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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스의 교육 Cyropaedia, Institution of Cyrus (성경에서는 고레스 왕)
06/29/2020 2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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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opaedia, Institution of Cyrus 키루스의 교육


                                성경에서는 고레스 왕이라 기록

위키메디아에서 펌

키루스의 교육(Cyropaedia)은 키루스 2세 대왕의 일대기에 대한 크세노폰의 저술이다. 헤로도토스 등의 기록과는 크게 상반되는 점이 있는 저술로, 크세노폰의 정치철학적 견해가 키루스 2세에 대한 역사 기록과 이 저술의 내용이 상반되는 지점에 드러나 있다.

Cyropaedia

체제와 내용편집

키루스 2세 대왕을 이상적 군주로 그려내기 위해 크세노폰이 키루스 대왕의 일대기를 재구성한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8권으로 이뤄진 이 저술은 크세노폰 전집에서 가장 긴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각 권별 내용편집

고대 그리스의 저술은 저술이 수록되는 두루말이의 '용량'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각 권의 구별이 지금 통상적으로 보는 것보다 작은 경우가 많다. 한국어판에서 각 권의 분량은 약 50~60쪽 분량이다. 각 권의 제목은 한국어판에 따랐다.

1권: 키루스의 어린 시절편집

크세노폰의 동기는 다음과 같이 첫 머리에 서술되어 있다. "그의 출신이 어떠하며 본성적 자질이 어떤지, 그리고 어떤 종류의 교육을 받아서 사람을 다스리는 데 그토록 탁월했는지 조사했다(1.6)." 여기서는 페르시아인이 일생동안 어떤 교육을 받고 어떤 활동을 하게 되는지를 다룬다. 이는 청년기의 귀족 남성이 밤에 공공건물을 지키는 등 절제와 의무를 강조하는 교육과 활동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스파르타의 엄격한 교육 내용과 흡사하였으나 그처럼 잔혹한 면은 없다. 크세노폰에 의해 이상화된 교육 내용으로 보인다. 이어서 키루스는 12세부터 외가인 아스티아게스의 메디아에서 자랐다고 서술되어 있다. 그가 16세쯤 되었을 때 아시리아의 왕이 그의 아들의 결혼식을 위해 쓸 사냥감들을 구하기 위해 메디아 국경을 넘어 군사행동을 취했고, 그에 대응하여 키루스는 첫 전투를 치렀다고 한다. 전투 이후 페르시아로 돌아온 키루스는 청년반 활동을 하게 될 때까지 페르시아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그때 아시리아는 세력 확장을 위해 메디아를 침공하려고 하였다. 메디아에서는 아스티아게스가 죽고 그의 아들이자 키루스의 외삼촌인 키악사레스가 왕이 되어 있었으며, 그는 페르시아에 원군을 청하고 키루스는 그 원군의 사령관이 되었다. 키루스는 그의 아버지에게서 전쟁에서 귀감이 될 만한 원칙들을 듣는다.

2권: 군대의 재조직편집

메디아에 도착한 키루스는 평민 병사들에게 귀족 병사들과 동일한 무장을 지급하고 포상 경쟁을 붙였으며 5와 10의 배수로 병졸들을 묶어 편제를 만드는 등의 군사 개혁을 한다. 여기서 키루스는 전공의 보상에 관한 판관이 되어 있을 수 있는 비효율 및 평민 병사가 부당하게 취급되는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는 무장은 페르시아의 것이라기보다는 그리스의 것이라고 한다. 인도의 사신이 등장하기도 한다. 곧이어 그는 이전에는 메디아에 공물을 바쳐오던 아르메니아가 그것을 끊어버렸다는 점을 지적하며 아르메니아 침공에 자원한다.


3권: 아르메니아와 스키타이 정복: 첫 번째 위대한 전투편집

키루스는 아르메니아를 진압하고 그 왕을 재판하게 되었다. 아르메니아 왕의 아들 티그라네스는 아르메니아 왕을 죽이려는 키루스를 말리기 위해 실제적인 힘에 의한 두려움은 가장 큰 효과를 가져올 수 있는 처벌이라는 논리를 편다. 이로써 아르메니아는 키루스의 동맹국이 되었다. 곧이어 키루스는 아르메니아인과 갈등 관계에 있던 칼데아인과 접촉하게 되었는데, 아르메니아와 칼데아 양측을 중재함으로써 키루스는 칼데아 역시 동맹국으로 삼는다. 이후 진격해온 아시리아 군대와 그 동맹군을 키루스의 주도로 한 차례 격퇴하게 된다.

4권: 아시리아군의 첫 번째와 두 번째 진지 점령편집

패배한 아시리아군은 퇴각하였다. 키루스는 지원자들을 이끌고 추가적인 원정에 나섰다. 아시리아 주변에 있던 기마 민족 히르카니아인들이 그들에게 내투하였다. 그들의 도움으로 아시리아군을 적의 영토에서 또 다시 격파하였다. 이전까지 대부분 보병이었던 페르시아군을 키루스는 이 승리로 얻은 수많은  기병에 익숙한 히르카니아인 및 메디아인을 활용하여 기병 부대로 변화시킨다. 기병 부대를 창설하는 결정을 위한 논의는 보병에 비교하여 기병의 우월함을 지적하는 글로 유명하다. 한편 키악사레스는 메디아인 대부분이 자발적으로 키루스를 따라 나서자 메디아인들에게 복귀명령을 내리는데, 키루스는 여전히 키악사레스가 자신의 동맹이며 필요한 전력에서 메디아인의 비중이 크다며 이를 취소하길 요청한다. 마지막 부분에서는 아시리아의 장군 고브리아스가 현 아시리아 군주의 전횡에 의해 살해당한 아들의 복수를 위해 아시리아를 배신하고 페르시아군에 투항한다.

5권: 고브리아스와 가타다스편집

첫 머리에서는 키루스의 성적 절제에 관한 내용이 등장한다. 이어 지원자들이 그들의 뜻에 의해 키루스의 군대에 종군하고 있다는 점을 확실히 하여 결속력을 확실히 하고, 고브리아스의 영지로 진출한다. 5권에서 주된 전장은 아시리아의 영토이며, 주변 지역은 전쟁의 전개에 따라서 자주 약탈당한다. 고브리아스는 역시 아시리아 군주의 전횡에 의해 거세당하고 환관이 되었던 가타다스라는 인물을 포섭할 것을 제안한다. 가타다스는 계략으로 고브리아스가 동맹을 맺을 것을 이야기하였던 사키아 방면의 요새를 함락하여 바쳐 투항 선물로 삼았다. 이후 가타다스는 부하의 배신으로 인해 아시리아 왕의 공격을 받아 위기를 맞지만 키루스의 군대가 때마침 도착해 아시리아 왕의 군대는 퇴각하였다. 이후 키루스와 아시리아 왕은 부분적인 평화 조약을 맺어 농민들에게는 평화를 보장하였다. 이후 키루스는 시리아를 일부 장악하고, 곧이어 키악사레스와 직접 회동한다. 키악사레스는 키루스의 세력이 크며 메디아인마저 키루스를 따르게 되었다는 것을 보고 침통해하지만, 키루스는 자신의 원정이 자신과 키악사레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이고 메디아인들이 이전보다 그를 덜 생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보여주어 키악사레스의 마음을 풀어준다.

6권: 대전투를 앞두고편집

회의를 통해 겨울과 적진 너무 깊숙이 들어온 것 때문에 나타나는 위협으로 인해 제기되었던 군대 해산안은 기각되었다. 한편 아시리아 왕이 바빌론을 버리고 리디아 방면으로 도주하였다고 전해져 왔다.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와의 결전을 위해 군사장비와 동맹국들의 결속이 강화되었다. 인도는 여기서 다시 등장하여 키루스와 동맹을 맺는다. 그러나 크로이소스가 키루스의 군대를 압도하는 규모의 군대를 이집트를 비롯한 수많은 동맹국에서 징발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군에는 공포 분위기가 퍼진다. 키루스는 연설을 통해 그에 대한 대비책을 제시한다. 양 군은 서로 진격하였고, 크로이소스는 키루스의 군대를 포위하는 방식으로 포진하였다.

7권: 대전투: 사르디스와 바빌론의 함락편집

크로이소스와의 전투 끝에 키루스가 앞장선 측면이 붕괴되면서 키루스가 승리하게 된다. 곧이어 리디아 수도 사르디스를 함락하고, 크로이소스를 복종시킨다. 여기서 키루스는 함락 후 관습적으로 이뤄지던 약탈을 크로이소스의 권유에 의해 중지한다. 키루스는 이후 바빌론으로 향하면서 여러 민족을 복속시켰고, 이 과정 속에서 앞서 아르메니아와 칼데아 양측에 했던 것처럼 내전이 일어나고 있는 곳에서는 판관이 되어 내전을 진정시켰다. 키루스는 바빌론을 포위하여 아시리아군이 굶어죽기를 기다리는 척 하면서 바빌론을 관류하던 유프라테스강 물을 돌릴 준비를 했고, 바빌론의 축제일에 맞춰 물을 돌려 하도를 통해 성 안으로 잠입, 바빌론을 장악하였다. 이후 키루스는 왕이 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8권: 제국의 건설: 키루스의 죽음편집

키루스는 거대한 제국의 행정 체계를 정비하였으며, 여기서는 2권에서 군대를 재조직할때 썼던 원리가 다수 전용되었다. 이후에는 키루스가 귀족들을 자신의 친구로 삼고 그들끼리도 친구가 되게끔 만들었던 방법을 서술하였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키루스는 영향력이 큰 시민들에게 자기들끼리 사랑을 나누게 하기보다 키루스 자신을 더 사랑하도록 만들려고 한 것(2.28)"이었다며 부정적 결과가 나타났음을 지적한다. 이어서 키루스의 행차가 신민의 존경을 이끌어내기 위한 기술로서 정리되었다. 또한 제사와 연회에서의 좌석 배정을 변경해나가는 것을 통해 귀족들의 명예를 조절하였다.

이후 키루스는 페르시아로 다시 여행을 떠나고, 메디아에서는 키악사레스의 딸과 혼인하게 되며 그것을 통해 메디아 전체를 상속받는다. 이는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매우 뚜렷하게 다른 부분이며, 이는 메디아의 군주로서도 키루스가 정통성을 얻게 하기 위한 장치다. 곧이어 키루스는 각 지역에 총독을 파견하여 그 지역에서 키루스와 같은 역할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다만 성채 주둔군과 수비대의 지휘관은 키루스 수하에 그대로 있었다. 이후 키루스는 원정을 통해 문명세계 전체를 장악하였다고 한다. 그는 맏아들 캄비세스에게 왕좌를 넘겨 주었다. 유언에서는 영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영원한 의 평가와 함께 부단히 이어지고 있는 인류의 평가도 중요한 것이라고 언급하여, 이 세계의 평가를 결국 의견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였던 플라톤과 대립되는 사고방식을 크세노폰은 드러내고 있다.

8장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키루스 사후 페르시아인들의 부패를 다룬다. 이 장이 후대에 추가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한국어판에서는 제기하고 있다.

평가편집

텍스트편집

  • 영문판 : 구텐베르크 프로젝트에 의해 관리되는 판본이다. [1]
  • 한국어판 : Xenophon, 이동수 옮김, 《키루스의 교육》, 파주: 한길사, 2015(개정판)
  • 한국어판 : 크세노폰 지음, 이은종 옮김. 《키로파에디아: 키루스의 교육》, 인천: 주영사, 2012

같이 보기편집


Cyrus 키루스 2세 (성경은 고레스, 히브리어: ???? Kore?, )

아케메네스 왕조의 시조로 페르시아 제국을 건설한 황제이다.

키루스 2세 또는 키루스 대제 (고대 페르시아: K?ru?, 바빌로니아어: Kura?, 엘람어: Kura?, 아람어: Kure?, 히브리어: ???? Kore?, 라틴어: Cyrus, 페르시아어: ????? ???? , 기원전 576년 또는 기원전 590년경 ~ 기원전 530년)는 테이스페스(Teispes)의 증손자이며 키루스 1 세의 손자이며 캄비세스 1 세의 아들이며 샤한샤이다. 그는 이란인들에게 건국의 아버지로 알려져있다. 성경에는 히브리어 발음에 근접한 고레스 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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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2세
K?ru?
Illustrerad Verldshistoria band I Ill 058.jpg
지위
아케메네스 제국의 초대 샤한샤
재위BC 550년 ~ BC 530년
재상하르파고스
이름
키루스 아케메네스
별호메시아
신상정보
국가아케메네스 제국
왕조아케메네스 왕조
부친캄비세스 1세
종교조로아스터교

페르시아인의 지도자로서, 그가 다스리는 동안 페르시아는 서남아시아,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을 정복하고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29년 동안 통치하면서 메디아, 신 바빌로니아, 리디아를 굴복시켰다.

어원편집

키루스라는 이름은 고대 문서 곳곳에서 다양한 언어로 발견된다.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인 크테시아스 플루타르크는 키루스라는 이름이 태양을 뜻하는 “쿠로스”에서 유래한다고 기록했다. 고대 페르시아에서 “태양과 같다”는 말은 “코르 (태양)+바시 (같다)”라고 쓸 수 있다는 것과 관련해서 설명했다.[1] 이 점은 고대 페르시아의 전설적인 첫 왕 잠시드의 “시드”가 태양을 뜻한다는 점에 견주어 볼 수 있다.

페르시아어에서 고레스는 ????? /k?uː??o?/라고 쓰고, 성서 히브리어에서는 고레스 (????)라고 쓴다.[2]

일생편집

유년시절편집

키루스는 기원전 576년 또는 기원전 590년경에 페르시아족 출신의 안산의 왕 캄비세스 1세와 메디아의 국왕인 아스티아게스의 딸인 만다네 사이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메디아 왕의 외손자에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에게 아들이 없어 어머니 만다네가 왕위를 이을 유력한 후계자라 메디아 왕족 가운데서도 매우 귀한 왕손이었지만, 정작 국왕 아스티아게스에게 심하게 박대를 받아 어린시절에는 목동 밑에서 목동처럼 자라다가 10세가 되어서야 간신히 친부모에게 돌아갈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이유를 두고 전설에 따르면 아스티아게스가 키루스가 자신의 왕위를 찬탈하는게 두려워해서 박대했다고 한다 어머니 만다네가 결혼하기전 꿈에서 소변을 보다가 소변이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꿨고 이후 키루스를 임신했을때는 또 만다네가 다리사이에서 포도나무가 자라 아시아를 뒤덮는 꿈을 꾸었다.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가 마고스(메디아의 사제)를 불러 이를 해몽해보자 만다네가 낳을 외손자가 아스티아게스를 몰아내고 왕이된다는 해몽을 들었고, 이 해몽이 두려웠던 아스티아게스는 만다네의 출산이 임박하자 제정업무를 하던 하르파고스를 불러 외손자의 살해를 지시한다. 이극고 키루스가 태어나고 하르파고스는 왕의 지시에 따라 자기집에 몰래 대려왔지만, 왕의 지시였다고해도 어린아이를 살해하는 것과 혹시나 만다네가 왕위에 올라 아들에 대한 보복이 두려웠던 하르파고스는 이 일을 다른사람에게 떠넘기로 마음을 먹는다. 그리고 아스티아게스의 목동 가운데 미트라다테스를 키루스를 산속에 버려 죽이라고 지시를 내린다. 그러나 미트라다테스도 어린아이를 죽이기가 마음에 걸리기는 마찬가지였고 아내 스파코가 키루스를 살려줄 것을 울며 간청하자 마침 스파코가 사산했던 아이를 대신 산에 버리고 키루스는 목동의 아들로 숨겨 키운다.

그리고 목동의 아들로 자란 키루스가 10세가 되던 해에 키루스는 친구들과 왕과 신하가 되는 역할놀이를 하던 중 키루스가 왕으로 뽑혔는데 친구들 가운데에는 메디아의 귀족출신 아이가 있었고 자신은 놀이라도 목동인 키루를 왕으로 섬길수 없다고 하자 키루스는 귀족 아이와 싸워서 때려버린다. 얻어 맞은 귀족아이는 아버지 아르템바레스에게 돌아가 목동 아들에게 얻어 맞은 것을 하소연하고, 아르템바레스는 목동들의 주인인 국왕 아스티아게스에게 이 사실을 고했고, 아스티아게스는 귀족 아이를 때린 목동 아이 키루스와 그 (양)아버지 미트라다테스를 불러 추긍한다. 그러나 키루스는 국왕 앞에서 당당히 항변했고 그런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아스티아게스는 그 목동 아이가 10년전에 죽인줄 알았던 외손자와 유사함을 느끼고는 목동 미트라다테스와 신하 하르파고스를 심문했고 결국 아스티아게스는 그 목동 아이가 자기 외손자임을 알게된다. 심문 후 아스티아게스는 자신을 속인 하르파고스의 아들을 죽여 처벌한 뒤 이어 마고스들을 불러 다시 키루스의 처분을 물었고 마고스들은 키루스가 놀이라도 왕이 되었으니 더이상 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의 왕위를 위협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이에 안심한 아스티아게스는 키루스를 친부모가 있던 페르시아로 보냈다고 한다.

메디아의 정복편집

키루스는 성년이 되자 외할아버지 아스티아게스에게 반란을 준비한다. 키루스는 기원전 554년, 아스티아게스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켜 메디아와의 전쟁을 시작했다. 이후 키루스는 아스티아게스에게 아들을 잃은 하르파고스의 도움을 받은 끝에 기원전 549년 엑바타나를 정복함으로써 메디아 제국을 정복하였다. 키루스는 나라의 이름을 메디아에서 페르시아로 바꾸었다. 아케메네스 제국의 시작인 셈이다.

리디아의 정복편집

메디아의 정복이후 리디아의 왕 크로이수스와 전쟁이 벌어졌다. 리디아가 먼저 페르시아의 도시를 공격했다. 키루스는 먼저 리디아 서쪽에 있는 이오니아 국가들에 리디아에게 반기를 들라고 제안했으나 거절당하자 리디아로 진격하여 들어갔다. 그는 가는 곳마다 승리로 이끌었고 마침내 기원전 547년경 리디아의 수도 사르디스까지 진군했다. 키루스는 하르파구스의 조언으로 낙타부대를 전면에 배치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는데 이로써 낙타냄새에 익숙하지 않은 리디아 기병을 효과적으로 물리칠 수 있었다고 한다. 기원전 546년 리디아 왕 크로이수스는 대패하였고 사르디스는 함락되었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는 키루스가 크로이수스를 살려주고 계속 참모로 데리고 다녔다고 하는데 다른 기록에는 처형당한 것으로 되어있다. 리디아 왕의 신하국이던 에게 해 해안의 그리스계 이오니아 도시들 또한 키루스에게 복속되었는데 이 도시들의 성벽을 공격할때 공성전에는 이때까지 그리스인들이 알지 못했던 토목공사를 이용한 공격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대략 기원전 542년까지 이 도시들은 페르시아에게 복속되었다.

한편 설화에 따르면 키루스는 리디아 정복 직후 크로이소스에게 대국이 망한다는 신탁을 주어 전쟁을 일으키게 만든 델포이에게 크로이소스를 묶었던 족쇄를 공물로 바치며 엉터리 신탁으로 전쟁을 부추긴 것을 조롱하자, 델포이의 신녀들은 크로이소스는 누가 멸망할 것인지를 묻지 않았으며, 원래 선조의 왕위강탈로 멸망할 운명을 아폴론을 잘섬겨서 몇년간 늦췄다고 변명을 했다고 한다.(1권 90~91장)[3]

신바빌로니아의 정복편집

기원전 539년 키루스의 군대는 신바빌로니아의 왕 나보니두스에 대한 백성들의 불만을 구실로 구바루 장군을 지휘관으로 삼아 바빌로니아를 침략했다. 이 원정은 비교적 별다른 저항 없이 같은해 10월 당시 고대 세계최대의 도시이자 바빌로니아의 수도인 바빌론의 함락으로 끝났다. 많은 바빌로니아 사람들이 나보니두스에게 등을 돌렸기 때문에 키루스의 정복은 신속하고 저항없이 이루어졌다. 신바빌로니아는 키루스에게 정복당하기 전 바빌로니아를 비롯하여 팔레스타인의 유다 왕국 시리아 왕국등 많은 왕국들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키루스의 수중에 떨어졌다.

이때부터 키루스 2세는 자신을 "바빌론의 왕, 수메르 아카드의 왕, 세계의 사면의 왕"으로 칭했다.

키루스 2세는 그의 특유의 관용정책으로 바빌론에 잡혀와있던 유대인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하고 유대인의 신성한 예루살렘 성전을 짓도록 허락했다.[4]

죽음과 후계편집

고대의 역사가들에 따르면 키루스는 카스피해 동쪽 중앙아시아의 유목민과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한 것으로 나온다.[5]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키루스는 조언자의 조언을 무시하고 동쪽으로 진군해 마사게타이족이라고 하는 유목민족과의 격렬한 싸움에서 전사했다고 하는데 마사게타이족을 이끄는 여왕이 자신의 아들이 키루스에게 죽자 그에 대한 복수로 키루스를 공격했고 결국 키루스는 전투 중 전사했다.

기록에 따르면 키루스의 죽음은 기원전 530년 8월경이라고 한다. 죽은후 키루스의 시신은 파사르가다에로 옮겨져 성대하게 장사지냈고 그의 아들 캄비세스 2세가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파사르가다에는 폐허가 되었지만 그의 무덤은 아직도 현존하고 있다.

캄비세스 2세는 아버지의 확장정책을 계승해 이집트를 복속하는 데 성공했으나 7년 만에 죽었고, 키루스의 집권 이전에 페르시아를 통치한 아르사메스의 손자인 다리우스 1세가 캄비세스 2세의 사후 혼란을 수습하고 강력한 황제로 등장했다.

저술 속의 키루스편집

바빌로니아에 잡혀 있던 유대인을 해방하는 키루스 2세

키루스는 종교적 관용과 다른 민족에 대한 배려가 뛰어난 관대한 군주로 알려져 있다. 구약성경 에스라(공동번역 에즈라)(1:1~4)에는 "고레스"로 나오는데 바빌론 유수로 바빌로니아에 잡혀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예루살렘 성전(제2성전)을 세울 수 있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약성경 이사야(45:1~4)에도 등장하는데, "나 여호와는 나의 기름 받은 고레스의 오른손을 잡고 열국으로 그 앞에 항복하게 하며 열왕의 허리를 풀며 성 문을 그 앞에 열어서 닫지 못하게 하리라"라는 구절을 통해서 키루스를 움직여 여러 나라를 정복한 분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시고, 그것을 키루스에게 알게 하셔서, 키루스로 하여금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하게 했다는 성경의 기록이 있다.[6]

키루스는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물론이고 그리스에서도 이상적인 군주이자 자비로운 대왕으로 존경을 받았는데 크세노폰등 많은 그리스인들이 그를 군주의 모범으로 묘사하고 있다. 어린 시절 할아버지인 메디아 황제 아스티아게스로부터 고난을 받아 양치기에게 길러졌으며 폭군인 외할아버지를 타도하고 대 제국을 세운 그의 일대기는 전형적인 영웅신화로 각색되어있다. 그러나 크세노폰은 저서 《키루스의 교육》에서 그가 그의 외삼촌이자 아스티아게스의 아들인 키악사레스에게서 메디아의 왕위를 물려받은 것으로 서술하였다. 이는 그가 정통성을 물려받은 군주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키루스의 이야기를 크세노폰의 가치관에 따라 변화시켰기 때문인 것 같다.

그의 통치기간 동안 그는 다민족국가인 페르시아 대제국의 융화를 위해 종교적 관용정책과 포용정책을 표방했으며 피정복민들에게서 기꺼이 배우는 자세를 취했다. 정부형태와 통치방식에서도 다른 민족의 것을 차용하여 그것을 새로운 제국에 맞게 응용했는데 이것이 그의 뒤를 이은 다리우스 1세등에게까지 전해져서 페르시아 제국의 문화와 문명을 형성해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고전 그리스 시대의 저술 《키루스의 교육》은 근대에 이르기까지 널리 읽혔기 때문에, 크세노폰에 의해 다시 서술된 그의 일대기는 근대에까지 큰 영향을 끼쳐왔다. 근대에 와서도 키루스는 마키아벨리에 의해 자신의 실력, 즉 무력으로 군주가 되었던 군주의 전형적인 사례로 인용된 바 있다.

키루스 리더십에 대한 저서도 한국에 출판될 정도로 키루스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지는 상황이다.[7]

설화 속의 키루스편집

이슬람의 전승에 의하면 다니엘이 키루스의 외삼촌라고 한다(성경의 다니엘서에 나오는 다니엘이 외삼촌이라면 위에 설명한 외할아버지인 아스티아게스와의 관계도 앞뒤가 맞지 않는 거짓이된다. 그러므로 이슬람의 전승은 사실이 아니다).

파사르가다에에 남아있는 키루스 대제의 무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키루스의 유산편집

  • 키루스에 대한 내용으로 가장 유명한 것은 파사르가다에에 있는 키루스 대제의 무덤이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 최초의 인권선언이라고 알려져 있는 키루스실린더가 대영박물관 52호실에 보관되어 있다.
  • 알렉산더 대왕(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도 어려서부터 크세노폰의 《키루스의 교육》을 읽으면서 키루스를 존경했다고 한다. 크세노폰은 키루스를 전쟁, 통치, 능력의 영웅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알렉산더가 키루스의 무덤을 방문했을 때, 존경의 의미로 키루스 왕의 무덤을 잘 꾸몄다고 한다.[8]
  • Patrick Hunt 교수는 키루스에 대하여 "만약 오래 전부터 위대한 인물을 꼽으라고 한다면, '키루스 대제'이야말로 '대제'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 몇 안되는 왕이 될 것이다. 키루스 대제는 그 당시 고대 제국이 볼 수 있는 세계 중에서 가장 큰 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왕이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다.[9]

참고 문헌편집

  1.  ; Plutarch, Artaxerxes 1. 3 [1]; Photius, Epitome of Ctesias' Persica 52 [2]
  2.  “히브리어”. 2019년 2월 7일.
  3.  헤로도토스. 《역사》.
  4.  “성경은 사실이다 - 역사학을 통한 증거”. 2017년 2월 18일. 2019년 2월 21일에 확인함.
  5.  “[역사 속의 인물] 정복과 관용의 고대 페르시아 황제, 키루스 대제”. 2013년 10월 17일. 2019년 2월 21일에 확인함.
  6.  “고레스 - 하나님의교회 말씀과진리”. 2019년 2월 21일에 확인함.
  7.  수정: 2016.04.08 10:25:02, 입력: 2016 04 07 10:28:01 (2016년 4월 8일). “키루스 대왕의 리더십··· 진정한 리더의 덕목은 뭘까”. 2019년 2월 21일에 확인함.
  8.  Wilcken, Ulrich; Borza, Eugene N. (1967). 《Alexander the Great》 (영어). W. W. Norton & Company. ISBN 9780393003819.
  9.  “Engineering an Empire” (영어). 2018년 8월 4일.
전임
아스티아게스
제1대 페르시아 제국 샤한샤
기원전 590년 - 기원전 530년
후임
캄비세스 2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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