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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친일파 청산 실패; 미군정은 일본과 남한에서 구관을 중용했다.: 김원봉의 눈물
05/15/2019 1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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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점령하의 일본(1945-1952)


이차대전후에 독일이나 프랑스에서 나치전범들을 철저히 처벌했던 반면에 일본에 진주한 미군은 일본제국주의 시대에 전쟁에 참여했던 인재들을 다시등용했다. 아태평양사령관 맥아터는 일본관리와 체제를 일단 그대로 유지하고 통치를 시작했다. 기업인들도 일부를 제외하고는 그대로 두었다.  도꾜의 70%가 폭격으로 파괴되었고 길거리에는 시체가 널려 있었다. 먹을 것이 전혀 없어서 매뚜기, 쥐와 뱀을 잡아먹을 지경이었다. 부모를 잃은 어린아이들이 거리를 방황하고 있는 것을 흔이 볼수  있었다. 이통에 일본이 점령했던 지역에서 많은 사람들이 들어 왔다. 나쁜 위생상태 때문에 전염병이 기승을 부렸다. 맥아터는 대량의 식량을 본국으로 부터 들여와서 식량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디디티 살포등 전염병 예방에 힘썼다. 맥아터는 일본천황을 전범으로 처벌하지 않았다.

그의 지위를 전혀 손상하지 않았다. 그에게 불리한 증언을 하지못하게 하고 모든 죄를 도조에게 떠 넘겼다. 적이었던 미국은 일본사람들을 살려준 은인이 되었다. 전범이라는 약점을 가진 천황을 비롯한 구관들은 국민에게 미국이 원하는 일본만들기를 대중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했다. 나중에 수상을 지낸 기시 노부스수케는 군정초기에 전범으로 투옥되었다가 나중에 미군정이 전략적으로 풀어주고 미국이 철저히 도와주어 수상까지 될수 있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재인과 아베; 일본보수의 정체 9/26/2018" 포스팅에 기제한바 있다. 대체로 일본은 미군정과 국민사이에 남한처럼 갈등이 심하지 않았다.


미군정시대 남한(1945-1948)


군정사령관 하지중장은 참모중에 Leonard Bertch 중위의 보고에 거의 전적으로 의지하여 남한을 다스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에 자기가 기록한 자료를 보관하고 있었고 그의 가족이 이것을 하바드 도서관에 기증했다. 한국 현대 사학자인 박태균교수가 이를 입수하여 2018년에 경향신문에 그내용과 그의 의견을 버치보고서라는 제목으로 기고했다. 그는 "한국민은 한국이 패전국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일본을 물리친 승전국임으로 독립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사실상 한국은 패전국의 식민지 였기 때문에 패전국의 일부였다. 그러나 지금도 한국사람들은 따지고 들면 그렇다고 인정하겠지만 일반적으로 패전국의 일부라고 생각하지 않는 다. 미국은 남한을 일본과 대등하게 취급하지 않았다. 미국은 신탁통치외에는 별다른 통치계획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국민의 문화, 특성, 역사등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다. 한국어에 능통한 사람도 거의 없었다. 한국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도 확신이 없었다. 미국정부는 하지에게 충분한 통치자금, 식량원조, 인력을 주지 않았다. 한국의 식량사정도 일본과 같이 좋지 않았다. 일본, 만주, 러시아, 북한에서 사람들이 들어왔다. 일년사이에 천오백만이 이천만이 넘는 인구가 되었다. 일제시대에 만주-한국-일본으로 만들어 진 경제체제는 마치 38선에 땜을 만들어 강물을 막아 버린 것처럼 일본-만주-북한이 없는 남한 홀로의 경제구역이 되었다. 일재 말엽의 과도한 화폐발행에다가 미군정은 부족한 통치자금을 매꾸기위해서 또다시 돈을 찍어내는 바람에 물가는 50-100배로 치솟았다. 한국민은 일본으로 부터 나라를 찾았으니, 자신들이 새나라를 만들려고 했다.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바뀌고 전국적으로 새나라 만들기에 많은 사람들이 참여 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를 전적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제감점기의 경찰을 포함한 구관들을 다시 등용했다. 일본과 같은 통치 원칙이었다. 마치 조선총독부가 미군총독부로 이름만 바뀐격이 된 것이다. 한국민의 적이었던 일본과 협력했던 사람들이 다시 자기들을 통치하게 된 셈이었다. 자연히 국민과 미군정은 충돌하게 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은 이들을 이용하여 자기세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대구항쟁, 4.3사건, 여순사건등의 주모자가 된다. 이러한 민중시위를 진압하고 공산주의자들을 색출하는 데 주역을 맏은 인물들은 친일파 구관들이었다. 민중의 반대를 무릅쓰고 반강제적으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 국민들이 원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친일파 청산이었다. 


김원봉과 노덕술


김원봉은 김구에 버금가는 독립운동가였다. 노덕술은 일제강점기에 사법계 형사로 독립운동가들을 체포하여 고문했던 대표적인 악질 친일파였다. 노덕술은 해방후에 공산당 때려 잡는 일을 도 맡게 되었다. 일제시대에 독립운동가를 다루던 방식을 그대로 적용했다.  중도좌파였던 여운형과 같이 민족주의 노선을 선택했던 김원봉은 체포되어 노덕술에게 뺨을 맏고 고문을 당하는 수모를 받았다. 여운형이 암살 당하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월북하게 된다. 김일성내각의 장관급에 등용 되었으나 1958년에 숙청되었다. 노덕술은 국가 유공자로 두차례나 표창을 받았으나,  김원봉은 이북에서도 연안파 숙청에 연루되어 역적 취급을 받았고 남한에서는 월북 했다는 이유로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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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암살은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의 활동을 극화 한 것이다. 김구가 책상머리에 앉자서 젊은이들을 고용하여 

레시스탕스 운동을 지휘한 반면에 김원봉은 훨씬 더 직극적인 행동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했다. 조선총독부 폭파사건미수, 부산과 밀양경찰서,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사건을 주도 했고 많은 무기와 인력을 동원하여 전국봉기를 시도했으나 김재진의 밀고로 실패했다. 1923년에는 일본황궁을 습격하여 천황을 살해할려고 했으나 실패 했다.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독립운동을 했던 그는 이북에서 숙청된후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고 한다. 고향인 경남 밀양의 가족들은 보도연맹사건에 연루되어 형제, 사촌까지 총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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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은 1899년에 경남울산에서 출생했다. 김원봉보다 한살 적다. 울산보통학교 2학년을 중퇴하고 일본 홋카이도에서 잡화상 고용인으로 일하다가 귀국하여 1920년 순사교습소를 수료하고 순사가 되었다. 주로 부산-경남지역에서 항일운동 사건을 수사하여 동포들을 체포 고문한 공으로 1932년 경성부 본정경찰서 경부 사법주임이 되었다. 1941년에는 경성 종로경찰서 경부 사법주임으로 근무 하였다. 1943년 경시로 승진하여 평양에 근무 했는

데, 독립운동가들이 열차를 타고 만주와 중국등으로 가는 길목에서 이들을 체포하여 혁혁한 공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해방될 무렵 평양경찰서장이었다. 쏘련군 진주후 체포되었다가 6개월만에 풀려났다. 친일파 척결에 적극적이었던 공산치하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낀 그는 곧 서울로 왔고 그다음해에 장택상은 그를 수도경찰서 수사과장에 임명했다. 조병옥, 장택상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여 반 이승만 세력 제거와 좌익분자 검거에 압장섯다. 지배세력이었던 일본에게 협조하여 출세했던 그는 해방후 또 다른 지배 세력인 미군정에게 충성하여 권세를 누렸다. 좌익세력과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제거하고 친미 반공정권을 세우려는 미군정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 


1948년5월10일 선거로 만들어진 제헌국회는 친일파 척결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급한 문제였다. 9월7일 반민족행위처벌법을 통과 시켰다. 친일세력을 기용한 미군정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해줘야만 했다. 일본이 물러난 마당에 그들은 마땅히 처벌 받아야할 대상이었다. 이법을 기반으로 반민특위를 구성하고 그 산하에 특별경찰대를 설치하여 국권강탈에 적극협력한자,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살상한 자를 체포하여 재판에 넘기고자 했다. 물론 국민의 열열한 지지를 받았다. 국민특위가 밝힌 반민족행위자는 7천여명이었다. 이중 682건을 조사했다. 그러나 미군정은 이미 친일파를 대거 기용하여 반공세력을 만들었다. 남한에 반공 자유진영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도구로 친일파를 이용했다고 볼수 있다. 이들은 이승만의 지지 기반이었다. 이승만이 반민특위의 활동을 무력화 시키는 것은 그리 어려운일이 아니었다. 위원장은 경북 대표 김상덕이 부위원장에는 서울 대표 김상돈이 맡았다. 특별재판부 재판장에는 김병로가 임명 되었다. 노덕술이 체포되었다. 취조하는 과정에서 그가 우파 테러리스트 백민태를 고용하여 반민특위 관련 인사들을 암살하려 했다는 사실이 백민태의 폭로로 밝혀 졌다. 친일파들은 친일파를 처단하고자하는 세력은 빨갱이라는 논리로 반민특위 활동을 방해했다. 이승만은 반민특위 활동을 비난하는 담화를 무려 다섯차례나 발표 했다. 안보가 위태로워 진다는 논리였다. 1949년5월 반민특위 주체세력이었던 국회소장파 의원들에게 빨갱이 누명을 씨워 체포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이를 국회프락지 사건이라고 한다. 1949년6월 6일 이승만의 지시를 받은 윤기병 서울중부경찰서장의 지휘로 반민특위 본부를 습격 했다. 이후 반민특위 활동은중단되었고 폐기법안이 통과되어 친일파 척결은 유야무야 되고 만다. 6.6 반민특위습격사건 후 노덕술은 곧장 풀려나서 경기도 경찰부 보안주임으로 승진했다. 헌병중령으로 변신하여 대공업무를 맡았다. 뇌물 수수로 체포되어 6개월 형을 살고 나온 후 잠적했다가 1960년 국회의원에 출마 했으나 낙선됐다. 1968년에 서울대병원에서 병사했다. 


친일파 청산; 중국과 남한의 차이


일본은 중일전쟁동안 점령지역에 허수아비 정부를 만들어서 통치할려고 했다. 만주에 푸이 중국본토에 왕징웨이가 만주국과 중국의 수반이었다. 일본에 협조했던 중국인들을 한간이라고 부른다. 중국은 일본과의 전쟁에서 이긴 엄연한 승전국이다. 일본은 1945년9.9일 중국 국민단정부에게 정식으로 항복 했다. 중국을 배반하고 일본에 협조했던 중국인들을 자국의 의지에 따라서 처벌할수 있었다. 물론 만주에서는 공산군에 의해서 본토에서는 국민당군에 의해서 척결되었다. 그러나 한국은 결코 승전국이 아니었다. 패전국 영토였다. 따라서 남북한은 승전국의 점령지였다. 북한은 쏘련의 의지대로 남한은 미국의 정책에 따라 움직여야 했다. 북한은 친일파 척결이 쏘련의 국익에 부합되는 일이었기에 초기에 매듭지워 졌다. 그러나 남한에서는 미국의 반공정책을 수행하는 데 친일파를 앞세웠다. 결국 이들은 남한의 기득권층이 되었고 보수세력으로 변모 했다. 이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반대파에게 빨갱이 프레임 씨우기를 일 삼았다. 한편  이 맞서는 진보세력은 보수세력의 약점인 친일 경력을 집요하게 공략 했다. 이러한 전통은 많이 나아지기는 했지만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야말로 누어서 침뱃기이다.


청의 멸망과 조선의 멸망의 차이; 김원봉의 눈물




청은 진시황 부터 시작한 2000년동안의 제국이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망하고 공화국이 된것이다. 나라가 타국에게 먹힌 것이 아니었다. 조선은 단군이래 계속된 한민족의 나라가 송두리 체 일본에게 먹힌 것이다. 국가를 배반한 반역죄를 척결할 수 없었던 이유는 해방이 주권을 한민족에게 돌려준 사건이 아니고 또 다른 나라에게 점령 당한 것에 불과 했기 때문이다. 요지음 김원봉을 독립유공자로 인정하는 문제를 가지고 왈과왈부하고 있다. 그를 북한에서 반역자라고 했고 남한에서도 공산주의자라고 내쳐왔다. 그가 독립운동을 하면서 꿈꿔왔던 나라는 분단된 두나라가 아니었을 것이다. 남북한 모두가 그를 독립운동가라고 할 자격이 없는 지도 모른다. 암살이라는 영화를 보면 그가 얼마나 통쾌하게 활동했는가를 알 수있다. 그의 독립유공 유무를 놓고 국회에서 당리당략을 위해서 콩당콩당 하고 있는 졸장부들의 모습을 보고 그는 저세상에서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그늘 역적이라하고 노덕술을 충신이라고 표창하는 농공행상은 차치하고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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