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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시시비비를 가려주지 않는다; 이일 장군과 임진왜란
12/11/2019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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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일은 이순신 장군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죽이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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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의 첫번째 백의종군>


32세에 과거에 급제한 이순신은 한양에 있는 훈련원에서 근무 하다가 전라 좌수영 만호(지금의 해군 장교)로 근무 했다. 강직한 성격의 이순신은 요지음 말로 사바사바나 인사청탁 등 출세하기 위해서 비굴한 짓을 전혀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그의 초기 관리 생활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예를 들면 병조판서 김귀영이 자신과 첩 사이에서낳은 딸을 이순신에게 첩으로 주겠다고 제의 했으나 이를 거절 했다. 1587년 조선보만호 겸 녹도 둔전사로 부임 했다. 국경수비병에 속한 한 장수였고 두만강 하류에 있는 섬 녹둔도의 농사를 돕는 대민지원 임무를 맡은 것이다. 녹둔도는 나주 근처에 있고 지금은 러시아 쪽으로 육지와 합쳐 저서 러시아 땅이다. 


부임하던 해 가을은 풍년이었다. 음력9월1일 이순신은 경흥 부사 이경록과 함께 병력을 이끌고 벼 수확을 도우려고 대민지원을 나갔다. 미리 매복하고 있던 여진족에게 급습을 당했다. 조선군11명이 전사하고 160여명이 여진족에게 잡혀 갔다. 15마리의 말이 약탈 당했다. 국경수비대 사령관 격인 북병사는 이일이었다. 이순신은 부임 후 여러번 이일에게 여진족에 대한 경계를 강화하기 위해서 병력을 늘여 달라고 요청 했으나 이일은 이것을 들어 주지 않았다. 이일은 녹둔도 전투에서 발생한 조선군의 피해가 이순신과 이경록이 군기를 소홀히 했기 때문임으로 이들을 사형시켜야 한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억기등, 이일의 부당함을 아뢰는 신하들은 소수였으나 선조의 선처로 사형을 면하고 백의종군 하게 되었다.  


1588년 2차 녹둔도 정벌에서 이순신은 여진족 장수 우물기대를 잡는 공을 세워 복직 했다. 백의종군

을 장군이 졸병으로 근무한다고 알려져 있으나 사실은 본래의 직위만 해제될 뿐 실제 전투에서는 지휘관의 신분으로 참여 했다고 요지음 사학자들은 설명하고 있다. 근래의 보도에 따르면 옛 녹둔도에 러시아, 남한, 북한이 협조하여 이순신장군 기념사업을 추진 중이라는 반가운 소식이다. 


<상주전투>

Image result for 임진왜란 지도"


1592년 음력4월13일 대마도에서 출발한 일본 함대는 부산포로 처들어 왔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그날 상황을 "왜적의 군함이 대마도로 부터 새까맣게 몰려와 그끝이 보이지 않았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거의 20만에 가까운 병력을 실을 려면 대단한 숫자의 군함을 동원했을 것이다. 조선 수군과 육군은 속수무책이었다. 부산포, 동래, 김해, 밀양등 경상도 각고을은 별 큰 저항 없이 일본군에게 속속 함락 되었다. 하루빨리 일본군 침공을 한양 조정에 알렸어야 했으나 봉화가 작동하지 않았다. 경상좌수사 박홍이

손수 가지고 온 장계가 조정에 도착한 것은 4월17일 아침이었다. 조정대신들은 이소식을 듣고 선조를 직접 대면하고 국난의 현황과 대책을 논의 할려고 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왕은 만나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서면으로 대책을 아뢰고 아뢴대로 실행 할 수 밖에 없었다. 이일을 순변사로 삼아 중로로 내려보내 서 올라오는 일본군을 막아 보려고 했다. 중로는 충주-조령-상주를 연결하는 길이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길로 올라오고 있었다. 충주-죽령-안동으로 이어지는 길은 유극량이 올라오는 가토가요마사를 막기로 하고 추풍령으로 올라오는 구로다 나가마사는 우방어사 조경이 대적하기로 명을 내렸다. 


명을 받은 이일은 군사 300명을 데리고 내려갈 계획이었으나 거의다 집에서 살림하던 사람들이고 반이상이 유생과 아전들이었다. 사흘동안 쓸만한 군사를 모아 보았으나  고작 60명 이었다. 할 수 없이 60명을 데리고 먼저 출발 했다. 별장 유옥이 군사가 모여 지는 데로 뒤 따르기로 했다.  당시에 조선의 방어 전략은  외적이 침공하면 적을 맞아 싸을 지점에 각 고을 군사들이 모이게 하고 중앙에서 지휘관이 도착하면 작전이 시작되는 구조였다. 군집합지는 대구였다. 그러나 대구에 모인 군사들은 아무리 기다려도 이일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던 차에 왜군이 점점 사까이 오고 있다는 소식에 무척 불안 해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밤에 비가 심하게 내리고 식량이 떨어져 가자 병사들은 하나하나 뿔뿔이 헤어 지더니 모두 달아 나고 말 았다. 


이일이 문경에 도착하니 성이 텅텅비어 있었다. 창고에 있는 쌀로 군사들을 배불리 먹이고 상주로 출발 했다. 상주목사 김해는 이일을 마중나간다고 하고 도망처 버렸다. 판관 권일이 남아 있었다. 이일은 군사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지 못 했다는 이유로 그의 목을 치려 했다. 그러나 권길은 자신이 군사를 모아 오겠다고 애원하여 목숨을 건졌다. 그리고 마을에서 모아 온 사람들은 모두 농민들이었다. 그래도 수백명을 모아 명색이 군대라는 것을 만들었다.그러나 그 중에 한사람도 전투 능력이 없었다. 이 와중에 적군은 이미 선산 까지 와 있었다. 한 마을 사람이 와서 이일에게 적군이 가까이 왔다고 알려 주었다. 그러나 이일은 사람들을 불안하게 한다고 그의 목을 치려고 하자, 그는 "소인을 옥에 가두었다가 내일 아침까지 적이 오지 않거든 소인을 죽여 주십시요."라고 애원 했다. 그날밤에 적군은 이미 이십리 밖에 진을 치고 있었다. 이일은 척후병을 세우지 않아서 적군이 가까이 있는 지를 몰랐다고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지적하고 있다. 다음날 아침에 이일은 그 제보자의 목을 베어 군사들에게 보였다. 그리고 한양에서 다른 장수가 데리고 온 군사와 현지에서 모집한 병력 고작 800 여명을 성밖 강가 평지에 모여 놓고 진치는 훈련을 시행 했다.  그리고 자신은 장군기를 높이 세워 놓고 말위에 올라 훈련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의 뒤에는 상주 관리 4명이 말에서 내려 서있었다. 조선 병사들은 일본군 척후병이 여기저기서 눈에 띠었으나 이일이 목을 칠 까봐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이일이 마상에서 성쪽을 처다보니 연기가 모락 모락 나고 있었다. 이일은 군관 한 사람에게 가 보고 보고하라고 지시 했다. 군관은 말을 타고 역졸 두사람이 고삐를 잡고 가는 데 다리 밑에 숨어 있던 왜병이 조총을 쏘아 군관을 말에서 떨어 지게 하고 목을 베었다. 조선군은 겁에 질렸고 곧 이어서 일본군이 공격해 왔다. 이일이 병사들에게 활을 쏘라고 했으 나 화살은 지척에 떨어 질 뿐이었다. 시위를 당길 힘이 없었던 모양이다. 이일은 줄행랑을 첫다. 일본군의 추격을 물리 칠려고 옷을 전부 벗어 던지고 머리를 풀은 채로 도망 갓다. 그리고 신립장군이 진을 치고 있는 충주로 향했다. 


<결론>


임진왜란 당시에 조선의 군대는 근본적으로 농민에 불과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금만 내면 훈련을 면제해 주었기 때문에 전혀 전투 능력이 없는 숫자상의 군대에 불과 했다고 볼 수 있다. 이일의 행태를 보면 싸울 수 있는 병력이 없었다는 것은 이해 할 수 있으 나, 그는 결코 병법을 아는 장수도 아니었다. 

부하의 목숨을 파리 목숨 처럼 취급하고 중요한 정보를 가벼히 여기고 적의 정황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아끼는 것은 자신의 목숨이었다. 자기 말뒤에 서있던 상주 관리 4명은 모두 죽었다. 그는 전란 중에 싸우지 않고 도주하여 목숨을 부지하는 방법으로 임진왜란 후에도 출세 가도를 달리다가 부하를 함부로 다룬다는 죄목으로 소완 당하여 한양으로 오는 도중 병사 했다고 한다. 하늘은 사람들이 바라는 것 처럼 공명정대하지 않다. 다행히 요지음은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들을 국민이 선택할 수 있다. 국민 하나 하나가 역사를 똑바로 이해하여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똑 같은 오류를 저지르는 지 눈을 부릅 뜨고 살펴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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