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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 그는 왜 암살 당했을까? 해방후 암살사건마다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그의 정체는?
05/22/2019 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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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6월26일 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는 경교장에서 자신의 당이었던 한독당원 안두희의 총탄에 맞아 

사망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무기수로 복역하다가 15년으로 감형되었다. 일년후에 6.25가 발발하자 이승만은  그를 석방하여 군에 복귀시킨다. 겨우 3년만에 소위에서 소령으로 진급하고 전후에 예편하여 군납업자가 된다.

음식을 군에 납품한 그는 납세급액 5위가 될정도로 부를 누렸다. 5.16후에 정부는 그를 냉대 했고, 1961년에 진상조사위원회가 그를 고발했으나 공소시효 만료로 유야무야 되었다. 1996년에 박기서가 그를 추적한 끝에 정의봉이라고 불리워지는 몽둥이로 가격하여 사망했다. 안두희의 배후로는 장택상, 김창룡, 이승만, 백의사와 미국이 거론되었다. 


2001년에 방선주교수와 정병준박사는 CIC 장교 George E. Cilley 소령이 상부에 보낸 보고서에서 안두희가 CIC

요원이고 백의사 단원이었다는 사실을 알아내어 발표했다. 염동진이 보스로 되어 있는 백의사는 우익테러 단체로 

김일성 암살시도를 비롯하여 해방후 많은 중요정객 암살사건에 관련 돼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고서는 미육군 방첩대(CIC)가 어떻게 백의사와 연계하여 김구 암살에 관여 했는 가는 밝히지 않고 있다. 그러나 당시에 미군정과 김구의 관계를 추적해 보면 미국이 김구를 제거할만한 정황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보고서는 신익희가 백의사를 조직했다고 하고 있고 신익희는 김구를 추종했다. 말하자면 김구와 신익희는 염동진의 보이지않는 보스였다고 할수 있다.  CIC가 염동진을 설득하기 힘들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상, alt.politics.korea, Young Kim; Kim Gu's Assassin, Ahn Doo Whi, was an American Agent). 


송진우와 김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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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우는 일본 와세다대학과 명치대학에서 공부한 우파 동립운동가였다. 김성수와 친분이 두터웠고 손기정이 배를린 오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할 때 동아일보사장이었다. 일장기를 지운 손기정 사진을 동아일보에 실어서 사장직을 사임해야 했다. 1945년8월10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것을 알라차린 조선총독부가 수권을 부탁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는 임시정부가 통치권을 인수해야 한다고 거절했다. 여운형이 수권을 수락하고 같이 일할 것을 송진우에게 종용했으나 같은 이유로 거절 했다. 해방후 그는 한국민주당(한민당)을 창당 했다. 군정에 협력적이었다. 


한편 김구는 중경임시정부의 주석이었다. 상해에서 시작한 임시정부는 윤봉길의사 의거이후 중국국민당의 후원으로 명맥이 유지되었다. 중국은 일본과 전쟁중이었다. 국민당이 일본군에게 퇴각하는 데 따라서 임정은 옮겨야 했고 일본이 항복할 무렵에는 국민당 정부와 같이 중경에 있었다.  태평양전쟁 말기에 광복군과 미국 CIA의 전신인 OSS와 협력하여 한반도에 들어가 일본군을 퇴출시키는 작전을 준비중 원자폭탄 투하로 일본이 예상 밖으로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광복군에 의한 일본군 소개는 이루어 지지 않았다. 임정은 조선총독부로 부터 통치권을 직접 인수하기를 바랐으나 미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미군정이 인수했다. 승전국인 미국이 패전국일본의 영토인 한국을 점령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으 나 한국국민과 임정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미국은 임정이 하나의 합법적인 정부로써 귀국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장개석은 중경에서 떠나는 김구에게 무려 20만딸러의 정치자금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김구가 이돈을 서울에서 받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구는 경교장에 임시정부를 차렸다. 서울의 자칭 임시정부는 내무부 산하에 조선총독부고등문관시험에 합격하고 총독부고우관료를 지낸 인물들을 동원하여 행정연구위원회를 설치 했다. 정권인수작업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기들이 바라는 권력은 미군정 손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군정이 김구를 좋게 볼리가 없었다. 국제정세에 밝은 송진우는 미군정에 비교적 협조적이었다. 


신탁통치반대운동과 송진우 암살


1945년10월23일 매일신보에 한반도 신탁통치가 처음 보도 되기는 했으나, 이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된것은

12월 말경이었다. 12월27일 모스크바 3상 즉 미국, 영국, 쏘련의 외상들이 종전후 여러문제를 토의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신탁통치가 결정되었다. 한반도에 민주주의적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5년동안의 신탁통치를 하기로 합의했다. 신탁통치가 보도되자 한반도 정계는 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져서 벌집을 건들어 놓은 것처럼 혼란에 빠졌다. 북한과 남한의 좌익계열은 반탁을 주장했으나 곧 찬탁으로 돌아 선다. 쏘련은 북한 전역을 찬탁으로 하고 남한의 공산세력을 찬탁으로 묶으면 한반도 전역을 공산주의국가로 만들 수 있다고 북한과 남한의 죄익 정객들을 설득 했기 때문이었다. 남북한의 우익 민족주의 계열과 같이 반탁을 해서 그들이 하나로 뭉치는 것을 우려했다고 볼수 있다. 12월27일, 일부 소수 좌익계열, 우익, 중도파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이 경교장에 모였다. 이모임에서 김구는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회를 조직하고 임시정부 국무위원회가 이를 관장할 것을 제안했다. 그리고 "탁치 순응자는 반역자로 처단한다" 라고 선언 했다. 이에 한술 더 떠서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한인 경찰관리들에게 파업을 할 것을 명령했다. 이들은 실제로 파업을 했다. 하지는 대노했고 일종의 쿠테타라고 생각하여 김구를 중국으로 추방할려고 했으나, 그를 소환하여 파업을 중단 할 것을 요구하는 데 그쳤다. 김구가 그들에게 라디오 방송으로 일에 복귀할 것을 종용해서 파업은 종료되었다. 


12월29일, 하지는 송진우를 불러 격렬한 반탁운동을 자제할 것을 부탁했다. 그날 저녁 그는 경교장 회의에 참석했다. 회의장 분위기는 임정이 반탁여론을 몰아 미군정으로 부터 정권을 탈취하자는 쪽으로 흥분되어 있었다. 송진우는 미국의 힘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철없는 행동을 저지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이 발언 했다. 


"여러분의 그런 생각이 모두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란 걸 나도 알고 있지만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로서 우리가 경박해서는 안되겠지요. 여기 누구라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의정서의 원본을 제대로 읽어본 분이 있습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 내용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의 정당 · 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 정확하다면 길어야 5년이면 통일된 우리의 독립정부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현재 이렇게 분할 통치되고 있는 상황이고 강대국간에 전후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들의 합의 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신탁통치가 길어야 5년이라고 하니 3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렇게 거국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물론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반대 방법은 다시 한 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위키피디아에서)


물론 격렬한 반발이 일어났다. 그날저녁 귀가하여 원서동 자택에서 자고 있는 데, 다음날새벽에 자택을 침입한 한현우를 비롯한6명의 총탄에 맞아 사망 했다. 하지는 김구가 암살 배후라고 했다. 역사학자 부루스 커밍스나 리차드 로빈슨도 김구를 암살배후로 지목했다. 송진우의 친미적인 태도가 임정 민족주의 극우파의 제거 대상이 된 것이라고 볼수 있다. 장택상, 조병옥은 사석에서 김구가 암살자를 고용하여 송진우를 죽였다는 발언을 간혹 했다고 한다. 


여운형 암살(1947.7.19)과 김구


여운형은 "여운형 암살의 배후는 누구인가?; 박헌영? 이승만? 김구?" 11/15/2018 본 브로그 포스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조선총독부로 부터 수권작업을 하고 있었던 여운형은 김구와 협조할려고 했으나, 김구는 임정만이 유일한 수권 정부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여운형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백의사 소속 우파 테러리스트 김영철이 범인 한지근에게 권총을 주었고 여운형의 외조카 박찬기는 김구를 그 배후로 지목 했다. 백의사는 김구-신익희-염동진으로 명령체계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장덕수 피살 사건과 김구


장덕수는 일본, 미국, 영국에서 공부한 당시에 가장 국제정세에 밝은 독립운동가였고 해방후에 주권국가를 세우기위해서 노력한 정치인중에 한 사람이었다. 여운형과 함께 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 수립에 적극참여했다. 송진우가 암살된 후 한민당을 다시 추스려서당수가 된다. 미국 유학시절에 이승만을 도왔다. 


그는 외세에 대해서 부정적인 김구와 달리 미국과 쏘련과 같은 강대국을 우리의 힘으로 밀어내기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따라서 미쏘공동위원회 적극참여를 주장했다. 임시정부수립과 신탁을 토의하자는 미쏘 송동위원회를 극렬하게 반대하는 김구와 정면대립했다. 서로 고성이 오고 갈정도로 감정 대립이 심했다.  더구나 김구와 임정파가 이끄는 한독당은 장덕수의 한민당과의 합당을 고집했다. 그러나 장덕수는 한민당을 임정파에 헌납하는 것이라고 절대 반대했다. 1947년10월18일 미쏘공동위원회가 완전히 결렬되자 장덕수는 남한단독정부수립을 지지했다. 미군정과 이승만또한 이를 원했고 그는 이에 동조 했다. 한편김구는 단독정부수립을 극력 반대했다. 


1947년12월2일, 미군정청경찰관인 박광옥과 교사 배희범등 6명의 총탄을 맏고 사망했다. 모두 김구의 한독당 당원이었다. 당시 수사를 맏았던 장택상은 수사가 진행될 수록 김구가 의심스러워 경교장을 압수 수색할려고 했다. 그리고 김구의 소환까지도 고려하고 있었다. 이를 알아차린 하지 군정사령관은 이를  저지했다고 한다. 김구는그동안 형님으로 깍듯이 모시던 이승만에게 구속되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 했으나 거절 당했다. 그리고 지도자를 잃는 장덕수의 한민당을 자기의 정치적 기반으로 이용했다. 김구는 검찰에 연행되어 취조를 당했다. 이승만은 장덕수 암살의 배후로 김구를 지목했다. 이후 김구와 이승만은 서로 적이 되었다. 


여순사건과 김구


장덕수가 피살된 이후 김구와 이승만은 누가 새나라의 정권을 차지하느냐를 놓고 대결하는 양상을 보였다. 미군정이 바라는 지도자는 이승만도 김구도 아니었다. 그들은 김규식을 원했다. 그러나 그는 진취성이 부족했고 대중적인 인기를 모으지 못했다. 그가 김구와 같이 남한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김일성과 협상하기 위해서 김구와 같이 평양 행을 하자 미군정과 김규식의 밀월 관계는 끝나고 만다. 송진우, 여운형, 장덕수의 제거는 정국을 이승만에게 유리한 쪽으로 끌고가게 했다. 더구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김구와 임정파들이 1948년5월10일 총선거에 불참하자 이승만의 정권 장악은 더욱 수월해 진 셈이었다. 같은 해 10월19일, 군내 좌파들이 경찰을 공격하는 여순사건이 터졌다. 이승만 정권은 이를 즉각 보도하지 못하게 하고 21일에야 이범석 총리를 통해서 발표했다. 극우파 정치인들이 군내좌파를 선동하여 일으킨 반란이라고 발표했다. 여순사건은 순수한 공산주의-민주주의

를 내새운 이념 투쟁이라기 보다는 친일 경찰의 부패, 군인푸대접, 민생에 대한 불만이 이념과 얽혀서 일어난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승만 정권은 공산주의자와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극우파를 엮어 넣어 정적을 제거하려 했다. 하지만 씰리 보고서는 여순사건관련 김구에 대한 의심을 완전히 씻서버리기 힘들게 하고 있다. 당시에 진압군이었던 광주 4연대의 일부가 반란군에 가담했고 김구는 이들을 이용하여 쿠테타를 시도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이러한 김구의 행적이 김구 암살의 원인이 되었을 법하다. 극우파였던 백의사 염동진을 설득하기 좋은 구실이 아니었을 까?


참고: alt.politics.Korea; Young Kim: Kim Gu's Assassin Ahn Doo Whi was an American Agent; George

         E. Cilley


         김용삼의 현대사 추적: 안두희, 김구를 저격한 진짜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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