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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을 보내드리고...
09/11/201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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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인어른을 처음 만나던 날, 평생 잊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글쎄 큰 절을 하고 무릎을 꿇은 내 앞에서 장인어른은 말없이 굵은 눈물만 뚝뚝 떨어트렸다.


어색한 양복에 과일바구니를 들고 고창 아내 집을 찾은 그때, 나는 서른두 살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그 해 스물일곱에 아내를 처음 만난 지 5년 만이었다.


그 전까지 아내는 집안에 나란 존재를 알릴 수 없었다.

나는 그 때까지도 혁명을 한답시고 운동단체에 상근을 하면서

어른들 눈에는 썩 훌륭하지 못한 직업을 전전하며 돈벌이를 하고 있었다.


반면 아내는 시골이긴 해도 근동에서 알아주는 지주 집안의 8남매 중 막내딸이었다.

아내는 나를 만나기 전까지 돈 고생을 모르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그런 딸이 난데없이 결혼을 하겠다고 데려 온 남자가 직업은 변변찮고,

집안도 몰락했고, 키마저 작고 왜소한 나란 사람이었다.


타고난 성정이 타인에게 피해주지 않고 자신에게 엄격하신 분이었다.

크게 성내는 법도 없고, 싫은 소리도 잘 하지 못했다.


그 시절 대학까지 졸업했지만 형제들이 재산을 팔아 도시로 나갈 때 고향에 남아

아버지 옆에 붙들려 농사를 짓고, 유산을 지킨 분이었다.


내가 아내와 5년여 비밀연애를 한 것도 차마 나설 수 없는 내 비루한 처지가 근본이었지만

어느 면으로 보나 크게 차이가 나는 아내의 집안을 당시 나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로 생각했다.


나는 사실 결혼을 주저했고 아내가 자신의 집안에 어울리는 남자를 만나

평탄한 삶을 산다 해도 붙잡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장인어른 앞에 무릎 꿇는 날이 오고야 말았고,

그런 내게 장인어른은 싫은 소리 한 번 못하고 굵은 눈물만 흘렸다.


장인어른에게는 내리 딸 여섯 뒤에 낳은 두 아들이 있다.

짐작한대로 내리 낳은 딸 여섯의 최종적인 목적지는 두 아들이었다.

아내는 그 마지막 딸이었고 아내가 태어나고 이태 뒤에 아들이 태어났다.


자신의 의지와는 완전히 무관한 채 뒤에 남동생을 본 아내는 단지 그 이유만으로

딸 중에는 가장 귀한 딸이 되었다. 하필이면 내 아내가 그랬다.


장인어른에게 파킨슨병이 찾아 온 건 아내와 결혼하고 몇 년 지나지 않은 십 칠팔 년 전이었다.

처음엔 가볍게 손이 떨리는 증상으로 시작되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자존감이 강했던 어른이 눈물을 자주 보이기 시작한 건

증상이 손에서 발로 발에서 입으로 옮겨지던 무렵이었다.


장인어른이 가장 낙담한 건 당신 몸이 당신의 또렷한 정신으로도

어찌할 수 없게 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혀가 굳으면서 대화가 불가능해지고 필담으로 대신 이어가다

그마저도 손 떨림이 심해져 어려워질 무렵 아버님 눈이 하는 말을 이해하고

전달해 주는 유일한 이는 장모님이었다.


그 때 아버님의 눈물은 자신의 언어가 타인에게 도달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었다.


당신과 당신 자식들에게 연결되던 통신이 그렇게 끊기고부터 장인어른의 표정은

좌절감에 더해 우울감이 더해졌다.


파킨슨병은 아주 긴 시간에 걸쳐 조금씩 사람의 몸을 불구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건 다시는 되돌릴 수 없는 비가역성을 포함하고 있었다. 

거기에 정신마저 포함되었다면 어쩌면 그 병이 잔인하지는 않았다.


더구나 장인어른처럼 스스로 엄격했던 분에게 그건 남겨진 삶에서

아주 조금씩 피가 말라가는 고통이었다.


자신의 정신이나 마음은 그대로인 채 자신의 몸이 차츰차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갈 때 장인어른이 겪어야 했던 마음의 상처와 고통을 나는 짐작만 할 뿐이다.

다만 내가 짐작한 만큼은 아니었기를 빌었다.


몸이 조금씩 사위어가는 고통 속에서 장인어른은 자신의 미래를 스스로 준비했고 스스로 해결했다.


몸의 병이 깊어지는 긴 시간동안에도 장인어른은 그에 필요한 비용을 타인에게 의탁하지 않았다.

그건 마지막 순간까지 포기할 수 없었던 자식들을 위한 배려였고 자존감이었다.


가장 가까이서 장인어른을 보살폈던 이는 아내 바로 밑 남동생 큰 처남이었다.

귀한 아들이었고 귀한 아들로 컸던, 자신도 귀한 아들임을 잘 알고 있었던 큰 처남은

그러나 사회에 나와서는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해서 큰 사업을 성공시켰다.


물론 재산 많은 장인어른의 도움이 매번 있긴 했지만 그래도 철부지 부자아들 노릇은 하지 않았다.

처남은 모든 면에서 장남이 해야 할 일을 피하지 않았고 잘 해냈다.


작년이었다. 이미 몇 해 전부터 아버님은 걷지도 못하고 병상에만 누워있었다.

게다가 투석까지 해야 할 만큼 건강이 심각해졌다. 입원해 있는 병원을 찾은 장남에게 아버님은 말했다.


“이제 그만 나를 놓아줘라.”

이 사실을 내게 털어 놓을 때 처남의 표정은 잠시 참담했다.


잔인한 병을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병이 깃든 몸이 사라지는 거다.

비가역적인 병이었고 장인어른은 스스로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어쩌면 존엄한 정신이 더 이상 훼손되기 전에 그걸 원했는지도 모른다.


의식이 있는 줄은 알지만 의식이 있는 지 없는 지 판단할 수 없을 만큼

병세가 심각해 진 건 몇 달 전이었다.


지난 달 어쩌면 일주일 전후로 그 시간이 다가왔다는 전갈을 받고

마지막 인사를 위해 아내와 병원을 찾았다.


십 몇 년 동안 말라가던 피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장인어른의 몸은 마르고 뒤틀렸다.

눈은 힘겹게 허공을 맴돌았고 숨은 가팔랐다. 죽음은 이미 곁에 와 있었다.


그래도 간혹 자식들 마지막 인사에 눈물이 비어졌다.

몸은 말랐어도 마르지 않은 눈물이 남아 있었다.

그게 부모라는 걸 부모가 된 나는 알 수 있었다.


장인어른은 평생을 농사지으며 살았던 고창군 무장면 옥산리 가라실 마을

집 앞 선영에 가루가 되어 땅에 묻혔다.

살아생전 그렇게 되기를 원했던 봉분으로 계신 아버님 옆이었다.

장인어른은 자신을 한 없이 참담하게 괴롭혔던 병에서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었다.

어제였다.


<P.S>
많은 분들에게 부고를 전하지 않았다.

이십여 년을 떠도는 동안 부고는 내게 날아들지 않았고 날아든 부고에도

응답하지 못했던 염치 때문이었다.


딱 두 군데 내가 부고를 전한 곳은 지금 가입해 현장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노조와

돌아온 고향에서 일상으로 만남을 이어가고 있는 초등학교 동창들이었다.

그래도 혹시 서운함이 있다면 미안한 마음을 전한다.



김지영 작가 페이스 북에서 가져온 글
출처: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1912661202391506&id=100009429334515

시골집(사진: 김자윤)

작가 김지영,장인어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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