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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조선 문명(古朝鮮文明), 인류 5대문명』[ 1~10회] - 신용하박사 (서울대 명예교수)
06/04/2020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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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박사 (서울대 명예교수)의 인류 5대문명,

『고조선 문명(古朝鮮文明)』[ 1~10회]

프로파일 ohyh45 ? 2020. 2. 7. 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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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의 인류 5대 문명, 『고조선 문명(古朝鮮文明)』을 더 보실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세요


신용하의 인류 5대 문명,『고조선 문명(古朝鮮文明)』[ 1~10]https://blog.naver.com/ohyh45/221800153134

① 인류 초기 ‘고조선문명’의 발견, ② 농업혁명과 기마문화의 형성, ③ 동아시아 최초 청동기 문화

④ 동아시아 金문화의 원류…, ⑤ 밝족의 한·예·맥 3부족 분화, ⑥ 고조선 태동시킨 ‘환웅의 군장국가’

⑦ 고조선 태동과 정치적 기반, ⑧ 고조선의 발전과 영역확대, ⑨ 새로 찾은 고조선 연방 고죽국

⑩ 中에 세운 고조선 분국


신용하의 인류5대문명,『고조선 문명(古朝鮮文明)』[11~회]https://blog.naver.com/ohyh45/221801144583

① BC 8C 조중전쟁과 국경선, ②고조선도'4개 세습계급사회'




[대동재단] 한민족의 기원 및 형성과 고조선 문명의 탄생 - 신용하 서울대 명예교수

제18차 대동재단 포럼_180911  Sep 12, 2018  (2020. 6. 4 J-blog 편집자 추가 게재)

마로니에방송

Sep 12, 2018



1.인류 초기 ‘고조선문명’의 발견

- 동굴 많은 한반도서 빙하기 견딘 인류, ‘동아시아 문명’ 창조하다


해 가장 먼저 뜨는 동아시아로 - 인류 선구자들 대장정끝 정착

옛 한반도 한강·대동강 일대 - 사람들 모여드는 곳으로 부상

농업 발달·인구밀집·지적집단 - 세 조건 갖춘 한반도 문명 발생

▲ 최후 빙기 때 동아시아 해안선과 구석기인의 이동 방향.


최후 빙기에 서해가 얼어 없어졌고 북위 40도 이북의 연해주는 동토였다. 고한반도는 유라시아 대륙 동쪽 끝의 유일한 동해안이었으며, 구석기 신인이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이동해 오다가 바다에 막혀 정착한 종착지였다. 신용하 교수 제공


우리는 학교에서 인류 최초의 독립 문명으로서 ① 수메르 문명(약 5500년 전) ② 이집트 문명(약 5100년 전) ③ 인더스 문명(약 4200년 전) ④ 고중국(황하) 문명(3600년 전)의 4대 문명을 가르치고 있다. 예컨대, 아널드 토인비는 인류 초기에 독립 문명으로서 이 4대 문명이 주변으로 파급돼 그 후 인류 고대 위성(衛星) 문명들을 형성·발전시켜서 인류가 문명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것은 낡고 너무 부족한 학설이다. 유라시아 대륙 가장 동쪽에, 고중국 문명 형성의 기원이 된 것으로, ‘고조선 문명’(약 5000년 전)이라는 거대 문명이 하나 더 있었다.


이것은 태양이 가장 먼저 솟는 땅을 찾아 동방 끝으로 이동해 왔다가 정착한 고(古) 한반도 출신 신석기 말기·고대 초기인들이 신석기 시대 ① 한강 문화 ② 대동강 문화 ③ 요하(遼河) 문화를 하나의 인과적 체계로 묶어서 규모가 큰 찬란한 문명을 창조한 것이다.


이것은 세계사를 바꿔 써야 할 새로운 문명이다. 이것이 ‘고조선 문명’이다. 토인비도 6개의 유산된 초기 문명이 더 있었다고 유보해 뒀었다. 이번 문화일보 연재에서는 이 새 인류 문명을 탐구해 나가기로 한다.


고인류학자들의 통설에 의하면, 최초의 인류 종(種)은 약 500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출현해 진화하면서 먼저 유라시아 대륙으로 퍼져나갔다.


약 250만 년 전에 손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손 쓴 사람(homo habilis)’이 됐으며,

약 170만 년 전에 꼿꼿하게 걷게 된 ‘곧선 사람(homo erectus, 原人)’이 됐고,

약 20만 년 전에 돌을 깨 불을 사용하는 ‘슬기 사람(homo sapiens)’이 됐으며,

약 10만 년 전에는 지혜가 더욱 발전한 ‘슬기슬기 사람(homo sapiens sapiens, 新人)’도 출현하게 됐다. 이 ‘슬기슬기 사람’의 두뇌 용량이나 사고 능력은 현대인과 완전히 동일한 것으로 설명돼 있다.


인류가 유라시아 대륙으로 건너와서 각지로 이동하기 시작한 것은 ‘곧선 사람’ 단계부터다. 그러나 활발한 이동은 ‘슬기 사람’과 ‘슬기슬기 사람’ 단계라고 설명되고 있다. 진화고고학에서는 ‘곧선 사람’부터 이들을 모두 합쳐서 ‘구석기인’이라고 호칭한다.


이 시기는 지구 전체가 더워서 시베리아에서도 아열대 식물 열매가 열리고 매머드와 공룡이 살았다. 어디에서나 식료를 얻을 수 있었으므로, 구석기인들은 한곳에 정착하지 않고 인간 무리(bands)를 이뤄 유라시아 대륙의 여러 방향으로 분산 이동했다.


구석기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 중 하나는 맹수들과 함께 매일 찾아오는 밤의 어둠이었다. 그러므로 가장 용기 있고 호기심 많은 구석기인 무리는 태양이 맨 먼저 솟아올라 어둠을 사라지게 하고 밝은(光明) 아침이 먼저 찾아오는 해 뜨는 동방을 향해 천천히 이동하는 형세를 이루게 됐다.


고한반도와 연해주는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이고 그 동쪽은 깊은 태평양 바다(동해와 오호츠크해)다. 그러므로 이곳은 해(태양) 뜨는 동쪽을 향해 수만, 수십만 년에 걸쳐 동쪽으로 이동해 온 구석기인 무리의 인류사적 대장정이 누적된 ‘종착역’(terminal) 같은 지역이었다.

▲ 빙기 때 해안선과 슬기 사람의 주 이동 경로(20만∼5만 년 전).

▲ 인류 최초 4대 독립 문명에 고조선 문명(그림의 A 부분)을 첨가했다. B는 수메르 문명 지역.


유라시아 대륙 동단 고한반도와 연해주 지역에 구석기인이 처음 도착한 것은 100만∼70만 년 전 무렵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의 가장 오래된 구석기 유적으로, 평안남도 상원군 흑우리 검은모루 유적(약 100만∼70만 년 전)과 절골 유적(약 93만 년 전), 충북 단양군 도담리 금굴 유적(약 70만 년 전)이 이미 발굴돼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이 밖에 한반도·만주·연해주 일대에서 발굴 보고된 주요 구석기 유적이 50개가 넘는다.


그러나 약 5만3000년 전 구석기 인류에게 대재앙이 닥쳐왔다. 지구 기후의 급격한 변화로 혹한의 ‘최후 빙기’가 닥쳐온 것이다. 태양광선의 95% 이상이 먼지에 가려져 5% 이하만 지구 표면에 닿았다. 이 시기에는 유라시아 대륙의 북위 40도 이북 지역은 긴 겨울에는 모두 얼어붙은 동토(凍土)가 돼 생물이 생존할 수 없었다.


예컨대 우랄 지역의 1월 평균 온도는 영하 30도였다. 수마트라 섬 적도의 평균 온도는 8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유라시아 대륙 구석기인들은 북위 40도 이남의 생존 가능한, 따뜻한 지역의 동굴을 찾아 이동한 소수 구석기인을 제외하고는 거의 사멸했다.


동아시아에서도 최후 빙기에 북위 40도 이북 지역에서는 인류가 상주(常住)하지 못했다. 물론 여름에는 사냥감을 뒤쫓아 북위 40도 이북에서 사냥하면서 계절적 일시 거주는 했다. 그러나 북위 40도 이북에 집단 상주지를 형성하고 문명을 만들지는 못했다.


동아시아의 북위 40도선은 한반도 신의주와 중국 베이징(北京)을 지나간다. 그러므로 고한반도의 압록강 최하류와 고중국의 베이징 이북은 최후 빙기 약 4만 년 넘게 인류가 상주할 수 없는 얼어붙은 동토였다.


그러므로 한국민족이 시베리아 고(古)아시아족에서 기원했다거나, 톈산산맥 또는 바이칼 호수에서 기원해 내려왔다는 학설은 기후변화를 모르던 시절의 낡은 학설에 불과하다.


동아시아의 북위 40도 이남 지역에서 구석기인들이 혹한을 피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가장 많은 지역이 바로 산지가 비교적 많은 고한반도였다. 한반도의 자연 동굴 총수의 90% 이상이 석회암 동굴이다. 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카르스트(Karst) 지형 석회암 지대는 한반도 중부 차령산맥·소백산맥 일대에 가장 잘 발달해 있다.


이 지역이 고한반도 ‘제1동굴지대’다. 그다음이 멸악산맥 일대의 ‘제2동굴지대’다. 중국에서는 남방 양쯔강 유역과 광시(廣西)성·구이저우(貴州)성·윈난(雲南)성 지역에 가야 석회암 동굴 지대가 나온다. 고한반도는 최후 빙기 겨울철 동토에 연접한 북방한계선의 매우 추운 지역이었다.


그럼에도 동아시아 최대 석회암 동굴 밀집 지역이었기 때문에, 기존 고한반도의 구석기인과 유라시아 대륙 동남부 해안을 따라 남방에서 꾸준히 이동해 올라온 구석기 신인(슬기슬기 사람)이 합쳐져서, 이 기간에도 종착지 고한반도는 세계 인구밀집 지역의 하나가 됐다.


또한 최후 빙기에 서해가 얼어 없어져 고중국 관내와 이어졌고, 대만과 중국 본토와도 이어졌으며, 북위 40도 이북의 연해주는 동토였기 때문에, 고한반도는 전체 유라시아 대륙의 가장 동쪽 끝 유일한 동해안이었다.


최후 빙기에도 구석기 신인이 태양이 솟는 동쪽을 향해 꾸준하게 이동해 들어오다가 바다에 막혀 더 동쪽으로 갈 수 없어서 정착하는 종착지가 고한반도였다. 약 1만2000년 전(일설 1만2500년 전), 인류는 최후 빙기의 대재난 시대를 견뎌내고 새 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지구 주변의 먼지가 걷혀 태양광선이 모두 땅에 닿으면서 기후가 대체로 오늘날처럼 온난해졌다. 지구 기후가 온난화되자 유라시아 대륙의 동토에 인접해 있던 구석기인들은 모두 동굴에서 나와 부근 강변과 해안에 움막을 짓고 새로운 용구로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를 만들어 사냥·어로·식료 채집을 하면서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 구석기인이 신석기인으로 진화하게 된 것이다.


신석기 시대에 인류 최초 문명 탄생의 첫째 조건이 된 것은 신석기인들의 농업경작(agriculture) 시작이었다. 종래 사냥과 채집으로 한 가족을 부양하는 데 수천 에이커의 토지가 필요했던 데 비해, 농경을 시작하면서 약 25에이커의 토지로 충분해졌다.


그러나 농업경작이 어느 곳에서나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비옥한 토지, 온난한 기후, 풍부한 물과 함께 야생종(野生種)을 인공적으로 재배하고 육성하려는 의지를 가진 현명한 인간 집단이 필요했다.


농업경작은 신석기인을 특정 지역에 장기간 정착시켰다. 인간의 유랑 시대를 정착 시대로 바꾼 것이다. 농경 마을과 읍락이 형성되고 이것은 대대로 전승됐다. 신석기인의 토지에 결부된 농업경작의 장기 정착은 인류 사이 수천 개의 상호 소통되지 않는 언어족을 만들어 냈다.


사회학적으로 신석기 농업혁명은 완전히 새로운 혁명적 사회변동을 가져왔다. 식량 생산 공급의 잉여 증가는 인구 증가를 결과했다.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분배 과정에서 갈등과 투쟁을 자주 발생시켰다. 갈등과 투쟁을 해결하기 위해 권력을 위임받은 우두머리와 그 집단이 출현했다.


가족들이 집합해 씨족이 형성되고, 씨족들이 통합해 부족이 형성됐다. 부족들 사이에 갈등과 투쟁이 일어나면, 패배한 부족의 포로는 노예가 되고 승리한 부족장과 그의 무장들은 노예를 소유하는 세습 귀족이 돼, 신분과 계급이 발생했다.


부족장들은 다른 부족들을 통합해 대부족장 또는 군장(chief)이 되고 준(準)국가인 군장사회(chiefdom)를 형성했다. 강력한 군장은 다른 군장을 통합해 고대 국가를 형성했다.


또한 잉여 생산물의 축적은 농업에 통합돼 있던 수공업을 분리시켰고, 농산물과 수공업 제품의 교환을 중심으로 한 상업이 분화됐다. 수공업의 발전으로 강한 생산용구와 무기를 만들기 위해 자연동과 주석의 합금인 청동기를 발명·제조하기 시작했고, 이어서 철기 제조가 시작됐다.


이 최초의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인류는 최초의 문명을 탄생시켰다. 인류 최초 문명 탄생의 첫째 조건이 바로 신석기 농업혁명, 청동기와 철기 제조, 고대 국가의 형성, 신앙의 통일, 언어의 통일과 문자 발명, 초기 과학과 문화예술의 성립 발전 등이었다.


따라서 인류 최초의 문명은 말기 신석기인이 거주한 모든 지역에서 균등하게 탄생한 것이 아니라, 매우 일찍 농업경작이 성립 발전하고, 인구가 밀집되고, 지적 성능을 활용한 과학적 수공업 기술이 성립되고, 고대 국가가 형성된 특정 지역에서 형성되고 탄생했다.


이 최초의 특정 지역 구심점이 유라시아 대륙의 두 곳에 뚜렷이 출현했다. 그 하나가 동방 고한반도의 한강과 대동강 유역에 성립돼 전파되기 시작한 ‘고조선 문명’이다. 다른 하나가 서방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초승달 지역에 성립돼 전파되기 시작한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이다.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1.인류 초기 ‘고조선문명’의 발견 - 동굴 많은 한반도서 빙하기 견딘 인류, ‘동아시아 문명’ 창조하다 / 문화일보,2019. 5.15.


2. 농업혁명과 기마문화의 형성

- 1만2500년前 한강유역서… 인류 최초 ‘쌀·콩·깨 재배’ 시작됐다


古한반도 중부는 인구밀집지역 - 사냥·채집만으로는 ‘식량 부족’

남한강·금강유역 경작에 적합 - ‘밥+콩장+깨양념’ 食문화 형성 - 밀 재배한 서양은 빵문화 생겨

벼, 기원전 28세기경에 中으로 - 기원전 7 ~ 5세기엔 日에 전파

부여, 동방 첫 ‘말 가축화’ 성공 - 전체 고조선 문명에 목축 전파 - 앞선 기마문화 덕에 영토 넓혀

▲ <그림 1> 한강 유역 출토 신석기 벼·탄화미.

▲ <그림 2> 한강문화의 신석기시대 재배 농경의 발상지역.

▲ <그림 3> 옥천 남곡리 1호 농경기념 선돌(왼쪽)과 수북리 선돌.

▲ <그림 4> 단립벼의 재배 기원지와 보급 경로도.


약 1만2000년 전(일설 1만2500년 전) 지구 기후가 오늘날처럼 온난화되자, 고(古) 한반도 구석기인들은 동굴에서 나와 인접 강변과 해안에 ‘움막’을 짓고, ‘마제석기(磨製石器)’와 토기를 사용하면서 새로운 신석기 시대를 열었다.


고한반도 중부 초기 신석기인 인구밀집 지역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식료 부족’이었다. 사냥·어로·채집만으로는 과잉인구의 부양이 불가능했다. 식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우선 야생식물의 종자와 뿌리를 채용해 식료 생산을 위한 ‘농업경작’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고한반도 중부 제1동굴지역의 동굴 밖 최근접한 남한강과 금강 상류 유역은

①석회암 동굴 최근접 하천 유역에 비옥한 충적층 평야가 있었고

②세계적으로 식물 종류가 매우 많아 온대작물 농업경작의 발생에 매우 적합한 지역이었다.


이러한 유리한 조건에서 식료 부족 문제의 대책으로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의 저지대에서는 실제로 신석기 시대의 시작과 동시에 1만2000년 전쯤부터 오곡, 특히 단립벼의 재배가 시작됐다.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사이의 충북 청원군 소로리에서 볍씨 18톨이 충북대 박물관(관장 이융조)에 의해 발굴됐는데, 농과학자들의 조사 결과 초기 재배벼임이 확인됐다. 서울대 기초과학연구소에서 소로리 볍씨가 포함된 토탄층 윗부분을 탄소측정한 결과 1만2500년 전으로 측정됐다.


이 소로리 단립벼 볍씨와 토탄층을 분리해 볍씨 8톨을 미국 애리조나대 고고연구소에서 탄소측정한 결과 토탄의 연대가 1만2552±90년 전, 고대벼가 1만2500±150년 전으로 측정돼 나왔다.


이 사실은 한반도의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유역에서는 신석기 시대가 시작되자마자 즉시 ‘단립벼’의 경작이 시도됐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 후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강·금강 유역을 비롯해 고한반도의 크고 작은 강변에서는 강 하류에까지 곡물 출토 시계열이 성립되고 5000년 전쯤까지 재배 공간이 대폭 넓어지면서 단립벼·콩·팥·밀·보리·조·기장·수수·깨 등 곡물이 출토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 고한반도 ‘단립벼’ 경작의 발생 기원 지역을 지도에서 그려 보면 <그림 2>와 같다. 이 지역에서 동시기에 오곡이 농기구들과 동반 출토되므로, 이 지역이 동방 신석기 농업혁명의 기원지로 판단된다.


국립문화재연구소가 고한반도 출토 신석기 시대 토기 몇 점에 박힌 식물들의 압흔을 탄소측정했더니, 신석기 시대 ‘조기’ ‘전기’부터 조·기장·콩·들깨를 재배해 식용하고 있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콩’ ‘콩과 작물’이 신석기 초기부터 재배됐다는 사실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오산리 출토 신석기 초기 토기에 박힌 ‘콩’과 압흔 토기에 부착된 탄화물을 연대측정한 결과 절대연대 7175∼7160년 전과 절대연대 7000∼6940년 전으로 측정돼 나왔다.


즉 고한반도에서는 콩과 팥이 기원전 53세기(7175∼7160년 전)경에 이미 재배됐음이 확인된다. 이것은 인류 문명사에서 획기적인 것이다. 중국에는 ‘콩’이 기원전 7세기 고조선 후국 산융에서 도입됐다. 서양에는 ‘콩’이 18세기 초엽 동방에서 들어왔다고 기록돼 있다.


출토 곡물들로 종합해 보면, 고한반도의 신석기 시대 한강 문화에서는 약 1만2000년 전부터 신석기 농업혁명이 시작돼 약 5000년 전까지 단립벼·조·기장·콩·팥·수수·밀·보리·깨(들깨와 참깨) 등의 농업경작이 크게 발전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중에서 고한반도 신석기 농업혁명에서만 볼 수 있는 독특한 것은 ‘단립벼’와 ‘콩·팥’과 ‘깨’의 경작이다.


당시 고한반도 신석기인들은 첫 ‘농업경작’의 큰 성공을 스스로 인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금강 상류에 신석기 시대 ‘농업혁명(농경 성공) 기념 선돌’이 2개나 남아 있다. 충북 옥천군 남곡리 개미재에 밭고랑을 새긴 1개의 선돌(남곡리 1호 선돌)과, 수북리 동정마을에 있는 다른 1개의 선돌(수북리 선돌)이 그것이다.(<그림 3> 참조)


문자가 없던 시대이므로, 농업혁명(농업경작)의 위대한 업적을 ‘논밭고랑’ 그림으로 표시한 기념비 선돌이었다. 대전 괴정동 출토 ‘방패형 농경문 청동기’(약 2600년 전)에 새겨진 밭 가는 농부 그림을 보면, 이 선돌의 줄그림이 논밭고랑임을 확인할 수 있다.


고한반도의 중부에서 시작된 신석기 농업혁명(농업경작)은 모든 한반도 강변과 해안에 주민 이동과 함께 전파됐다. 농업경작은 태양의 ‘햇빛’과 ‘따뜻한 온도’의 은혜에 직결돼 있으므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매우 일찍 ‘태양(해) 숭배’ 사상을 더욱 갖게 됐다. 그들은 ‘태양’(해)이 제공하는 ‘밝음’(광명·光明)을 숭상했으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게 됐다.


그들은 또한 족장과 자기들을 ‘태양’의 후손, 즉 하늘(天)의 후손으로 생각해 ‘천손의식’을 갖게 됐다. 또한 그들은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애경했다. 후에 그들과 그 후예들은 자신들을 태양의 ‘밝음’을 의미한 “‘밝’족”으로 자처했고, 고대 중국인들은 이를 차음해 ‘발인(發人)’이라고 표기했다.


인류 문명사에서 최초의 신석기 농업혁명은 두 곳이 구심지가 돼 일어났다. 그 하나가 약 1만2000년 전부터 고한반도 중부 남한강과 금강 상류 지역에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인 ‘밝족’이 단립벼(쌀)·콩·수수·조·기장·깨 등의 농경에 성공해 주변 지역으로 전파한 농업혁명이었다.


다른 하나는 약 1만1500년 전에 비옥한 티그리스강과 유프라테스강 유역에서 수메르족이 밀·보리 농경에 성공해 주변 지역에 전파한 농업혁명이다. 실증적으로 발굴 보고서들을 읽어 보면, 단립벼 재배는 고한반도에서 기원해 기원전 28세기경에 중국 산둥반도와 중국 동해안 일대로 전파됐다. 남쪽 일본 열도로는 기원전 7∼5세기경 한반도에서 일본 규슈 지방 등으로 전파됐다(<그림 4> 참조).


중국 학자들도 농업경작을 고조선(이때는 동이(東夷)족으로 표현)에서 도입했음을 기록들에 남겼다. 중국에 농경을 처음 가르쳐 준 것은 동이족인 신농(神農)족이며(‘사기(史記)’ ‘부사년(傅斯年)’), 역시 동이족인 백익(伯益)이 쌀 농경과 목축을 가져와 가르쳐 줬다(‘사기’).


동이족인 근모(根牟)족은 밀·보리 재배를 가르쳐 줬다(중국학자 장푸샹(張富祥)). 가장 질긴 고급 명주와 그 직조 방법도 동이족이 전수해 줬다고 기록돼 있다(‘상서정의(尙書正義)’).


인류 최초 5대 독립 문명은 모두 독특한 농경문화를 문명의 기초로 해 시작됐다. 고조선 문명은 ‘단립벼(및 밀·보리)+콩+깨’ 재배의 농경문화 유형과, 이에 의거한 ‘쌀밥(및 밀·보리 식료)+콩장(간장+된장)+깨 양념(향료)’의 독특한 식문화 유형을 형성했다.


이와 달리 수메르(메소포타미아) 문명은 ‘밀’(및 맥류) 재배와 ‘빵’ 식문화를 형성해 이집트문명과 그리스·로마를 거쳐서 서양에 전파됐다.


인도 문명은 ‘장립벼’ 재배와 장립벼 쌀밥 식문화, 중국 문명은 ‘잡곡’ 재배와 만두·국수 식문화, 아널드 토인비가 뒤에 독립 문명으로 추가한 마야·아즈텍 문명은 ‘옥수수’ 재배, 잉카 문명은 ‘감자’ 재배와 그에 따른 식문화 유형들을 각각 형성했다.


고조선 문명의 식문화는 단립벼 ‘쌀’로 ‘밥’뿐 아니라 무려 200여 종의 떡(이종미 교수)과 과자 등 온갖 파생 음식을 만들었고, 설탕(조청·엿)과 각종 술도 쌀로 빚어냈다. 염분을 소금 가루로 직접 섭취하지 않고 매우 독특하고 현명하게 콩 식물단백질과 융합시켜 섭취하는 콩장(간장·된장) 식문화도 창조했다.


깨(참깨·들깨)는 지금도 주로 한국인이 애호하는 독특한 향료·양념이다. 중국과 일본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이와 유사한 식문화는 사실은 고조선 문명의 식문화가 전파된 것이다.


고조선 문명의 농경과 관련된 또 하나의 큰 특징은 인류 문명사에서 매우 이른 시기에 기마문화를 형성·발전시킨 것이다. 고대의 순화된 말(馬)은 크게 나누면 고조선 문명의 ‘동북아시아종 말’(속칭 ‘몽고말’, 키 약 130㎝)과 수메르 문명의 ‘서남아시아종 말’(속칭 아랍말, 키 약 150㎝)의 두 종류다.


동북아시아종 말은 키가 작지만 추위에 매우 강하고 장거리 선수다. 서남아시아종 말은 크지만 추위와 병에 약한 단거리 선수인데, 장거리를 달리면 쓰러져 죽는다.


동북아시아종 말은 고조선 후국 부여가 최초로 가축화해 ‘말’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부여는 야생동물의 가축화가 선진적으로 진행된 농목(農牧) 국가였으며, 심지어 관직 명칭까지 마가(馬加·加는 장관 또는 지방 제후 호칭), 우(牛)가, 구(狗)가 등 가축 이름을 사용했다.


현재 한국 민속놀이의 하나로, 가축들 이름(모=말, 윷=소, 걸=양, 개=개, 도=돼지)에서 딴 윷놀이도 부여의 민속이다. 18세기 증기기관 발명에 의한 기계동력 사용 이전까지, 인류 문명 교통·운수의 주동력은 ‘말’의 동력, 즉 마력(馬力)이었다.


‘마력’을 가진 자는 심지어 세계 정복에 나설 수도 있었다. 이 인류 최초의 자연 동력 ‘마력’의 발견·발명자가 동방에서는 고조선 문명(몽고말)이었고, 서방에서는 수메르 문명(아랍말)이었다.


부여에서 가축화된 ‘말’은 전체 고조선 문명권에 전파돼 목축을 선도했다. 특히 실위족(원몽골족) 등 유목민족들은 ‘말’을 도입해 양·염소 등 가축몰이에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부여와 실위는 기마민족 국가의 면모를 갖췄다.


고조선의 첫 도읍지 강동 아사달 지역 읍지인 ‘강동군읍지(江東郡邑誌)’에는 군 주위의 대박산(大朴山)과 묘운대(墓雲臺) 위에 각각 ‘철마(鐵馬)’가 세워져 있어, 아래를 압도하듯 내려다봤다고 기록돼 있다. 또 강동현 만달산(蔓達山) 산정에도 수철마(水鐵馬)가 세워져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한반도와 만주의 수많은 고을 가운데 산마루에 마상(馬像)이 3개나 세워져 있던 곳은 강동 아사달이 유일하다. 이것은 이미 고조선 시대에 ‘말’의 비중이 매우 높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한 이 지역 전설 가운데, 단군이 기마연습을 많이 해 푸른 산이 흙이 파여 붉은 산이 됐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마산(馬山)이 실재하고 있다.


고고 유물로는 약 4025년 전의 것으로 연대측정된 랴오둥반도 남단 대취자(大嘴子) 1기 유적에서 기마병 무기인 청동꺾창 1개, 석제꺾창 1개가 고조선 번개무늬 채색 도기 등과 함께 출토됐다. 이후의 고조선 기마문화의 직접적 증거로 예컨대, 선양시 정가와자 6512호 무덤에서 출토된 청동 마구들처럼 다수 유적의 마구(馬具) 증거유물들이 넘치고 있다.


고조선 문명의 선진적 기마문화는 고조선 문명권에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고조선의 기병부대는 발전된 기사법(騎射法)의 전술과 질풍노도 같은 신속성으로 국방에 효율적이었을 뿐 아니라, 국가의 영역을 급속히 확대시켰다. 또한 기마문화가 확대된 고조선 고대연방국가의 교통과 통신에도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고조선 문명은 일찍이 기마문화를 발전시킨 결과, 북부 연해주와 흑룡강까지 고조선 영역을 확보했다. 또한 고조선 기마문화는 고조선 서변 후국들이 고중국을 제압하면서 난하, 조백하를 건너 영정하(永定河)에 도달하고, 지금의 산시성 깊숙이 들어갈 수 있게 한 동력이 됐다.


‘만리장성’은 고조선의 막강한 기병부대들이 넘어올 수 없도록 고중국 측이 쌓은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이었다.


중국에는 처음 고조선 이주민 백익(伯益)족이 고조선 ‘말(馬)’을 전수했으나, 기마(騎馬)는 할 줄 모르고 주로 수레를 끄는 데 사용했다. 중국에서 처음 기마제도가 시작된 것은 기원전 307년 조(趙)나라 무령왕(武靈王)이 스스로 동호의 기마복을(胡服騎射) 입어 모범을 보이면서 고조선 후국 동호로부터 처음 기마제도를 도입해 소규모 기병대를 창설한 것이 효시라고 중국 고문헌들에 기록돼 있다.


일본에는 기원후 4∼5세기경 한반도 가라국에서 말과 기마제도가 처음 도입됐다. 일본 도쿄(東京)대 에가미(江上波夫) 교수가 ‘기마민족 일본열도 정복설’을 주장한 바, 이 경우의 ‘기마민족’은 고조선 문명의 부여족과 그 후예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2.농업혁명과 기마문화의 형성 - 1만2500년前 한강유역서… 인류 최초 ‘쌀·콩·깨 재배’ 시작됐다 / 문화일보,2019. 6. 26.


3. 동아시아 최초 청동기문화

- 대동강유역서 출토된 세밀한 청동공예품… 中문명보다 1000년 앞서


한반도 서북 평남 성천군서 - BC31세기 첫 청동조각 발견

용곡리지역 비파형 청동창끝 - 고조선 성립 BC26세기 추정

특유의 청동거울 ‘다뉴조문경’ - 세계유일 조립식 ‘비파형동검’

아름다운 기하학도안 ‘팔주령’ - 한반도·요동·요서 고루 분포

광석 녹여 합금하는 청동기술 - 문명 고도화의 중요한 지표

中, 빨라야 BC20~BC16세기 - 日은 BC4세기 들어서야 개막


인류는 신석기 시대 후기·말기에 자연동·자연금·운철(隕鐵: 운석 속의 타고 남은 철) 등 자연 광석을 채집·단조해서 금속을 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자연 광석들을 녹여 ‘합금’을 만들면 더 견고한 도구를 제작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합금’은 고도의 과학기술의 응용을 알려주기 때문에, 문명 형성의 중요한 지표가 된다.


인류가 최초의 합금을 제조한 부문은 동(순동·자연동(自然銅))과 주석과 아연 등을 녹여 합금해서 제조한 ‘청동기’의 생산이었다. 청동기의 생산과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인류가 과학적 문명의 시대에 들어섰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고조선문명권에서 신석기 농업혁명이 시작된 것은 고한반도 중부지방 ‘한강문화’였지만, 최초의 청동 유물이 나온 것은 BC 31세기경 청동합금 조각이 출토된 ‘대동강문화’였다. 대동강 중상류인 평안남도 성천군 용산 무덤에서 5069년 전(1995년 기준 BC 3074년)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靑銅) 조각들이 팽이형 토기, 돌도끼, 돌도끼 조각과 함께 출토됐다.


이것은 청동 무기나 도구를 제조하기 직전의 준비된 중간재 청동 조각이지만, 이미 자연동(銅)과 석(錫)과 연(鉛)의 세 광석을 합금시켜 제조한 합금 조각이기 때문에, 청동기 시대가 한반도 서북지방에서는 BC 31세기에 시작되고 있었음을 강력히 시사하는 것이다.


이어서 고조선(단군조선) 성립기인 기원전 26세기의 것으로 측정된 비파형 청동 창끝이 강동군 용곡리 5호 고인돌 무덤에서 나왔다. 기원전 26세기(4593±167년 bp)의 것으로 측정된 청동 단추와 청동 창끝도 발굴됐다.


또한 상원 장리에서 BC 3000년기 전반기의 큰 규모 고인돌(오덕형) 무덤의 무덤 칸에서 청동 교예 장식품 1개, 청동 방울종 2개, 청동 끌 1개를 비롯한 청동 제품들이 나왔다. BC 26세기의 유적·유물로 측정됐다.


이 가운데서 청동 2인 교예 장식품은 서로 어깨를 끼고 발목을 합친 2인의 교예사가 각각 1개씩의 둥근 고리(環)를 들고 또 다른 2개의 둥근 고리 위에 올라서 재주를 부리는 형상을 제작한 것이다.


옷의 몸통과 팔 소매, 바지에 고조선 문명 특유의 굵은 기하학적 번개무늬가 돋쳐 있고, 얼굴에는 입·코·눈·귀가 잘 묘사돼 있는, 작지만 매우 숙련된 기술의 우수한 청동 공예품이다(<그림 1-3> 참조).


또한 청동 방울종은 원추형의 종처럼 아가리가 넓고 꼭대기가 좁은 형태로, 울림통·고리·추로 이뤄진 작은 방울종이다. 역시 고조선 문명 특유의 굵은 기하학적 번개무늬가 돋친 것으로서 숙련된 기술로 어려운 구조를 만든, 매우 뛰어난 청동 공예품이다(<그림 1-4> 참조).


고조선 문명의 대동강문화에서 BC 31세기 청동기 시대의 시작은 동아시아 최초다. BC 31세기의 청동 합금 조각이 아직 청동기는 아니라고 불안해하는 경우에는 BC 26세기의 비파형 청동 창끝 2점, 청동단추, 청동 교예장식품, 청동 방울종 2점, 청동 끌, BC 25세기∼BC 24세기의 금동귀고리 3점 등 청동기 유물이 발굴돼 시계열이 완벽하게 형성됐으므로 이때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음은 명백한 것이다. 고조선은 BC 31세기∼BC 26세기에 초기 청동기 시대로 진입했다.


요하 서편 홍산문화의 우하량 유적에서도 BC 30세기경의 순동(純銅)귀고리 1점과 거푸집이 발굴됐다. 이를 두고 중국 고고학자 일부는 홍산문화를 금석병용기로 설정하고 있으나, 이것은 자연동이지 아직 주석 및 아연과의 ‘합금(合金)’이 아니므로 청동기라고 볼 수 없다.


동아시아에서는 고조선 문명의 대동강문화에서 BC 31세기∼BC 26세기에 처음으로 청동기 시대가 성립돼 주위로 전파된 것이다. 서방 수메르 문명에서는 BC 33세기∼BC 30세기의 청동기 유물이 출토되기 시작해 이 시기부터 청동기 시대에 들어서게 됐다고 보고 있다.


고조선문명 청동기 문화의 특징적 유물 중 하나는 청동거울인 다뉴조문경(多粗紋鏡)과 다뉴세문경(多細紋鏡)이다. 보통 뒷면 무늬그림의 줄의 섬세한 정도에 따라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으로 구분한다. 고조선식 청동거울은 모두가 둥근 태양 모양에, 뒷면에 붙은 꼭지가 2∼3개의 ‘다뉴’(多, 여러 꼭지)이고 중심부의 약간 위에 꼭지를 붙여 제조돼 있다.


무늬는 ①햇빛(태양광선) 무늬와 ②번개 무늬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에 비해 그 훨씬 후의 고중국식 청동거울은 둥글거나 사각형 모양에 뒷면에 붙인 꼭지가 중심부에 한 개뿐인 단뉴(單, 한 개 꼭지)로 제조돼 있으며, 무늬는 각종 동식물 등 구상물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고조선문명의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의 완전하게 둥근 형태는 해(태양)를 상징한다고 본다. 고조선 사람들은 천손의식을 갖고 하늘과 해(태양)를 숭배했으므로, 청동거울을 항상 해와 같이 둥근 모양으로 만들고, 뒷면의 무늬는 햇빛(태양광선)을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했다.


고조선문명에서 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의 뒷면에 동심원을 1∼3개 그리고 햇빛을 삼각형 또는 별무늬 모양으로 나눠 그린 것도 사실은 모두 햇빛(태양광선)의 기하학적 무늬다. 종래 이것을 별무늬 또는 삼각무늬, 톱니무늬로 이름 붙여 설명해 온 것은 해(태양) 숭배 사상과의 관련을 간과한 정확하지 않은 설명이라고 본다.(<그림 2-1> 참조)


이 고조선 다뉴조문경의 지역적 발굴 분포를 큰 강을 경계로 가정해 지도에 옮겨보면 <그림 3>과 같다. <그림 3>에서도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조선 다뉴조문경은 한반도 전역과 만주의 요동·요서 및 연해주지역에도 분포돼 있다.


고조선문명의 청동기문화 유물들 가운데 독특한 청동기로 ‘비파형동검’이 있다. 이 청동단검은 그 모양새가 고대 악기 비파(琵琶)와 비슷한 곡선으로 도안돼 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다. 고조선문명의 비파형동검은 고중국의 직선으로 도안된 동검이나 또는 북방 오르도스식 구부러진 도안의 동검과는 확연히 모양새가 달라서 누구나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고조선 비파형동검의 큰 특징으로는


첫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중간 부분의 양날에 돌기를 만들고, 그 돌기를 중심으로 검 끝과 검 아랫부분을 부드러운 곡선 모양새로 만들어서 마치 고대 악기 비파 모양처럼 도안했다는 점이다. 전 세계 청동검 양식에서 비파형 도안은 오직 고조선 청동단검과 비파형 청동 창끝만 가진 매우 독특한 도안이다.


둘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검몸과 검자루를 별도로 주조해 조립하는 세계 유일의 ‘조립식’ 청동단검이다. 두 개 부품을 별도로 주조해 조립하는 것이므로 청동기 주조 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제작할 수 있는 동검이다.


셋째, 비파형 청동단검은 검몸의 한가운데 ‘등대’가 검의 거의 끝에서부터 검자루 이음매까지 세로로 곧게 만들어져 있다. 이것은 동검을 견고하게 하면서 조립을 정확히 하기 위한 것이다.(<그림 2-3> 참조) 주목할 것은 고조선의 비파형 청동단검은 ①한반도 ②요동 ③요서 지역에서 출토되는 비파형동검의 형태와 구조가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이다.


고조선문명의 세형동검은 철기 시대의 동검이다.


고조선에서 BC 12세기경에 철기 시대가 시작돼 철제무기, 특히 철 장검과 철 단검이 점차 비파형 청동단검을 대체하기 시작하자, 이와 관련해 비파형 청동단검에도 아름다운 곡선의 실용적 직선으로의 변화가 일어나서 세형동검이 출현·발전했다. 세형동검도 조립식 동검이다.(<그림 2-4> 참조)


비파형 청동단검과 병행해 성립한 청동무기로 ‘비파형 청동 창끝’이 있다. 비파형 청동 창끝은 손잡이에 긴 나무막대를 끼워 긴 창으로 사용한 것인데, 나무막대는 삭아 없어지고 청동 창끝(銅矛)만 출토된다. 가장 오래된 출토 비파형 창끝은 덕천 남양유적 집자리에서 나온 BC 26세기의 비파형 창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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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금속문명권에서 청동 창끝을 사용했으나 이러한 비파형 청동 창끝은 고조선문명에만 있었고, 이웃 고중국 계열에는 없었던, 고조선의 독특한 청동무기다. 고조선문명에서 청동도끼도 많이 출토되는데, 부드러운 곡선을 넣어 도안한 ‘부채꼴’(扇形) 청동도끼다. 이것은 이웃 고중국의 직선도안 ‘책꼴’(冊形) 청동도끼와 쉽게 구별된다.


고조선문명에서는 각종 의례·의식에서 의기(儀器)를 청동기로 제조해 사용했다. 고조선에서는 특히 제천의식을 담당하기 위해 국읍(國邑)에는 천군(天君)이라는 담당자를 두고 그의 제천 제사 지역을 소도(蘇塗)라고 해 신성시했다. 소도는 단군신앙을 담당한 성스러운 곳이었으므로, 여기서 고조선 시대에 사용한 제의용 청동기들은 단군신(檀君神) 숭배와 관련이 있다고 해석된다


여기서 사용한 청동의기들은 방울종과 방패형 의기가 대종을 이루고 있다. 청동방울종은 동령(銅鈴: 작은 청동 방울종)과 동탁(銅鐸: 큰 청동 방울종)이 발굴되고 있다. 동령 가운데 팔주령(八珠鈴)은(<그림 2-2>) 8각형 구도의 중앙 몸체의 중심에 1개 태양(해)과 태양광선(햇빛살)을 도안하고 8각의 끝에는 동그란 종방울을 달아 두 개 타래머리무늬(雙頭渦紋)를 조각한 청동기다.


팔주령은 단군신앙의 소도의 제의기이므로, 중앙의 태양은 단군, 그 둘레의 원(圓)은 단군의 밝달조선의 상징이고, 8각 끝의 8방의 작은 종방울들은 단군의 8방의 후국을 상징하는 8개의 작은 태양으로 해석된다. 이러한 고조선문명의 청동기는 당시 세계 최고 기술과 아름다운 기하학적 도안의 예술품으로도 세계 정상의 것이었다.


고중국의 청동기는 고조선 후국 고죽국 지역 당산(唐山)에서 출토된 BC 20세기의 홍동(紅銅) 조각 2점과 용산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BC 18세기의 작은 청동 추가 있다. 상(商) 시대의 하남성 이리두문화 유적에서 나온 삼족기 청동 술잔, 향로, 청동 칼, 추, 끌은 BC 16세기∼BC 13세기의 것이었다.


중국 고고학계는 일찍 잡아도 중국에서는 BC 20세기∼BC 16세기 초기 청동기 시대가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고조선 아사달지역의 BC 31세기∼BC 26세기보다 약 1000년 뒤의 일이다.


일본 청동기 시대의 개막은 야요이 시대(BC 4세기 중엽∼AD 3세기 후반)이므로 다시 이보다 훨씬 후의 일이다


고조선문명에서 최초의 청동기가 나왔다는 사실이 한자(漢字) 만들기에도 반영돼 있다. ‘鐵’(철)의 옛 글자(상·서주 시대)는 ‘철’(철, 쇠, 금속)이었다. ‘철’(철)은 ‘동이의 금속’이라는 뜻이다. 즉 고대 중국 지식인들은 동·금·철 등 금속이 동이(고조선)에서 중국으로 들어온 것임을 당시에는 잘 알고 있었다.


유럽 고고학자들은 1928년 상(商)의 청동기(BC 16세기∼BC 13세기)를 발견하고 경탄해 이때부터 ‘황하(고중국)문명’의 개념을 정립하기 시작했다. 고조선이 그보다 1000년이나 앞서 찬란한 청동기를 만들고, 상나라 사람 자체도 고조선의 청동기술을 갖고 간 고조선 이주민이었는데, 우리가 ‘고조선문명’론을 정립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회 참조)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3. 동아시아 최초 청동기문화 - 대동강유역서 출토된 세밀한 청동공예품… 中문명보다 1000년 앞서 / 문화일보,2019. 6. 26.


4. 발달된 기술의 금문화와 철기문화

-동아시아 金문화의 원류… 三國금관 기원은 스키타이 아닌 고조선


BC 25세기에 이미 도금기술 - 청동·금 활용 金銅장식 제조 - 金 양산하며 순금장식도 발전

고조선 상징물 태양·새깃털 - 삼국 금관에도 그대로 계승- 스키타이 기원설 틀렸단 증거

BC 12세기엔 철기시대 열어 - 철검·철거울·쇠뇌 잇단 출토 - BC 7세기엔 ‘강철’까지 진화

고조선은 당대최고 금속기술 - 같은 문명권인 부여의 철 장검 - 日 전파돼 일본刀 원형 된 듯

고조선문명은 동아시아에서 최초로 ‘금(金)’ 문화를 창조해 발전시킨 문명이었다.


고조선문명의 금 문화는 BC 25세기에 금을 청동기에 도금한 금동기로 시작됐다. 평양시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5호무덤에서 출토된 BC 25세기(bp 4425년·bp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거해 1950년을 기준으로 역산한 고고학의 연대)의 금동 귀걸이, 강동군 송석리 문성당 8호무덤에서 출토된 BC 24세기(bp 4384년)의 금동 귀걸이, 강동군 순창리 글바위 2호무덤에서 출토된 BC 24세기(bp 4376년)의 금동 귀걸이 등이 이러한 금동 장식물이었다.


고조선의 수도 지역에서는 적어도 BC 25∼BC 24세기에는 왕족과 귀족들에 의해 금동 귀걸이가 제조돼 사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동은 청동과 순금을 전제로 하고 후에 도금하는 것이므로 청동과 순금 기술보다 한 단계 더 높은 과학 기술을 요했다.


고조선문명에서 금은 매우 일찍 발견돼 사용됐으나 순금은 매우 귀중하고 소량이어서, BC 25세기에 이르러 도금기술이 발명되자 청동기에 금을 도금한 ‘금동’(金銅) 장식품 형태로 금 문화가 시작됐다.


자연과학자들이 주목한 대로, 글바위 5호 무덤에서 나온 금동 귀걸이는 과학기술상 아말감법으로 순동에 금을 도금한 것이었고, 글바위 2호 무덤에서 나온 금동 귀걸이는 판금법으로 순동에 순금박판을 씌운 것으로서, 이러한 금속공예 기술이 이미 BC 25∼BC 24세기 고조선에서 사용됐다.


한반도의 강들, 특히 고조선 수도 아사달이 위치한 대동강 유역에는 사금이 매우 많았으며, 운산 금광 부존에서 볼 수 있듯이 금광이 풍부했다. 고조선이 건국된 한반도 자체가 금이 많이 나는 지역으로 고대 중국인에게도 알려졌었다.


이미 신석기시대 사람들까지도 강가에서 사금 채집과 판금 제작을 시작했다고 추정된다. 강동군 강동읍에는 한말∼일제강점기 초기까지 ‘생금동’(生金洞·금이 나는 고을)이라는 이름을 가진 큰 마을이 남아 있었다.


‘순금’의 경우를 보면, 고조선 수도지역에서 BC 12세기의 ‘순금’으로 제조한 장식 패물들로 순금 귀걸이와 순금 목걸이도 출토됐다. 이것은 순금 장식품이 이때 처음 제조된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기술적으로 순금 장식물 제조가 금동 장식물 제조보다 쉽기 때문에, 금동 귀걸이를 제조한 BC 25∼BC 24세기에 순금 귀걸이, 순금 목걸이도 동시에 제조할 수 있었지만, 아직 발굴되지 않았을 수도 있고, 순금이 매우 값비싼 것이어서 재료를 절약하기 위해 순금 장식물을 제작했다가도 녹여서 금동 장식물에 재활용했을 수도 있다.


순금 패물이 BC 12세기경부터 다수 나오는 배경은 이 시기부터 금광 채굴에 의한 금의 대량생산이 가능했던 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


고조선문명의 이른 시기의 금 문화는 고조선 후국 부여를 비롯해 전 문명권에 전파됐다. 부여의 풍속에 대해 ‘삼국지’ 위서 부여전은 “부여에서는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크기가 대추만 하다”고 했고, “나라 밖에 나갈 때는 비단옷·수놓은 옷·모직 옷을 즐겨 입고, 대인(大人)은 그 위에다 여우·살쾡이·원숭이·희거나 검은 담비 가죽으로 만든 갓옷을 입으며, 또 금·은으로 모자를 장식했다”고 서술, 모자의 금·은 장식이 관습이었음을 기록했다.


이 기록을 증명하는 유적·유물이 1985년에 발굴됐다. 부여족 유적인 길림성 유수노하심(楡樹老河深) 묘지 유적에서 화려한 마노 구슬 목걸이와 금귀걸이 장식이 출토된 것이다. 목걸이는 마노 구슬 266개를 줄에 꿰고, 6돈의 금으로 만든 네모 모양의 장식을 달아 길이가 98㎝나 되는 화려한 것이었다.


금귀걸이도 <사진 2>에서처럼 장식 금잎을 많이 붙인, 매우 화려한 것이었다. 부여에서는 금 문화와 함께 금동 문화도 발전했다. 널리 알려진, 길림 동단산(東團山)에서 출토된 부여인의 청동 가면도 금도금한 금동 가면이었다.


부여·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찬란한 금 문화와 금동 문화는 멀리 스키타이 금 문화와의 교류 훨씬 이전에 이미 고조선에서 먼저 계승·발전된 것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의 이러한 금·금동 문화를 직접 계승해 고구려·백제·신라·가야에서는 금관(金冠) 문화가 초기부터 발전했다.


고구려에서는 초대 동명왕(재위 BC 37∼BC 19년) 때부터 금관을 사용했다. 지금의 평양에 있는 고구려 동명왕릉은 일제강점기인 1940년에 일본인들이 도굴, 부장품들을 반출해 갔다. 광복 후 북한 고고학자들이 발굴조사를 한 결과 ‘금제관식(金製冠飾)’들이 109점이나 출토됐다.


그 다수가 금관에 매다는 금 및 금동제 날개 장식들이어서, 동명왕이 금관을 의례용으로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금관은 최근 몇 개의 실재가 보고됐다. 신라 금관과 백제·가야 금관은 이미 잘 알려져서 더 설명이 필요치 않다.


필자가 여기서 구태여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금관까지 거론한 것은 이 금관들의 원류가 고조선문명의 금 문화임을 알지 못하고, 학계 일부에서 스키타이 기원설 또는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금관은 왕권의 상징이기 때문에 반드시 ‘사상’이 상징화돼 있다. 고조선문명에서는 태양과 단군(하느님)을 숭배했고,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상징화했다. 그러므로 고조선 사람들은 평민까지도 모자에 새 깃털을 꽂았었다. (농경문 청동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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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금관들이 공통적으로 고조선문명의 금 문화·금관을 직접 계승한 자생적인 것임을 증명하는 요소는 다수 있다. 예컨대


①금관의 양 옆면에는 고조선의 도안 모형인 새 깃털을 불꽃 등과 함께 다양하게 조합·변형하면서 표시했다

는 점

②금관의 앞면 꼭지 또는 중앙 정면에 넣은 태양을 상징하는 도안

③금관의 테 둘레에 있는 몇 줄의 점선

④고조선의 새 깃털과 불꽃 문양을 한 세움 장식

⑤금관에 동반된 금귀걸이가 고조선의 금동 귀걸이를 직접 계승한 점

⑥금관의 곡옥 달개가 고조선의 곡옥을 직접 계승한 점 등이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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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고조선문명 후예들의 이러한 금관들의 자생성과 특징은 특히 ①정면 중앙 또는 상단의 각종 원형 해(태양) 상징과 ② 옆면(귀 위)의 각종 새(鳥) 깃털 도안과 불꽃에 명백하게 표현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고조선문명의 태양숭배와 새 토템의 발전된 사상을 왕관에 표현한 것이라고 본다. 이것은 고조선 전통이지 스키타이나 시베리아와는 상관이 없다.


학계 일부에서 한국 고대 왕관의 북방기원설을 제시하면서 왕관 앞·옆면의 도안을 기원후 5세기 스키타이 금 문화와의 교류 과정에서 얻은 나무와 나뭇가지에서 구했다는 시베리아 기원설을 주장하는 것은 ‘국왕이 사용하는 귀중한 금관’의 사상성과 전통 계승성을 파악하지 못한 빗나간 견해라고 본다.


고구려·백제·신라·가야의 금관은 스키타이 금 문화와 교류하기 훨씬 이전에 고조선문명 금 문화를 직접 계승한 것이다.


이런 찬란한 금관은 고조선문명의 후예들만이 썼다. 막강한 권력과 권위를 가졌던 이웃 중국의 역대 왕과 황제들도 이런 금관을 쓰지 못했다. 일본의 어떤 역대 왕들도 이런 금관을 쓰지 못했다. 오직 고조선문명의 후예들만이 이런 금관을 썼다.


또한 고조선문명은 동방에서 가장 앞서서 BC 12세기에 철기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고조선문명권은 두만강 유역 함경북도 무산(茂山) 지역과 만주 무순(撫順) 지역에 세계 최대 철광산 중 하나가 부존돼 있을 뿐 아니라, 한반도 만주지역 도처에 철광석이 부존돼 있는, 혜택받은 지역이었다.


특히 무순 지역엔 노천철광(露天鐵鑛)도 있어서, 이미 BC 70∼BC 49세기 ‘예’족의 신석기시대 신락(新樂) 문화 유적에서는 족장의 집 자리에서 석탄 정제품과 함께 모아놓은 적철광석(赤鐵鑛石)들이 출토되기도 했다.


현재 철기 발굴의 초기 단계에서는 우선 고조선 수도권 지역에서 주목되는 철기 출토품으로서 평양시 강동군 송석리 1호 석관무덤에서 철거울(鐵鏡)이 인골과 함께 출토됐는데, 인골의 연대가 BC 12세기로 측정됐다.


또 강동군 향목리 1호 고인돌에서 철창과 쇠줄, 철촉이 출토됐는데 BC 7세기로 측정됐다. 이 지역에서는 연속되는 그 후 편년의 철검(鐵劍·쇠장검), 철칼, 철제 기계활인 쇠뇌(鐵弩·석궁)들이 출토됐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송석리의 BC 12세기 철거울이 순도가 높고 단조해 제작한 쇠거울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철기 생산이 이미 시작됐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향목리의 BC 7세기 철창·쇠줄·철촉은 ‘선철’ 단계를 넘어 이미 ‘강철’ 단계로 들어서기 시작한 순도의 것이어서, 제철기술이 제강기술 단계에 이르렀음을 알려준다.


BC 7세기에 강철이 생산됐다는 사실은, 해면철과 선철 생산은 훨씬 전에 이뤄졌으며 늦어도 BC 7세기에는 철제 무기와 농구 생산이 가능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한편 만주 무순 부근 지역 유수노하심 중층유적의 고분 129좌에서 무려 540여 점의 철기가 출토됐는데, BC 331년경의 것으로 측정됐다. 한편 태래평양(泰來平洋) 묘지의 철기는 BC 412년경, 조동동팔리(肇東東八裏) 묘지의 철기는 교정치가 BC 481년의 것으로 보고됐다.


또 무산 철광산을 배경으로 한 함경북도 무산군 범의구석에서 출토된 쇠도끼 2개 가운데 1개는 BC 7∼BC 5세기 것이었고, 다른 1개는 BC 4∼BC 3세기 것이었다. 평안북도 영변군 세죽리 출토 쇠도끼·쇠과·쇠끌·쇠칼·쇠낫 등의 측정연대는 BC 4∼BC 3세기였다. 평양시 토성동 목곽무덤에서도 장검·쇠칼·극·활촉 등 철기가 세형동검·세형동과 등과 함께 출토됐는데, BC 3세기경의 것으로 측정됐다.


고조선문명은 종래의 청동 무기를 철제 무기로 바꾸기 시작했다. 철제 장검과 단검, 비수, 철창, 철제 화살촉과 쇠뇌, 철제 갑옷이 출현해 발전하기 시작했다. 고조선문명의 철기 문화에서 철검이 출현해 세형동검과 함께 사용됐다. 고조선문명의 부여 철검이 길림성 유수노하심 유적에서 다수 발굴됐는데(<사진 4> 참조),


우수한 ‘장검’이었다. 부여식 장검은 충북 청주시 오송읍 정방리 토광묘에서도 1개 출토됐는데, 칼은 철이고 자루는 동으로 제작해 조립한 ‘동병철검’(銅柄鐵劒)이었다. 제주 용담리 유적에서도 85㎝의 부여식 장검 2자루가 출토됐다.


부여식 철제 장검은 부여족 무사 집단의 이동에 따라 가야·탐라 지역에 전파됐으며, 말과 함께 일본 열도에도 전파된 것으로 해석된다. 필자는 부여 장검이 일본에 건너가 초기에는 왕과 장수의 신분재와 ‘쓰루기’라는 제사용 철검으로 사용되다가, 무사의 ‘일본도’로 발전하게 된 것이라고 본다. 즉, 일본도의 기원은 부여 장검이라고 본다.


이상의 철기 출토품과 고조선문명권 각지에 산재한 철기 출토품을 종합해 볼 때, 고조선의 철기시대는 약 BC 12세기부터 세형동검 출현 직후에 동반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강철제 농구와 무기 생산은 약 7세기부터 시작된 것으로 관찰된다


일본 학계와 한국 학계 일부에서는 과거 일제 식민주의 사관의 설명과 유사하게 BC 3세기 초엽 연(燕)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공해 1000여 리의 고조선 영토를 빼앗은 후 철이 고조선에 도입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연의 철기 문화에 고조선이 패전한 것으로 추측한 것이었다.


그러나 BC 12∼BC 3세기의 고조선문명권 안에서 자생적으로 제조된 각종 우수한 철기들이 다수 출토됐으므로, 연의 철기 문화에서 고조선의 철이 전파돼 들어왔다는 가설은 허구에 불과했음이 증명됐다.


일찍이 단재 신채호 선생은 반대로 연의 진개가 고조선 후국 동호(신조선)에 인질로 오자 동호왕이 진개를 과신해 군사기밀까지 모두 알게 해 주었기 때문에, 진개가 고조선의 철기·철제 무기를 포함한 선진문물을 배우고 군사상태를 잘 파악해 귀국한 다음 고조선(동호 지역)을 기습해 패전시킨 것으로 설명했다. (‘고조선상고문화사’)


고대 중국인들은 동북(만주) 지역 철물이 중원 지역보다 더 발전해서, 동북에서 중원으로 들어왔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고조선문명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청동·금동·금·철기를 망라해 당시 최고 수준의 찬란한 금속기술과 금속문화에 있었다. 이것은 고조선문명의 후예에게 계승돼 중앙아시아에 들어가 지배한 투르크족, 유럽에 들어가 라인강 양안을 거의 200년 동안이나 통치한 아발(大檀)족 모두 원래 우수한 ‘대장장이’들이었다.


본토에 남은 고조선문명의 후예들도 고조선·고구려·신라의 쇠뇌, 부여의 철장검, 신라의 금관과 종, 백제의 금동대향로, 가야의 갑옷·투구·장검, 고려의 금속활자 등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세계 최고, 최선진 금속문화의 전통을 계승했다. ( 3회 참조)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4.동아시아 金문화의 원류… 三國금관 기원은 스키타이 아닌 고조선 / 문화일보,2019. 7. 17.


5. 밝족의 한·예·맥 3부족 분화

- ‘밝음’ 숭배한 밝족 후예가 ‘한강·대동강·요하문명’ 꽃피웠다


신석기 혁명으로 농업 시작되자 - 古한반도에 태양숭배 밝족 형성

한강·대동강 뻗어 나간 ‘한족’ - 풍요기원 햇빛살무늬토기 사용 - 우리에겐 ‘빗살무늬’로 알려져

요동 반도로 이동한 ‘예족’은 - 호랑이 토템 삼고 철광석 활용

요서 평야지대 정착했던 ‘맥족’ - 玉器 쓰며 제의문화 발전시켜

3부족이 결합해 ‘고조선’ 건국 - 인류 최초 독립 문명 탄생 원천

▲ ① 천손 사상을 상징하는 옥천 안터 1호 선돌 ② 한강 유역 암사동 뾰족밑 햇빛살무늬 토기 ③ 우하량 제2지점 1호총 제21호묘 출토 거북 모양 옥기 ④ 대전 괴정동 출토 농경문 청동기 ⑤ 신락하층문화 유적의 석탄정제품 ⑥ 충북 단양 소재 현대에 복원된 솟대 끝의 새


고(古)한반도 중부 남한강·금강 유역에서 시작된 신석기 농업혁명은 식량공급을 일거에 증가시켰으나, 인구증가도 뒤따랐으므로 식료부족 문제를 다 해결하지 못했다. 이에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농업경작의 새로운 방법과 기술을 간직한 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선 이남의 농업경작이 가능한 크고 작은 모든 강변과 해안으로 이동을 감행했다.


농업경작은 ‘햇빛’의 은혜에 직결되므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매우 일찍 공통으로 ‘태양(해)숭배’ 사상을 갖게 됐다. 그들은 ‘밝음’(光明)을 숭상했으며, ‘태양’이 있는 ‘하늘’을 숭배하고, 태양이 있는 하늘을 나는 ‘새’를 토템으로 정해 애경했다. 후에 그들의 후예들은 태양의 ‘밝음’을 의미한 ‘밝’족, 후대의 고대중국인의 차음표기로는 발인(發人), 백족(白族)이라고 호칭했다.


주목할 것은 약 1만2000년 전∼9000년 전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이 서로 교류하면서 농업경작·사냥·어로·식료채집을 하고, ‘태양’ 하늘숭배, 천손의식, ‘밝음’ 애호 사상, ‘새’ 토템을 공통으로 형성해 오래 교류하며 생활하는 동안에 사람과 문화에 ‘공동 유형’을 형성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이들을 ‘밝’족이라고 통칭하면서도 학술용어로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 그들의 문화를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 문화유형’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다.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밝족)’은 성립 후 처음 단계에서 크게 3갈래로 분화·발전했다. 첫째는 지구기후 온난화 이후에도 고한반도의 북위 40도 이남의 강변과 해안에 그대로 계속 남아 정착해서 ‘고대’를 맞은 신석기인들이다.


이들은 스스로 자기들을 ‘밝’족이라고 호칭했으나, 후에 ‘밝’대족 기원의 다른 부족들과의 구별을 위해 그들이 ‘남한강’을 거쳐서 ‘한’강 유역 등에서 유래했다는 특징이 파악돼 ‘한’족이라는 호칭도 갖게 됐다.


이때의 ‘한’은 ‘큰’ ‘하나’ ‘하늘’의 뜻을 가진 고한반도 신석기인들의 고유어라고 해석된다. 즉 그들은 ‘밝’족 또는 ‘한’족으로 호칭되다가 ‘밝’대족의 분화 진전에 따라 ‘한’족으로 점차 호칭이 확정돼간 것이다.


‘한’족 신석기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당시 세계 최선진 신석기 농업혁명의 성취와 그에 인과관계를 가진 모든 문화항목이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태양’ 숭배, 태양이 있는 푸른 하늘 숭배, 천손의식, ‘새’ 토템 등이었다.


현재도 충북 옥천에 세계 유일의 태양을 잉태한 신석기시대 여성상이 남아 있다. 햇빛살(태양광선)이 토템 ‘새’에 집중해 비쳐서 잉태해 ‘알’에서 천손 영웅이 탄생했다는 유형의 ‘난생설화’도 밝족·한족의 설화다.


한족은 약 1만2000년 전부터 토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문암리 유적 제10층), 약 1만 년 전부터는 햇빛살 무늬를 그린 뾰족밑 토기가 출토돼 나오기 시작한다. 이 무늬를 일본 학자들이 머리 빗는 ‘빗살무늬(櫛目紋)’ 토기라고 이름했는데 잘못된 호칭이다.


머리 빗는 ‘빗살’을 그린 것이 아니라, 농업생산을 풍요롭게 해 주는 ‘햇빛살’을 그린 것이다. 그러므로 이 아래가 뾰족한 독특한 형태의 ‘한’족 토기 명칭은 ‘빗살무늬(줄목문)’ 토기가 아니라 ‘햇빛살무늬(태양광선)’ 토기, ‘빛살(광선)’ 토기로 호칭돼야 할 것이다.


‘한’족은 ‘밝’족을 본터에서 계승해 하늘을 나는 ‘새(鳥)’를 토템으로 애경했다. 필자가 2013년 고조선문명 세미나에서 처음 발표한 “밝족과 한족의 토템은 ‘새’다”라는 명제는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쉬운 것이다.


사회학·인류학적으로 토템 장대(totem pole)인 한족의 ‘솟대’ 꼭지에 세우는 ‘새’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삼국지’ ‘후한서’ 등 중국 고대문헌들이 이 ‘새’를 써놓지 않고 ‘蘇塗’(소도)라는 귀신 제사하는 곳으로 써 놓았기 때문에 이를 몰랐을 뿐이다.


한민족은 고조선·고구려·백제·신라·가라·탐라 모두 ‘새’ 토템이었으며, 모자에도 두 귀 위에 새털 깃을 세우고, 왕관에도 새털 깃 도안을 했으며, 죽으면 무덤에도 새털 깃을 넣었다. 지금도 한국 대통령의 상징 도안은 ‘봉황새’다.


‘한’족은 ‘밝’족과 마찬가지로 10진법과 자(尺度)를 사용했으며, 천문지식과 기하학적 도안을 크게 발전시켰다. 햇빛을 그림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특히 기하학적 도안이 크게 발전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족은 죽으면 상층은 ‘고인돌’ 무덤을 썼다. 고인돌은 ‘한’족의 무덤양식이었다.


둘째 갈래는, 지구 기후 온난화로 동토(凍土)가 녹아 북위 40도선 이북도 농경이 가능하게 되자, 고한반도 ‘밝’족의 일부가 북위 40도선 이북의 요동지역에 이동·정착해 형성된 ‘예(濊)’족이다.


이들은 자기들을 개척지의 큰 강 ‘요하’의 ‘東(동,쇠)’쪽으로 이동한 ‘밝’족의 일부라고 자부해 ‘쇠’(東)족이라고 차별화해서 호칭했다. 후대에 고대 중국지식인들은 ‘쇠’를 ‘濊’ ‘예’ ‘예’ ‘穢’ 등으로 음차 표기했다가, 후에 남방음으로 변음돼 ‘예’(Ye)로 발음하게 됐다.


‘濊’족은 약 9000년 전∼6000년 전에 한반도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또는 동해안을 따라 북상해 요하 동쪽으로 이동해서 지금의 요동반도·태자하·목단강·제2북류 송화강·두만강 하류 일대를 중심으로 널리 분산해서 정착한 신석기인들이었다.


‘예’족은 요하 이동지역에서 고한반도와 동일 기초의 문화를 가지면서도 요하 이동 새 정착지에서 독자적 신석기문화를 창조해 생활했다. 심양 부근의 신석기 ‘신락(新樂)문화’는 현재 발굴된 예’족의 대표적 신석기문화 유적이라고 판단된다.


‘후한서’ 예전에서 “(예족은) 해마다 10월이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주야로 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춤추니 이를 무천(舞天)이라 한다. 또 범(虎)을 신(神)으로 여겨 제사 지낸다”고 했다. ‘예’족은 환경의 영향을 받아 맹수의 왕인 ‘범’을 주토템으로, ‘새’를 부토템으로 정해 외경했던 것으로 해석된다.


예족은 부근에 풍부한 무순광산의 노천 철광과 노천 석탄광이 있으므로, 7200년 전의 신락문화 유적에서는 이미 석탄정제품과 적철광석 덩이가 출토됐다.


셋째 갈래는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밝족) 일부가, 북위 약 40도 이북의 과거 동토였던 지역이 인간거주와 농경 가능지역이 되자, 약 9000년 전∼6000년 전에 여러 차례에 걸쳐 서북방이동을 감행해 지금의 요서 대릉하 및 시라무렌강 사이 평야지역·내몽고자치구 동부지역 일대에 정착한 ‘貊(박)’족이다.


그들은 새 환경에 적응해 토템을 ‘곰(熊)’으로 정하고, 고한반도에서 가져온 ‘새’는 부토템으로 했다. ‘후한서’에서도 “맥이(貊夷)는 웅이(熊夷)다”라고 했다.


이들은 자기들을 ‘밝’대족의 일부로서 서북방 이동을 감행했다고 ‘북밝족’으로 자부했는데, 후대에 고대 중국인들은 그들에게 한자로 ‘북발’(北發) 또는 단음으로 ‘貊’(박, 백, 맥)족이라 이름을 붙이고 ‘박’ ‘백’이라고 발음하다가 후에 남방 발음으로 변음돼 ‘맥’이라고 읽게 됐다.


종래 일부 고대사학자가 ‘貊’(맥)을 ‘곰’과(科)의 짐승의 표기로 해석하고, 또 시베리아 또는 중앙아시아 또는 바이칼호 부근 북방 부족 ‘예’ ‘맥’족이 빈 공간의 고한반도에 이동해 들어왔다고 해석한 것은 지구 기후변화를 모르던 시기의 낡은 가설이다.


그러한 북방은 동토가 돼 당시 부족과 문명의 기원 형성지가 될 수 없었다. ‘맥’족은 원래 고한반도에서 ‘밝’족 일부가 서북방으로 이동해 요서지방 대릉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에 정착해서 형성됐으며, ‘맥’족이 그곳에서 만든 신석기문화가 홍산문화(紅山文化)이고, 그 가장 발전된 중심이 우하량(牛河梁) 유적이다.


우하량 유적 제1지점에는 제단과 신(神)을 모시는 신성한 묘당(廟堂)이 있고, 그 묘당에서 진흙으로 만든 여신상과 곰의 조각상, 새의 날개 등이 부서진 상태로 출토됐다. 이 부족은 ‘여신’을 숭배하고 ‘곰’을 주토템과 ‘새’를 부토템으로 한 부족이었음이 증명됐다.


우하량 유적 제2지점에는 여신을 위해 제사하는 제단 다음에 족장급의 무덤들이 있는데, ‘족장’을 나타내는 맨 앞의 중앙 대묘의 유골은 여성이었다. 이 곰 토템 부족의 족장은 여성이었다


홍산문화의 족장급 무덤들에서는 오늘날의 눈으로 보아도 당시 세계 최선진의 찬란한 옥기(玉器)들이 쏟아져 나왔다. 중국 일부 고고학자는 홍산문화의 찬란한 옥문화와 제의문화를 놓고 ‘요하문명’이라는 개념과 학설을 정립해, 심양 요령성 박물관에서 장기 전시하고 있다.


이뿐만 아니라 고중국문명의 시작은 황하문명에서가 아니고 그보다 1000여 년 앞서 ‘요하문명’에서 시작된다고 주장하면서, 홍산문화의 창조자는 하(夏)를 건국한 황제(黃帝, 軒轅)의 ‘황제족’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홍산문화와 우하량 출토유물은 그들이 고한반도의 ‘밝’족과 동일한 ‘북밝’족이며 ‘맥’족임을 출토유물이 매우 명료하게 증명하고 있다. 신성한 묘당에서 여신상과 함께 맥족의 토템인 ‘곰’ 상과 ‘밝’족 및 ‘한’족의 토템인 ‘새’ 상이 출토되지 않았는가?


중국 문헌 역사 25왕조사의 어디에도 ‘황제족’이라는 족속은 아예 없었다. ‘곰’ 토템과 ‘새’ 부토템을 가진 것은 貊(맥, 박)족뿐인데, 그들은 고한반도 계통이며, 고조선에 통합된 부족의 일부였다.


고중국은 명나라 초기 이전까지는 이 홍산문화 지역에 발도 들여놓은 적이 없다. 역대 고중국학자들은 그들이 모두 東夷(동이) 또는 北狄(북적)이어서 자기들의 조상이 아니라고 한결같이 강조, 주장하고 배척해 왔다.


홍산문화는 고한반도 밝족 계열인 맥족(貊族)의 신석기시대 문화이며, 후에 고조선문명의 선행요소의 일부로 고조선문명에 통합된 신석기문화다.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것은 약 5000년 전에 앞에서 고찰한 ①‘한’족의 한강문화와 ②대동강문화 ③ ‘맥’족의 요하 이서 홍산문화(일부 중국학자의 ‘요하문명’)와 ④ ‘예’족의 요하 이동 신락문화 등 크게 4대 신석기문화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지양·승화·발전돼서 탄생한 것이다.


‘고조선문명’을 큰 강과 연관해 표현하면, 신석기시대 ‘한강문화’ ‘대동강문화’ ‘요하문화’(중국 고고학자들의 ‘요하문명’)가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해 탄생한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동아시아 3대강(한강·대동강·요하) 문화가 밝족과 그 후예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고 한 단계 더 발전돼 ‘고조선문명’이 탄생한 결정적 계기는 약 5000년 전에 고한반도에서 ‘한’ ‘맥’ ‘예’ 3부족이 결합해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을 건국한 대변혁에 의거한 것이었다.


중국 고고학자들과 사회과학원은 맥족의 요서 지방 ‘홍산문화’ 하나를 갖고서도 ‘요하문명’론을 정립하고 있는데, 그보다 선진한 고한반도 한강문화와 대동강문화, 그리고 요동의 예족문화와 요서의 맥족 홍산문화(요하문명)를 모두 통합해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고조선문명’을 인류 최초 독립문명의 하나로 정립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 4회 참조)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5. 밝족의 한·예·맥 3부족 분화 - ‘밝음’ 숭배한 밝족 후예가 ‘한강·대동강·요하문명’ 꽃피웠다 / 문화일보,2019. 8. 7.


6. 고조선 태동시킨 ‘환웅의 군장국가’

- 환웅, 예·맥족 포용… 부족공동체→고대국가 발전 터 닦았다


고대국가 형성前 準국가형태 - 과도기적 정치체제가 군장國 - 군장(chief)이 여러 고을 통치

‘최고의 예술품’ 무계리 석검 - ‘제사용 술잔’ 조동리 간토기 - 당시 군장들 권력·삶 보여줘

6000~7000년前 대동강 유역 - 한족 ‘환웅 군장국가’가 지배 - 기후변화로 예·맥 이동·유입

강대했던 환웅, 홍익인간 실천 - 예·맥족 제압 않고 정착 도와 - 곰 토템 맥족과 혼인동맹까지

고조선 국가는 선행한 ‘환웅’족의 군장국가(君長國家·chiefdom)를 한 단계 더 지양·발전시킨 고대국가였다. 여기서 군장국가란 스펜서와 서비스 등 진화론적 사회학자·문화인류학자들이 정립한 개념인데, 고대국가 형성 직전에 군장들(chief)이 자기 고을에 일종의 준국가(準國家)로 볼 수 있는 통치조직과 질서를 만들어서 고을과 주변 일대를 통치하는 정치체를 의미한다.


군장국가는 부족공동체로부터 고대국가로 가는 과정의 과도적 정치체다. 군장국가의 특징은 동일한 큰 부족 안에서도 크고 작은 다수의 군장국가가 출현해, 처음에는 상호 대등한 관계에서 협동 또는 경쟁하면서 자기의 통치세력을 점차 더 확대해 가는 데 있었다.


한반도에서 ‘한’(韓)의 군장국가 실태를 보면, ‘삼국지’ 위서 ‘한’조에 주로 한강 이남 진(辰)국 지역의 이름만 나온다. 마한에 속하게 된 것이 월지국(月支國) 등 54국, 진한에 사로국(斯盧國) 등 12개국, 변한에 미오야마국(彌烏耶馬國) 등 12개국이 있다.


고고유물로는 ‘한’족 무덤양식인 고인돌의 크기가 비교적 크고, 부장품 중에서 생산용구와는 별개의 전투용 또는 위신용 석검(石劍·특히 손목 방패 장치가 있는 전투용 석검)과 제천(祭天)용 특수 토기들의 출토는 군장국가 존재의 증거가 될 수 있다.


예컨대 전북 진안군 모정리의 경우, 상당히 큰 A-1 고인돌 1기에서 ‘붉은 간토기’(磨硏紅陶)와 함께 10개의 석검이 출토됐다. 같은 지역 모정리 망덕 고인돌에서는 붉은 간토기와 함께 역시 7개의 석검과 다수의 돌화살촉이 출토됐다(③, ④ 참조). 붉은 간토기는 태양(하늘)에 제사하는 용구이고, ‘검은 간토기’(磨硏黑陶)는 지신(地神)과 강물(水)에 제사하는 용구다. 이 지역을 통치하는 ‘한’족의 ‘군장국가’가 형성됐음을 추론할 수 있다.


충북 충주 조동리 부근 군장국가의 군장의 제사용 붉은 간토기(약 6200년 전) 등을 보면(② 참조), 오늘날의 술잔에 비해서도 손색이 없다. 경남 김해 무계리 군장국가의 군장의 석검은 그 시대 세계 최고의 예술적 석검이다.(① 참조)


한강 이남 군장급 고인돌 무덤 출토품들의 편년이 대부분 6000년 전~7000년 전임을 보면, 고한반도에서는 적어도 약 6000년 전~7000년 전에 다수 ‘군장국가’들이 출현했다고 필자는 보고 있다.


‘한’족 대군장들 가운데서 ‘환웅국’은 고한반도 가장 북변에 위치한 군장국가로서, 역시 적어도 약 6000년 전~7000년 전에 지금의 대동강·청천강 유역에 형성돼 발전되고 있던 군장국가였다고 본다. ‘삼국유사’와 ‘제왕운기’의 ‘단군설화’에서 보면, 단군왕검에 의한 조선(고조선) 개국 과정을 설명하면서 분량의 거의 4분의 3을 ‘환웅’ 이야기에 배정하고 있다.


인류 모든 역사에서 고대 개국시조의 역사는 ‘신화’ 또는 ‘설화’로 돼 있다. 시조 신성화를 위해 신(神)·하느님(天)을 빌린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적 역사는 개국신화 속에서 신화적 요소와 사실적 요소를 구별해 내어 사실만으로 역사를 정립해야 한다.


그런데 ‘단군설화’에는 신화적 요소는 ‘환인(=하느님)’ 설명의 단 한 번이고, 모두 사실 이야기로 돼 있다. 단군 ‘신화’(神話)가 아니라, 단군 ‘설화’(說話)이고 ‘사화’(史話)이다. 단군설화의 ‘곰’과 ‘범’도 진화론적 사회학·인류학의 토템이론이 잘 설명해 주는 것처럼, 신석기시대 부족명칭이다.


그러므로 ‘단군설화’를 신화라고 버리는 것은 이 시대 유일한 문헌사료를 버리는 어리석은 일이다. 단군설화에서 ‘사실’의 줄거리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1)환인(하느님)의 여러 아들 가운데 환웅(桓雄)이 항상 지상에 내려와 인간 세상을 다스리고자 하는 뜻이 강하므로, 환인(하느님, 아버지)은 지상의 삼위(三危)산과 태백(太伯)산을 내려다보니, 태백산이 가히 홍익인간(弘益人間)하기 적합하므로 아들 환웅을 천부인(天符印:하느님이 붙인 징표) 3개를 주고 무리 3000명을 이끌고 지상에 내려가게 했다.”


여기서 ‘삼위산’은 중국 감숙성 돈황(敦煌) 부근의 산이고, 태백산은 고한반도에 있는 산이다. 환인(하느님)은 고‘한반도 태백산’을 선택해 아들을 내려보낸 것이다. 하느님이 선택한 땅 고한반도 ‘태백산’의 신성성이 함축돼 있다.


(2)초대 “환웅은 무리 3000을 이끌고 태백산(太白山)의 신단수(神壇樹) 아래 내려와 여기를 신시(神市)라고 말하니, 이 분이 환웅천왕(桓雄天王)이라는 분이다.”

여기서 ‘태백산’ ‘신단수’ ‘신시’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과 학설이 제시돼 있다. 필자는 인류의 하늘에서 내려온 신화(및 설화)의 서술양식에 따라, 이들을 모두 ‘건국 부족 거주 지역’에 연결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태백산’은 ‘밝’족의 제천하는 신성한 ‘큰 밝달’이다. 즉 ‘밝’족 거주지역인 고한반도의 제천하는 산이다.


‘신단수’는 태백산(‘밝’족 거주지역) 내의 신성한 숲이 있는 한정된 지역을 가리킨다. ‘神市’는 ‘(신성한) 왕검의 도읍지’의 한자 뜻 표기로서, ‘왕검성’과 같은 뜻이다.


(3)환웅이 처음 3000명을 이끌고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것은 또한 환웅은 고한반도 북변에서 자생한 족속이 아니라 하늘(실제 역사에서는 고한반도 중부)에서 이동해 들어온 족속이 수립한 군장국가의 군장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4)환웅의 하강(이동) 후의 치세의 목표에 하느님(환인)으로부터 받은 홍익인간(인간을 널리 이롭게 함)과 재세이화(在世理化·세상을 이치로 교화시킴)의 설화가 기록돼 있는 것은 환웅 군장국가의 통치이념이 정립돼 있었음을 시사한다.


고한반도 각지에서 군장국가들이 형성·발전돼 고대국가 형성 직전에 있던 약 5000년 전에 요서 지역에, 갑자기 기후변화가 일어나서 강우량이 급감하고 장기간 기후 건조화가 진행됐다. 요서지방 대릉하와 시라무렌강 유역에서 홍산문화를 만든 농경부족인 ‘맥’족은 더 이상 이곳에서 농경을 지속하기 어려워 남방 이동을 감행하게 됐다.


우하량 유적지를 중심으로 ‘홍산문화’ 유적을 남긴 ‘맥’족은 약 5000년 전에 여족장의 지휘 아래 남방으로 부족 대이동을 감행했다. 홍산문화 출토 유적·유물이 5000년 전에 갑자기 뚝 그치고, 그 대신 요동반도 압록강 유역, 요서의 하가점 하층문화유적 지역에서 홍산문화를 계승한 ‘맥’족의 유적·유물이 발견·발굴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당시 ‘맥’족의 이동은 4갈래로 나누어졌다.


첫째 갈래는 여족장(우하량 지역)의 지휘 아래 압도적 다수가 동남쪽 요동반도와 압록강을 건너 한반도 북부로 이동했다. ‘맥’족의 원래 기원은 ‘고한반도 밝족’이었으므로 고한반도의 온난한 기후와 강우량을 아는 맥족은 기원지인 역사적 고향 방향으로 진로를 택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요동반도와 한반도는 농업경작에 적합한 토지가 있는 지역이기 때문이었다.


둘째 갈래는 어떠한 사정으로 ‘맥’부족 내의 소수 일부 씨족이 주류에서 이탈해 바로 남방의 발해만 연안 해안으로 내려와 새 정착지를 개척한 경우다. 발해만 연안은 해수면이 낮아져서 해안선은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맥’족 이동의 이 갈래가 서요하 발해만 연안지역에 정착 후 고조선 건국 후에 통합돼 남긴 유적이 ‘하가점 하층문화’다.


셋째 갈래는 어떠한 사정으로 ‘맥’부족 내의 극소수 씨족이 서남방으로 이동해 중국 동해안에 정착한 경우다. 당시 중국 동해안은 해수면이 약간 내려가서 주인 없는 새 간척지가 조성되고 있었다. 그들은 중국 동해안 새 간척지에 정착해서 고대 중국인들이 말한 ‘동이’(東夷)의 일부가 됐다.


넷째는 기후 건조화 후에도 이동하지 않고 요하 상류 양안과 시라무렌 강·노합하 유역에 남아서 후에 조성된 수초지·목초지에서, 목축으로 생업을 바꾸어 유목민이 된 경우다.


필자는 동북아시아 유목민은 약 4000년 전~5000년 전 건조기에 부족 이동을 감행하지 않고, 그대로 예족과 맥족 지역의 거의 말라 가는 강가에 남아서 수초지·목초지를 따라 유목생활을 시작한 원 실위(室韋)족과 원 산융(山戎)족에서 기원한다고 보며, 그들도 원래 ‘밝’족의 후예들이었고, 맥족·예족의 남겨진 갈래였다고 본다. 필자는 이 동아시아 유목민 기원의 발견을 매우 중시한다. 그들은 유목민이 되자 ‘이리(늑대)’를 토템으로 정해 자기 정체성을 구별했다.


‘맥’족뿐만 아니라 ‘예’족 중에서도 농경씨족들의 일부는 기후 건조화 시기에 씨족이동을 감행해 농경에 적합한 남방으로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방 이동 ‘예’족은 ‘맥’족보다는 소규모였다고 추정된다.


왜냐하면 ‘예’족의 다른 일부는 삼림지대와 큰 강·호수지역 환경에 잘 적응해 수렵과 어로를 농경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면서 정착했기 때문에, 농경이 어려워져도 수렵·어렵 등 다른 생존수단이 여전히 일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예’족은 요동반도와 압록강·두만강 양안 및 청천강 이북의 고한반도에도 이미 분포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상해 정착했던 ‘예’족 일부의 남하는 이 지역의 인구밀집에만 작용했지 큰 교란을 일으키지는 않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같은 시기 ‘맥’족 주류의 큰 규모의 동남방 이동은 이 지역에 상당히 큰 충격과 영향을 주었다. 약 5000년 전 이제 요동반도는 ‘예’족 지역에 새로 ‘맥’족이 들어와서 ‘예’족과 ‘맥’족이 섞여서 거주하는 지역이 됐다. ‘맥’족이 고한반도에 이동해 들어오자 이번에는 청천강 일대까지 군장국가를 형성하고 있던 ‘한’족의 ‘환웅’ 군장국과 접변하게 됐다


인류 초기역사에서 취약한 부족집단이 찾아와 복속하면 강대한 부족은 대개 전쟁과 폭력으로 노예화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환웅 군장국가의 마지막 군장 ‘환웅’은 그렇게 하지 않고, 찾아온 곰 토템 맥족과 범 토템 예족을 자기 영토에 정착시켜 선진농경을 가르쳐 주고 도와줬다.


곰 토템 맥족의 여족장이 한족 환웅군장국의 마지막 군장 ‘환웅’에게 ‘혼인동맹’을 요청하자 ‘환웅’ 군장은 이것도 수용해 ‘한’족(환웅국)과 ‘맥’족의 혼인동맹에 의한 두 부족의 결합이 이루어졌다. 필자는 환웅국의 마지막 군장 ‘환웅’은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통치 이념을 잘 실천한 큰 시야를 가진 군장이었다고 생각한다.


환웅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으로 ‘맥’족을 포용해 정착시키고 혼인동맹으로 한·맥 2부족의 결합을 성취했기 때문에 환웅의 군장국가는 그 자리에서 즉각 매우 강대하게 됐다.


이것만이 아니다. ‘맥’족이 ‘한’족 환웅국가의 왕비를 내는 부족으로 대우받게 됐음을 알게 된 제2갈래의 발해만 연안 ‘맥’족과, 중국 동해안 간척지에 들어간 제3갈래의 ‘맥’족과 옛터에 잔존해서 유목민이 돼 가는 ‘맥’족 등 광범위한 지역에 흩어진 모든 ‘맥’족들이 모두 환웅의 군장국가 정치체에 순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5회 참조)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6. 고조선 태동시킨 ‘환웅의 군장국가’ - 환웅, 예·맥족 포용… 부족공동체→고대국가 발전 터 닦았다 / 문화일보,2019. 8. 28.


7.고조선 태동과 정치적 기반

- 요령성 출토 새·곰·범 청동장식… ‘고조선=한·맥·예 연맹’ 증거


- 한민족 고고학

한족·맥족 혼인동맹 통해 출생한 단군이 건국… 예족은 자치권 가진 제후국으로 결합

도읍 ‘아사달’은 원래 나라 이름… 아침 뜻하는 ‘아사’·나라 뜻하는 ‘달’ 한자로 의역해 ‘朝鮮’

▲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출토된 ‘새’ 토템족이 ‘곰’ 토템족, ‘범’ 토템족, ‘이리’ 토템족을 휘하에 거느린 동안의 청동장식.

▲ 산동반도 대문구문화 유적에서 출토된 ‘아사달문양’이 새겨져 있는 팽이형 토기.


‘새’ 토템 ‘한’족의 군장국가 군장 환웅(桓雄)이 ‘곰’ 토템 ‘맥’족의 여군장(부족장)과 혼인동맹으로 그 사이에서 후손 ‘단군’(檀君)이 태어나 성장하자, 단군은 ‘아사달’(阿斯達)에 도읍을 정하고 ‘조선’(朝鮮)이라고 호칭한 고대국가(나라)를 개국했다.


‘삼국유사’에 인용된 중국 고문헌으로는 “‘위서’(魏書)에 이르되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壇君)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해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高(堯)와 같은 시기이다라고 역사적 사실만을 간단히 기록했다.


한편 삼국유사에 수록된 ‘고기’(古記)는 ‘단군설화’를 수록하면서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熊女:곰 토템 부족 여족장)의 혼인에 의한 한·맥의 혼인동맹 사이에 출생한 아들인 단군왕검의 ‘조선’(朝鮮, 古朝鮮) 개국을 기록했다.


중국 고문헌들에 나오는 ‘한맥’(한貊)도 새 토템 한족과 곰 토템 맥족의 결합에 의한 ‘고조선’과 한국원민족의 형성을 인지한 기록의 한 사례다. 범 토템 ‘예(濊)’족은 다른 방식에 의해 한·맥족과 결합했다. 예족의 고조선 국가에의 결합양식은 일정의 자치권을 가진 ‘후국’(侯國)제도에 의거한 것이었다.


예족에 관한 최초의 고문헌 기록인 ‘일주서’(逸周書) 왕회해(王會解)편에 ‘예인’(穢人)이 나오고, 그 주에는 “예(穢)는 한예(韓穢)이니 동이(東夷)의 별종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여기서 ‘韓穢’는 한과 결합한 예 또는 한의 예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해석된다.


한·맥·예 3부족 결합의 증거는 고고 유물에서도 보인다. 고조선 강역이었던 만주 요령성 평강지구에서 고조선 후기 커다란 새(독수리, 삼족오)의 지휘와 보호 아래서 곰과 범이 순종하고 있고 그 옆에 이리가 따르는 금도금 장식으로 조각 유물 2점이 출토됐다(왼쪽 위 사진 참조).


이 장식물의 동물은 부족 토템 상징으로서, 커다란 새는 한족의 토템이고, 곰은 맥족, 범은 예족의 토템이며, 이리는 후에 고조선 후국족이 된 ‘실위’족 등 유목민족의 토템이었다. 이 유물은 한족의 중심적 지휘 아래서 고조선이 한·맥·예 3부족이 연맹해 형성되고, 후에 이리 토템 족이 참여했음을 잘 증명해 준다.


고조선의 건국 시기는 언제인가? 종래 여러 가지 견해와 조사연구가 진행돼 왔다

▲ 단군조선의 탁자식 고인돌들.

① 한반도 강동 문흥리 2호 고인돌, ② 요동반도 해성 석목성 고인돌,

③ 요동반도 개주 석붕산 고인돌, ④ 요동반도 대석교 석붕옥 고인돌,


(1)삼국유사에서 인용된 위서에서는 고조선의 건국 시기를 고중국의 ‘요’(堯)임금과 동시기라고 했다. 중국에서는 요임금의 즉위년에 대해 무진(戊辰)년설과 갑진(甲辰)년설이 병존했다.


‘동국통감’(東國通鑑,서거정 편찬)은 무진년설을 택했는데, 구한말에 이를 서기 BC 2333년으로 환산했다. 고조선 건국 시기를 BC 2333년, 즉 BC 24세기로 보는 문헌학적 견해가 정립된 것이다.


(2)고고 유물에서 보면, 고조선 건국 직후 고조선 이주민(중국학자들의 동이족) 소호(少호 또는 少昊)족의 유적인 산동반도 ‘대문구(大汶口)문화’ 유적 상층 유물에서 ‘아사달문양’이 새겨져 있는 고조선 ‘뾰족밑 팽이형(변형) 민무늬토기’ 11점(파손분 포함)이 출토됐다.


이 11개 토기 술잔은 형태가 고조선 특유의 뾰족밑 팽이형 민무늬토기일 뿐 아니라, 토기 위의 잘 보이는 위치에 아사달문양까지 새겨 넣었으니(오른쪽 위 사진 참조), 이것은 고조선 건국 후 산동반도에 이주해 간 고조선 이주민의 토기임이 명백한 것이다.


아사달문양 토기의 편년을 취하면, 고조선 건국 시기는 BC 3000년∼BC 2400년 이전으로 볼 수 있다.


(3)북한 고고학자들이 1993년 강동읍의 단군묘를 발굴해 보니 남녀 한 쌍의 인골 잔편이 출토됐다. 두 기관에서 24∼30차 측정한 평균치는 bp 5011±267년(bp는 방사성 탄소 연대 측정법에 의거해 1950년을 기준으로 역산한 고고학의 연대)이었으니, 이 뼈를 단군의 유골로 본다면 BC 30세기경 건국된 것으로 볼 수 있다.


한편 중국 사회과학원은 1996년 5개년 계획의 ‘하상주단대공정’(夏商周斷代工程)의 결과, 중국 최초의 고대국가 하(夏)나라의 건국 연대를 BC 2070년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고조선 건국 연대 BC 30세기보다 9세기 뒤늦은 것이며, 가장 낮은 연대인 BC 2333년보다 263년 뒤늦은 것이다.


종합해 보면, 환웅 족의 ‘군장국가’ 시기를 제외하고서도, 단군의 고대국가 고조선 건국 시기는 BC 30세기∼BC 24세기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고조선은 BC 30세기∼BC 24세기에 건국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인 것이다.


고조선의 원래 나라 이름은 ‘아사(시)달’이었다. 일연의 삼국유사에 인용된 위서와 고기는 고조선의 나라 이름을 ‘조선’이라고 기록했다. 일연은 이것이 삼국(고구려·백제·신라) 이전의 ‘옛 나라’임을 나타내기 위해 ‘古’(고)자를 붙여서 ‘고조선’(古朝鮮)이라는 항목 이름을 사용했다.


그러나 ‘朝鮮’은 한자 이름인데, 고조선의 건국 시기에는 한자가 아직 없었으므로, 순수한 고조선말 원래 나라 이름이 있었을 것임은 틀림없다.


위서와 고기에서 고조선의 도읍이라고 기록한 아사달이 바로 고조선의 나라 이름일 것으로 본 기존 학설에 필자는 찬동한다.


고대 역사에서는 도읍 이름과 나라 이름이 동일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아사’는 현대 일본어에서도 ‘朝’를 아사(아침)로 읽으며, ‘달’은 ‘땅·나라’의 뜻이니, 아사달을 뒤에 한자로 의역한 것이 ‘朝鮮’이라고 본 것이다. 고조선의 고조선말 고유의 나라 이름은 ‘아사달’(Asadar)이었다.


고조선의 서변지역과 고중국에서는 ‘사’(sa)가 ‘시’(si)로 변음돼 ‘아시달’(Asidar)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달’은 ‘땅’(land)·‘나라’의 뜻이고, ‘아사’·‘아시’는 ‘태양이 맨 처음 솟는 아침’의 뜻이다. ‘아사달’·‘아시달’은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라는 뜻이다.


고조선의 수도 아사달은 ‘밝달 아사달’(대박산 아사달)이라고도 했다. 이것은 상징적으로 고조선 나라의 대명사로도 사용됐다. 고중국에서는 밝달 아사달을 ‘發朝鮮’(발조선)으로 번역해서 사용하기도 했다. ‘밝달’이 ‘發’로 음차표기되고, 아사달이 ‘朝鮮’으로 의역표기돼 합쳐진 것이다.


고조선 첫 도읍지 밝달 아사달의 밝달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고조선 민족의 상징적 호칭 대명사로서도 의미가 확대됐다. 그리하여 고조선 사람들을 밝달 사람, 고조선 민족을 밝달 민족으로 호칭하기도 했다. 후에 밝달을 한자로 번역할 경우에는 ‘倍達’(배달)로 음차표기되기도 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고조선의 ‘아시(사)달’(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이 ‘아시아’(Aisa: land of the sunrise)와 동일한 뜻을 가진 나라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고조선 서방후국들 사이에서 아사달은 상고음으로는 아시달로 발음되고 있었다.


왜 유럽 사람들은 ‘아시(사)달’이 있는 동방을 ‘아시아’로 이름 붙였을까? 서양인들도 그리스문명 시대에 유라시아대륙의 동방 끝에 태양이 처음 뜨는 곳 ‘아시(사)달’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정보를 알고 있지 않았을까?


삼국유사, 고기에서는 고조선의 첫 도읍지가 아사달이라 하고, 옮긴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白岳山 阿斯達)이라고 했다. 아사달이 밝달(백산, 白山)과 중첩 사용돼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밝달은 한자로 ‘白山’(백산), ‘白岳’(백악), ‘朴山’(박산), ‘朴達’(박달), ‘北岳’(북악), ‘檀’(밝달나무 단) 등 여러 가지 한자로 음차표기돼 왔다. 삼국유사에 고조선의 초기 도읍을 단지 아사달로만 기록하지 않고 ‘백악산 아사달’이라고 기록한 것은 고조선의 첫 도읍지를 비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참고가 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 평안도 강동현(江東縣)조에 ‘대박산’(大朴山)과 ‘아(사)달산’(阿達山) 이름의 연속된 산이 있다. ‘강동군읍지’의 지도를 보면, 대박산의 비탈이 거의 끝나는 기슭 옛 현청 동헌의 뒤에 ‘아달산’이 그려져 있다. 대박산이 ‘큰 밝달’(太白山·태백산의 뜻)과 동일한 것이고, 아달산이 아사달임은 바로 알 수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에는 왕릉으로 ①단군묘(檀君墓) ②고황제묘(古皇帝墓)의 2개 고대왕릉이 이 책이 처음 편찬된 15세기까지 남아 있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단군묘’가 15세기에도 둘레가 410척(약 123m)이라고 했다.


이 거대한 규모는 이 무덤이 왕릉임을 알려준다. 단군묘 등 옛 왕릉이 2개나 15세기까지 남아 있는 곳은 옛 왕조의 도읍지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강동군읍지’에는 강동현에 조선 후기까지 ‘황제단’(皇帝壇)이라는 제천(祭天)용 거대한 ‘제단’이 남아 있었는데, 둘레가 607척(약 182.2m), 높이가 126척(약 37.8m)이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거대한 제단은 여러 계단의 피라미드형 큰 제단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강동현조를 자세히 검토해 보면, ‘왕궁터’(대궐터)까지도 찾을 수 있다. 이 고문헌은 강동현의 마을들 가운데서 특히 6개 마을을 별도로 구태여 ‘고적’(古跡)으로 분류했는데, ①잉을사향(仍乙舍鄕) ②기천향(岐淺鄕) ③반석촌(班石村) ④박달관촌(朴達串村) ⑤마탄촌(馬灘村) ⑥태자원(太子院) 등이다.


이 6개 마을 가운데, ‘이두’로만 읽히는 마을이 ‘잉을사향’(王宮里의 뜻)이다. 이것을 이두식으로 풀어 읽으면, ‘임금집마을’=‘왕궁리’(王宮里)가 된다. 이곳이 고조선의 왕궁이 있던 ‘터’임이 명칭으로 남겨져 전해온 것이다.


잉을사향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15세기에는 ‘용흥리’(龍興里)로 호칭됐다. 그 주변 문흥리에는 고조선 왕의 무덤으로 보이는 거대한 탁자식 고인돌도 남아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고조선은 개국 후 2번 천도했다가 다시 아사달로 돌아왔다고 했다. 천도는 부수도와 관련돼 있는 것으로 보이며, 이 경우에도 ‘강동(江東) 아사달’은 ‘원도읍’으로서 계속 존속됐다고 추정된다.


요컨대 고조선의 첫 도읍은 대동강 중류 동쪽 ‘강동 아사달’이었고, 그다음 천도한 두 번째 도읍은 요동의 ‘개주(蓋州) 아사달’이었다고 본다. 개주지구 주위에 거대한 왕릉인 탁자식 고인돌이 지금도 10여 개 남아 있고, 그 주변에 다시 또 다수의 탁자식 고인돌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를 알 수 있다. ( 6 회 참조)


■ 용어설명


아사달·아시달


고대 역사에서는 도읍 이름과 나라 이름이 동일한 경우가 종종 있다. 고조선 고유의 나라 이름은 ‘아사달’(Asadar)이었다. 고조선의 서변지역과 고중국에서는 ‘사’(sa)가 ‘시’(si)로 변음돼 ‘아시달’(Asidar)이라고도 했다. 여기서 ‘달’은 ‘땅’(land)·‘나라’의 뜻이고, ‘아사’·‘아시’는 ‘태양이 맨 처음 솟는 아침’의 뜻이다.


‘아사달’·‘아시달’은 ‘태양이 맨 처음 뜨는 나라’(land of the sunrise), ‘태양이 맨 처음 뜨는 아침의 나라’(land of morning)의 뜻이다. 고조선의 ‘아시(사)달’은 그리스문명 시대에 유라시아대륙의 동방 끝에 태양이 처음 뜨는 곳 ‘아시아’의 어원이 아닐까.


檀君


단군(檀君)은 박달임금의 뜻이며, 음가만으로는 ‘天王’의 뜻이다. ‘단군’은 고조선 건국 왕(임검)일 뿐 아니라 ‘황제’(皇帝)였다. 뒷날 상(商)에서 만든 한문자 ‘皇’ 자 그 자체가 ‘박달임금’(白+王)을 합해서 단자·단음화한 것이라고 본다. 고조선은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였으므로, 건국 무렵에는 오직 ‘단군’만이 ‘皇’이었다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7.고조선 태동과 정치적 기반 - 요령성 출토 새·곰·범 청동장식… ‘고조선=한·맥·예 연맹’ 증거 / 문화일보,2019. 9. 11.


8.고조선의 발전과 영역확대

- 고조선 ‘8방의 후국들’ 통해 고대 연방제국 발전 기반 다졌다


- 한민족 고고학

지역 부족장들, 자신들 지위 유지한 채 선진적 정치조직 편입되는 ‘후국제’ 환영

봉건제와 유사하나 봉토 하사 없이 통치권 승인… 2000여 년간 지속되다 위만 정변으로 해체

▲ 고조선 문명의 천군(天君)이 의례·의식에서 사용하던 의기(儀器)인 ‘8주령’.

고조선과 8방 후국들의 관계를 상징한다.


약 5000년 전 고조선이 한·맥·예 3개 부족의 연맹 결합으로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로 건국될 때 ‘한’족과 ‘맥’족은 혼인 동맹으로 결합하고, ‘예’족 군장에게는 자치권을 줘 처음부터 ‘후국’(侯國) 제도를 채택했다. 후국은 고조선 제왕이 제후(諸侯) 또는 후왕(侯王)을 통해 복속 국가 또는 지역을 간접 통치하는 것이다.


고조선의 단군은 처음부터 왕인 동시에 황제인 ‘제왕’이었고, 예족은 고조선 제왕의 간접통치를 받는 동시에 예족 후왕(濊君)의 직접 지배 아래 있었다. 예족의 후국 지위는 고조선이 BC 108년에 멸망할 때까지 지속됐다.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 고조선은 한반도에서 건국된 후 만주의 요동·요서·연해주 일대로 진출해 나가면서 후국 제도를 활용함에 따라 고대 ‘연방 국가’로 발전하게 됐다. 이 지역 부족장 다수가 간접통치 방식인 후국 제도를 환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조선 고대 연방 제국은 현대 연방 제국처럼 치밀하게 잘 조직된 것은 아니었다. 당시의 교통·통신·사회정치 조직기술 수준에 따라 약간 느슨하게 묶인 ‘연맹적’ 성격의 고대 연방 제국이었다.


고조선의 후국 후왕의 임명 방식에는


①기존 부족장의 후왕 임명

②고조선 제왕의 왕족 파견

③기존 부족장에게 제왕의 왕족 여자를 출가시켜 ‘고추가’(사위 후왕)로 삼는 방법

④점령지에서 공훈이 큰 지역의 ‘대인’ 임명 등 여러 방식이 있었다.


고조선의 후국 제도는 여러 요인으로 비교적 단기간에 영역을 확대했다. 먼저 각 지역 부족들이 이미 소통 가능한 동일 계통의 ‘고(古) 한반도 초기신석기인 유형’(‘밝’족)의 사람들이었을 뿐만 아니라 고조선 건국에 처음부터 참여한 맥족과 예족의 거주지역이 만주 요동·요서, 연해주 지역이었으므로, 이 지역 잔류 주민과 부족을 고조선 후국으로 통합하기가 용이했다.


고조선이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로서 선진적 정치조직이었기 때문에 국가형성 단계 이전인 부족들을 후국으로 편입하기도 보다 용이했다. 이와 함께 고조선의 후국 제도는 각 부족 지역의 기존 통치 질서를 인정한 ‘간접 통치’였으므로 고조선 영역 확대에 대한 저항을 최소화할 수 있었다


▲ <그림 1> <그림 2>는 고조선 영역의 제1단계와 제2단계.<그림 3>은 제3단계 최전성기.

<그림 4>는 제4단계 위만조선 시기(BC 194∼BC 108).


후국 제도에서 고조선 중앙정부와 후국의 관계는 간접 통치였지만, 본질적으로 ‘지배·종속’ ‘중앙과 주변’의 관계였다. 다만 그 통치 유형이 ‘직접 지배’가 아니라 ‘간접 지배’였을 뿐이었다.


고조선 후국들의 중앙 본국에 대한 의무는

① 전쟁 시 군사 동원, ② 군사 장비 공납, ③ 군량 제공, ④ 생산물 교환과 교류, ⑤ 특산물 공납,

⑥ 전국대회 참가, ⑦ 신앙·종교의식 참가 같은 것이었다.


반면 후국들이 본국으로부터 받는 혜택은

① 군사적 보호, ②,후국 제후의 지배질서와 권위 보장, ③ 특산물의 교환, ④ 재난 시 긴급원조,

⑤ 선진적 경제와 기술 전수, ⑥ 선진적 문화 전수와 지원, ⑦ 각종 정당성과 명분 제공 등이었다.


고조선 중앙 본국과 후국의 관계를 그림으로 그리면, 입체적으로는 고조선 제왕(단군)이 정상에 있고, 그 아래 각급 후국들이 피라미드형으로 종속돼 있는 형태였다. 고조선 본국을 중심에 놓고 후국들을 방위별로 재분류해보면 대체로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고조선의 중앙본국: 조선(직령지·밝달조선·發朝鮮·고조선)

② 남부 후국: 진(辰·震)국

③ 동부 후국: 옥저(沃沮)·읍루(읍婁)

④ 북부 후국: 부여(夫餘)

⑤ 요동지역 후국: 양맥(良貊)·구려(句麗)·비류(沸流)·개마(蓋馬)·구다(句茶)·행인(荇人)·임둔(臨屯)

⑥ 요서지역 후국: 고죽(孤竹)·불영지(弗令支)·불도하(不屠何)·청구(靑丘)·진반(眞潘)·동호(東胡)·

원오환(原烏桓)·선비(鮮卑)·고마해(庫莫奚)·원정령(原丁零, 원 투르크족)·오손(烏孫)

⑦ 동부 내몽골지역 후국: 산융(山戎, 원 훈족)·원유연(原柔然, 원 아발족)·실위(室韋, 원 몽골족).


이를 평면으로 그리면, 고조선 본국이 정중앙에 있고, 다수의 후국이 그 지배와 영향을 받으면서 주변에 연결돼 있다.


고조선의 후국 진국 지역의 ‘천군’(天君)이 사용했던 의기에 고조선과 후국 간의 관계를 평면으로 도안한 것이 있다. 천군의 8주령에서 중앙의 ‘해’(태양)는 고조선 본국과 ‘단군’을 상징하는 것이고, 중앙의 ‘햇빛’을 받으며 주변에 연결된 8방의 작은 ‘해’들은 고조선의 지배를 받는 8방 후국들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된다(위 사진 참조).


한국에는 고조선이 1개 중앙 본국과 8방의 주변 소국 9개국 체제로 돼 있었다는 전통적 의식이 존재해 왔다. 또 고(古) 중국에서는 동이(東夷)가 9개 종족으로 구성돼 있어서 ‘구이’(九夷)라는 별명이 있는 것으로 의식해 왔다.


고조선의 4대 후국으로서는 남으로 진국, 북으로 부여, 동으로 옥저, 서로 고죽을 들 수 있다. 이 밖에도 수십 개의 후국이 있었다. ‘고려사’에는 단군조선의 후국이 약 70개국이었다고 시사했다. 이는 앞으로의 연구 과제이다.


고조선이 고(古) 한반도에서 건국돼 고대 연방제국의 최전성기에 이를 때까지의 과정을 3단계로 나눠 볼 때, 제1·2 단계의 영역을 <그림 1>과 <그림 2>와 같이 대강 그려 볼 수 있다. 고조선 국가 조직의 연맹적 연방제국의 강점은 중앙 본국이 비교적 안정적이게 된다는 것이다.


중앙 본국이 강력해 후국들을 통제할 수 있을 때는 문제가 없지만, 중앙 본국이 쇠약해지고 지방 후국이 강성할 때에는 후국의 분리독립이 용이해진다는 것이 약점이다.


고조선의 후국 제도는 ‘봉건제도’와 유사하지만, 다른 측면이 있었다. 봉건제도는 군사적 점령지 또는 복속지의 토지를 봉해 주는 영주의 ‘봉토’(封土) 하사가 핵심이다.


하지만 후국 제도에서는 봉토는 거의 없고, 기존의 지역 ‘지배·통치권’을 승인하는 ‘정치·군사적’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고조선 연방제국의 최고통치자 ‘단군’은 직령지의 ‘임금’인 동시에 전체 고조선 연방제국의 ‘황제’였다.


필자는 한자 ‘皇’ 자체가 상나라 사람들이 한자를 만들 때 ‘박달(白)+임금(王)’이 바로 황(皇)제임을 나타낸 조립문자라고 앞서 지적한 바 있다.


고조선의 통치 영역에 반드시 후국들을 포함해야 한다고 본 선학은 신채호 선생이었다. 그는 “단군조(檀君朝)의 정치통일구역이 그와 같이 넓어, 북으로 흑룡강을 지나며, 남으로 현해(玄海)를 건너며, 서로 지나(支那)의 연해안과 동몽고(東蒙古)를 포내(抱內)했다”(‘조선상고문화사’)고 썼다.


실제로 고조선 연방제국의 최성기 영역은 북으로는 흑룡강 계선, 남으로는 제주도와 대마도, 서로는 요서의 난하를 건너서 북경 부근의 영정하(永定河), 동으로는 연해주 오호츠크해안까지에 이르는 광대한 것이었다. (<그림 2> 참조)


일찍이 신채호 선생은 초(楚)나라 시인 굴원(屈原·BC 343∼BC 277)이 ‘동황태일’(東皇太一·동쪽의 황제가 가장 첫째다)이라는 노래를 ‘초사’(楚辭)의 첫머리에 수록해 단군왕검을 동방의 최초·최고의 ‘황제’로 기렸음을 시사한 바 있다(‘조선상고사’).


2000여 년간 장기 지속되던 후국 제도에 의한 고조선 연방국가는 BC 194년 대사건으로 해체됐다. 위만(衛滿)이라는 장군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고조선(후조선) 준왕(準王)을 내쫓고 고조선 왕이 된 것이다. 이른바 ‘위만조선’의 시작이다.


BC 3세기 초에 연(燕)의 장군 진개(秦開)가 고조선의 서변을 침공해 1000여 리를 빼앗은 일이 있었는데, 위만은 그때 남은 조선족의 후예였다. BC 209년 위만이 조선인 등 피난민 1000여 명을 이끌고 후조선 준왕에게 투항했다.


준왕은 위만을 신임해 고조선 서변 국경 지역에 정착시켰다. 위만이 탁월한 장수로서 서변 국경을 잘 지키자, 준왕은 위만을 크게 신임해 이 지역 후왕에 임명했다. 지금의 창려(昌黎), 옛 험독(險瀆)이 위만의 주둔 도읍지로 추정된다.


BC 195년 연 왕 노관(盧관)이 한(漢)에 저항해 흉노로 도망한 사건이 일어나서 한의 중앙군이 노관을 잡으러 출병하자 위만은 이것을 기회로 잡아 “한나라가 대군을 이끌고 10로로 나눠 쳐들어오고 있으니 내가 가서 왕궁을 지키겠다”고 후조선 준왕에게 거짓 보고해 승낙을 받고, 준왕이 있는 요동 개평 부근의 고조선연방 왕검성(王儉城)에 입성, 군사정변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해 버렸다.


준왕은 황급히 뱃길로 한반도 마한 지역으로 피란했다. 위만은 새 왕조의 이름을 ‘조선’으로 이어 사용했으나, 정당성이 전혀 없는 위만의 정변에 고조선 연방 후국 중 어느 한 곳도 이를 수용·복종하지 않았다.


불과 1년 사이에 고조선 연방국가는 해체돼 모두 독립하게 되고, 위만조선은 준왕의 직령지만 승계한 ‘작은 고조선’이 됐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직령지 내에서도 예족이 불복해 예족 후왕 남려(南閭)가 28만 구(口)의 예족을 이끌고 한에 투항해 버렸다.


한 투항에 반대한 예족은 동으로 이동해 ‘동예(東濊)’가 됐다. 한은 남려를 맞아 창해군(滄海郡)을 설치해 줬다가 2년 후에 폐지해 버렸다.


위만조선은 BC 194년∼BC 108년 87년간 존속했지만, 그 이전 고조선 연방국가의 ‘대 고조선’이 아니라, 직령지만 통치한 ‘소 고조선’이었다. 즉 ‘고조선 연방제국’(대 고조선)은 BC 194년에 위만의 불법 군사정변으로 해체됐고, 그로부터 87년 후 BC 108년에 위만조선(소 고조선)도 해체된 것이었다.


한 무제의 위만조선 정복 출병에 맞춰서 옛 중국의 ‘조선’에 관한 관심과 정보수집이 실행됐다. ‘한서’(漢書), ‘사기’(史記) 등의 ‘조선’ 기사는 모두 ‘위만조선’을 가리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고문헌에서 ‘조선’이 언급되면 그것이 ‘고조선 연방’인지 ‘위만조선’인지를 먼저 판별해야 한다. ‘관자’(管子), ‘산해경’(山海經), ‘전국책’(戰國策) 등의 ‘조선’은 ‘고조선 연방’ 또는 그 일부를 지적하고 있지만, ‘사기’ ‘한서’ ‘후한서’(後漢書), ‘삼국지’(三國志) 등과 그 이후의 고문헌은 ‘위만조선’을 고조선으로 기록하고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국내 학자 일부가 이 중국 고문헌 기록으로만 고조선 역사를 보는 것은 전체 고조선이 아니라 ‘위만조선’을 고조선으로 보는 것일 뿐이다. (문화일보 9월 11일자 17면 7 회 참조


■ 용어설명


위만조선


위만조선은 BC 194년~BC 108년의 87년간 존속했지만, 그 이전 고조선연방 국가의 ‘대 고조선’이 아니라, 직령지만 통치한 ‘소 고조선’이었다. 즉 ‘고조선 연방제국’(대 고조선)은 BC 194년에 위만의 불법 조사정변으로 해체됐고, 그로부터 87년 후 BC 108년에 위만조선(소 고조선)도 해체됐다.


후국제도


고조선의 ‘후국’ 제도는 봉건제도와 유사하지만, 약간 다른 측면이 있었다. 봉건제도는 제왕이 영주에게 ‘봉토’(封土)를 하사하는 것이 핵심이다. 후국 제도에서는 봉토는 거의 없고, 기존 지역 ‘지배·통치권’을 승인, 하사하는 ‘정치·군사적’ 성격이 강한 것이 특징이다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8.고조선의 발전과 영역확대 - 고조선 ‘8방의 후국들’ 통해 고대 연방제국 발전 기반 다졌다 / 문화일보,2019. 10. 8.


9.새로 찾은 고조선 연방 고죽국

- 고조선의 중국식 표기 ‘고죽’ … 中 청동 술단지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BC 21세기 건국해 조양~천진 이르던 고조선의 후국 … 공자도 도덕·예의 있는 ‘군자국’ 칭송

‘아사달’문양 청동화폐로 상업·무역 발달 … BC 3세기초 燕의 장수 진개 침공 받고 멸망

▲ 1973년 중국 요령성 객좌현 북동촌 매장지에서 발굴된 청동기의 일부.


상(商)나라의 은허(殷墟) 청동기보다 더욱 앞선 청동 제기들 중 하나에 ‘父丁孤竹亞微(부정고국아미)’라는 명문이 있어서 고죽국(孤竹國)의 청동기라는 사실이 증명됐다.(큰 사진) 상나라 시대 고죽국이 있던 위치.(중국 사회과학원 지도를 바탕으로 국경은 당(唐) 시대 자료에 의거해 필자가 추가·작은 그림)


1973년에 중국 요령성 객좌현 고산(孤山) 북동촌(北洞村) 산기술 제1호 매장지 구덩이에서 상(商)나라 후기 수도 은허(殷墟)에서 발굴된 청동기보다 시기도 앞서고 더욱 선진한 청동예기 6점이 발굴됐다.


그중에 청동·술단지 제기 하나에 ‘父丁孤竹亞微(부정고국아미)’라는 명문이 있어서 이 청동기들이 고죽국(孤竹國)의 청동기라는 사실이 증명됐다. 이어서 부근의 제2호 매장지에서 또 6점의 청동기가 출토됐다.


고죽국 청동기가 12점이나 발견되자, 중국 학계에서는 고죽국을 상(商)의 제후국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이웃인 하북성(河北省) 당산(唐山)시 대성산(大城山) 유적에서 구멍 뚫린 자연동(紅銅·홍동) 장식물 2점이 1959년에 출토됐는데, 중국에서는 이것을 BC 2000년경의 중국 최초의 동기(銅器)로 설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고문헌들이 ‘고죽국’을 중국의 조상국가가 아니라 ‘동이족’의 국가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에서 맨 처음 ‘고죽국’이 조선사람의 조상국가라고 주장한 학자는 성호 이익(李瀷)이다. 이익은 명나라 지리서 ‘대명일통지(大明一統志)’에 조선성(朝鮮城)이 북경에 가까운 영평부(永平府) 경내 있다는 글을 읽고, “고죽국은 영평부에 있었다. 고죽국 세 임금의 무덤과 백이(伯夷) 숙제(叔齊)의 묘(墓)도 그곳에 있다”고 했다.(‘성호사설’)


이익은 고죽국이 고조선 후국임을 잘 인지하여, “고죽의 옛터가 오늘의 요심(遼瀋)에 있으면서 북해(北海, 발해)의 바닷가로 일컬어지는 것이다. 단군(檀君)…시대에 이 고장은 조선(朝鮮)에 통합됐다”고 기술했다.


이어 신채호 선생이 중국 고문헌 ‘수문비고(修文備考)’에 “고죽국은 ‘조선종(朝鮮種)’”이라 하였고, “고죽은 9족(九族, 조선족의 별칭)의 하나”라고 했다.(‘조선상고문화사’)

▲ ‘孤竹亞微(고국아미)’ 명문이 새겨진 객좌현 북동 1호 출토 고죽국 청동기(위). 객좌현 소파태구 출토 고죽국 청동예기(아래).


필자도 신채호 선생을 따라 추적해보았더니, 중세 중국학자들도 ‘고죽국’이 동이족 고조선 국가임을 알고 있었다. ‘일주서(逸周書)’ 왕회편에서는 ‘고죽’을 불령지, 불도하, 산융 등과 함께 들었는데, 공영달은 이들은 모두 동북이(東北夷)라고 했다.


북경대 도서관에 수장된 ‘황명수문비사(皇明修文備史)’의 ‘구변고(九邊考)’는 ‘고죽국을 조선과 함께 동이족’이라고 공식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에 필자는 확신을 갖고 ‘고죽국’의 실체를 탐구하여 2013년 연구논문을 발표했다.


고죽국은 명칭부터 고조선의 후국이었다. 고대 중국에서 고죽국은 ‘孤竹’ 또는 ‘고주(孤廚)’로 표기했다. 고조선 호칭을 음차 기록한 것이다. ‘孤竹’이란 한자 명칭은 고조선이 왕족 지방통치자에게 붙이는 ‘고추가(古鄒加)’에서 나온 것으로서, ‘고추가가 다스리는 나라’의 의미로 성립된 것이었다.


고조선은 중요한 후국에 대해서는 ‘가(加)’ 가운데서도 ‘고추가’를 파견하거나, 또는 후국의 제후를 왕실 혼인을 통해 ‘고추가’의 최고 ‘가’ 칭호를 주었다. ‘古鄒’의 고중국어 방언(客話) 발음도 ‘Kutseu’이고, ‘孤竹’의 고중국어 방언 발음도 ‘Kutsu’이며, ‘孤廚’의 고중국 방언 발음도 ‘Kutshu’로서 거의 완전히 동일하다.


‘고추가’의 ‘고추’를 고중국에서 ‘孤竹’ 또는 ‘孤廚’ 등으로 달리 표기한 것은 원래의 고죽국 이름은 고조선 언어로 된 명칭이었고, 그 고조선 말 이름을 여러 가지 유사발음의 다른 한자를 선택해서 표기했기 때문이었다.


BC 7세기경 고죽국의 후왕은 ‘답리가(答里呵, 고대음 다리가·Tariga, Dariga)’로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답리+가’로서, 이때의 ‘가’는 ‘고추가’인 것이다. 여기서 ‘고죽국’(Kutsu국) 명칭 그 자체가 고죽국은 고조선의 고추가가 통치하는 ‘후국’임을 나타낸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조선 후국 고죽국은 언제 설치되었을까? 고죽국은 고조선이 건국 후 난하를 건너서 고중국 관내 지역으로 진출하던 시기에 난하 양안에 설치되었던 고조선 최서변 후국의 하나였다. 고죽국의 설치시기는 BC 21세기경의 매우 이른 시기에 성립됐다.


중국 고문헌들은 하(夏)나라를 건국한 선주민 장수 헌원(軒轅)이 동이족 장수 치우(蚩尤, 고조선 이주민 장수)와 대결하여 탁록(탁鹿) 대결전에서 승리하여 하(夏)를 건국하고 국왕이 됐는데, 후에 중국인들이 헌원을 황제(黃帝)로 추존하여 중국 고대국가 건국 시조로 삼는다고 설명해 왔다.


‘탁록’은 난하를 건너 지금의 북경의 서쪽 120㎞ 지점에 있는 벌판이다. 지금의 하북성 탁록현에 속한다. 최근 중국의 고대사학자들은 헌원과 치우를 실재인물이며, ‘탁록벌 전투’도 사실로 인정한다.


중국은 하(夏)의 성립 시기를 BC 2070년(BC 21세기)으로 추정했고, 하왕조의 존속기간을 BC 2070년∼BC 1600년으로 추정했다. 하(夏)의 건국연대 BC 2070년대 설을 받아들인다면, 고죽국 설치는 하(夏)의 건국보다 약간 먼저였으니, 고조선의 고죽국 설치는 늦어도 BC 21세기경이 된다.


고죽국의 위치는? 당(唐) 시대의 ‘통전(通典)’ 북평군 평주조에서 “평주는 지금의 노룡현(盧龍縣)이다. 은(殷) 시대에는 고죽국이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통전’ 영주(營州)조에서는 “영주는 지금의 유성현이다. 은(殷) 시대에는 고죽국지(孤竹國地)였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상·은(商·殷) 시대에 고죽국이 매우 강성하여 지금의 대릉하 유역 조양(朝陽) 지구도 영유했음을 기록한 것이었다.


중국 사회과학원이 편찬한 ‘중국역사지도집’에서는 ‘고죽국’을 난하 하류 유역에 표시했다. 그러므로 ‘고죽국’ 영역은 당(唐) 시대의 유주(幽州)·계주(계州)·평주(平州)·영주(營州)로 구성되어 있었다. 유주가 서쪽이고 영주가 동쪽이었다.


고죽국의 도읍은 난하의 동쪽 강변 노룡(盧龍)이었지만, 고죽국의 서변은 난하를 건너 서쪽으로 지금의 천진(天津)까지였다. 백랑수(지금의 대릉하) 유역과 지금의 조양(朝陽) 지역은 영주(營州) 지역이므로 고죽국의 통치를 받던 고죽국의 영지였다. 고죽국은 난하를 가운데 두고 그 동쪽은 ‘조양’과 서쪽은 ‘천진’까지에 걸친 고조선의 후국이었다.


즉 고조선 시기에 발해만 북쪽 해안에 고조선 후국 고죽국이 있었으며 중국인들은 고죽국과 고죽국 수도 ‘고죽성’을 ‘조선’이라고 인식했었고, 명나라 시대에는 영평부 소속 ‘조선성(朝鮮城)’으로 편제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이 소위 ‘동북공정’을 시작한 전후부터 고죽국을 고중국의 상(商) 또는 연(燕)의 후국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나오는데, 전혀 사실이 아닌 억설이다

▲ 영성현 소흑석구 출토 고조선 번개무늬 다뉴조문경.


고죽국은 발해만 연안에 설치된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고조선에서 파견된 고추가가 통치했다. 그 역사적 증거로는 BC 7세기 중엽에 고조선과 고중국이 국경 전쟁을 하게 됐는데, 중국 측 산동반도의 제(齊) 환공(桓公)은 노(魯)·연(燕)·진(晉) 등과 연합국을 편성했다.


이에 대항하여 고조선 측은 고죽(孤竹)이 중심이 되어 불리지(弗離支, 또는 영지·令支)·산융(山戎)·도하(屠何) 등이 고조선 연합군을 편성하여, 고중국(周, 齊, 燕…등) 연합군에 대항하여 고조선을 방어했다.


이때 고죽국은 고중국 연합군에 대항해 고조선의 중심세력이었음이 고중국 측 문헌 ‘관자(管子)’에 기록돼 있다. 이때 제의 환공에 대항해 싸운 고죽국 장군이 황화(黃花)였고, 고죽국 군주의 성씨는 묵(墨) 씨였으며, 호칭은 고조선 고추가인 답리가(고대발음 다리가)였다.


BC 3세기에 편찬됐다는 ‘산해경(山海經)’, 해내경에는 ‘조선(朝鮮)’이 나오는데, “동해의 안 북해의 모퉁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과 천독이라고 한다”고 기록했다. 또 ‘산해경’ 해내북경에서도 “조선은 열양(列陽)의 동쪽에 있는데, 바다의 북쪽이고 산의 남쪽이다”고 서술했다.


여기서 중국의 동해를 황해로, 북해를 발해로 해석하면, ‘산해경’의 ‘조선’은 ‘통전’의 ‘고죽국’과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즉 고중국에서는 ‘고죽국’을 ‘조선’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죽국은 어떠한 정치를 하던 고조선 후국이었는가? 고죽국은 매우 이른 시기에 율령을 제정하여 통치한 율령국가였다. ‘서경’에 고죽국 왕자 백이(伯夷)의 업적으로 “법령을 제정하여 백성들을 (자의적) 형벌로부터 막았음”을 든 것은 고죽국에서는 매우 일찍 ‘율령’에 의한 통치 행정이 시행되었음을 기록한 것이다.


고죽국에서는 청동기문화가 크게 발전했다. 현재 중국의 가장 오래된 황동(黃銅) 2점도 당산(唐山)에서 출토됐는데, 고죽국 청동기였다. 1973년에 고죽국 영토였던 요령성 객좌현 북동촌의 두 매장지에서 출토된 12개 청동기 가운데 한 예기(禮器)에는 “고죽국의 아미(亞微)”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서 고죽국의 청동기임을 알려주는데, 당시로서는 최고수준의 청동기였고 상(商)의 청동기의 원류가 된 것이었다.


고죽국에서는 청동기수공업과 함께 고조선지역과 고중국지역을 소통 교류하는 상업과 무역도 매우 발전했다. 상거래에는 청동 주조화폐로 ‘고죽명도전(孤竹明刀錢)’과 ‘명화폐(明化幣)’ ‘일화폐(一化幣)’가 사용됐다.


필자는 중국 산동반도 대문구문화유적에서 1979년 발견된 11점 토기 술잔의 문양이 고조선 민족을 상징하는 ‘아사달’ 문양임을 이미 밝힌 바 있다. 고죽국이 고조선 고죽국 청동 화폐에 ‘아사달’ 문양을 주조하여 조선화폐임을 표시한 것인데, 1928년에 일본학자들이 이 문양을 ‘명(明)’자로 잘못 해석하여 ‘명도전(明刀錢)’이라고 호칭하고 중국 학자들이 연(燕)나라 화폐로 잘못 분류해서 지금까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소위 명도전과 명화폐 및 일화폐는 고죽국 화폐였다. 특히 이 중에서도 고죽국 ‘명도전’은 고조선 연방 전역과 고중국에서 고죽국의 왕성한 상업·무역에 병행하여 국제화페로 널리 사용됐다.


고죽국은 기본적으로 농경국가이면서도 목축을 병행하여 발전시켰으며, ‘말’을 대대적으로 사육하여 ‘기마문화’를 발전시켰다. 고죽국은 ‘기마문화’에 기반하여 기병부대를 창설해서 고조선 후국이 된 다른 기마유목민족들과 함께 때때로 연합군을 편성하여 작전했다. 고죽국은 고중국의 어느 한 후국이 고조선을 침노하게 할 때는 사전에 막아 방어해주는 서번(西藩)의 지위와 역할을 잘 수행했다.


고죽국은 이미 고대에 도덕과 예의가 확립된 선진적 문화국가였다. 일찍이 공자(孔子)는 고죽국을 예의와 도덕이 확립 발전된 ‘군자국’이라고 보았으며, 노(魯)나라에서 도덕이 바로 서지 못하면 구이(九夷)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말했다. 여기서 ‘구이’는 ‘고조선’ 전체를 가리키는 용어이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는 노나라에서 가장 가까운 ‘고죽국’을 가리킨 것이었다.


고죽국에서 성인에 버금하는 ‘백이’ ‘숙제’가 나와 역사에 영구히 기록된 것은 우연한 돌출이 아니라 고죽국의 확립 발전된 예의와 도덕에 기반한 것이었다. 사마천도 ‘사기(史記)’에서 ‘백이열전’을 쓰면서 고죽국이 효(孝)와 인(仁) 등 도덕과 예의가 확립된 나라임을 확인했다.


고죽국은 BC 3세기 초기에 연(燕)의 장수 진개(秦開)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1000여 리의 땅을 빼앗을 때, 진개의 침공을 받고 멸망했다. 그 바로 뒤에 고조선 후국 동호(東胡)가 반격을 가하여 지금의 조양(朝陽) 지구 등(唐 시대의 營州지역)은 회복했으나, 고죽국의 본래 영지(唐 시대의 유주·계주·평주지역)는 회복하지 못했다.


BC 206년경에는 산융이 동호를 공격하여 멸망시키고 고죽국의 ‘영주지역’은 산융의 영지가 됐다. 연에 뒤이어 진(秦)의 시황(始皇)이 고죽국의 옛 영지 가운데 난하 하류 유역(당 시대의 평주 지역 일부)을 진나라 안으로 포함해 넣어 갈석산(碣石山) 부근에 이른바 ‘만리장성’을 수축했기 때문에, 산융의 기병부대도 고죽국의 ‘유주·계주·평주지역’을 회복하지 못했다. (8 회 참조)


■ 용어설명


고죽국(孤竹國)


백이·숙제(伯夷·叔齊)로 잘 알려진 고죽국은 현재 중국에서 은(殷)나라의 제후국으로 기록돼 있지만, 많은 사료·유물은 고조선의 후국(侯國)임을 말하고 있다. 고죽국은 발해만 연안에 설치된 고조선의 후국으로서 고조선에서 파견된 고추가가 통치했다.

BC 7세기 중엽 고조선과 고중국이 국경 전쟁을 할 때 중국 측 연합국에 대항하여 고조선 측은 고죽(孤竹)이 중심이 돼 연합군을 편성해 방어했다. 이는 고중국 측 문헌 ‘관자(管子)’에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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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9.새로 찾은 고조선 연방 고죽국- 고조선의 중국식 표기 ‘고죽’ … 中 청동 술단지에 또렷이 새겨져 있었다 / 문화일보,2019. 11. 6.


10.中에 세운 고조선 분국

- 고조선 이주민, 5800년전 산동반도 개척… 古중국에 선진문명 전수


- 한민족 문명학

해수면 낮아져 생긴 동쪽 해안 간척지에 정착… 東에서 온 큰 활 가진 ‘동이’족이라 불려

결혼·화식·선진농경법 등 가르쳐… 고조선 상징 ‘아사달 문양’ 토기도 곳곳서 출토

▲ <그림 1> 산동반도와 중국 동해안의 지형 변화(기원전(BC) 5500~BC 1300).

황색은 후에 간척지. BC 5500년경 산동반도가 2개의 섬으로 돼 있다가 BC 1300년경 연륙이 끝나 간척지가 만들어지고, 현재(완신세·完新世)의 지형이 됐다.


중국 산동반도와 황하 및 회수 하류 유역 등 중국 동해안에는 약 5800년 전부터 2400년 전까지 고조선 이주민들과 그 후예들이 들어가 세운 다수의 자치적 소분국(小分國)들이 형성돼 고조선 문명권의 서남부 일대를 이루면서 발전하고 있었다. 신채호 선생은 이들을 고조선 ‘식민지’라고 표현했는데, 필자는 ‘分國’이라고 바꾼다.


고조선 사람들의 이 시기 이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지역의 환경변화를 먼저 알 필요가 있다. 중국의 장광직 교수가 1986년경부터 아날학파의 방법론을 적용해 그린 산동반도와 중국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