에는 수천명의 인민군이 나타나서 맹렬히 공격 해 왔다. 미군은 혼비백산하여 무기, 철모, 군화, 셔츠까지 버리고 도주 했다. 반이 전사 했다. 어떤 병사는 서해안으로 도주하여 쪼각배를 타고 부산으로 가기도 했다. 


딘 소장 평택-안성 라인에 진치다.


오산에서 패퇴 한 후 딘 소장이 지휘하는 24사단 병력이 모두 도착하여 평택-안성 라인에 방어선을 쳤다. 때는 7월 장마철이었다. 참호 속에 물이 차 올랐다. 장병들은 전투하러 온 것이 아니고 경찰 노릇 하러 왔다고 믿었다. 인민군은 자신들을 보기만 하면 도망갈 것이라고 믿었다. 전투는 뒷전이었다. 주말 이면 일본으로 가서 걸프랜드와 즐길 것 만 생각하고 있었다. 


수십대의 탱크를 앞세운 수천명의 인민군이 나타나자 발포 명령이 떨어 졌다. 총을 쏘지 않는 병사들이 많았다. 후퇴 명령이 떨어지자 무거운 무기를 버리고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고 줄 행랑을 쳤다. 상관이 정지 명령을 내려도 한 없이 도망 갔다. 

전투기 끝나고 한 상사가 부하에게 왜 총을 쏘지 않았느 냐고 물으니 총이 발사가 되지 않았다고 했다. 총이 먼지로 잼 됐거나 잘못 아샘블 되었기 때문 이었다. 병사들은 총기 소재도 제대로 하지 않았고 부해 후 다시 짜 맞출 줄도 몰랐다. 


비가 멎고 여름 더운 날씨가 되니 병사들은 물을 마셔야 했다. 그러나 물병 까지 버리고 도망간 병사들이 많았다. 그들은 할 수 없이 더러운 물을 먹어 야 했다. 


미군은 천안으로 후퇴 했다. 


미8군 사령관 Walton Walker 낙동강 방어선 결심

대전일보 :: 대전전투로 포로… 휴전뒤 석방 제주 4·3사태 진압 지휘하기도

천안-금강 라인이 무너지자 미군은 북한 전력을 과소평가 했음을 시인했다. 24사단 딘소장은 대전에 본부를 설치 했다. 8군사령관 워커는 낙동강 방어선을 결심하고, 7월 19일 그는 대전으로 가서 딘 소장에게 대전에서 이틀 동안 만 인민군을 진격을 막아 달라고 주문했다. 본국에서 전투 병력, 무기와 물자가 도착하는 데 필요한 시간을 벌기 위해서 였다. 


인민군은 앞에서 공격하면서 일부는 옆으로 돌아 적의 후방 퇴로를 차단 하는 작전을 잘 썼다. 한편 미군은 통신 장비가 부족 하여 전방의 전황을 사람이 직접 가지 않고는 알길이 없었다. 딘은 인민군이 자신의 퇴로를 차단 한 것도 모르고 인민 그들이 대전에 쳐들어 왔는 데도 후퇴 하지 않았다. 부대원 모두를 후퇴 시킨 후 바주카 병을 데리고 탱크를 파괴 하러 본부를 나갔다. 워커에게 약속한 이틀 동안 대전을 방어 하기 위해서 였다. 


이틀 후 빗발 치는 총알을 뚫고 지프차를 몰아 대전을 탈출 했다. 차는 총에 맞아 망가지고 그는 홀로 되어 대구 쪽으로 가려고 했으나 방향을 알 길이 없었다. 그러던 중 한국인 한모와 최 모씨를 만 났다. 

그들에게 100원 줄 테니 길 안내를 해 달라고 부탁 했다. 그러나 그들은 딘 장군을 인민군에게 넘기고 인민군으로 부터 3만원을 받았다.

6·25전쟁 발발 64주년…단돈 3만원에 딘 소장을 인민군에 팔아넘긴 ...

옷까지 벗어 던지고 말도 안통하는 외국 땅에서 헤맨지 35일 만에 인민군에게 붙 잡혀 평북 강계 포로 수용소에 있다가 1953년 휴전 후에 석방 되었다. 딘 장군의 대전 지역 작전 덕분에 워커는 낙동강 방어에 성공하여 유엔군이 반격 할 수 있었다. 딘 장군을 인민군에 팔아 넘긴 한모와 최모는 휴전 후 사형 되었다. 


다음은  3. 채병덕 장군의 최후와 낙동강 전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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