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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김일성은 어떻게해서 스탈린으로 부터 남한침공을 허락받을 수 있었을까?
06/18/2019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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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은 대리전쟁이었다

Korean War Montage 2.png


우리민족은 대륙세력과 태평양세력 사이에 끼어있는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이 두세력의 전쟁터가 되어왔다. 고구려 시대를 제외하고는 외침을 자체적인 힘으로 방어할 정도로 한번도 강한 나라가 되어 본적이 없다. 임진왜란은 명과 일본, 청일전쟁은 청과 일본, 러일전쟁은 러시아와 일본, 한국전쟁은 쏘련, 중국과 미국의 싸움이었다. 대륙세력은 옛부터 중국과 러시아였고 태평양세력은  일본이 패망한 후에 일어난 한국전쟁에서는 일본이 미국으로 바뀌었다. 


쏘련이 주도하여 만들어진 국가와  군대의 수반인 김일성이 독자적으로 남한을 침공할 수는 없었다. 우리민족은 일본이 패망한 후에 한반도에 두나라가 만들어 질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미,쏘에 의해서 각각 남한과

북한이 건국하고 이승만과 김일성이 남북의 수반이 되었다. 국민정서가 통일된 한나라를 당연하게 여기는 판에 이 두사람 모두가 통일전쟁을 마다할리가 없었다.  그러나 미국은 이승만이 그렇게 원했던 군사원조를 원에 차게 해주지 않았다. 치안유지 용인 경찰경비대 수준의 육군 10만정도로 만들어 놓고 1949년6월에 미군은 500명의 고문관만 남기고 철수 했다. 


1931년 만주사변으로 시작된 일본과 중국의 싸움은 1945년9월9일 일본이 중국에게 항복하여 중국의 승리로 끝났다. 그러나 일본과 싸우는 동안 갈등은 계속되었으나 한 몸이었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중국천하를 놓고 싸우게 된다. 이를 국공내전이라하고 모택통이 승리하여 1949년10월1일 그는 중국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국민당의 장개석은 대만으로 쫒겨 간다. 청말의 내란과 외침, 청이 망한 후에 나타난 군벌의 활거, 군벌을 토벌한 국민당군의 횡포, 일본의 침략 전쟁 그리고 국공내전에 시달린 중국민은 배곱은 배를 움켜쥐고 위대한 지도자 모택통만 처다보고 있었다.  가는 곳 마다 소작인들에게 토지분배를 약속했고, 공산당군인들은 농민에게 절대 폐를 끼치지 않았고 친절하게 대했다. 따라서 모택통에 대한 농민들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듯 했고 그만큼 그에 대한 기대도 컸다. 

1943년 테헤란 회담에 참여한 스탈린그러나 모택통은 전쟁에는 1963년 당시의 마오쩌둥 

고수였은나 경제에는 까막눈이었다. 일찍이 국공내전중에 미국과 접촉하여 미국으로 부터 경제제도를 도입할려고 했으나 미국이 장개석을 택하여 이제는 쏘련에게 도움을 청할 수밖에 없었다. UCLA

정치역사학 교수 리차드 바움은 미국에서 알아주는 중국 통이다. 1949년12월 그의 중국현대사 강의록에서 모택통의 쏘련방문을 재미있게 묘사하고 있다. 모택통과 중국공산당은 중국의 군사력과 과학기술이 낙후되어 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경제를 살리기위해서는 모든 분야에서 선진기술을 받아들여야 했다. 마오는 스탈린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하고 모스크바로 갔다. 중국 공산당은 전적으로 코민테른이 도와주어서 중국인민공화국을 만들 수 있었다. 코민테른은 레닌이 세계를 공산화하기위해서 만든 국제공산주의 조직이다. 쏘련은 항상 형노릇을 할려고 했고 중국은 이를 아우처럼 따랐다. 그러나 중국이 안정된 후에는 이러한 쏘련의 우월주의 때문에 중국이 쏘련에게 반발하여 서로 사이가 좋지않았다. 모택통은 모스크바 호텔에서 묶으면서 스탈린이 만나자고 하기를 학수고대 했다. 그러나 10일이 지나도 만나주지 않았다. 호텔에는 도청장치가 되어 있었다. 참지못한 마오는 "먹고 싸기만 할려고 여기 온 것은 아니야!"(I am here to do more than eat and shit)라고 투덜 거렸다. 물론 쏘련측 정보기관에 이말이 전해져서 이 일화가 지금까지 전해 지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모와 만난 스탈린은 모든 분야의 과학기술 원조와 대폭적인 군사원조를 약속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그 대가로 만약 미군이 38선을 넘어서 북한을 침략하면 중국이 파병할 것을 요구했다. 1950년 4월, 스탈린은 남침 허락을 받으러 온 김일성에게 중국이 파병할 것을 약속 하면 침략하라고 지시했다. 


1950년5월 김일성은 모택통을 만나서 남침을 할터이니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모택통은 북한을 홀대할 입장이 아니었다. 국공내전동안 김일성은 모택통을 성심성의껏 도왔다. 김책이 무려 3만의 군사를 동원하여 국민당군과 싸웠고 일제강점기에 만주에서 공산군과 같이 일본을 상대로 싸우던 조선의용군, 동북항일연군등이 모택통군에 잔류하여 국민당군과 싸웠다. 그리고 일본군에게서 노획한 소총등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원조해 주었다. 모택통은 물자와 무기가 부족한 상황임에도 거의 10만에 달하는 조선군대에게 쓰던무기를 소지한 체로 북한으로 돌려 보내는 조치를 한다. 김일성은 천군만마를 얻은 셈이다. 이들은 남침북한군의 주력부대가 된다. 


1949년8월29일 쏘련은 원폭실험에 성공한다. 1945년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끼 원폭투하이후 미국은 지구상에 유일한 핵 보유국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쏘련도 원폭을 가지게 되어 두나라가 서로 공격할 수 없는 세력구도가 

짜여진 것이다. 냉전의 시작이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할 수 있었던 중요한 조건중에 하나였다. 


스탈린은 미국이 국민당을 적극적으로 돕지 않고 모택통이 중국을 점령하게 하는 것을 보고 중국보다 더 전략적 가치가 없는 한반도를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더구나 쏘련 정보기관은 미국정부로 부터 모스크바 주제 미국대사관에 오는 암호 해독에 성공 했다. 스탈린은 이 암호 해독을 통해서, 만약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면 미국이 핵무기를 써가며 이지역을 방어 할려고 할 정도로 이지역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판단 했다. 


사실상 미국은 북한이 남한 보다 훨씬 우월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으면서 수수방관 했다. 전쟁발발 일년전에 미군을 전면 철수 했다. 북진통일을 원하는 이승만은 미국에게 군사원조를 입이 닳도록 부탁했으나 겨우 국방경비대 수준으로 남한군대를 민들어 주었다. 미국군부는 만약 쏘련이 3차세계대전을 일으키면 남한을 포기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쏘련은 한반도와 육로로 연결되어 있어서 육군을 동원하기가 용이한 반면에 미군은 한반도 남쪽이 바다이기 때문에 병력을 배로 수송해야 되고 어짜피 해군과 공군으로 공격해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쏘련과 전쟁이 벌어지면 남한과 대만을 포기하고 일본과 얄류산열도를 잇는 도서 방어선을 구축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만약 미군이 개입하지 않으면 군사력을 비교할때 김일성이 거의 100%의 승산을 가진 전쟁이었다. 의 불균형은 전쟁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참고: 위키피디아; Korean War, 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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