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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의(名義)를 지킨 이항복
11/14/2019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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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사 이항복(1556~1618)이란 재상이 있었다. 어린 시절의 그는 소문난 익살꾼이요, 장난꾸러기였다. 소년 이항복은 요샛말로 좀 “노는 아이”였다. 한 가지 못하는 것도 있었다는데, 그것이 바로 글공부였다.


그러나 마음먹기에 따라 사람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는 다른 아이들보다 조금 늦게 글을 읽기 시작했으나, 불철주야 노력한 덕분에 스물다섯에 어려운 문과시험에 당당히 합격하였다. 그로 말하면 상대를 포복절도하게 만드는 입담에다 글솜씨까지 겸비하였던지라, 조정에서도 그의 인기는 대단하였다.


그가 활동하던 16세기 후반의 조정은 혼란스러웠다. 당쟁이 심해 다들 살얼음판을 기었다. 그럼에도 이항복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아, 언제나 유쾌하고 활달하기만 하였다. 무려 39년 동안 벼슬길에 있었던 데다 요직인 이조판서를 한 번, 병조판서를 다섯 번이나 지냈다. 정승도 네 번이나 역임했다. 관운도 좋았거니와 인품이 넉넉하고 능력이 출중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592년, 왜란이 일어나 국운이 위태로웠다. 그때 이항복의 둘도 없는 벗 이덕형(1561~1613)이 사신으로 뽑혀 명나라로 출발하게 되었다. 이항복은 압록강을 건너가는 친구의 손을 붙들고 이렇게 말하였다. “만약 이번에 자네가 구원병을 데려오지 못하면 내 시체를 이 나루터에서 찾으시게.” 그러자 이덕형이 응답했다. “끝내 구원병이 오지 않거든 자네는 나의 주검을 명나라 도읍에서 찾아오시게.”


이처럼 결연한 마음가짐으로, 그들은 난국을 헤쳐 나갔다. 그랬기에 명나라로부터 구원병이 도착했고, 모두가 힘을 합쳐 결국 왜적을 물리칠 수 있었다. 여기에는 물론 명장 이순신의 희생과 김덕령, 곽재우, 정인홍 같은 의병장의 공을 빠뜨릴 수 없다. 그러나 이항복, 이덕형의 애국충정도 잊으면 안될 일이다.


당파를 따지기로 하면, 두 사람은 서로 다른 편이었다. 그럼에도 그들은 당파를 초월해 심우(心友)로 남았다. 왜란이 끝난 지 수년 후, 친구 이덕형이 먼저 세상을 등졌다. 이항복은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상가를 찾아가서, 손수 친구의 시신을 염하였다. 정치적 이해를 초월한 진정한 우정이요, 의리였다. 요즘 세상에는 도무지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이런 친구가 있으면 제아무리 세상이 거칠고 메마르다 해도 살 만할 텐데 말이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은 이른바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말하기 시작했다. 오성과 한음은 두 사람의 호였다. 오성 이항복과 한음 이덕형이 타고난 개구쟁이로 별의별 익살을 벌이고 기상천외한 꾀를 냈다는 이야기였다. 전국 어디에나 널리 퍼져 있는 구수한 이야기지만 실화는 아니었다. 이항복은 이덕형보다 다섯 살이나 위였다. 그들이 함께 어울려 서울의 고샅길을 휩쓸고 다녔을 리가 없었다.


그런 사실을 많은 사람들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오성과 한음의 이야기를 만든 것은 왜일까. 물론 나의 억측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었다고 본다.


요컨대, 구질서의 통쾌한 전복을 바랐기 때문이리라. 용기와 지혜만 있다면 어린아이들이라도 세상의 어리석음과 비리를 여지없이 폭로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세상의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간단히 풀 수 있을 거라는 민중의 신념을 보인 것이다. 


저마다 이해득실의 주판알을 튀기다 끝내는 불구대천의 원수로 갈라선 당파 간의 싸움은 부질없는 짓이라는 이야기였다. 소년 오성과 한음처럼 스스럼없이 웃고 장난치며 재밌게 살면 될 일인데 세상이 너무 복잡하다는 비판이었다.


그런데 예나 지금이나 세상은 녹록하지 않다. 광해군의 조정에서도 권력투쟁의 회오리가 크게 일어났다. 집권층은 서인과 연결되어 있는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 모후인 인목대비마저 폐위하고야 말 작정이었다. 퇴임한 노대신 이항복이 보기에는 명분도 없고 도리에도 어긋난 처사였다. 그는 반대의사를 밝혔다.


그러자 집권당의 대신들이 한밤중에 집으로 찾아와, 한편으로 회유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협박하기도 하였다. 이항복은 요지부동이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아들과 조카들이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애원하였다. 부디 마음을 돌이켜 가문을 위기에서 구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이항복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선을 그었다. “나는 나라의 막중한 은혜를 입어 재상까지 지낸 몸이다. 이제 늙어 죽을 때가 된 모양이구나. 어찌 뜻을 꺾어 명의(名義)를 무너뜨릴까 보냐. 이미 나의 결심이 섰으니, 너희는 아무 말도 하지 말라.”


광해 9년(1617) 겨울, 폐모론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그는 유배객이 되었다. 환갑도 지났고 중풍까지 앓아서 반신불수였는데도 조정은 이항복을 용서하지 않았다. 추위를 무릅쓰고 그는 함경도 북청으로 떠나야 했다. 자신의 최후를 예감한 듯 이항복은 아들에게 수의를 준비하라고 말하였다. 결국 그 이듬해가 되자 신념의 인간 이항복은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뜻을 지키며 살려 하면 이래저래 풍파가 잦은 게 인생살이인가 보다. 고금이 다르지 않다.


백승종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겸임교수

원문보기: http://news.khan.co.kr/990100


Mission Peak(11-11-2019)

이항복,이덕형,오성과 한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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