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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운동; 전봉준과 대원군
04/05/2020 1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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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군 전봉준과 대원군 밀약설 진실은? : 뉴스 : 동아닷컴

전주성 함락 사흘후 1894년6월3일 일본영사관 순사 와타나베는 운현궁에 있는 대원군을 찾아 갔다. 조선에 군대를 보낼 기회를 노리고 있는 일본은 이번사태가 얼마나 심각한가를 알아야 했다.대원군은 "동학당이 아니라 백성들이 지방관의 폭정에 견디지 못해 들고 일어난 것이다. 쉽사리 진정되기 어려우며 서울에서도 반드시 일어날 것이다. 이번 일에는 비범한 인물도 가담하고 있어 그 책략에 놀랄 만한 것이 많다" 라고 말했다. 비범한 인물은 

전봉준을 염두에 두고 한말이다. 


그러면 과연 대원군과 전봉준은 얼마나 가까웠을 까?


전봉준은 가난한 양반 전창혁의 아들이다. 고향은 전북 고창군 죽림리이다. 훈장 이었지만 장사도 했다. 30대 전후에 동학교도가 되었다. 양반관리들의 수탈이 극심했던 시대에 계급사회를 부정하고 인간의 평등과 존엄을 강조하는 종교에 몸담은 것은 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1890년에 운현궁에서 호시탐탐 복권의 기회를 노리고 있던 대원군을 찾아가서 문객 생활을 했다. 


운현궁은 지금 인사동 근처에 옛 모습이 거의 보존되어 있다. 섭정할 때도 그는 이곳에서 기거 했다. 대원군은 1864년 부터 1873 까지 섭정하다가 고종이 20세 되던해에 민비에게 밀려 고종이 친정을 하게 되어 권좌에서 물러 난다. 1882년 임오군란을 이용하여 재집권했으나 청군의 개입으로 민비와 고종이 권력을 되찾고 대원군은 청군의 포로가 되어 중국 천진에 가택연금되었다. 겨우 33일 집권 했다. 그후 1885년에 석방되어 운현궁으로 돌아 왔다. 청나라는 1894년 청일전쟁 때까지 조선을 10여년 직접지배했다. 


대원군은 보부상을 이용한 전국에 정보망을 가지고 있었다. 운현궁에는 매일 시전에 가서 민심을 파악하는 식객이 있었다. 섭정동안에 60년간의 세도정치의 패혜를 개혁한 덕으로 대원군의 대중적 인기는 식을 줄 모르고 계속되었다. 더구나 민비와 그 척족의 부패와 수탈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대원군을 찾을 수 밖에 없었다. 대원군의 권력에 대한 욕망은 나이가 들 수록 커지기만 했다. 


정의에 불타는 혁명가 전봉준이 부패의 원흉 민비 반대파인 대원군을 찾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더구나 대중적인 인기가 있는 대원군에게 조언를 청할 만 했다. 그는 1892년 2년여의 문객 생활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 갔다. 농사지으면서 훈장 노릇을 했다. 


동학교는 로 조직되어 있었다. 한고을의 교도를 접이라하고 접의 장을 접주라 했다. 몇개의 접이 모여 포주가 되었다. 동학교를 총괄 하는 사람을 교주라고 한다. 교주 최시형은 전봉준을 고부지방의 접주로 임명했다. 


전봉준은 농민들과 연명하여 고부군수 조병갑에게 학정에 항의하는 상소를 했으나 돌아 온것은 곤장이었다. 이듬해인 1893년 2월, 대원군을 다시 찾았다. 여기서 둘 사이에 무슨 이야기가 오고 갔는지 아무도 모른다. 그저 봉기를 의논 했을 것이라고 짐작 할 수 밖에 없다. 


고부로 내려간 전봉준은 동지를 모았다. 탐관오리 척결, 인간이 평등 함을 역설했다. 그는 전주 구미리에서 김개남, 송해옥등과 만나 봉기를 모의 했다. 이 때 대원군이 보낸 나성선이 참석 했다. 전봉준은 1차 봉기 때 민씨 척족을 축출하고 대원군을 권좌에 복귀 시킬 것을 요구 하기도 했다. 


1894년1월 전봉준의 부친 전창혁은 조병갑에게 상소를 올리다가 곤장을 맞고 사망했다. 이에 분노한 전봉준은 그 해 3월21일 농민군을 이끌고 관아로 처들어 간다. 동학운동의 시작이었다. 


동학군 2차 봉기와 대원군


관군이 동학군에게 패배하여 전주성이 함락되자 조선정부는 당황하여 청나라에게 원군을 청했다. 청나라군데가 아산만에 들어온지 하룻만에 일본군이 인천에 상륙 했다. 그동안에 전주 화약이 맺어지고 농민군이 전주에서 철수 했다. 조선이 양쪽 군대에게 철수를 요구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청일전쟁의 시작이었다. 


일본군대는 제 빨리 한양으로 진격했다. 한양을 점령하고 일본은 고종에게 조선이 청나라에게 종속된 것이 난리의 근원이라고 하면서 청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친일 내각에 의한 개혁을 요구 했다. 고종은 청나라를 믿고 일본의 요구를 거절 했다. 그러자 일본군대는 고종과 민비를 구금시키고 친일 개화파 내각을 만들고 일본 입맛에 맞는 개혁을 시작 하니 이를 갑오개혁이라고 한다. 그리고 대원군을 정권의 우두머리로 앉힌다. 민비를 싫어하고 대원군을 지지하는 국민의 뜻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물론 아무 권력 없는 허수아비지만 자택구금되어 있는 고종과 민비보다 나은 신세였다. 한양에 주둔하고 있던 원세계를 비롯한 청군은 줄행랑을 친다. 


야망에 찬 바지사장 대원군은 실권을 쥘려고 머리를 굴리기 시작한다. 아산만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에게 청나라 전함이 파괴되고 육지전에서 연전연패하여 청나라군대는 평양으로 후퇴 했다. 본국에서 만4천명에 달하는 원군을 보충받아 일본군과 결전을 할 준비를 했다. 대원군은 평양의 청군 장군에게 밀서를 보냈다. "상국은 많은 원병을 보내시어 우리의 종사와 궁전을 보호해 주시고, 일본인에게 아부하여 매국행위를 감행한 ... 무리를 일소하여 이 위기를 구제해 주시기를...." 라는 내용의 밀지를 보냈다. 


1894년 8월, 대원군은 이건영을 동학군 지휘부에 파견했다. 이건영은 전봉준에게 "왜구가 궐내를 범하고 종사에 화가 미처 명맥이 조석에 달려 있으니....너희들이 만약 한양으로 오지 않으면 화환이 기필코 당도할것"이라는 밀서를 제시 했다. 또 김개남에게는 "기병하여 한양에 올라오라, 이것이 국태공(대원군)의 진의" 라고 대원군의 뜻을 전달 했다.


10월에 동학군은 다시 전투를 개시 했다. 북쪽의 접주들은 봉기를 꺼려 했다. 자칫 종교가 말살될 것을 우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접은 봉기에 적극적이었다. 일차 봉기 때는 조선정부와 탐관오리들이 적이었으나, 이제는 외적 일본과의 싸움이었다. 아마 대원군의 선무 작업은 이 두세력의 단결을 초래 했을 것이다. 단결된 동학군 20여만명은 조선정부군 3000명과 400명의 일본군에게 무참히 패했다. 11월초 전봉준이 도망갈 무렵에는 겨우 500명이 살아 남았다. 일본군의 대포와 기관총의 위력이었다. 


대원군이 평양주둔 청 장군에게 보낸 밀지는 일본군에게 넘어 간다. 청과 내통한 증거가 발각되어 일본은 대원군을 파직했다.


대원군이 동학란을 부추겨서 농민혁명이 일어 났다고 보기는 힘들다. 그러나 전병준은 대원군의 국민적 지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의 의거가 지신이 왕이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명분이 필요 했을 것이다. 대원군은 권력 쟁취를 위해서 전봉준을 이용하려 했을 것이다.



1894년은 조선역사상 가장 혼란스러운 해였다. 동학란, 청일전쟁 그리고 갑오경장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백성들은 청군과 일본군 모두에게 인력과 물자를 공급하고 약탈을 당했다. 민씨 척족과 양반의 수탈에 다 엎친데 덥친격으로 나라가 외국끼리의 전쟁에 병참기지화 되고 전쟁터가 된것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운 역사는 갑오개혁을 무척강조하고 청일전쟁을 가볍게 다루려고 애쓴다. 물론 동학 혁명은 무척 자랑스럽게 내 세운다. 그러나 갑신정변과 갑오경장의 뒤안에는 일본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청나라의 지배에서 일본의 지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 정도라고 볼 수 있다. 

갑오경장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세 사건이 마치 아무관계없이 일어 난 것 처럼 오해하기 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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