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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씨 왕족 흉노의 모돈(묵특)單于는 고구려의 유리왕인가? (1)
02/15/2020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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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김씨 왕족 흉노의 모돈(묵특) 선우單于는 

고구려의 유리왕인가? (1)




03/07/2019 07:08



http://blog.koreadaily.com/lagraceservice/1096015에서 스크렙하여 펌



고구려의 역사는 600년이다아니다 900년이다두가지 설이 있다.


그런데 흉노 (중국어: 匈奴, 병음: Xiongnu 슝누) 초대 왕인 두만 선우의 이름이 Tumen이다. 두만강이 Tumen Jiang이고 도문이 본래 두만 Tumen 이다. 흉노는 주몽이 고구려를 개국하기 이전부터 고대 중국 중원 북방에서 큰 세력을 떨치면서 강력한 유목민족 국가를 이루면서 확장되고 있었다. 


두만 선우(정체자頭曼單于터키어Tumen, Teoman, ? ~ 기원전 209재위기원전 220 경 기원전 209)는 흉노의 선우로서 역사에 첫 등장한 사람이다그의 이름은 몽골어나 투르크어의 투멘(만인장)과 관련이 있다(자료 위키백과)


그런데 흉노의 초대 왕인 두만 선우의 이름이 Tumen이다. 흉노는 고대 중국 사가들이 기록하고 부른것 이다. 흉노의 종족 이름은 따로 있다. 흉노 제국은 본래 선우 제국인 동시 훈족이라고도 하고 호(胡)라고 총징하였다. 흉노족은 몽골계가 아닌 튀르크계 곧 돌궐계통이다. 몽골이라는 종족도 우리 한민족의 계통이지만 몽골이라는 종족명과 나라 이름이 이 세상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징기스칸 때 부터이다. 선우는 또한 황제의 명칭이다. 고구려도 고씨 왕(제)국이었다.

 

*차근 차근하게 살펴보기로 하자. 고대 중국에서는 중국 변방에 있는 이웃 나라들 적을 통틀어서 동쪽은 동이東夷 , 남쪽은 남만南蠻 서쪽은 서융西戎 북쪽은 북적北狄 곧 흉노족, 선비족들을 모두 오랑캐라 불렀다. 오늘날 공산당 중국도 자기 나라는 대국이고 이웃 국경을 접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은 소국이라고 칭한다. 아무턴 고대나 현대나 중국(China, 지나)이라는 나라 위정자들은 고약한 사람들이다. 백성들도 따라서 그들의 속마음에는 자기들은 대국 사람인 척 하면서 행세를 한다. 참 못된 심보를 가진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들은 군사 수천 명은 죽어도 땅 1평은 절대로 빼앗기지 않는다고 하다. 일단 이들은 남의 것도 자기들 손에 들어갔다가 전쟁으로 패하여 빼았기면 전쟁등의 보복을 해서라도 기어코 빼앗아야 분이 풀리는 종족이다. 한(?)족 말이다.


남들이 좋고 큰 것을 가지고  있으면 빼앗지 않고 소유하지 않고는 못사는 종족이다. 거짖말하고 속이고 훔쳐서라도 자기들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소유하기 힘들면 가짜를 만들어서 라도 자기들 것이 최고라고 우겨된다. 오죽하면 중국 공산당 인민 해방군 안에 사이버 해킹부대까지 두고 남의 나라 주요 기밀을 도둑질해 가는 현실이다. 군부와 정부뿐만 아니라 민간인들 까지도 복사하고 해킹을 하니 도저히 갚지 못할 나라요 백성들이다. 이 사람들은 가짜와 진짜를 구별할 줄 모르고, 진실과 거짖을 분별할 줄 모르며, 옳고 그름도 분간할 줄 모르는 사람들인 것 같다. 주로 오늘날 한족 공산당원들 말이다이것이 사실이요 현실이다. 나도 그 나라에서 십오년 이상 왕래하면서 사업했을 뿐 아니라 아에 수년을 상주하면서 사업을 해 보았다. 사실 한족은 뿌리도 없고 족보도 없고 전통도 역사도 자기 문화도 없는 잡종 민족이다. 무조건 크고 많아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종족이다. 


미안하지만 인종 차별이 아니라 아에 조상적 부터 뿌리가 그러니 어쩔 수 없는 나라요 종족이다. 오죽했으면 적군과 전쟁에서 포로로 붙잡은 마부 노롯하는 흉노족 왕자 투후에게 황제의 생명을 구했다고 해서 김金씨 라는 성까지 하사했다. 그러나 황제가 높은 관직에 앉힌 투후 김일제 자손들이 동이의 나라 신라까지 망명와서 신라 건국의 주인공 중의 한 사람인 경주 김씨 왕족의 조상이 되었겠는가? 그러나 이들은 원래 조상의 땅으로 찾아 왔으니 당연지사이다.  본래 중국 사람들은 아쉬울 때는 살살거리고 배가 부르면 언제 도와 주었느냐고 하면서 입을 싹 씻는 의리 없고 피도 눈물도 없는 파렴치하고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족속들이다. 국가 외교를 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생겨에 관한 사업을 하고, 글로발적인 사업을 하면서 관계를 하더라도 절대로 속지 말아야 한다(편집자 주).


퍼온 블로그 http://blog.koreadaily.com/lagraceservice/1096015 자료에서 ‘몽고인이 본 고구려 칸의 계보’에서 고구려 태조 추모(주몽)왕의 이름이 Tumen Mergen Bogd Khan(재위:BC 199-BC 168) 이라 한다.


즉 흉노의 두만 선우와 고구려 추모(주몽)왕의 이름이 Tumen으로 같은 것이다.


두만(Tumen)은 투르크어로 만인의 우두머리를 뜻하며또다른 호칭으로 탱리고도(?犁孤塗선우로도 불리는데 몽골식으로는 텡그리 쿠투라도 부르며이는 하늘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출처나무위키)


그러나 두만 선우 (재위 BC 220 경 - BC 209) 와 추모왕 (대한민국 자료: BC 58 재위 BC 37 ? BC 19)의 연대는 한 200년 차이가 난다몽고에서 본 고구려 칸 계보에서는 추모왕의 재위기간을 BC 199 - BC 168기간으로 본다두만 선우와 약 20년차이를 보인다북한에서는 추모왕의 연대를 BC 298 재위 BC 277 - BC 259로 본다 한다. (자료나무위키북한에서는 추모왕의 연대가 두만 선우보다 오히려 50년가량 앞선다그러나 남북한 모두 추모왕이18 년 재위하고 40살쯤의 나이에 서거하는 것은 동일하게 본다.


고구려의 역사가 900년이라는 것은 흉노의 두만 선우가 고구려의 추모왕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흉노의 두만 선우에 이어 모돈(묵특묵돌선우가 왕위를 이어 가는데그 왕위의 계승이 유리왕의 계승과 다소 닮은 점이 있다.


먼저 모돈(묵특묵돌)선우의 경우를 보자.


두만 선우의 맏아들은 묵돌이었는데이때 두만에게는 후궁이 낳은 어린 아들이 따로 있었다두만은 묵돌 대신에 이 아들에게 뒤를 잇게 하기 위해 묵돌을 월지에 인질로 보낸 후월지와 전쟁을 일으켰다하지만 묵돌은 월지에게 살해당하지 않았고오히려 월지의 명마를 훔쳐 흉노로 도망쳐 왔다이에 두만은 묵돌에게 태자에게 주게 되어 있는 좌현왕의 작위를 내리고, 1만 명의 기병의 대장으로 삼았다.


하지만 묵돌은 이에 그치지 않고 반란을 도모하였다묵돌은 소리나는 화살이라는 뜻의 명적(鳴鏑)을 가지고자신의 휘하에 있는 1만의 기병을 훈련시켰고 기원전 209 결국 사냥터에서 두만 선우는 묵돌의 공격을 받아 활에 맞아 암살당했다“(자료 위키백과).


두만 선우에 이어 등장하는 묵특(모돈선우는 위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위를 찬탈하는 것으로 나온다묵특 선우 시절흉노에게 크게 당하던 한나라의 사마천이 쓴 사기의 흉노 열전 내용이라면 과장되게 나쁘게 서술했을 가능성이 있다


* 사실 중국의 고대나 현대 역사서는 믿을 수 없다. 중국의 역사서를 100% 그대로 믿었다가 함정에 빠지고 큰 코 닥치게 된다. 그래서 서양 학자들이 숨겨진 중국을 모르고 곧이 곧대로 믿고 중국 역사를 배우고 번역하고 저술을 남기다 보니 오늘날 우리의 역사가 엄청나게 왜곡되어 버렸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역사 왜곡은 오날날 일이 아니다. 이들은 조상 대대로 역사 왜곡을 해 왔다. 지금까지 남겨진 중국의 모든 사가들의 역사서는 관제 사가들이 기록한 사서로서 중국에 불리한 모든 역사는 그대로 기록하지 않고 중국에 유리하도록 기록했다. 중국 역사에서 분서 경유라는 역사적 사건이 있다. 


공자와 그의 제자들이 사실 그대로의 글을 남겨서 책으로 남겨진 것은 모두 불태워 버린 사건이다. 

공자는 우리 역사가들이 잘 아는대로 그는 동이족이다. 살아 생전에 그의 소원은 동이의 나라에 가서 살고 싶다고 글을 남겼다. 동이는 오늘날 바로 우리 한국을 말하는 것이다. 중국에서 공부할 때 배운 것이고 확인한 것인데 옛날이나 지금이나 1. 국가에 불리하고 해가 되는것은 사실대로 기록하면 안된다. 2. 임금(혹은 황제)이나 조상에게 해가 되고 불리한 것은 사실 그대로 기록하면 안된다. 마지막 3. 자신이나 부모와 가족에게 해가 되고 부리한 것은 것은 사실 그대로 기록을 남기면 안된다고 했다 (편집자 주). 


Eurasia Steppe Belt Huns (free source : Wikipedia)


그러면 고구려의 유리왕의 왕위 계승을 보자.

유리왕 고구려 제2(재위:BCE.19~18) .)

유리명왕(瑠璃明王)이라고도 한다이름은 유리(類利유류(儒留또는 누리(累利)라 했고,『위서(魏書)』고구려전에는 여달(閭達여해(閭諧)라고 적혀 있다동명왕(東明王)주몽(朱蒙)의 맏아들이다어머니는 예씨(禮氏)이고왕비는 다물후(多勿侯송양(松讓)의 딸이다아버지 고주몽을 찾아 서기전 19(동명왕 19) 4월에 동부여(東夫餘)에서 고구려로 와서 곧바로 태자로 책봉되었으며그 해 9월 동명왕이 사망하자 왕위에 올랐다” (자료김용선 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동부여에서 돌아 온 후 태자로 책봉된후 5개월후 추모왕이 40세 나이로 사망한다.

즉 유리왕의 왕위 계승 과정이 일상적이 아니라는 것이다찬탈일 수도 있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실제 추모왕이 유리왕을 태자로 삼은 해에 40세 나이로 갑자기 죽은 것이나이후 추모왕의 둘째부인인 소서노와 그의 아들 온조와 비류가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했다는 일화를 고려하면 말이다이러한 가능성은 아래 김용선 글에서도 나타나며 찬탈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있다.


유리왕과 주몽의 관계는 부자 관계로 나타나고 있다그러나 유리왕은 개인적인 성격이나 정치적 세력·활동 등 여러 면에서 주몽과 대등한 능력과 실력을 갖추었고 주몽과 대응 관계에 있는 인물로 여겨 유리왕과 주몽을 부자 관계가 아닌 것으로 파악하는 견해도 있다이런 근거로『삼국사기』나『삼국유사』에 의하면 동명왕의 성()은 고씨(高氏)유리왕 이하 제5대 모본왕(慕本王)까지는 해씨(解氏), 그리고 제6대 태조왕(太祖王이후는 다시 고씨로 되어 있다는 것을 들고 있다또한 태조왕 이후의 고씨 왕들만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에 대한 제사를 지냈다고 보기도 한다.” (자료김용선 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유리왕 부여에서 탈출하는 과정은 주몽의 탈출 신화와 흡사한 면이 많고, 유리왕이후 모본왕까지의 왕성이 해()씨로 나타나는 등의 문제로 인해 유리명왕의 왕위 계승을 찬탈이나 개국의 형태로 보는 시각도 있다.< 김용선고구려 유리왕 고〉《역사학보》” (자료 위키백과)


초점은 찬탈의 여부가 아니라 이러한 유사한 양상으로 보아서 흉노의 묵특 선우가 고구려의 유리왕이라는 것이다그리고 고구려의 유리왕으로 보이는 흉노의 묵특 선우는 매우 찬란한 정복사업을 펼치고 성공했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점이다.


우선 위키자료를 보면 다음과 같이 설명된다.


묵돌이라는 이름은 투르크어인 "바야투르(Bayatur, 용감한 자)"의 한자 음차로 알려져 있다.아버지인 두만선우(頭曼單于)와 갈등을 빚다가 그를 제거하고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이후 초한전쟁 시기에 동호(東胡) ·월지(月氏) ·정령(丁零등을 비롯한 주변의 민족들을 정복하였고중국을 통일한 한나라()의 고제(高帝)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였으며, 서역의 누란(樓蘭등 26개의 나라를 평정하여 흉노의 세력을 크게 강화하였다.” (자위키백과)


김은한은 “묵특 선우의 흉노 전성기”에서 보다 상세히 언급한다.


“ 묵특 선우아틸라징기스칸티무르 이들 4명은 역사책에 자주 등장하는 흉노의 영웅들이었다아주 짧은 기간에 거대한 초원 제국을 일으켜 세운 사람들이었다.

….……………..


그 때 동쪽에서는 강성한 동호(東胡)가 있었다(BC 209~BC174). 묵특이 아비를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동호 왕은 곧 사자를 보내 두만이 생전에 타던 천리마를 달라고 하였다묵특이 신하들에게 물으니 “천리마는 흉노의 보배입니다주지 마십시오”하였다.


묵특은 “어찌 남과 나라를 이웃하여 있으면서 말 한 필을 아끼겠는가?” 동호 왕에게 천리마를 주었다얼마 뒤에 동호 왕은 묵특이 그들을 두려워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사자를 보내서 알지(선우의 부인중 한 사람을 얻고자 한다는 말을 전했다.


신하들이 “동호 왕이 무도하여 알지를 요구합니다청컨대 그를 공격하십시오” 하였다묵특은 “어찌 남과 나라를 이웃하고 있으면서 한 사람의 여자를 아끼겠는가.” 드디어 사랑하는 알지를 동호 왕에게 주었다.


동호의 왕은 더욱 교만해져서 동호와 흉노 사이에 천여 리에 걸쳐있는 버려진 땅을 요구하였다묵특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어떤 사람은 “이것은 버려진 땅이니 주어도 좋으며 또 주지 않아도 좋습니다”라고 하였다이에 묵특은 매우 성내어 말하기를 “땅이란 것은 나라의 근본이다어찌 그것을 줄 수 있겠는가.”

드디어 동쪽으로 동호를 습격하였다동호는 묵특을 경시하여 대비하지 않고 있다가 동호 왕은 전사하고 흉노는 그 백성과 가축을 걷어드렸다.


다시 서쪽으로 월지를 쳐서 달아나게 하고 남쪽으로 누번과 하남(河南)의 백양왕(白羊王)울 병합하였다.


북쪽으로 흔유굴사정령격곤신려 등을 치고 남쪽으로 진나라 몽염에게 빼앗겼던 흉노 땅을 되찾은 후 연나라와 대()나라로 쳐들어갔다.


당시 중원은 항우와 유방이 쟁패 중이어서 흉노가 연,대를 침공한 것을 상대할 겨를이 없었다한고조(漢高祖유방이 비로소 중국을 통일하고, 한 왕(韓王한신은 대()를 옮겨 마읍(馬邑)에 도읍을 정하게 하였. (한신은 유방을 도운 대장군 한신과는 동명이인이다).


흉노가 마읍을 포위하니 한신이 항복하고흉노는 남쪽으로 태원(太原), 진양(晉陽)에 이르렀다한고조가 친히 출병하게 되었는데 때가 마침 겨울이라 몹시 추워 한나라 병사 중 동상으로 손가락이 떨어진 자들이 많았다.


묵특이 약졸들만 내보내어 유인하니 한나라는 32만의 병력으로 흉노를 추격하였다한고조와 한나라 기병들이 먼저 평성(平城)에 도착했지만 대부분의 보병들은 뒤로 처지게 되었다.


묵특은 40만의 기병으로 백등산(白登山)에 고립된 유방을 7일 동안 포위하였으니 한나라 군사들은 군량이 다하여 흉노의 대군을 상대할 상태가 못되었다한고조는 사자를 시켜서 몰래 후한 선물을 알지(閼氏왕후)에게 보내었다.


사자는 은밀하게 선우가 한나라를 쳐부수면 한나라에 있는 수 많은 미인들이 선우를 모시게 되니 그리 되면 알지의 처지가 딱하게 될 것이라고 설득하였다. 알지는 묵특에게 “두 나라의 임금은 서로 곤욕하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지금 한나라 땅을 얻는다 하더라도 그 곳은 선우가 끝내 살만 한 곳은 아닙니다또 한왕에게도 신()이 있는 것이니 선우는 살피십시오”라고 진언하자 묵특은 알지의 말을 쫓아 포위의 일각을 풀어주었다.


양쪽 군사들이 철수한 다음에 한나라는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었다흉노에게 호된 곤욕을 치른 한고조는 흉노와는 전쟁을 하지 말라는 유언까지 남겼으니한고조를 이어 혜제소제문제경제는 유언을 충실하게 지켜 흉노의 무리한 요구를 수용하고흉노에게 매년 조공을 바쳐 흉노와의 갈등을 피하곤 하였다.


당시 흉노와 한나라가 맺은 화친 조약의 내용이 다음과 같다.

1) 한나라 공주를 흉노 선우에게 의무적으로 출가시킨다.

2) 한나라는 매년 술비단곡물을 포함한 일정량의 곡물을 바친다.

3) 한나라와 흉노가 형제 맹약을 맺는다.

4) 장성을 양국의 경계로 한다.


이 합의는 BC198년 중국 종실의 공주가 흉노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중국이 흉노에 보내는 조공 액수는 매번 늘어났는데 BC192년부터 BC135년까지 60여년 동안 9번에 걸쳐 흉노에 보내는 조공 액수가 증가했으니 실상 전한(前漢)은 흉노의 속국과 같은 존재였다.”

(출처보스톤 코리아칼럼리스트김은한역사문제연구소 연구위원, “묵특선우의 흉노 전성기”중에서)

즉 묵특 선우 시절 유방의 한나라는 흉노의 속국과 같은 것이었다.

지난번에 한나라가 페르시아 지역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을 본 블로그 http://blog.koreadaily.com/ lagraceservice/1096015에 올렸다진시황의 진나라가 알렉산더 제국이었고진나라의 수도지역에 한나라가 있었다는 기록이 이를 밑받침하고 있다따라서 흉노인 고구려도 페르시아 지역에 있는 한나라의 북쪽동쪽에 있었다는 것이다본 블로그에 올린 ‘갈석산의 위치 검토’에서 한나라는 동북쪽이 항상 근심거리 라며 갈석 사이를 분주히 지나가며 전쟁준비를 했었다는 옛 시가 이를 말해 준다후에 묵특 선우의 정복지역을 검토해가며 이를 방증하고자 한다

*상기 내용 본 블로그는 이 기사를 퍼온 Blog site 내용을 의미합니다. (편지자 주)

흉노의 묵특 선우와 동일시 되는 고구려의 유리왕시절의 기록을 보자.

유리왕은 재위 기간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넓혔으며 고구려 왕국의 초석을 다졌다.

서기전 9년에는 선비(鮮卑)를 쳐서 항복을 받았다.서기 3년에는 도읍을 홀본(忽本)에서 국내성(國內城)으로 옮기고 위나암성(尉那巖城)을 쌓았다13년에 부여(夫餘)가 침범했으나 대패시켰으며이듬해에는 양맥(梁貊)을 쳐서 멸망시키고 한나라의 고구려현(高句麗縣)을 빼앗았다. ” (자료 나무위키)


유리명왕(瑠璃明王,기원전 38~18)은 고구려의 제2대 태왕(재위:기원전 19 나이 20세 기원후 18 나이 56)으로 는 유리(榴璃 또는 類利또는 유류(孺留)이다동명성왕과 왕후 예씨의 맏아들이다기원후 3에 졸본에서 수도를 위나암 국내성으로 옮겼고…재위 33인 서기 14에 무휼을 태자로 삼았고2만 명의 군대와 오이와 마리장군을 보내  서쪽의 양맥(梁貊)을 치고또 현도군의 고구려(高句麗縣 또는 高句驪縣)을 쳐서 복속시켰다.” (자료 위키백과)


유리왕 역시 활발한 정복전쟁으로 영토를 넒혔다.


따라서 흉노의 묵특 선우의 정복 전쟁지역과 유리왕의 정복 전쟁지역을 비교하면 우리가 그 지역을 보다 잘 알 수 있고 고구려의 위치를 보다 잘 알 수 있다고 본다.


묵특 선우와 유리왕의 이야기에서 차이는 탈출국이 월지와 부여라는 차이이다.

만약에 묵특 선우와 유리왕이 동일인이라면 우리는 다음과 같이 추리할 수 있다. (다음장 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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