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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오른팔, '독실한' 기독교인 차지철
06/19/201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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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천한 출생과 성장과정 탓, 평생 극심한 열등감에 시달려


서자로 태어난 차지철

 5·16 쿠데타 이후 중앙청 앞에 선 박정희, 그

좌우의 인물은 후일 박대통령의 경호실장이 된 박종규와 차지철.     ⓒ 자료사진



박정희와 최후의 순간까지 함께한 차지철(1934-1979)의 생애를 보면 극적인 면이 많다.


차지철은 경기도 이천 시골농가에서 주막집 주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모친 김씨는 '지'씨 성을 가진 사람과 딸 셋을 낳았다.

그 후 김씨는 인근마을 차씨 집에 개가해 차지철을 낳았다.


가부장제가 팽배한 1930년대에 딸 셋을 낳고 개가한 여성이 남편이나 친척

그리고 이웃들로부터 제대로 된 인간대접을 받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이런 환경에서 차지철은 아버지 얼굴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했고 이복형들로부터도

미운 오리새끼처럼 갖은 모멸과 냉대 그리고 차별을 받았다.


그런데 그런 차지철이 불과 30년 후에는 최연소 국회의원, 40년 후에는, 경위야 어찌되었건,

한 나라의 '2인자'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세속적 눈으로 보자면 그는 자수성가하여

크게 '성공' 한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부끄러운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었기에

차지철은 항상 뿌리 깊은 열등감을 갖고 살았다.


그리고 그런 가정 형편 때문인지 그는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닐 때 친구들과

잘 어울리기보다는 늘 외톨이로 지냈다.


그래서 혼자 할 수 있는 격투기에 빠져 들었다.

학창시절에는 별로 튀지 않고 과묵했으며 급우들과도 잘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고등학교 때도 동창 허봉의 증언에 따르면 친구지간에 말다툼도 없고 싸우는 일도 없었고

내성적이고 온순하고 선량했다고 한다.


차지철은 용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형편 때문인지 아니면 공부를 못해서인지

하여간 대학진학을 포기한다.


그리고 6.25 전쟁 막바지인 1953년 사병으로 입대한다.

그리고 육사 12기 시험에 응시하지만 낙방한 후 간부후보생으로 1954년 소위를 달았다.


'돌대가리'라 불리던 전두환도 육사 11기 시험에 합격한 것을 고려하면

당시 차지철의 머리가 별로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여간 이 육사 12기 시험의 실패는 차지철에게 열등감을 더해준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출생과 성장과정의 박탈감을 보상받으려 나중에는 병적이라 할 만큼

카리스마에 지나치게 집착한다. 

차지철이 장교시절 새벽 산에 올라갔다가 일출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더니

옆에 있던 부하에게 이런 말을 했다는 일화도 있다.

"내가 왜 이처럼 강해졌는지 알아? 고독을 씹으며 자랐기 때문이야.

내 인생엔 아버지도, 형도 없어. 어머니만 있어."

대위 시절인 1957년 차지철은 미국의 포병학교로 유학을 가는데 당시 그는 태권도 5단,

합기도 5단, 검도 3단, 도합 13단이었다.


당시 인종차별적인 미군장교를 맨손으로 '묵사발' 만들었다는 일화를 보면

무술에는 일가견이 있었던 듯하다.
  
1960년 그는 보병학교를 졸업하고 공수단 대위로 있었다.

1961년 박정희가 5·16군사쿠데타를 일으키고 차지철이 적극 가담하는데

이 사건은 그의 생애에 큰 도약의 기회가 된다.


특히 그는 5.16 후 만 29세의 나이에 박치옥 공수단장의 소개로 박정희 경호장교로

활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박정희 신임을 얻고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1년 후인 1962년 그는 육군중령으로 예편하여 민주공화당 상임위원을 지냈다.



학, 석, 박사 학위를 전부 3년 만에 취득한 차지철 국회의원


▲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정부 청사 연두 순시를 수행하고 있는 차지철 경호실장.

두 사람 사이로 당시 노태우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모습이 보인다.     ⓒ 동아일보



그리고 박정희 덕으로 1963년 그는 30살의 나이로

민주공화당 전국구로 6대 국회의원이 되었다.


그러나 평소 감추고 싶은 출생환경과 육사 12기 낙방으로 인한 심한 열등감 때문인지

국회의원이 된 해인 1963년 국민대학교 정치학과를 입학하고 같은 해 학사를 취득한다.


그리고 1년 후인 1964년에 한양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석사, 또 1년 후인 1965년에는

정치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는데 당시 그는 계속 국회의원직을 유지한 상태에서 3년 안에

학, 석, 박사 학위를 딴 것이다. 아마 당시 여당 국회의원의 막강한 특권이 작용했을 것이다. 

1964년 3월부터 한일회담 반대 시위가 있었는데 경찰은 이 시위와 관련 180여명을 연행하여

서울형사지법에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러나 영장담당 판사가 일부 피의자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그러자 이튿날 새벽 총으로 무장한 수도경비사 1공수 소속 군인들이 서울형사지법에 난입했다.


당시 무장군인들의 법원난입 사건과 관련하여 최영도 변호사는 배후에 차지철이 있다고

의심했으나 증거가 없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1964년부터 차지철은 박정희의 주문으로 월남전 파병에 반대하는 관제데모에 앞장선다.

박정희 논리는 대미관계에서 언론이나 야당에서 강하게 반대해야 한국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파병 조건을 교섭하는 데 유리한데,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차지철은 박정희 명을 받아 월남전의 역사를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한다.

그 후 '열 받은' 차지철은 국회에서 "월남 특권층 자식들은 대부분 외국으로 도망가 있는 마당에

우리청년들이 그들 대신 죽음 앞에 나서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박정희 명을 기대이상으로 수행한다.


그래서 결국 박정희가 월남전 파병문제를 놓고 대미관계 협상을 하는데 유리한 고지를 제공해 준다.

그러니 이렇게 하나를 시키면 둘을 거뜬히 하는 차지철이 박정희는 너무나 대견했을 것이다. 


1966년 학력을 통해 비천한 가정환경에 대한 열등감을 어느 정도 극복한 차지철은

미모에 좋은 가정출신의 여성과의 결혼을 통한 신분상승을 노렸다.


마침 그때 33세 총각 국회의원 차지철에게 어느 날 미모의 20대 중반 여성이 찾아왔다.

그녀는 명문대 출신으로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외적 조건이 화려했다.

만난 지 한 달 만에 그는 그녀와 곧 결혼하겠다고 했다.


그의 지인들은 '끼 있는 여자 같다'며 반대했지만 차지철은 그런 우려를 무시하고

그녀와 만난 지 몇 달 만에 결혼했다.

그러나 지인들의 우려대로 결국 결혼 여섯 달 만에 차지철은 이혼하고 말았다.

차지철은 이때부터 기독교 신앙에 빠지기 시작했는데 아마 감추고 싶은 출생 및

성장과정과 허영심이 빚은 불행에서 벗어나려는 그의 처절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한편 차지철은 1967년 민주공화당 지역구로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겉으로 그는 탄탄한 출세가도를 달리고 있었지만 그의 속은 불우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심한 열등감과 분노가 지배했던 것 같다.


서자의 자식이라서 그런지 차지철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를 누구에게 한 번도 이야기 한 적이 없다.


7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후 잘나가는 그에게 이복형이 찾아왔다.

그런데 그는 이복형의 얼굴을 알아보면서도 '나한텐 형이란 없소' 라며 이복형을 문전박대했다.

설움 받던 어린 시절 '서자'라고 멸시하던 이복형에 대한 분노가 여전히 가슴깊이 남아 있었던 같다.



비천한 출생과 성장과정으로 극심한 열등감에 사로잡힌 차지철


 1977년 육사에 재학중이던 박지만 생도를 박 대통령 가족이 면회하던 날 기념사진.

당시 육사 교장이었던 정승화 장군(오른쪽), 경호실 작전차장보였던 전두환 장군(왼쪽에서 세 번째),

차지철 경호실장(박 대통령 오른쪽) 등이 눈길을 끈다     ⓒ 남산의 부장들



1969년 35세이던 차지철은 국회 외무위원회에서 의정사상 최연소 상임위원장이 될 정도로

박정희의 후원과 신임을 받았다.


그 덕인지 1971년엔 제8대 국회의원에 무난히 당선되었다.

그리고 그해 국회 내무위원장을 지냈다. 이렇게 그의 정치경력은 '승승장구' 했지만

그는 자신의 비천한 출생과 성장과정에 대한 극심한 열등감은 여전히 벗어날 수 없었던 것 같다.

차지철이 국회내무위원장 시절이었다.

군 선배이자 평소 친하다고 생각했던 김현옥 내무장관이 신임인사차 들렀다.

김 장관이 손을 들며 '어이 차 박사' 라고 불렀다. 그러자 차지철의 안색이 순식간에 변했다.


다른 사람들을 내보내 놓고 차지철이 김현옥 내무장관을 어떻게 다루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다음에 김 장관이 차지철을 다시 만났을 때 마치 고양이 앞의 쥐처럼

두발을 모은 채 공손히 '내무장관 왔습니다'라고 인사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차지철은 국회 내무위원장때부터 비육사출신들을 무척 챙겼다.

정규육사의 전두환, 노태우가 몸담았던 '하나회'같은 조직은 없었지만 차지철은 비육사출신들이

10여 명 씩 모이면 반드시 찾아가 금일봉도 주고 바비큐파티도 열어주면서 격려하곤 했다.

이것도 자신이 과거 육사시험에 낙방한 것에 대한 뿌리 깊은 열등감 때문이 아니었을까?


1973년에도 차지철은 9대 국회의원에 당선되었고, 그해에 또 국회 내무위원장을 지냈다.

그런 차지철의 생애에 또 하나의 큰 인생 도약기가 오는데 그것은 1974년 재일교포 문세광의

육영수 저격사건이었다.


육영수가 사망하자 이 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박정희의 경호실장 박종규가 물러난다.

이때 박종규 후임으로 차지철은 박정희 경호실장이 되었다.

이때부터 박정희만 믿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마음대로 휘두르는 차지철의 월권이 시작된다.

그는 경호실장이 된 뒤부터 청와대의 위상을 높인다고 경호실장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스스로 격상시켰다.


그러면서 현역 중장 또는 소장을 자기 아래 경호차장으로 두었으며

현역 준장을 차장보에 임명하였고 그 제도를 아예 만들었다.


또 비상시에는 수도경비사령부도 지휘할 수 있게 법까지 바꿔놓았다.

이때부터 박정희 정권이 본격적으로 부패, 붕괴되기 시작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출생이 비천하고 '돌대가리'도 합격했다는 육사시험에 낙방하고 첫 결혼에도 실패한 자신을

주위에서 멸시한다고 느껴서인지 차지철은 심한 열등감과 외로움 속에서 오직 폐쇄적인

권력욕에만 매달렸다.


또한 경호실 훈련 때는 마치 자신이 군의 총사령관인 듯이 항상 군복을 입고

아예 수도방위사령관 등 다른 장군들을 지휘하기도 했다.



히틀러의 SS제복을 베낀 차지철


또한 경호실 산하 군인들에게는 히틀러의 SS제복을 베낀 특제 제복을 입혀 완벽하게

박정희 친위대로 만들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군대사열식 비슷하게 국기 하강식을 한다며 장차관과

군장성 등을 불러 일렬로 세워놓고 자신의 무력시위를 행사했다.


차지철은 평소 "경호실은 각하의 신변만을 보호하는 곳이 아니다.

각하가 도전을 받아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면 우리 경호실은 무슨 소용이 있는가.

경호실은 각하의 자리까지도 보위해야한다"는 자신의 강력한 소신을 주위에 강요했다.


결국 차지철의 본심은 박정희 경호를 핑계로 '경호실장은 대통령의 파수꾼이자 국가의 2인자' 라는

등식으로 자신의 월권을 정당화 한 것이다.

차지철은 또한 "모든 정보는 꼭 대통령 경호실을 통해야 한다"는 이상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장관들에게 대통령 결재를 받을 문서는 꼭 하루 전에 경호실에 갖다놓도록 요구했다.


장관들이 의아스럽게 생각하자 차지철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일본의 명치유신 때 어느 신하가 왕에게 올리는 문서의 귀퉁이에 독약을 발라놓은 일이 있었다"는 

이유였다. 즉 왕이 손가락에 침을 발라 문서를 한 장 한 장 넘기는 걸 이용해 독살하려 했다는 것이

차지철의 핑계였다.


그래서 장관들이 기분 나쁠지 모르지만 대통령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는 자기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통보했다.


그래서 차지철은 박정희에게 올라가는 각종 기밀과 중요 문건을 미리 파악했고

이런 방법으로 모든 정보를 독점했다.

이외에도 차지철은 종종 "각하를 빼놓고 나보다 앞설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누구의 승용차도 내 차를 앞서 갈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해서 박정희가 외출 시 비서실은 물론 경호실도 모두 의전 때문에 애를 많이 먹었다.


청와대 월간 회의 같은 공개된 자리에서도 차지철은 늘 박정희 다음으로 1순위를 고집했다.

직책 서열로 따지면 엄연히 비서실장이 위고 그래서 박정희 오른쪽에 비서실장이,

왼쪽에 경호실장인 차지철이 앉아야 한다.

그런데 차지철은 안하무인으로 이런 모든 의전을 뒤집어버렸다.

게다가 차지철은 막강한 경호실 권력을 기반으로 권부 내에도 권력을 구축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자신과 경쟁이 되거나 껄끄러운 장군들은 견제하고 자기 사람을 군 요직에 심는 작업을 벌였다.


차지철이 겨냥한 첫 번째 포석은 박종규 전임실장의 영향력을 무력화시키는 것이었다.

13년 동안이나 박정희 뇌리에 박혀 있는 박종규의 모습을 지우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보더라도 박종규는 5.16 당시 박정희 소장에게 차지철 대위를 소개시켜준 장본인이었고

쿠데타에 같이 목숨을 건 동지였으며 차지철이 정계에 진출한 뒤에는 물심양면으로

뒤를 봐준 후원자였다.


그러나 차지철은 경호실장에 임명되는 과정에서 박종규가 자기를 추천하지 않은 데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차지철의 저돌적, 다혈질 기질이 대통령 신변을 책임지는

경호실장으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한 박종규는 다른 이를 자신의 후임에 추천했던 것이다.



'독실한 기독교인' 차지철이 박정희의 '바람기'를 잠재웠나?


 박정희 전 대통령을 쓰러뜨린 10.26사태의 총성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삶까지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사진은 박 전 대통령이 한 행사장에서 차지철 경호 실장 등과 함께 자료를 보고 있다.

(왼쪽에서 2번째부터 차지철, 박정희,이상열,박종규씨)   ⓒ 연합뉴스



그러나 박정희는 생전에 육영수의 '유언'과 김정렴 비서실장이 추천한 차지철을 선택했다.

생존에 육영수는 박정희의 '여색'에 질색하던 터라 술 담배를 안 하는 '독실한 기독교인'

차지철이 박정희의 '바람기'를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김정렴은 "차지철이 충성심이 두터운데다 무술이 뛰어나며 국회의원으로서 박사학위도 따내는 등

성실한 일면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추천 이유를 밝혔다.

그러나 일단 경호실장이 된 차지철은 자신의 사설 정보기관까지 두며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의

권한을 침해하고 당시 야당인 신민당을 상대로는 직접 정치공작을 벌여서 김재규와

사사건건 충돌이 잦았다.


더욱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에게 보고할 때도 차지철은 자신이 경호실장으로

동석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 김재규는 차지철의 이런 건방진 월권 행위를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고, "내가 그래도 중장 출신인데 어찌 저런 대위 출신이랑 옥신각신 하겠나"라며

분을 삭였다고 한다.

김정렴 비서실장 시절에는 차지철이 비서실 업무에 크게 간섭하지 못했지만 비서실장이

김계원으로 교체된 1979년부터 차지철은 이제 비서실의 업무에도 내놓고 간섭하기 시작했다.

그 외에도 차지철은 "최규하 국무총리에게 전화를 대"라고 지시해 놓고도

수화기를 들고 있지 않았다.


유신말기에 차지철에게는 박정희를 빼놓고는 자신보다 높은 사람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당시 차지철을 두고 '부통령 각하'나 '북악산 2인자'라는 말도 나돌았다.


이런 상황에 대해 정부각료나 공화당 고위인사 중에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워낙 박정희가 차지철을 맹목적으로 총애하였기에 아무도 박정희에게 감히 차지철의

월권문제를 직언하지 못했다.

그래서 유신 말년인 1979년이 되어서는 박정희의 측근이라는 인물도 차지철을 빼놓고는

사실상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예를 들면 김종필, 이후락, 김형욱, 신직수, 박종규가 그렇고, 김재규도 사실은 차지철과 함께

측근자라고 볼 수 있지만 실제로는 박정희의 일방적인 차지철에 대한 편애로 김재규는

깊은 소외감을 느낀다.

그러니 차지철만이 박정희와 '혼연일체'가 되어서 절대적인 권력을 휘둘렀다.

그렇기에 유신말기에는 박정희와 차지철을 빼놓고는 어느 누구도 유신체제를 꼭 지켜야겠다는

강한 의사를 갖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1979년에는 정계뿐만 아니라 사회계에도 '차지철이 박정희의 후계자를 노린다'

혹은 '결정되었다'는 설이 파다했다. 그리고 차지철은 자신이 대권을 잡았을 때 휘호를 쓰기 위해

명필을 개인교사로 두고 서예연습을 한다는 소문도 돌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박정희도 유신말기에는 공화당 의원이건, 총리이건, 측근이건,

사실상 '충견' 같은 차지철을 빼놓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힘을 안 실어주었다.


그리고 오직 자신에게만 모든 권력을 집중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차지철의 안하무인적인 월권의 근원은 결국 박정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급기야 차지철은 김영삼 신민당 총재 의원직 제명을 주도했고,

이에 1979년 10월 16일 김영삼 의원직 제명에 반대하며 부마항쟁이 일어났다.


이에 차지철은 강경진압을 주장하며 공수부대 투입을 주도하였다.

더욱이 "각하, 캄보디아에서도 3백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 2백만 명 정도의 시위대를

탱크로 밀어 죽이는 게 대수입니까"는 차지철의 발언은 정말 박정희 정권의 광적인 정신상태와

그 최후가 임박했다는 징조를 보여준다.



주색에 취해 놀다 살해당한 박정희의 최후

결국 1979년 10월 26일 밤, 박정희는 주색에 취해 놀다가 김재규에 의하여 피살되었고

차지철도 경호실장으로 현장에 있었지만 박정희 경호는 뒷전으로 하고 화장실로 도망가다가

박정희와 함께 비굴한 최후를 맞았다.


박정희와 차지철의 죽음은 독재 권력의 최후가 얼마나 허망한지 보여준다.

특별히 경호실장이 총격이 시작되자 자기 목숨 위험하다고 박정희를 버려두고 도망갔다는 것은

차지철이 얼마나 평소에 내공이 없는 인물이었는지를 보여준다.

명색이 대통령 경호실장 그리고 박정희 권력의 2인자라면 이런 위기 상황에선

자기 목숨을 던져서라도 김재규를 공격해서 박정희가 몸을 피할 시간을 만들었어야 했다.


또 당시 차지철은 경호실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차고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박정희는 술자리에 총이 보이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일부러 차지철에게 총을 차고 오지 말라고

지시했다는 후문도 있다.

10.26 직후 가해자가 누군지 상황이 불분명 했을 때 차지철은

박정희 살해범으로 의심을 받은 바도 있다.

그 이유는 차지철이 평소 내놓고 항상 '부통령' 노릇을 했기 때문이었다.  

화장실에서 죽은 박정희의 오른팔, '독실한' 기독교인 차지철,

그는 평소 술과 담배를 일체 안하고 하루 두 차례 꼭 기도를 드리는 철저함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매주 수요일 새벽 4시엔 삼각산 비봉 바위밑에 있는 조그만 기도원에 올라가 무릎을 꿇고

몇 시간씩 꼼짝 않고 기도하곤 했다.


집에도 조그만 기도실을 하나 만들어 놓고 십자가 밑에서 예배를 드렸단다.

그리고 매일 아침 6시, 저녁 6시 두 차례 노모를 모시고 예배에 정성을 쏟았다고 한다.

차지철이 열심히 드린 그 '기도'의 내용은 무엇이고 그는 과연 누구를 위해 그렇게 밤낮으로

열심히 기도했을까?


"캄보디아에서도 3백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가 1, 2백만 명 정도의 시위대를 탱크로

밀어 죽이는 게 대수냐"고 당당하게 큰소리치던 차지철, 그가 과연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을까?

기독교의 본질은 사랑이고 약자에 대한 배려이지 독재자에 대한 간지러운 아부와 맹목적 추종이 아니다.

차지철은 사망할 당시 서울 모교회의 안수 집사였다.

그리고 그는 지금 영락교회 교인묘지에 묻혀 있다.


차지철의 삶과 죽음을 생각하면 나는 '황제의전'에 집착했던 공안검사 출신의

'독실한 기독교인' 황교안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국역사에서 처음으로 국정농단으로 탄핵된 대통령 박근혜!

그리고 그 부패한 정권의 2인자였던 황교안!


나는 그가 '독실한 전도사'로 요즘도 교회에서 설교를 한다는 언론보도를 보면,

한국기독교인들이 왜 이런가라는 깊은 탄식을 금할 수 없다.

래서 차지철의 그 영욕으로 얼룩진 삶과 죽음이 더 안타깝다.



출처: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33087
차지철, 김재규, 독재자 박정희, 국정농단 박근혜, 박근혜 부역자 황교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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