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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공군에게 잡혀간 미군은 어떻게 살아 남았을까? 어느 육군 상사의 이야기
09/11/2019 1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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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강가의 벽동 포로 수용소: blog.naver.com 울프 독, 중공군장교가 촬령한 미군포로생활)


1951년3월17일, Charles Schlichter 상사와 함께 중공군 포로가 된 미군은 벽동근처에 있는 중공군 포로수용소 Camp #5에 들어갔다. 압록강 근처에 였다. 중공군에게 잡혀간 미군 포로는 모두 3,200명이었다. 3월에 잡혀온 이들의 반이 10월이되면서 죽었다. 미군 군의관이 환자들을 돌보게 했으나, 중공군은 이들을 치료할 약이나 기구를 주지않았다. 군의관은 환자를 눈앞에 두고 속수무책이었다. 중공군이 제공하는 음식은 평균 미국인이 건강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칼로리에 훨씬 못미치는 것이었다. 약 500 그램의 삶은 옥수수와 조를 매일 주었고, 가끔 메주콩과 중국배추가 나왔다. 이것은 1200-1600 칼로리였다. 미군들은 형편없이 말라갓다. 미네랄과 비타민이 부족한 것도 큰문제였다. 동아시아 사람들에게는 메주콩이 유일한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그러나 미군들은 콩을 어떻게 요리할지를 몰라서 설익은 콩을 먹었다.  소화가안되고 심한 설사를 했다. 미국에서는 콩을 소에 먹였다. 미군들은 그저 탄수화물만 먹고말았다. 고기가 주식이었던 미군들이 장기간 견디기 어려운 다이어트였다. 

 

(blog.naver.com 울프 독: 벽동 구용고 미군포로들)


옆으로 누어야만 잘수있을 정도로 좁은 수용소 또한 미군이 참을 수 없는 주거 환경이었다. 부상당한 상처를 치료하지 않은 체, 좁은공간에서 지내야 했다. 이가 창궐하여 이들을 괴롭혔다. 그야말로 생지옥었다. 중공군은 하루에 6시간 씩 사상교육을 시켜 이들을 공산주의자로 만들려고했다.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6시간동안 안자 있기도 힘든 일이었다. 많은 미군들은 먹지않고 스스로 삶을 포기 했다. 그러나 이중에서 굳건하게 살아 남은 사람들이 있었다. 신앙심이 강한사람과 전쟁경험이 많은 군인정신이 투철한 사람들이었다. 신앙심이 강하고 군인정신이 투철한 터키군인들이 가장 잘 견뎠다. 

(blog.naver.com 울프 독: 터키군)

 

Schlichter 상사는 2군 보병사단 의무대 서지칼 태크 였다. 그는  지금 까지 계속해서 군생활을 해왔다. 파란 눈을 가지고 있는 그는 키가 크고 깡마른 체격을 가지고 있었다. 19세에 펜실바니아 내숀날 가드가 되었다. 태평양 전쟁 때는 함대 해병대의 일원으로 Kwajalein, Eniwetok, Saipan, Titian등의 전투에 참여했다. 이차대전이 끝나고 그는 결혼했고 가구 세릴즈맨으로 일하고 있었다. 1950년 어느날 아내 엘리자벹이 신문광고에 군에서 지원자를 모집한다고 알려주었다. 아내는 그에게 군에입대할 것을 권했다. 평소에 그가 군에서 일하기를 원했고 자신도 따라다닐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950년6월 그는 메디간 제너랄 하스피탈의 서지칼 테크로 일하고있었다. 한국전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라디오를 통해 들려왔다. 불길한 예감이들었다. 한 밤중에 그는 엘리자벹에게 말했다. “ 잘 모르지만 나한테 무슨 일이생길거야, 어디가지말고 내가 떠날 때 있던 곳에서 꼭  기다려. 왜 야면 난 꼭 돌아올 테니까”. 두사람은 뜬 눈으로 밤을 세웠다. 1950.7.16일 그는 제2사단에 배속되어 한국으로  떠났다. 

 

(Schlichter 상사의 부대는 청천강근처 군우리 전투에서 중공군에게 섬멸되었다)

 

북한군 공격에 견디기 힘들게 되자, Coer 대령은 “싸워 받자 소용없다” 라고 외치며 부하들과 함께 투항했다. Schlichter 상사를 비롯하여 모두 15명이었다. 복한군은 갑자기 그들에게 기관총을 겨누었다. 그는 죽는 줄 알았다. 미국의 영광과 힘은 이억만리 타향에서, 그것도 살을에이는 듯한 찬바람이 부는 언덕에서 죽음을 직면 했을 때는 그런 것들은 아무짝에도 쓸데 없었다. 

 

그는 그의 자켓에 바이블을 간직하고 다녔다. 그의 가족이 신앙심이 강했고 그도 그렇게 성장했다. 그러나 이때까지 거의 성경책을 열어보지 않았다. 그는 자켓에서 성경책을 꺼냈다. 그러나 책이 땅에 떨어지고 23th Psalm 이열렸다. 그는 구태여 읽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면 어렸을 때 부터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ven though I walk through the valley of the shadow of death,[c]
    I will fear no evil,
for you are with me;
    your rod and your staff,

    they comfort me. 


갑자기 중공군장교가 나타나더니 북한군에게 쏘지말라고 외쳤다. 그리고 중공군은 포로들을 모아 북쪽으로 향했다.  그들은 비틀거리며 아무말없이 추운날씨에 손발이 얼어 붙으면서 북쪽으로 걸어갔다. Charles Schlichter는 갑자기 더이상 내일을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그리고 그는 이들중에 살아서 고국을 다시볼 단 한명의 군인이 었다. 


(미군은 1950년 겨울에 청천강과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1951년 1월에 서울을 내주고 수원-원주-삼척 라인으로 후퇴했다. 새로 부임한 미8군사령관 리지웨이 장군의 지휘로 3월에 서울을 다시 수복하고 북진하여 7월에는 38선 근처의 종래 남한의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1951년7월 이후에는 북한군과 중공군, 남한군과 미군 사이에 전면전은 사실상 끝났다. 휴전협상이 진행되었고 서로 고지점령을 목표로 한 국지전만 계속되었으나 양쪽에 많은 사상자는 끊임없이 발생했다. 미국내에서는 미국에 아무런 이득이없는 전쟁에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되고 막대한 예산을 허비하는 전쟁을 빨리 끝내라는 여론이 비등했다. )


1952년8월, Charles Schlichter 상사는웨완(Wewan)에 있는 포로수용소 캠프 #4에서 환자들을 돌보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는 터키, 영국, 프랑스, 일본계 미국인, 쁘에르토리칸 군인들을 치료해 주었다. 그는 전쟁이 어떻게 진행되는 지, 미국내 사정이 어떤지 전혀 몰랐다. 그중에서 그는 터키군들과 친하게 지냈다. 특히 통역을 맡았던 벨리 하산과 힐미 안드라날리와 아주 친하게 지냈다.  중공군 의사와는 영어로 이야기 할 수 있었고 그와도 친하게 지냈다. 


특히 터키군의 강철같은 군기와 중공군 앞에서 굽힐줄 모르는 자존감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이들과 수십년 동안 서신교환을 했다. 그는 터키와 영국 정부로 부터 표창장을 받았다. 날이 바뀔 때마다 터키 병사들은 그를 만나면 Nassa-san Akadash (안녕하세요. 내 친구야)라고 무거운 어조로 인사했다. 포로생활이 도대처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좋은 소식은 없었지만 지내기는 많이 좋아 졌다. 점점 중공군은 미군포로를 포동포동하게 만들고 있었다. 대부분의 포로들이 정상적인 건강한 모습으로 변했다. 포로들은 무슨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그리고 그 이유가 희망적인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한편 캘리포니아에서는 한 장교가 Schlichter 상사의 아내에게 GI insurance benefit과 사망에 대한 보상을 주겠다고 연락했다. Schlichter 상사는 전쟁중 행방불명(MIA)된 병사 명단에 오른지가 벌써 2년이 되었기 때문에 정부는 보상금을 가족에게 지불할려고 했던 것이다. Elizabeth Schlichter는 울면서 거절했다. 그는 그 장교에게 자기남편이 떠날 때 반드시 돌아 올 테니 우리가 헤어진 곳에서 어디 가지 말고 꼭 기다리라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아무리 힘들어도 그말만 굳게 믿고 기다렸다. 상사를 아는 모든 사람이 다 그가 죽엇다고 생각했지만  그는 홀로 그가 돌아 올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Image result for 판문점 포로교환


1953년4월, 전혀 생각지도 않았는 데 갑자기 소 포로교환(Little Switch)이 발표되었고 Schlichter 상사는 여기에 포함되었다. 원래 환자와 부상병만 우선 서로 교환하자는 취지의 프로그램이었는 데 중공군은 오히려 건겅상태가 좋은 포로들을 석방했다. 자기들이 포로들에게 잘해 주었다고 선전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은 우선 남쪽의 집합소로 이동되었다.  각지의 포로 수용소에서 유엔군 포로들이 모여 들었다. 1953년9월6일 아침 그는 트럭에 실려 판문점에 도착했다. 덩치큰 특무상사가 트럭 옆에 오더니, "내가 네 성을 부르면 네 이름으로 대답해라"라고 외 쳤다.  "Schlichter!" 라고 호명하자, "Charles"라고 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상사는 "상사, 돌아와서 반갑소!" 라고 굵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야 이친구야, 넌 아마 내가 얼마나 좋은 지 모를 거야"라고 Schlichter 상사는 대답했다. 160명의 마지막 포로들은 하나 하나 판문점을 통과 했다. 적군에 의해서 그들의 등에는 "전쟁범" 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 전쟁범들은 쥬스, 밀크와 아이스크림이 준비 돼 있는 테이블에 가기전에 하나 하나 무사히 돌아 오게 된 것을 신에게 감사 했다. 그 중에는 무릅을 꿇고 감사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감사하는 마음은 다름이 없었다. 극동군 사령관 Mark Clark장군도 그들을 환영 했다. 이렇게 해서 미군 상사 Charles B. Schlichter는 집에 돌아 왔다. 그가 그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 하는데는 무려 천십일이 걸린 것이다. 


1952년9월23일, Schlichter가 탄배는 쌘 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이 때 쯤에는 한국전쟁이 미국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이미 사라지고 있었다. 밖은 쌀쌀했고 가랑비가 내리는 데 태평양 안개는 짓었다. 부두에는 포로들이 돌아 온다고 사람들이 잔뜩 모여서 앞이 잘 안 보였다. 갑자기 선장의 굵직한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서 들렸다. "앞을 보세요. 아마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그리고 안개가 것치면서 골든게이트 브리지가 나타 났다. 부두에서는 공군 군악대가 "God Bless America"연주하고 있었다. 공산주의 캠프에서 천일 밤낮을 보낸 그들은 결코 이런 것들이 메란콜리 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물 고인 자신의 눈으로 보이는 모든 사람들이 울고 있었다. 휘파람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리고 벤드가 요란하게 올려 퍼지는 가운데 촬스는 부두가에 서있는 엘리자베즈를 발견 했다. 







 

 

- 5th anniversary edition, This Kind of War; The Classic War History by T.R. Fehrenbach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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