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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 요한과 정연관 상병이야기, 미국은 어떻게 광주 항쟁과 6월항쟁에 영향을 미쳤나?
06/11/2019 1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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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S Special;6/09/2019)


강원도 정선 봉화치 마을 산골에서 농사지으며 살던 마음씨 좋은 아저씨는 정연관 상병의 억울한 죽음의 비밀을 파헤친 장본인이었다. 정상병은 대한민국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군 상관의 명령을 어기고 김대중 후보에게 투표 했다는 이유로 구타 당하여 사망 했다. 1972년10월 유신 헌법은 허수아비 통표주체 대의원에 의한 간접선거로 되어 있었는 데, 1987년6월 항쟁으로 직접선거로 헌법이 개정되고 그해 12월에 처음 실시된 대통령 선거 였다. 전두환의 친구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법만 바뀌었지 군사독재의 연장이었다. 노태우 당선을 무효화 시킬 수 있었던 커다란 비밀이었다. 요한은 이 사건의 무게를 아는 듯 모르는 듯 정의의 불사조 처럼 덤벼 들었다. 


1987년6월10일 부터 6월29일 까지의 시위사태로 인해서 5년제 직접선거로 헌법이 바뀐다. 이를 6월항쟁이라고 한다. 이 헌법으로 지금 까지 대통령이 선출 되고 있다. 따라서 6월항쟁은 남한민주주의의 시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두환 독재-6월항쟁-민주화로 진행되는 과정에 미국이 깊숙히 관련되어 있었다. 남한 국민의 의지대로 만 이루진 것은 결코 아니었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탄핵되자 부통령이었던 제랄드 포드가 승계했다. 1976년에 공화당 후보로 민주당 후보인 지미 카터와 대결 했다. 사기꾼에 가까울 정도로 간교하고 조폭 보스처럼 강압적이었던 닉슨에게 학을 띤 미국민은 독실 한 기독교 신자이고,  순진 할 정도로 정직한 것 처럼 보이는 지미 카터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1977년 1월 부터 그는 미국 대통령 직을 수행 했다. 1980년 선거에서 재선에 실패하여 로날드 레이건에게 대통령 직을 내준다. 카터가 임기 일년여를 남긴 1979년11월4일 극우 이란 학생들이 테헤란에 있는 미대사관 직원 52명과 미국시민들을 인질로 삼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인질극은 무려  444일 이나 계속되었다. 카터는 특공대를 보내 인질을 구할려고 시도 했으나 실패 했다. 1981년 1월20일 레이건이 막 취임한 후에야 풀려 났다. 


반전 데모에 시달리던 닉슨은 키신저를 앞세워 월남전 종전을 위한 전략에 몰두하고 있었다. 베트콩을 원조하고 있던 중국을 떼어 놓기 위해서 닉슨과 키신저는 중국을 방문하여 마오와 주을레를 만나고 중국과 외교, 통상을 할 것을 약속 한다. 그 댓가로 중국은 베트콩에 대한 원조를 중단 했다. 그 후로는 쏘련이 베트콩 지원을 담당 했다. 남한이 북한과 다름없는 적이라고 생각했던 중국이 남한의 우방이라고 믿고 있던 미국과 가까와 지자 남한정부는 당황 했다. 더구나 닉슨은 국내 반전여론을 잠재우기 위해서 아시아에 있는 모든 미군을 감축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남한 주한미군 1개사단을 감축하겠다고 남한 정부에 통보했다. 닉슨은 한국에 알리지도 않고 월남에 있는 미군을 철수 시키기 시작 했다. 1969년에 미군 47만이 월남에 있었고 한국군은 약5만이었다. 미군의 약9%에 해당하는 병력이었다. 1971년에는 미군15만, 한국군4만5천, 약21%였다. 1972년에는 미군보다 더 많은 약60%에 해당하는 한국군이 월남에서 싸우고 있었다. 박정희 정부는 한국군을 되도록이면 오랬동안 월남에 주둔시키려고 했다. 경제적인 이유였다. 한국군은 미군 지원이 없는 전투를 해야 했고 정보에 어두어서 사상자가 늘어 났다. 자연히 사기가 떨어졌고, 전투를 회피했다. 미국정부의 불만 또한 커졌다. 이와 같이 닉슨과 박정희는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불안해진 박정희는 자주국방을 내세우고 방위산업 육성에 나섰다. 정국을 강압으로 안정시키기위해서 유신을 단행 했다. 원폭 제조를 시작했다. 유신을 격렬히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 나고 부마사태로 확대되고 있었다. 결국 박정희는 미국이 용납할 수 없는 지도자가 되었다. 그러는 동안 닉슨은 탄핵되고 포드가 2년 집권한 후에 인권을 무엇 보다도 중요시 할 것 처럼 보이는 카터가 대통령이 되었다. 미중앙정보부 요원으로 추정되는 주한 미대사관 직원과 만나서 시국이야기를 하곤 했던 한국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총탄에 맞아 박정희가 암살되었다.이란 호스테지 사건이 일어나기 약 8일 전인 1979년10월26일이었다. 한국민은 1961년 부터 시작된 군사독재를 종식 시키고 민주주의를 실현할 희망에 벅차 있었다. 그러나 미국정부로 써는 이란에서 미국의 장악력을 상실할 위기에 처한 가운데 남한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를 이란과 같이 반미 세력이 집권할 것을 우려 한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희망과는 달리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세력이 등장 했다. 1979.12.12일 군사정변을 일으켰으나 

정권을 왼전히 장악 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헌법으로 민주주의정권을 원하는 데모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전두환과 신군부는 광주에서 발생한 시위를 과잉진압하여 시민들을 분노하게 한후 이들이 무기를들고 반격하자, 광주를 내란 발생지역으로 규정하고 공수부대, 헬리콥터등을 동원하여 무차별 살상을 감행했다. 이것이 5.18 광주 항쟁이다. 군 공격에 저항하던 시민군은 미국 대사와 면답을 요청하여 미국의 중재를 원했으나 묵묵 무답이었다. 결국 신군부가 주장하던 공산주의자들의 반란은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1979년5월22일, 워싱톤에서는 광주사태에 대해서 미국이 어떻게 해야 될까를 상의하기 위해서 대한 정책위원회가 열렸다. 위원회 맴버로는 국무성 장관 Edmond Muskie, President Carter's security advisor Zbigniew Brzezinski, the director of CIA Admiral Stansfield Turner, the secretary of defense Harold Brown, Christopher Halbrooke and Gregg 였다. Brzezinski 는 회의의 결론을 단기적으로는 (신군부)를 지지하고 장기적으로는 정치적인 진화(evolution)를 하도록 압력을 넣는다 라고 요약 했다. "


광주항쟁당시에 가장 유력한 야당지도자였던 김대중은 남북한 공화제를 주장했다고 해서 보안법위반으로 체포되어 이미 감옥에 있었다. 그러나 그는 광주에서 반란이 일어나게 음모 했다는 죄목으로 구속되고 사형이 선고되었다. 레이간 대통령의 첫번째 국가안보 담당 보좌관이었던 리차드 알랜은 자기가 김대중의 생명을 구해주었다고 주장했다. 1981년2월 전두환은 레이간 대통령의 초청으로 백악관을 방문 했다. 말하자면 태자 책봉이 된 것이다. 그는 외국 지도자중 처음으로 레이건 행정부 백악관을 방문하는영광을 차지하고 그대신 김대중을 사면 했다. 김대중은 그 다음해에 미국으로 망명했다. 


전두환정부 말기인 1987년 국내에서 반독재 분위기가 무르 익거가고 있기도 했지만, 1980년에 정했던 장기적인 목표인 민주화를 위해서 전두환 정권에게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1987년1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 한달 후인

1987년2월 Assistant Secretary Gaston Sigur는 영구 적으로 민간 정부에게 이양 할 것을 정식으로 전두환 군사 정권에게 요구 했다. 그리고 만약 이에 저항 하면 미국은 한국을 지지 하지 않을 것이라고 압력을 넣었다. 그리고 야당을 비롯한 민주 세력과 대화를 할 것을 요구 했다. 간접선거에서 직접선거로 바꾸는 것을 골자로 하는 헌법 개정을 여러 가지 공적인 통로 를 통 해서 종용 했다. 6월항쟁이 발생하자,  전 두환이 데모 대를 진압 할 목적으로 계엄령을 선포 할 려고 했다.  미 국무성은 이를 강력히 반대 하는 성명을 발표 했다. 전두환은 계엄령에 대해서 여러 군 장성들과 상의 했으나 대 다수의 장성 들이 마치 미국이 이를 반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것 처럼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손발이 묶인 전두환은 국민들이 원하는 헌법개정을 허락 할 수 밖에 없었다. 


약 32년전에 일어 났던 6월항쟁은 오늘날의 대한민국 헌법을 탄생시킨 민주화 운동이었다. 이 헌법으로 7명의 대통령을 선출했고 한명의 대통령을 탄핵 시켰다. 아무리 정치가 뒤졌다고 하지만 이 헌법을 지킴으로 써 아시아 제일의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이 헌법이 만들어 지기 전까지 박종철, 이한렬 같은 많은 희생자들이 있었다. 이 헌법으로 보호를 받는 시민들은 이들의 공을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요한은 이 헌법으로 처음 치루어 진 대통령선거에서 억울하게 죽은 정연관 상병이 관련된 부정을 발견하고 선거부정을 밝혀서 정상병의 억울 함을 풀어 줄려고 노력 했다. 아무리 좋은 헌법을 만들어 놓아도 지키지 않으면 아무쓸모가 없다. 시민은 정치인들이 법을 지키는지 항상 눈을 부릅뜨고 실펴야 한다. 자기 운명과 목숨을 개의치 않고 약자를 도우려고 하는 요한의 행적은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한 사람이라고 느껴진다. 제2부가 16일에 방영되니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Reference: Blowback, Chalmers Johnson

참고: 한계레; 박태균, 미군과 함께 철수 했다면 전사자 줄었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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