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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1. 미군정기의 미군과 남북한 힘의 균형
06/02/2020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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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6월이면 육이오를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부터 한국전쟁 시리즈를 포스팅 합니다.


한국전쟁 

한국 전쟁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머릿말


한국사람들은 한국전쟁을 육이오라고 한다. 1950년6월25일에 북조선이 남한을 침공해서 시작된 전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Korean War(한국전쟁)”로 통용된다. 한국사람들이 한 전쟁인지 한국에서 일어난 전쟁인지 분명하지 않으나 두가지 의미가 다 포함되었다 고 생각한다. 


좀더 광범위하게 역사를 돌이켜 보면 근현대에 한국사람들은 한국에서 3번의 한국전쟁을 겪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 그리고 육이오이다. 모두 대리전쟁 었다. 한국사람들은 전쟁터, 인력, 군수물자를 제공하고 실제로 서로 싸운 당사자들은 강대국들이었다. 청일전쟁은 청과 일본,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 이었고 육이오는 쏘련과 중국이 미국과 자유진영을 상대로 한 전쟁이었다. 냉전시대 초기에 보기드문 열전이기도 했다. 


한국사람들은 남한을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으로 부터 막아준 미국을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전쟁준비 상태, 미군의 당시의 상황, 미군이 어떻게 전쟁에 임했는 지는 잘 모른다. 이억만리 낯설은 타향에서 미군이 어떻게 싸웠는지 알아 보려고 한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T.R. Fehrenbach의 “This Kind of War(50th Anniversary Edition)”를 참고로 했다.


1. 미군정기의 미군


1945년8월15일 여운형은 건국준비원회를 조직하여 새나라 건설 작업을 시작했다. 패전이 확실해 지자 조선충독부은 여운형에게 통치 권력을 넘겨주고 무사히 본국으로 돌아갈 심산이었다. 총독부는 소련군이 서울에 들어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며칠 후 미국의 제안으로 38이남은 미국이 이북은 소련이 점령하게 되었다. 오끼나와에 주둔하고 있던 24사단이 서울에 들어와 총독부를 접수 했다.


목숨을 걸고 태평양 섬에서 전투를 했던 병사들은  지도상에 어디 있는 지도 모르는 한국에 와서 나라를 다스리는 행정 일을 해야 했다. 그들은 전투하는 병사들이지 사무실에서 행정일을 하는 사무관들이 아니었다. 하지는 행정능력이 있는 병력을 보내달라고 본국에 여러번 요청을 했으나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남한국민들은 조선이 일본을 이겼다고 생각했다. 미군이 남한을 점령한 것은 부당한 일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일본의 점령지역이었고 미국은 일본을 패망시킨 전승국이었다. 패전국의 영토를 점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군정은 한국사람들이 자체적으로 새 정부를 세우려는 노력을 전혀 인정하지 않았다. 상해임시정부와 건국준비위원회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자연히 미군정과 민중 간에 충돌이 잦았다. 


William P. Jones 중령은 인구 1016명의 작은 시골 마을 일리노이주 모리스빌 출신이다. 2차대전중에는 전투 공병대 본부 장교로 이태리에서 근무 하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기 직전에 전부대가 필립핀으로 이동하라는 먕령이 떨어 졌다. 대서양을 건너 파나마 캐널을 지나 태평양을 항해하여 필립핀으로 가던 중 일본이 항복했다. 


2명을 제외한 전 부대원이 제대하여 귀향했다. 하지 중장은 공병이 필요했다. 존스는 한국으로 차출되었다. 자신은 아무 공병 기술도 없는 육군이었다. 하지는 보급부대와 보병부대 병력을 존스 에게 주어 공병대를 조직하게 했다. 




존스의 임무은 부산에 미군 막사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의 부하들은 못하나 박을 불 모르는 18세 어린아이들이었다. 모두 이제 전쟁이 끝났으니 집에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도대처 열심히 근무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패전하여 점령지였던 조선에서 일본으로 돌아가려고 기다리는 일본군에게서 해결책을 찾았다. 

말하자면 적군의 포로가 된 그들은 고분고분 말을 잘들었고 일도 전문가 처럼 잘 해냈다. 그러나 그들도 얼마지나지 않아 본국으로 돌라 갔다. 


군인과 장교들 뿐만 아니라 전문직에 종사하던 사람, 에진니어, 은행원, 기업인 모두 사라졌다. 부산 이라는 지역이 정상적으로 돌아가는 데 필요한 인력이 송두채 빠져 나간 것이었다. 


존스와 그의 부하들은 한국이 어떤 나라인지 전혀 모르고 임지에 왔다. 아무도 그들에게 한국에 대한 사전 교육을 시켜주지 않았다. 존스가 직면한 한국은 경악스러운 상황이었다. 사람들은 찢어지게 가난했다. 길거리는 먼지가 가득 했고 더러웠다. 높은 소음은 하루종일 그를 괴롭혔다. 코를 질질 흘리며 길거리를 방황하는 고아들이 많이 눈에 띄였다. 한편으로는 해방이라고 날뛰는 사람들이 길거리 메웠다. 


존스가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경험해본적이 없는 악취였다. 부산시내는 생선썩는 냄새, 나무타는 냄새, 목욕하지 않은 사람냄새로 꽉차 있었다. 교외로 나가면 인분냄새가 코를 찔렀다. 


인플레이션으로 돈은 아무 가치가 없었다. 좀 유능한 한국인들은 친일파로 매도되었다. 미군정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사람들과 같이 일했던 조선사람들을 요직에 등용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은 그들을 적의 녹을 먹은  죄인이기 때문에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오히려 상을 주는 미군정을 좋아 할리가 없었다. 


미군정은 남한군대가 공격능력을 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KMAG(Korean Military Advisory Group) 은 미군사고문단을 지칭한다. 이조직은 미군 조직의 일부가 아니고 미 국무성에 소속되어 있었다. 미 정부의 방침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창설되는 한국군이 공격능력을 가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반면에 한국사람들은 남북한 모두 분단된 국가를 원치 않았다. 북의 김일성 만큼이나 남한의 이승만도 무력으로 통일을 해보고 싶어 했다. 그는 미국에게 군대다운 군대를 만들어 달라고 했으나 미국은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제 막 이차대전이라는 커다란 전쟁을 끝냈는 데 또 전쟁을 할 의욕은 없었다. 국민도 평화를 원했다. 병사들도 전쟁에는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한국군은 소총 하나로 무장한 경찰자위대였다. 포병은 105 미리 단거리 포 밖에 없었다. 탱코나 중장거리 포는 한국군 에게 주지 않았다. 당시 주한 미 대사였던 John J. Muccio는 미국은 남한이 북으로 처들어 가는 것을 철저히 경계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사석에서 한 한국군 장교에게 “너의 군대는 시청을 공격할 능력도 없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제일 비서관 해롤드 노블을 시켜서 “한국군이 북한의 침략을 막을 수 있을 뿐만아니라 이 주만에 평양을 점령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 있다”고 공표하기도 했다. 


한편 북조선은 기존의 인민위원회(건국준비윈원회를 기반을 한 조직)를 인정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빠른 속도로 건설 했다. 친일파와 지주들을 를 철저히 제거했다. 주민과 큰 마찰 없이 정국이 안정 되었다. 쏘련은 김일성 정부를 아낌없이 원조하여 일년만에 강력한 군대를 만들게 했다. 주민과 마찰이 심한 남한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남한국민의 정서, 문화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었던 미국은 남한을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한 확실한 정책이 수립되지 않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미국은 자기들의 임무가 끝났다고 판단하고 1949년6월29일 미군정을 수행했던 미군이 남한에서 철수 했다. 고문관 500명만 잔류했다. 육이오 사변 터지기 일년 4일 전이었다. 북조선과 남한의 힘의 균형의 차이는 엄청 난 것이었다. 힘의 불균형이 크면 클 수록 전쟁 발생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이다


다음은 2. 전쟁 초기 미군 패퇴; Task Force Smith와 General De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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