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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인류 5대 문명,고조선 문명(古朝鮮文明)[11~회]-신용하박사(서울대 명예교수)
06/04/2020 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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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박사(서울대 명예교수)의 인류 5대 문명,

고조선 문명(古朝鮮文明)[11~회]

프로파일 ohyh45 ? 2020. 2. 8. 17:12
Naver Blog 송풍수월에서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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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의 인류 5대 문명, 『고조선 문명(古朝鮮文明)』을 더 보실려면 아래 포스트를 클릭하세요


신용하의 인류 5대 문명,『고조선 문명(古朝鮮文明)』[ 1~10회] https://blog.naver.com/ohyh45/221800153134

① 인류 초기 ‘고조선문명’의 발견, ② 농업혁명과 기마문화의 형성, ③ 동아시아 최초 청동기 문화

④ 동아시아 金문화의 원류…, ⑤ 밝족의 한·예·맥 3부족 분화, ⑥ 고조선 태동시킨 ‘환웅의 군장국가’

⑦ 고조선 태동과 정치적 기반, ⑧ 고조선의 발전과 영역확대, ⑨ 새로 찾은 고조선 연방 고죽국

⑩ 中에 세운 고조선 분국


신용하의 인류 5대 문명,『고조선 문명(古朝鮮文明)』[11~20회]?https://blog.naver.com/ohyh45/221801144583

① BC 8C 조중전쟁과 국경선, ②고조선도'4개 세습계급사회',③13.우랄·알타이어족 기원,

④ 고조선의 ‘神誌문자’, ⑤ 고조선문명권 종교,⑥ 10진법 창조 전파, ⑦[계속]



11. BC8세기 조중전쟁과 국경선

- 고조선과 古중국 경계선 이어서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었다


- 한민족 문명학

고조선, BC 10세기 燕·晉과 국경 맞대고 교류·갈등…BC 8세기엔 古중국군 격파뒤 산동반도까지 세력 확장

古중국, 고조선 기병 막으려 요수 동쪽서부터 축성…‘압록강 단동이 만리장성 시원’동북공정 주장은 허위



▲ 만리장성은 연의 진개에 의해 고조선 후국 고죽국이 멸망한 직후 고중국 측(연·진)이 축성한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른쪽 작은 지도는 중국사회과학원이 그린 지도.


오늘날 국경선의 영향 때문에, 과연 고조선의 영역이 지금의 중국 베이징(北京) 부근에까지 이르렀는지 의문시하는 한국인과 중국인이 다수 있다.


그러나 중국 역사에서 말하면 하(夏)나라(BC 2070∼BC 1600)와 상(商)나라(BC 1600∼BC 1046)까지는 지금의 베이징 부근을 관통해 톈진(天津)에 이르는 큰 강인 영정하(永定河)가 고중국(夏, 商)과 고조선의 국경선이었다. 이 사실은 중국 고문헌 및 출토유물들과 함께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이를 잘 증명해준다.


지금 만리장성의 남과 북에서 출토되는, 고고학에서 말하는 ‘하가점상층문화’(夏家店上層文化)가 BC 14세기∼BC 7세기경의 고조선문명 서변문화유적이다. 대체로 노노아호산(努魯兒虎山) 이서로부터 영정하·간하(干河) 양안까지가 동일한 하가점상층문화권이라고 볼 수 있다.




▲ 비파형 동검


매우 선진한 청동기 문화가 특징이고, 출토품목의 대종은 기마문화와 기마부대의 청동무기·마구·의기가 중심이다. 비파형동검도 대부분 조립식이 아니라 칼에 자루를 붙여 만들고 곡선도 약화시켜서 전투 실용성을 높였다. 고조선 후국별로는 고죽·불령지·불도하·산융(원흉노) 등 당시 고중국족이 말한 호맥·동호·예맥조선(濊貊朝鮮)의 유물이다.


상(商)은 고죽국(孤竹國)과 마찬가지로 고조선 사람들이 건국한 나라였기 때문에 고조선과 매우 우호적이었고, 상호 교류가 활발했다. 상(商)시대에는 많은 고조선 사람이 영정하를 넘어 남하해서 자치 마을공동체를 만들어 평화적으로 함께 거주했다. 그러나 주(周)가 상(商)을 멸망시킨 후에는 고조선인의 남하에 대한 견제가 본격화됐다.


BC 11세기경 후반 고조선 사람들이 계속 서남쪽으로 내려오므로 주(周)는 소공석(召公奭)을 연(燕)에 봉하고, 당숙(唐叔)을 진(晉)에 봉해 이를 막게 했다. 연(燕)은 당시 황하 이남의 소국이었으며, 지금의 베이징 지구는 연(燕)의 영역이 아니라 고죽국의 영역으로서 고조선의 변경지역이었다.


고중국 주(周)나라 후국 연(燕)이 북방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자, 고조선의 서변 후국들은 BC 10세기경부터 주(周)의 후국 연(燕), 진(晉)과 국경을 접하게 됐고, 자연히 교류와 함께 갈등도 일어나게 됐다.


BC 8세기 말(BC 707년, 동주 환왕(東周 桓王) 13년)에 고중국 사가들이 호맥(胡貊)이라고 기록한 고조선 서변 후국이 연(燕)을 공격해 격파하고 산동반도에 있는 제(齊)를 공격한 일이 있었다.


이때 고조선 후국(산융)의 공격력은 주로 고조선 기마문화의 선진성과 우월성에 의거하고 있었다. 고조선 후국 기병부대의 민첩한 기동성이 연(燕)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산동반도의 제(齊)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이때는 고중국 측이 패전해 막대한 공물을 내고 화친을 맺어 간신히 돌려보냈다. 그로부터 43년 후인 BC 664년(동주 혜왕 13년)에 고조선 후국 산융이 또 연과 진을 공격해 들어왔다. 위급해진 연(燕)이 제(齊)에 긴급 구원을 요청했다.


연(燕)이 패망하면 전례에 비춰 제(齊)를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한 고중국 패권자 제(齊)의 환공은 재상 관중(管仲)을 대동하고 고중국 제후국들의 수십만 연합군을 편성해 이번에는 북으로부터의 ‘기구’(騎寇: 기마를 한 침략군)를 격퇴하려고 출병하게 됐다. 이때 고중국 연합군의 편성을 보면 주(周)나라의 북변 후국들을 알 수 있다. 그에 대응해서 편성된 고조선의 연합군을 보면 고조선 서변 후국들을 알 수 있다.


△고조선(후조선) = 고죽(孤竹), 불도하(弗屠何 또는 屠何), 불령지(不令支, 또는 令支), 산융(山戎, 원흉노, 일명 무종(无終), 또는 북융(北戎)


△고중국(東周) = 제(齊), 조(曺), 허(許), 노(魯), 연(燕), 진(晉: 그 후 한(韓)·위(魏)·조(趙) 3국으로 분화)


이때 고조선 후국들(고죽·불도하·불령지·산융)과 고중국 후국들(제·조·허·노·연·진)의 지리적 전쟁터를 찾아보면, BC 8세기∼BC 7세기의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을 대체로 알 수 있게 된다. 전쟁터의 지명은 대부분 영정하 이남 지역들이었다.


‘관자’(管子)에는 환공의 연합군이 고조선 연합군을 물리쳤다고는 기록돼 있으나, 반년 이상 걸린 이 전쟁에서 환공이 큰 승전은 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고조선 연합군은 모두가 기병(騎兵)부대였는데 비해, 고중국 연합군은 주력이 보병(步兵)부대였기 때문이었다.


이 전쟁에서 제(齊)나라 환공의 목표는 산융 등 ‘동북이’를 영정하 이북으로 밀어내는 것이었다. BC 664년 제(齊)나라 환공의 연합군 원정 이후의 상태를 보면, BC 4세기까지 고죽·불도하·불령지·산융의 이동은 없고 연(燕)의 이동도 없는 것으로 보아, 제(齊)나라 관중의 연합군은 산융·불도하·불령지·고죽을 멸망시키지는 못했지만, 연(燕)나라를 그 자리에 존속하도록 보호해 주고 돌아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도)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고조선 전성기의 고중국과의 경계선은 고조선 서변 후국들인 고죽, 불도하, 불령지, 산융(무종) 등이 고중국의 후국 연(燕)나라와 동으로는 영정하, 북으로는 간하를 경계로 국경을 접해서 연(燕)나라를 대체적으로 동·북·서방에서 둘러싸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齊)나라의 출병과 귀환 후의 고조선과 고중국의 변경 양상을 보면, BC 7세기 후반부터 BC 4세기 말까지에도 이 국경선은 변동이 없고, 고조선 후국 동호와 고죽 등이 연(燕)을 압박해 연(燕)은 존망의 위기가 계속됐다.


신채호 선생에 의하면(‘조선상고문화사’), 이때 고조선 측(동호와 고죽)이 연(燕)보다 군세가 우세하고 군제가 발달해 연(燕)을 공격했으면 고조선의 승리가 확실했다. 그러나 동호의 대신 예(禮)가 개전(開戰)을 극력 반대하고 화친을 추구하므로 그의 주장이 채택됐다.


이에 긴장과 공포 속에 있던 연(燕)은 환영해 동호에 진개(秦開)를 인질로 보내어 화친을 약속했다. 동호(고조선 후국)의 왕은 진개를 매우 신임했으므로, 진개는 수십 년간 동호의 군사시설과 군사무기, 군사기술을 관찰하고 습득하게 됐다.


연(燕)의 진개는 수십 년간 동호를 거울같이 잘 알게 된 후 탈출해서 연(燕)에 귀환해 군사령관이 됐다. 진개는 고조선의 철기문화와 철제병기를 수입해서 무기를 고조선식으로 개혁하고, 기마부대를 편성해서 징병제를 실시해 강군으로 훈련시킨 후, BC 3세기 초엽에 동호를 기습했다.


진개는 동호의 강점과 약점을 잘 알고 탈출해 본국에 돌아가서 치밀한 전쟁 준비를 한 후에 동호를 기습한 것이므로, 결국 동호는 대패하고 연(燕)의 진개가 크게 승리해 동호의 많은 영토를 빼앗게 됐다.


진개가 승리한 후 연(燕)이 행정구역을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의 5군(郡)으로 편성했는데, 이때 연·진 당시에는 지금의 난하(롼허강)를 ‘요수(遼水)’라고 호칭했다. 그러므로 연(燕)이 이때 말한 요동·요서는 난하(당시의 요수)의 동쪽과 서쪽 양안을 가리킨 것이었다. 중국 고


대사에서 요하, 요수는 중국의 동북 국경지대 ‘멀리 있는 강’의 호칭이어서 여러 차례 변동했다. 신채호 선생이 잘 밝힌 바와 같이 진(秦)나라 때까지는 요하가 지금의 난하였다.(‘조선상고문화사’) 그 후 고중국의 영역과 인식이 동북쪽으로 이동·확대됨에 따라 대능하(大凌河)를 요하로 불렀다가, 한(漢)나라 이후에야 지금의 요하를 요하로 호칭하기 시작했다




▲ 고조선의 청동투구


요컨대 연(燕)의 장수 진개의 공격 때 BC 3세기 초엽에 이르러서 요동·요서(난하의 동·서)에 걸쳐 있던 고죽국·불도하·불령지는 패퇴했으며, 고조선은 서변 1000여 리의 영토를 상실한 것이었다.


고조선은 BC 3세기에 이르러 연(燕)의 장수 진개의 공격과 뒤이은 진시황의 만리장성 수축으로 이전의 영정하·간하 계선에서 후퇴해 이 단계에서는 만리장성을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으로 삼게 됐다.


BC 3세기 초, 연(燕)이 고조선 후국 동호를 공격해 고조선 영토 1000리∼2000리를 빼앗은 전성기 이후, 연(燕)은 중국의 전국시대(BC 403∼BC 221) 이른바 ‘전국7웅’(戰國七雄)의 하나가 됐다.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 초(楚), 진(秦)의 7국은 패권을 장악하려고 치열한 쟁투를 벌이게 됐다. 이 가운데서 진(秦)이 가장 강성해 한·위·조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마침내 BC 222년에는 연(燕)도 멸망시켰다.


진의 왕 정(政)은 열국을 통일하자 BC 221년에 황제를 자칭해 ‘시황제’(始皇帝)라고 불렀다. 진시황은 통일을 성취하자마자 기존 열국의 성들을 연결해 이른바 만리장성의 수축을 시작했다. 그 가운데서 고조선과 접경한 나라가 연(燕)나라였으므로 만리장성은 연(燕)의 장성을 동북 방면의 한계로 했다. 즉 진시황의 만리장성은 연·진과 고조선의 경계선으로 된 것이었다.


만리장성의 역사를 3기로 나누어 본 신채호 선생의 연구를 요약해 보면 그 실상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첫째는 진시황 이전의 연(燕) 장성이다. ‘사기’에 “연(燕)이 흉노를 막으려고 장성을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 쌓았고, 그 안에 상곡(上谷), 어양(漁陽), 우북평(右北平), 요서(遼西), 요동(遼東) 군(郡)을 두었다”고 했는데, 이것이 진시황 이전의 연(燕)의 장성이다.


둘째는 진시황의 장성이니, 진시황은 연(燕)의 장성을 그대로 활용한 위에 북방과 경계를 이뤘던 한·위·조(본래 진(晉)에서 분화)의 성곽을 북서변으로 연결했다. 이것이 진시황의 이른바 만리장성이다.


셋째는 진시황 이후의 장성인데, 오늘날 남아 있는 만리장성은 명(明)나라 때 서달(徐達)이 진시황의 장성을 그대로 보수해 축성한 것이다. 신채호 선생에 의하면 연(燕)의 장성이나 진시황의 장성이나 또는 명의 장성이나 모두 그 동남쪽 끝은 난하 유역의 구 영평부(永平府) 안에 있었고, 지금의 난하 하류 동쪽 갈석산(碣石山) 부근에서 끝나는 것이다. 이것을 통칭해 만리장성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연·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만리장성은 연(燕)의 진개(秦開)에 의해 고조선 후국 고죽국이 멸망한 직후의 고중국 측(연·진)이 축성한 고조선과 고중국(연·진)의 국경선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중국사회과학원이 그린 지도 위에 그려보면 위의 작은 사진과 같다.


고중국(연·진)의 입장에서 보면, 만리장성은 고조선 후국들(산융·동호 등)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연(燕)과 진(秦)이 축성한 방어선이었다. 고조선의 입장에서 보면, 만리장성은 그 이전 영정하까지 남하 진출했다가 BC 3세기 초엽에 연(燕)에 기습당해 패전해 고죽국 등 1000여 리를 잃고 후퇴했다가, 진의 만리장성 수축으로 회복하지 못하게 경계선이 축성된 고조선의 서변 ‘국경선’이었다.


필자는 즉 만리장성은 고중국 측(연·진)이 축성한 BC 3세기경의 고조선과 고중국의 마지막 단계의 국경선이었다고 보고 있다. 왜 고중국(연·진)은 만리장성을 축성했으며, 왜 고조선(동호·산융)은 잃어버린 만리장성 이남의 영토를 회복하지 못했을까?


고조선의 후국 동호와 산융(원흉노) 등의 질풍노도 같은 막강한 기병(騎兵)부대가 만리장성을 넘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리장성은 고조선 후국들 가운데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의 막강한 기병부대의 남하를 막기 위한 길고 높은 성벽이었다.


보병부대는 만리장성을 기어서 넘을 수 있었으나, 인간의 손이 성문을 열어주지 않는 한, 손이 없는 말은 만리장성을 넘을 수 없었다


오늘날 중국의 일부 소위 ‘동북공정’ 추진 인사들이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 만리장성의 시원을 역사적 진실 그대로 난하(당시 호칭 요수) 동쪽 강안 갈석(碣石)에서 구하지 않고, 지금의 요령(遼寧)성 요하의 동쪽 압록강 대안 단동(丹東)에서 구하는 것은 완전히 허위다.


일부 ‘동북공정’ 인사가 단동의 고구려 성인 호산산성(虎山山城)을 중국식으로 개수해 ‘장성(長城)의 시원(始原)(만리장성의 시작)’이라고 새겨넣은 것을 답사갔다가 목격했다.


그러나 이것은 역사 왜곡 날조이며,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2300년 전 고조선과 고중국의 국경선인 난하 하류 갈석산 아래에서 시작하는 만리장성이 고조선 유민을 포함한 연·진 사람들의 가혹한 부역 노동으로 쌓아놓은 역사 유물로 달에서도 보이도록 길게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 10 회 참조)


■ 용어설명


진개(秦開)


중국 전국시대 연(燕)나라의 장군이다. 진개는 본래 호(胡·북방 이민족)에 인질로 보내져서 그곳 사람들에게 신임을 얻었다. 이후 연나라로 돌아가 군대를 거느리고 동호(東胡)를 습격해 패주시켰다. 진개의 정확한 활동 시기는 알기 어렵다.

다만 ‘사기’ 흉노열전에서는 진개가 조 무령왕이 운중(雲中)·안문(雁門)·대(代) 등의 3군을 설치한 후에 활동했다고 쓰여 있다.

이는 대략 무령왕이 재위 26년(BC 300년)에 운중을 차지한 이후이다. 그의 손자 진무양(秦舞陽)의 활동 시기가 BC 227년인 것으로 미뤄 볼 때 대략 BC 3세기 초에 활동한 것으로 짐작된다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11. BC8세기 조중전쟁과 국경선 - 고조선과 古중국 경계선 이어서 쌓은 것이 만리장성이었다 / 문화일보,2019. 12. 31.


12. 고조선의 사회신분

- 고대제국 기본틀이었던 신분제… 고조선도 ‘4개 세습계급’ 사회였다


한민족 문명학

‘왕족-귀족-평민-노비’로 이루어져… 거울·칼·옥 유물들은 ‘천부인’ 왕족의 상징

관료·장군 역할 귀족 ‘수레’ 소유하기도… 생산담당 평민은 부의 정도에 따라 다시 3개층으로 구분


인류에게 구석기시대는 사회학적으로 서열(rank)만 있었지 신분(estate)과 계급(class)은 없었다. 구석기인 무리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을 우두머리(Head, Chief)로 뽑아 그의 향도에 따라 사냥과 식료 채집을 하러 유랑하면서 겨우 생존을 유지했고, 무리의 나머지는 모두 평등했다.


그러나 신석기시대에 농경사회가 시작되고 잉여생산물이 발생하여 축적되기 시작하자, 이를 분배하는 과정에서 우두머리를 비롯하여 그의 측근들이 서열의 상위를 기득권화하고 잉여생산물 분배에서 특권을 세습적으로 설정하고자 하여 ‘신분’이 발생했으며, 신석기 말기에는 제도로서의 사회신분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우두머리(chief)는 자기의 지위를 자기 자손에게 세습시키는 군장사회(chiefdom, 君長社會)를 형성해 나갔으며, 측근에게 특권을 나누어 주어 세습 ‘귀족’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군장사회가 고대국가·고대사회 형성으로 진전됨과 동시에 사회신분도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신분’과 ‘계급’의 가장 큰 차이는 신분은 대대로 ‘세습’되는데 비하여, ‘계급’은 세습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말하면 신분은 세습되는 계급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인류의 모든 고대사회는 신분제 사회였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능력’이 아니라 출생 ‘신분’이 지위와 직책의 범위를 결정했다. 인류사회의 신분제도가 폐지된 것은 18∼19세기 때였다. 영국은 아직도 신분제를 농노제 폐지 이외는 유지하고 있다. 인류는 약 4000∼5000년간 신분제도 속에서 생활한 것이다.


고조선이 약 5000년 전 동아시아 최초의 고대국가로 건국되고 고대연방제국으로 발전됨에 따라 고조선 문명권의 세습적 사회신분제도가 발전되었다. 고조선은 한국역사 최초의 신분제 사회였다. 고조선문명권의 사회신분제도는 기본적으로 4개 큰 신분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①왕족(제왕 및 후국소왕의 왕족) ②귀족 ③평민 ④노비의 4신분이 그것이다.


고조선 제왕의 지위와 역할은 국가 최고통치자의 지위를 갖고, 통치에 필요한 모든 자원을 사용처분할 특권을 가지면서, 국가와 국민을 외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하고 국민의 생존을 유지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고조선 왕족은 혈연적 씨족공동체를 형성하여 여러 가지 신분적 특권을 누리면서 제왕의 통치를 엄호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삼국유사’ 고기에는 환웅이 환인(하느님)으로부터 지상으로 내려가 사람을 통치하라는 천명의 증거로서 ‘천부인’(天符印·하느님이 만들어 주신 증명) 3개의 통치권 증거물 관련 기록이 있다. 출토되는 고고유물에서 보면 천부인 3개는 ①거울 ②칼 ③옥이었다. 이 세 가지 보물이 한 벌로 발굴되면 왕족무덤인 것을 알 수 있다.


고조선의 왕족 표징의 하나인 ‘청동거울’은 왕족 자신들이 하느님(환인·桓因, 천신·天神)의 아들과 자손이라고 생각하고 그 증거로 사용했다.


고조선의 청동거울(다뉴조문경과 다뉴세문경)이 다른 문명과는 달리 언제나 둥근 형태인 것은 ‘하늘’(천원·天圓)과 ‘해’(태양)를 상징한 것이었다고 해석된다. 둥근 청동거울의 뒷면에는 ‘햇빛살’ 무늬를 도안하고, 왕족, 무장(武將)인 경우에는 ‘번개’ 무늬를 도안했다.


고조선 왕족 표징의 하나인 ‘청동검’은 부계인 ‘한’족과 적대세력을 제압하는 ‘힘’을 상징한 것으로 해석된다. 고조선 왕족 표징의 하나인 ‘옥’은 모계인 ‘맥’족과 부드러운(곡선적) 선정(善政)의 문화를 상징한 것으로 해석된다.


고조선문명권의 청동기시대 고고유적·무덤들 가운데 부장품으로 ①청동거울 ②청동칼 ③곡옥(또는 환옥)이 한 벌(한 세트)로 출토되는 무덤들이 가끔 있다. 이것은 일단 고조선의 단군계 왕족의 무덤이라고 볼 수 있다.


고대연방국가는 변방에 왕족 무장을 파견하여 주둔시킨 경우가 많았다. 예컨대 중국 요령성 심양 정가와자 6512호 목곽무덤은 이러한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 무덤에서는 42종 797점에 달하는 부장품 가운데서 ①청동거울(다뉴세문경) 1개 ②비파형동검 3개 ③옥 목걸이 1개가 한 벌로 나와서, 이 무덤 주인공이 고조선 단군계 왕족 출신 무장임을 알려주고 있다.


이 무덤의 주인공은 4필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탔으며, 수레를 화려하게 치장했다. 이것은 말머리에 새 깃털을 화려하게 꽂아 붙이는 나팔형 청동기가 4개이고, 모든 마구가 4벌씩인 데서 알 수 있다. 화려한 수레와 치장은 일종의 신분재(身分財)였다.


고조선 후국의 군장·족장들 가운데 단군왕검의 직계혈통 후손이 아닐지라도, 고조선 왕족의 성씨를 하사받은 ‘단’(檀), ‘한’(韓), ‘한·간’(汗), ‘해’(解), ‘아사나’(阿史那) 등 성씨의 다음 후국군장들은 일단 고조선문명권의 일종의 ‘왕족’이라고 볼 수 있다.


①부여의 왕족 -‘해’(解) 씨 ②선비의 왕족 -‘단’(檀) 씨 ③유연의 왕족 -‘대단’(大檀) 씨 ④산융(원흉노) 왕족-‘단’(檀) 씨 ⑤철륵(정령, 원돌궐) 왕족-‘아사나’(阿史那) 씨


대동강 유역에는 고조선 왕족의 무덤들이 다수 있는데, 문헌이 없어서 어느 왕족의 것인지 판별할 수 없다. 이 가운데 1958년 건축공사 중 우연히 발견된 무덤의 출토 유물 중에 ‘부조예군(夫租예君)’이라는 인장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부조예군묘’라고 통칭하는 무덤이 발굴되었다.


이 무덤의 출토품을 통하여 고조선 말기(BC 2세기) 고조선 후국인 예족 군주 말단 왕족의 생활실상의 극히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부조예군묘’의 부장품으로는 먼저 무기류로 ①고조선식 세형동검 1개(조립식 세형동검으로 손잡이를 제외한 검 몸체의 길이 39.6㎝·그림 1)를 비롯하여 ②다수의 청동제 마구류 ③청동제 수레부속품 ④무기류 등이 출토되었다.


고조선 후국의 몰락왕족도 화려한 무장을 하고, ‘기마’를 했을 뿐 아니라, ‘수레’도 애용하였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후기와 말기·민족이동기에는 후국민족의 족장 또는 군장들이 ‘가’(加, Ka, Ga)의 명칭에 머물지 않고 ‘한’(Han, 제왕·왕)을 칭하여 ‘가한’(가+한) ‘칸’ ‘간’(Kahan, Gahan, Khan, Gan)이라고 호칭한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후국민족 ‘칸’ ‘간’들도 신분이 왕족으로 상승된 경우라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세계사에서 왕 또는 제왕을 ‘칸’(Khan), ‘간’(Gan), ‘한’(Han), ‘가한’(Gahan)이라고 호칭한 왕족의 부계는 모두 고조선 후예계통이라고 볼 수 있다.


유럽중세사를 읽으면, 군주국들 가운데, ‘칸 군국(君國)’(‘Khanate’)이라는 군주국들이 10여 개 나오는데, 이들은 고조선 연방제국 해체 후 기마부대를 이끌고 서방이동한 고조선 문명 후예들이 유럽에 세운 중세국가들이다. 오직 고조선문명에서만 왕을 ‘한’ 또는 ‘칸’으로 호칭했기 때문이다.


고조선의 사회신분제도에는 왕족의 바로 아래 ‘귀족’ 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특권적 행정관료 또는 부하 무장(武將)이 되어 위로는 제왕의 통치를 보좌하면서 아래로는 평민지배를 담당하고, 전쟁이 일어나면 군사의 장군·장교 또는 지휘관의 일부가 되어 국방을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고조선 사회의 귀족신분은 ①관료귀족과 무장 ②일반귀족 ③천군(천군·天君, 산군·神官)의 세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고조선에서는 최고위 관료귀족을 ‘가’라고 불렀다. 한자 발음표기에는 加, 伽, 可, 柯 등의 여러 가지 한문글자로 ‘가’ 발음이 표기되었다. 후국 부여에서는 관직명으로 ‘가’를 붙여서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저加)·‘구가’(狗加) 등과 같이 ‘가’(加)가 장관직 명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고조선의 도읍 아사달 주변과 후국들의 수도 국읍들의 주변에는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설치하고, 여기에 ‘단군신’(檀君神, 天神, 단굴, Dangun, Dangur)의 제사를 담당하는 제사장인 ‘천군’(天君)이라는 호칭의 ‘신관’(神官)을 두었다. 이 소도별읍의 ‘천군’은 특수한 귀족신분의 하나였다.


권세 있고 부유한 귀족(大加)은 ‘수레’를 소유했으며, 거의 모든 귀족이 ‘말’을 기마용으로 소유했다. 고조선의 요서지역 영성현 남산근 102호 귀족무덤에서 출토된 뼈에 두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의 그림(그림 3)이 새겨져 있어서 ‘고조선식 수레’를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귀족신분의 특징은 생산노동에는 종사하지 않고 정치·행정·군사(장교)에만 참가하여 활동하는 데 있었다. 부여의 경우와 같이 전쟁이 일어나면 고조선의 귀족 남자는 모두 군인으로서 전쟁에 참가했다.


고조선사회 인구의 절대다수를 점했던 기본신분은 평민이다. 평민신분의 지위와 역할은 제왕과 귀족신분의 지배 아래에서도 일종의 ‘자유민’으로서 고조선사회를 지탱하는 모든 ‘생산활동’ 담당 역할을 수행한 것이었다. 평민신분의 생산활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농경과 목축이었고, 다음 보조적인 것이 수공업과 상업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평민신분은 조세, 군역, 부역의 의무도 담당했다. 마을에 남아 있는 공유지경작, 수로시설, 고인돌축조, 대건축·제단·성곽 등의 토목공사들도 두레를 편성하여 주로 평민신분이 담당했다.


평민은 ‘소가족제도’의 독립가족 생활을 했다. 고조선 시대의 집자리 발굴 결과를 보면, 한 집자리는 평균 약 5명이 거주할 수 있는 공간이어서 고조선의 가족제도는 평민의 경우 ‘소가족제도’였다고 볼 수 있다.


고조선사회의 평민은 3개 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①호민(豪民) ②소민 ③하호가 그것이다. ‘호민’은 부유한 평민을 가리킨 것이다. 소민(小民)은 평민의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자유민이었으며, 농업 종사의 경우 자영농민(그림 2)을 가리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조선시대에는 인구에 비해 개간가능한 미간지가 많았으므로 소민(小民)은 가족노동력을 활용하여 미간지를 ‘개간’해서 경작하여 농민적 토지소유를 정립하고 얼마든지 ‘자영농민’이 될 수 있었으리라고 추정된다.


고조선 사회의 ‘소민’은 인구 구성에서 절대다수를 점했으며, 신분은 ‘자유민’이었으나, ①조세납부와 ②병역의무와 때로는 ③부역의 의무가 있었다. 조세는 생산물의 20분의 1인 이십취일세(二十取一稅)가 기준이었다. 고중국 맹자는 이 세율이 가볍다하여 ‘맥도’(貊道)라고 호칭했다.


‘삼국지’ 위서 부여전에서 (소민이) “활·화살·칼·창을 병기로 사용하며, 집집마다 자체적으로 갑옷과 무기를 보유했다”고 서술한 것은 ‘소민’이 전쟁시기에는 모두 스스로 무장한 ‘병사’가 되는 ‘전민개병(佃民皆兵)’ 신분이었음을 쓴 것이다. ‘소민’은 스스로 무장할 수 있었다는 면에서 명백히 ‘자유민’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호’는 평민 신분층 가운데서 최하위층에 있던 가난한 평민을 가리킨다. 그들은 사회신분은 평민이고 자유민이었으나, 경제적으로 영락하여 노비신분으로 전락할 위험이 있는 빈곤한 평민이었다.


고조선사회에서는 ‘천민신분’으로서 ‘노비’신분이 형성되어 있었다. 고조선 노비신분의 사회적 지위는 주인(노비주)의 재산으로 규정되어 자유와 권리가 전혀 없는 예속된 천민으로서, 우마처럼 사역당하고 매매되는 최하층 신분이었다.


고조선 노비신분의 역할은 주인의 지시에 따라서 ①가사노동을 주로하고 ②생산노동 ③기타 온갖 잡역 노동을 수행하는 것이었다.


고조선의 ‘범금8조’의 한 조항에, “도둑질한 남자는 가노(家奴)로 삼고, 여자는 비(婢)로 삼는다. 단 재물로 죄를 면하여 속량하고자 할 때에는 1인당 50만을 배상하도록 한다”는 조항은 고조선사회에 ‘노비제도’가 실재했었고, 노비는 우마처럼 매매되었으며, 속량가격은 약 50만이었음을 잘 알려주고 있다.


고조선사회 전체의 신분 구성에서 수적으로 대부분을 점유하면서 생산을 담당한 것은 ‘평민’이었고, 왕족과 귀족이 그들을 지배하면서 4신분이 함께 고조선 문명을 만들어 나갔다고 볼 수 있다.


■ 용어설명


부조예군(夫租예君) : 대동강 유역에서 1958년 건축공사 중 발견된 고조선 왕족의 무덤. 출토 유물 중에 ‘부조예군’이라는 인장이 포함돼 있어 ‘부조예군묘’라고 통칭한다. 이 무덤의 출토품을 통해 고조선 말기(BC 2세기) 고조선 후국인 예족 군주 말단 왕족의 생활상 일부를 들여다볼 수 있다. 고조선식 세형동검, 다수의 청동제 마구류와 수레부속품, 무기류 등이 출토됐다.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12. 고조선의 사회신분 - 고대제국 기본틀이었던 신분제… 고조선도 ‘4개 세습계급’ 사회였다 / 문화일보,2020. 1. 29


13.우랄·알타이어족 기원

- 유라시아 분포한 우랄·알타이어족은 고조선語 쓰던 기마민족에 기반


▲ 고조선 해체 후 부여·고구려·백제·신라 다국시대에 그들의 언어는 이미 고조선어를 공통조어로 계승했기 때문에 서로 통역 없이 소통했다. 이를 입증하는 중국 고문헌 기록은 적지 않다. 사진은 단군이 천제를 올렸던 곳이라 전하고 있는 인천 강화군 마니산 정상의 참성단. 자료사진


- 한민족 문명학

고조선 세운 한·예·맥 부족 모두 ‘밝’족 언어에 기초… 제후국 부족들도 공통 언어로 사용

유럽까지 대이동한 훈족·튀르크족·위구르족, 현지인과 융합하며 고조선語 기반한 우랄·알타이어족 형성


인류의 언어는 사회학적으로 인간이 집단을 이뤄 생활할 때 의사소통을 위해 발명한 도구다. 그러므로 인류의 언어는 이미 구석기인 무리(bands)에서 발명됐음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고대 고(古)한반도 사람들을 한 ‘민족’ 공동체로 결합시킨 가장 기초적 결합요소는 ‘고대 한국어’라는 ‘언어의 공동’이었다. 민족은 일차적으로 ‘언어공동체’인 것이다.


한국어는 언제 어떻게 형성됐을까? 언어학자들은 미시적으로 현대언어의 구조적 친연성을 탐구해 소급해서 어족을 분류하고 기원을 찾아 큰 성과를 냈다. 결론부터 말하면 한국어는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언어학자들이 밝혀낸 우랄·알타이어족의 특징은 ①주어(S)+목적어(O)+동사(V)의 어순 ②후치사 ③교착어 ④모음조화 ⑤두음법칙 ⑥부동사의 중요한 역할 ⑦모음교체 및 자음교체의 없음 ⑧관계대명사 및 접속사의 없음 ⑨어휘의 성별이 없음 등이다.


한편 역사사회학자들은 반대로 먼저 ‘민족형성과 이동’을 거시적으로 탐구해 한국어 및 한국민족의 기원과 우랄·알타이어족의 기원을 동시에 찾아낼 수 있다. 이에 의하면 고조선 문명의 고조선어(고대 한국어)가 ‘우랄·알타이어족’의 공통조어(共通祖語)이고 그 기원임이 밝혀지게 된다.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들’은 기후가 온난화돼 북위 40도 이북에서도 인간의 상주와 농경이 가능하게 되자, 약 9000년 전부터 북위 40도선을 넘어서 이동하는 씨족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고한반도의 북위 40도선 이남에 그대로 남아서 농경 등을 영위한 초기 신석기인들은 ‘한’부족을 형성하고 동시에 언어도 ‘한’부족 언어를 형성하게 됐다.


북위 40도선을 넘어서 북상해 요동반도·대요하 동쪽 태자하·북류 제2송화강·눈강·목단강·수분하·흥개호·혼강 일대를 중심으로 이동해 정착한 신석기인들은 ‘예’(濊)부족을 형성해 역시 ‘농경’을 시도하면서, 태양을 숭배하며 ‘범’(虎)토템을 갖고, 언어도 ‘예’부족 언어를 형성하게 됐다.


북위 40도선을 넘어서 북상해 대요하 이서의 대릉하·소릉하·노합하·시라무렌강 유역에 이동해 정착한 신석기인들은 ‘맥’(貊)부족을 형성, 역시 ‘농경’을 시도하면서 태양을 숭배하며, ‘곰’(熊)토템을 갖고 언어도 ‘맥’부족 언어를 형성하게 됐다.


‘한’ ‘예’ ‘맥’부족이 각각 언어를 달리 분화해서 형성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모두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유형’(‘밝’족)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 근저에는 고한반도 초기 신석기인 시대의 ‘원시 공통어’(‘밝’족 언어)의 통합적 기초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한’족은 ‘해’(태양) 숭배의 ‘새’ 토템 부족이었으므로 족장을 ‘한’으로 호칭했는데, ‘맥’족은 ‘곰’토템 부족이었으므로 족장을 ‘님검(검, 곰)’(임금)으로 호칭했다. 고조선어에서는 제왕의 어휘에 ‘한’과 ‘님검, 검’이 병존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는 대부분 ‘한’(Han)이었다.


고조선 문명권에서 처음에 ‘한’(Han)은 제왕이었고, 제후나 지방장관은 ‘가’(Ga)였다. 그러나 고조선의 발전과정에서 제후가 제왕이 되거나 자칭했을 때에는 ‘가한’(Ga+Han), ‘간’(Gahn), ‘칸’(Kahn)이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인류사에서 제왕을 ‘한’(Han), ‘간’(Gahan), ‘칸’(Kahn)으로 호칭한 국가와 민족은 모두 원래 고조선 문명권의 포함된 국가나 민족뿐이었다.


고조선이 후국(侯國)제도를 채택해 고대연방제국으로서 여러 부족과 원민족들이 고조선 연방국가에 포섭되고 고조선 문명권이 형성되자, 고조선 문명권에 속한 후국 부족들과 원민족들은 고조선어를 분유해 자기 부족어 또는 원민족어를 통합시켰으므로 고조선어는 고조선 문명권의 공동의 언어가 됐다.


BC 108년 고조선 해체 후에 그 후예들이 유라시아 대륙 각지에 흩어져 민족이동을 했어도 그들의 언어는 고조선어를 조어(祖語)로 해서 변동해 고조선어와 매우 밀접한 친연성을 갖게 됐다. 즉 고조선 문명권에 속했던 민족들의 언어와 그 후예들의 언어는 ‘고조선어’를 그들 언어의 공통 조어로 공유하게 된 것이었다.


우선 한국역사에서도 고조선 해체 후 부여·고구려·백제·신라 다국시대에 그들의 언어는 이미 고조선어를 공통조어로 계승했기 때문에 서로 통역 없이 모든 나라와 지역들에 고조선어가 공동으로 통용됐음을 단편적 고문헌으로도 논증할 수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고구려전에서는 동이의 옛말에 의하면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 하는데, 언어와 풍속 등은 부여와 같은 점이 많다”고 했다. ‘후한서’ 동이열전 고구려조에서도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이라고 하는데 그러한 까닭으로 언어와 법칙이 많이 동일하다”고 기록했고, 이어서 구려조에서는 “구려는 일명 맥(貊)이라 부른다”고 했다. 즉 맥족인 부여·구려·고구려는 언어가 동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양서’ 백제조에서는 “백제는(…) 지금 그 언어와 복장이 대개 고구려와 동일하다”고 했다. 백제의 지배층이 부여계임은 여러 곳에 기록돼 있다. 백제와 고구려는 언어가 동일한 것이었다.


그러면 신라는 어떠한가? 신라 지배층은 ‘한’계이므로 이 점이 특히 주목된다. ‘양서’ 신라조에서는 “(신라) 언어는 백제를 기다린 이후에 통했다”고 기록했다.


고중국인들은 언어가 다른 신라인과는 언어소통을 못 하고, 신라인과 언어가 동일한 백제인을 기다려서 통역을 시켜서야 소통할 수 있었다. 즉 신라와 백제는 언어가 동일해 소통되고, 고중국인만 소통되지 않은 것이었다.


그러면 ‘예’족 계열의 언어는 어떠한가? 옥저(沃沮)가 바로 ‘예’족의 국가였는데, ‘후한서’ 동옥저조에서는 “(동옥저는) 언어·음식·거처·의복은 구려(句麗)와 비슷하다”고 했다. ‘삼국지’에 동옥저전은 “그들의 언어는 구려와 크게는 같지만(大同) 때때로 작게는 다른 부분도 있었다(小異)”고 했다.


즉 ‘한’족·‘맥’족·‘예’족의 언어는 이미 고조선 시기에 고조선어로 통합돼 하나의 민족언어로서 고조선어가 형성됐고, 잔존한 부족언어들은 방언(사투리) 정도로 남은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조선 해체 후 삼한·삼국시대에 들어가서도 이미 동일한 고조선어를 공통조어로 분유했기 때문에 삼한·삼국 등 나라는 나뉘었지만 언어는 하나의 민족어를 사용하면서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었던 것이다. 주시경 선생은 고조선(단군조선) 시기에 자연스럽게 조선어가 형성됐다는 견해를 일찍이 갖고 있었다.


그러면 고조선 문명권을 구성한 고조선 후국(侯國)들의 언어는 어떠했을까? ‘위서’ 실위전에서는 “실위어(室韋語·원몽골어)는 고막해(庫莫奚), 거란, 두막루(豆莫婁) 나라와 동일하다”고 했다. 또한 ‘위서’ 두막루 전에서는 “두막루는 옛 북부여(北夫餘)이다”라고 했다.


위의 두 자료를 합해보면, 북부여어(北夫餘語·즉 부여어)와 원몽골어(실위어)와 고막해어 그리고 거란어가 동일했음을 알 수 있다.




박은식 선생은 선비(鮮卑)는 북부여의 별종이라고 했다. 따라서 ‘부여어’와 ‘선비어’는 동일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전’(通典)은 “고막해는 그 선조가 동부선비(東部鮮卑)의 별종이다”라고 했다.


‘북사’(北史) 해전(奚傳)에서는 “해(奚)는 본래 고막해로 그 선조는 동부호(東部胡)로서 우문(宇文)의 별종이다”라고 했는데, 우문씨는 동부선비의 지배씨족의 하나였다. 고조선 후국들인 실위(원몽골)·선비·고막해의 언어는 부여어와 동일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오환(烏桓)은 선비와 고막해와 함께 동호(東胡)를 구성했던 3대 맥족계열 고조선 후국들이었으므로, 오환어(烏桓語)가 선비어·고막해어와 동일했을 것임은 충분히 알 수 있다.


정령(丁零, 원돌궐, 철륵·鐵勒, 고거·高車)과 유연(柔然)은 스스로를 고조선계(古朝鮮系)·단군계(檀君系)라고 주장했으므로, 그들이 고조선어를 분유(分有)했을 것임은 물론이다.


일본은 고조선 후국은 아니었으나 고조선 국가 해체 전후 고조선 계열 사람들이 규슈(九州) 등 일본열도에 건너가 정착해서 고조선어를 공통조어로 한 언어를 사용하면서 최초의 일본 고대국가를 수립해 운영했기 때문에, 언어의 구조와 형태에서 일본어는 선주민 어휘를 흡수하면서 고조선조어의 한 갈래 흐름으로 형성됐고, 한국어와 함께 우랄·알타이어족의 하나로 형성된 것이다.


고조선 연방국가가 BC 108년에 해체되자, BC 2세기부터 기원후 1세기에 고조선 후국들의 민족이동에 의한 동아시아에서의 ‘민족대이동’이 일어나게 됐다.


고조선 연방제국의 후국들 가운데서 서변후국이었던 유목기마민족인 훈(Huns·산융), 불가르(Bulgar·불령지, 불도하), 아발(Avar·유연), 마자르(Magyar), 튀르크(Turks·정령, 돌궐), 위구르(uyghurs)족 등은 서방으로 ‘말’을 타고 마차를 끌며 ‘민족대이동’을 감행해 카프카스 지방 등 중앙아시아에 정착했다.


이 고조선 문명권의 서변 유목기마민족의 중앙아시아로의 민족이동과 정착 활동으로 중앙아시아의 대부분이 고조선어를 공통조어로 한 우랄·알타이어족이 된 것이다.


수세기 후에 훈족, 불가르족, 아발족, 마자르족, 위구르족, 튀르크족 일부는 다시 서방이동을 감행해 발칸반도, 중부유럽, 북유럽으로 민족대이동을 계속했다. 그들이 정착을 원한 곳은 이미 선주민들이 있었기 때문에 그사이 온갖 갈등과 전쟁과 타협의 역사가 있었다.


그들이 민족이동을 감행해 정착한 곳에서 선주민들의 어휘들을 대폭 채용, 융합시켰다 할지라도, 그들의 언어 구조(문법)가 ‘고조선 언어’였다면 고조선 언어를 조어와 문법으로 한 우랄·알타이어족이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발칸반도의 불가리아와 헝가리, 중·북부 유럽의 바스크, 에스토니아, 핀란드, 갈레리아, 러시아의 수많은 타타르 공화국 언어가 우랄·알타이어족에 속하게 된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오늘날 유럽과 중앙아시아에서 우랄·알타이어족의 분포는 BC 2세기경부터 시작된 ‘고조선어’를 사용하는 민족들의 ‘세계사적 민족대이동’의 최후의 정착결과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고조선 문명에 속했던 다수 민족의 이러한 거대한 ‘민족대이동’을 가능하게 한 동력은 그들이 ‘말’(馬)을 사용하는 ‘기마민족’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고조선어 사용 후국 민족들의 민족대이동의 경로를 세계언어지도에 그려보면 <그림>과 같다.


‘민족대이동’의 경로에서도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서유럽까지 들어갔던 고조선 어족 사용 기마민족들은 인도·유럽어 사용 선주민들과 타협해 지금은 헝가리와 불가리아(제1제국)를 제외하고는 북방으로 밀려 핀란드, 에스토니아, 갈레리아 지방에 집약, 정착했다.


또 아발족 일부는 피레네 산맥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저항세력이 약했던 광대한 시베리아 일대는 대부분 우랄·알타이어족권이 됐다.


오늘날 언어학자들은 우랄·알타이어족의 개념을 세분해 우랄어족과 알타이어족과 추크치·캄차카어족으로 분류하고 있음을 본다. 또 언어학자에 따라서는 한국어, 일본어, 핀란드, 헝가리어, 튀르크어를 각각 독립한 언어유형으로 분류하고자 하는 경향도 있다. 21세기 현재의 극도로 분화 변용된 언어생활만 횡적으로 보면 이러한 주장에도 근거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적으로 기원을 찾아보면, 19세기 말까지는 위의 언어들이 모두 ‘우랄·알타이어족’으로 개념화하는 것이 정확했으며, 더 소급해 ‘우랄·알타이어족’의 기원을 더 찾아보면 그것이 바로 고조선 문명의 ‘고조선어’임을 알 수 있다.


‘우랄·알타이어족’의 기원은 고조선 문명의 ‘고조선어’이고, 이것이 현대의 우랄어족, 알타이어족, 추크치·캄차카어족의 ‘공통조어’인 것이다. (문화일보 1월 29일자 16면 12 회 참조) 신용하박사 (서울대 명예교수)


■ 용어설명


조어(祖語) : 하나의 언어가 장기간에 걸쳐 둘 이상의 다른 언어로 분화됐을 때 그 근원이 되는 언어를 이르는 말이다. 유라시아 대륙의 극동인 고(古)한반도와 만주·연해주 일대에서 발전한 고조선 문명의 ‘고조선 조어’가 기원전 2세기쯤 연방국가의 해체를 기점으로 서방으로, 동남방으로, 북방으로 민족대이동을 감행, 정착해서 ‘우랄·알타이어족’이 형성되고 그 후에 분화되고 있는 것이다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13.우랄·알타이어족 기원 - 유라시아 분포한 우랄·알타이어족은 고조선語 쓰던 기마민족에 기반 / 문화일보,2020. 2. 26.


14.고조선의 ‘神誌문자’ - 고조선 '독자적 문자' 사용했다

··· 훈민정응에 영향끼쳤을 듯


- 한민족 문명학

토기·청동기·암벽 등서 유사한 문자 발견… 삼국유사·용비어천가 등 고문헌에도 실재 흔적

세종실록엔 ‘훈민정음이 옛 전자 모방했다’고 기록… 남은 자료 적고 해독 어려워 연구 필요



고조선문명에서는 지배층 지식인만이 사용하던 고조선 말을 표기하는 ‘신지(神誌)문자’라는 글자가 있었다. 그러나 유물이 적게 발견되어 아직 해독하지 못하고 있다. 고조선 황화 유역에서 이주민 밝족이 商(상=殷·은)을 건국한 후 고중국어를 표기하는 ‘한문자(漢文字)’를 발명하여 오늘날의 한문이 되었다.


고조선문명의 후예들은 민족별로 여러 가지 문자를 차용한 간이문자를 만들어 사용했다. 15세기 전반기에 들어와서 드디어 조선에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는 새로운 알파벳이 발명되어 모든 우랄·알타이어족 언어와 세계 모든 언어를 쉽고 정확하게 표기할 수 있는 세계 문자가 창조되었다. 고조선문명의 시작부터 간략히 살펴보기로 한다.


고(古)한반도 초기 신석기인은 최초에는 노끈이나 ‘새끼에 매듭’(結繩·결승)을 만들어 의사소통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태호(太호)족이 고한반도에서 중국 산동반도로 건너가서 원주민에게 ‘새끼 매듭’(결승)에 의한 의사소통 방법을 전수해 주었다는 기록은 태호족이 떠나기 전 고한반도에서는 ‘새끼 매듭’에 의한 의사소통 방법이 실행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또한 고한반도 신석기인은 ‘나무에 새김’(算木, 佃木)을 만들어 의사소통했다는 기록(續博物志(속박물지))도 있다. 이러한 새끼줄이나 나무는 모두 썩어버렸으므로 오늘날 그 기호나 부호를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바위 또는 토기에 새긴 ‘그림문자’ ‘기호’ ‘부호’는 현재도 남아 있다.



위의 그림문자가 새겨진 요서지역 소하연문화의 토기.



그러나 현 단계에서는 무엇을 기록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앞으로 관련 학계의 연구과제라고 할 것이다. 고조선에는 신지(神誌)문자라는 문자가 창제되어 실재했다. 고중국에서는 고조선의 신지문자를 ‘창힐(蒼힐)문자’라고 호칭하기도 했다.


국에는 고조선시대에 신지(神誌)가 창제한 문자가 사용되었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고문헌에 ‘신지’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는 ‘신지비사(神誌秘詞)’라는 서책이 암자에 남아 있었음을 기록했다.


세종 때 편찬된 ‘용비어천가’에서는 ‘구변지국(九變之局)’의 ‘局’을 주석하면서 ‘구변도국(九變圖局)’을 신지(神誌)가 편찬한 도참서(예언 서적)의 이름으로 설명했다.


‘세조실록’에서는 신지비사를 ‘고조선비사(古朝鮮秘詞)’라고 기록하면서, 민간이 소장하고 있는 ‘고조선비사’ 등을 관에서 회수하여 다른 원하는 서적으로 교환해주도록 유시했다.


‘예종실록’(1472년 편찬)과 ‘성종실록’(1495년 편찬)에도 유사한 유시가 발령되고 있는 것은 신지의 ‘고조선비사’가 당시까지는 민간에 꽤 널리 보관되어 있었는데 조정에서 모두 몰수하여 소멸시킨 것을 알려주고 있다.


조선왕조 선조 시기의 권문해(權文海)가 편찬한 ‘대동운부군옥(大東韻府群玉)’에서는 “神誌는 단군시대 사람으로 호는 스스로 선인(仙人)이라 했다”고 기록했다.


임진왜란 직전인 1590년(선조 23년) 윤두수(尹斗壽)가 편찬 간행한 ‘평양지(平壤誌)’에는 “평양 법수교(法首橋)에 옛 비석이 있는데 언문도 아니고 범(梵)문자도 아니며 전(篆) 자도 아닌 글자로서 사람들이 능히 알 수가 없었다”고 기록했다.


또한 “계미년(선조 16년) 2월 법수교에 매장되었던 멱석비(石碑)를 파내어 본 즉 3단으로 나누어졌는데, 비문은 예(隷) 자도 아니고 범서(梵書) 모양과 같았으며, 어떤 이는 이것을 단군(檀君) 시기 신지(神誌)의 소서(所書)라고 말하였는데, 세월이 오래되어 유실된 것이라고 했다”고 기록했다.


‘해동역대명가필보(海東歷代名家筆譜)’와 ‘영변지(寧邊誌)’에는 신지문자 16자가 채록되어 있다.


이 밖에 고조선 시대의 토기·청동기·암벽 등 유적·유물에는 위의 문자와 유사한 문자들이 간혹 조각되어 있어서 고조선의 신지문자가 실재했음을 알려주고 있다.


한편 고중국에서는 신지(神誌)문자를 창힐문자(蒼힐文字)라고 부르면서 기록을 남겼다.


▲ 창힐문자의 비석 탁본(사진 왼쪽).

해독되지 않는 고조선문명 지역의 신석기 기호문자가 새겨진 경남 남해군 양하리 바위와 경북 영일군 칠포리 바위.


중국 고문헌 ‘포박자(抱朴子)’에는 하(夏)나라를 건국한 황제(黃帝)가 靑丘(청구)에 도착하여 풍산(風山)을 지나다가 자부(紫膚) 선생을 만나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받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대해 ‘청구’는 조선의 옛 이름이며, 3황은 ‘환인·환웅·단군’으로서, 황제가 고조선의 풍산을 지내가다가 고조선의 ‘자부’라는 학자로부터 고조선의 문자(삼황내문)를 받아왔음을 기록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다. 이때 황제가 받아간 ‘삼황내문’이 고중국이 창힐문자라고 호칭했던 신지문자라는 것이다.


중국 송나라시대 서기 992년(송 순화 3년)에 간행된 옛 붓글씨 첩책 ‘순화각첩(淳化閣帖)’에는 한문자로 해독되지 않는 글자로 새겨진 비문 28자를 창힐문자라는 이름을 붙여 수록했다.


또한 청나라시대에 세운 중국 섬서성 백수현 사관향(白水縣 史官鄕)에 있는 ‘창성묘(倉聖廟)’라는 사당에 ‘창힐조적서비(蒼힐鳥迹書碑)’와 서안(西安)시 비림(碑林)에 있는 ‘창힐서비(蒼힐書碑)’는 역시 ‘순화각첩’의 창힐문자 28자를 모사하여 세운 것이었다.


신지문자와 창힐문자가 동일한 이유는 신지문자가 고중국에 전수된 것이 창힐문자이기 때문인 것으로 해석된다. 그 근거는 우선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위에서 든 ‘포박자’에 고중국 황제가 조선에 간 적이 있을 때 고조선의 학자 ‘자부’ 선생으로부터 고조선 문자(신지문자)를 받아왔다고 풀이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蒼힐’은 ‘푸른나라 사람 힐’의 뜻으로 그 자체 ‘靑丘’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중국에서는 ‘창힐’을 황제의 사관(史官)이라고 하면서 글자를 반포했다고 하여, ‘힐황(힐皇)’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힐’이 사관 이름이며 ‘蒼’은 ‘靑丘’(조선)를 의미함을 시사하는 것이다. 즉 창힐문자란 ‘고조선 사관 힐’에서 받아온 문자의 뜻이 되는 것이다.


고조선의 신지문자는 BC 108년 고조선 국가가 한(漢) 무제(武帝)의 침공으로 멸망하고 한 4군이 설치된 이후 한문자가 본격적으로 들어옴에 따라 급속히 소멸하기 시작했으나, 고려시대까지는 일부 수공업자 계급 사이에서 잔존했던 흔적이 보인다.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이자 국어학자, 사학자였던 권덕규(權悳奎)는 단군 고조선 시기부터 고려 시대까지 신지문자를 비롯하여 고유 문자가 존재했으며, 조선왕조에서 1443년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것은 이를 토대로 크게 계승·발전시킨 것이라는 주장을 일찍부터 강력하게 주장했다.


고조선 신지문자는 초기 소박한 문자 체계의 상태에서 BC 1세기부터 한문자가 보급되기 시작하고, 고구려·백제·신라의 조정에서 AD 4세기∼AD 6세기경 한문자가 공식 문자로 채택됨에 따라 급속히 쇠퇴하기 시작하여 소멸 단계에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고려시대까지는 민간에서 구속용문자(舊俗用文字)로서 잔존했다가, 조선왕조 세조 때 마지막 잔존한 신지문자 관련 몇 종 서적까지 조정이 강제 수집하여 최종적으로 소멸시킴으로써 없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지문자는 현재 충분히 수집되어 있지 않고, 또한 해독되지도 않고 있다. 고조선문명 연구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다수의 연구자에 의해 신지문자가 풍부하게 수집된 다음에 언젠가는 해독될 날이 있으리라고 예견할 수 있다. 신지문자는 앞으로 학계가 연구해야 할 과제다.


조선왕조 세종은 1443년(세종 25년) 마침내, 다음 표와 같은 훈민정음 28자를 제정하여 1446년에 반포했다. 초성(자음) 17자와 중성(모음) 11자로 구성된 알파벳인데, 조립하면 세계 어떠한 언어도 능히 표현할 수 있는, 세계 문자들 가운데 가장 우수한 과학적 문자이다.


주목할 것은 세종이 훈민정음을 제정한 ‘세종실록’ 기사에 훈민정음이 ‘옛 전자(古篆)’를 모방했다고 기록한 사실이다. 또한 정인지의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에서도 “글자는 옛 전(篆)자를 모방했다”고 기록했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 고전(古篆, 옛 전자)을 반드시 한문자의 ‘옛 전자’로만 해석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 표현은 훈민정음 반대파에게는 한문자의 ‘옛 전자’로 해석되게 했지만, 동시에 신지문자의 ‘옛 전자’의 의미도 포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훈민정음의 글자 꼴이 한문자의 옛 전자와 동일한 것은 몇 개 없는 반면에, 그 정도의 닮은 수는 아직 50여 자밖에 수집하지 못한 신지문자에도 실재하기 때문이다.(표 참조)


물론 훈민정음은 완벽한 표음문자이고, 신지문자는 표의문자인지 표음문자인지조차 알지 못하는 미지의 문자이기 때문에, 훈민정음이 신지문자를 계승 완성한 문자라고는 추정할 수 없다. 필자는 신지문자와 ‘훈민정음’은 별도의 문자체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사회학도이고 언어·문자학자가 아니므로, 이것은 필자의 생각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 도중에 모든 기존 문자를 참조했고, 요동에 와 있는 명의 언어학자 황찬(黃瓚)에게 성삼문(成三問) 등을 13차례나 파견하면서 서면 토론한 것을 고려할 때, 세종이 고려시대까지 민간의 일부에서 존속했고 세종의 후대 왕들 시대까지도 존속하여 그 수거를 명령했던 신지비사와 신지문자를 참작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볼 수 있다.


신지문자와 훈민정음의 관계 역시 학계의 앞으로의 연구과제 중 하나라고 할 것이다. 명백히 할 것은 고조선문명에서 지배층은 독자적 신지문자를 제정하여 사용했으며, 한문자가 들어와 그것을 대체한 AD 4세기까지는 신지문자가 지배층 사이에서 사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지문자를 계승했든지 또는 별도의 문자체계로 창작했든지 간에, 고조선문명 창조자의 직계 후예가 15세기에 세계의 모든 문자 가운데서 가장 과학적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여 평민층까지 모든 백성이 세계에서 가장 알기 쉽고 배우기 쉬운 과학적 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 용어설명


신지문자(神誌文字) : 고조선문명 지역에서는 해독되지 않는 신석기 기호문자의 흔적들이 남아 있는데, 이를 고조선 지배층이 자신들의 말을 표기했던 ‘신지문자’라고 일부에서는 추정한다. 고중국에서는 ‘창힐(蒼힐)문자’라고 불렀다. 주류 고고학계에서는 고조선의 문자로 인정하지는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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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14.고조선의 ‘神誌문자’ - 고조선 '독자적 문자' 사용했다 / 문화일보,2020.3. 25.


15. 고조선 문명권 종교 - 태양·하느님이 단군신앙으로 통합

… 흉노·투르크 國敎로도 발전


- 한민족 문명학

단군·환웅·환인 숭배 3신교 형성… ‘삼위일체’로 여기며 사실상 인류 최초의 일신교

신성한 ‘소도’에 ‘솟대’세웠는데 끝에 나무로 만든 새 부착… 단군·인간 이어준다고 여겨

고조선시기 진국지역 농경문청동기(뒷면)에 ‘솟대’와 그끝의 ‘새’(대전 괴정동 출토,왼쪽사진의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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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른쪽 사진은 현대에 복원된 솟대. ‘단군신앙’은 우주를 하늘과 땅, 지하의 3차원 세계로 나누었고, ‘나무’와 ‘새’는 이 3세계를 소통하는 통로로 여겼다. 자료사진


고조선문명은 인류 최초의 단립벼·콩 재배와 농업경작을 시작했고, 농업경작은 처음부터 ‘햇빛’(태양광선)과 기후·기온에 크게 좌우되었기 때문에 자연히 ‘태양 숭배’가 매우 일찍 형성됐다. 고조선문명의 태양 숭배는 태양이 있는 ‘하늘’ 숭배에 연결되어 ‘태양=하느님’ 숭배의 사상과 양식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BC 30세기∼BC 24세기 고조선국가를 건국한 후에는 개국시조 ‘단군’이 고조선 사람들의 숭배의 대상이 됐다. 고조선문명권에서는 단군을 자기 민족의 조상임과 동시에 개국시조로 신앙하는 ‘단군 숭배’가 형성됐다.


개국시조 단군이 서거하자 고조선인들은 단군(의 영혼)이 그의 조부(환인), 부모(환웅)가 계신 하늘로 승천했다거나, 신성한 산의 산신으로 됐다가 승천한 것으로 설명하고 또 믿었다. 여기서 기존의 태양=하느님 숭배와 단군 숭배는 하늘 세계에서 구심점이 합쳐져서 하나로 통일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


고조선에서는 본래 제왕을 ‘한’이라고 호칭했고, 그 초대 제왕이 단군이었으므로, 한족 계열의 고조선 남방에서는 조상신이 된 개국시조 ‘한’(단군)이 승천하여 계신 하늘을 ‘한울’(‘한’의 집·전당)이라고 사유하여 ‘한울=하늘=하느님’을 숭배하는 신앙이 형성됐다.


북방(예·맥 계열)에서는 단군이 승천하여 계신 하늘을 아예 ‘단(하늘, 天)이라 했고, 시조신 ‘단군이 계신 전당·굴=단굴’이라고 생각하여 ‘단굴 숭배’ 신앙이 동일하게 형성됐다. ‘태양=하느님(天)=단군=단굴’ 숭배가 하나의 ‘단군신앙’(Tengrism, Tangrism) 체계로 통합되어 고조선문명의 신앙의 특징으로 형성된 것이다.


이에 고조선문명권에서는 ①단군과 ②그의 조상 환웅 및 ③환인(하느님)의 3신을 숭배하는 고조선 신앙인 삼신교(三神敎 또는 神敎)가 형성 보급되어 종교와 신앙의 공동성을 형성하게 됐다. 박은식은 고조선의 종교는 바로 삼신교이고, 단군신앙이라고 하였다.


▲ 불가리아 제1제국의 깃발(8세기, 위 사진)과 카즈흐스탄의 국기(21세기 초반, 아래). 신용하는 ‘단군신앙’ 상징이 들어 있다고 주장한다.


단군신앙에서는 하느님(환인)·환웅·단군은 삼위일체의 하나로 통합되어 ‘단군이 곧 하느님’이오 ‘하느님이 곧 단군’으로 신앙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고조선문명권에서는 아예 ‘단(Tan, Dan)’을 ‘하느님’ ‘한’과 동일한 용어로 사용하였다.


즉 고조선 건국 후 성립된 단군신앙은 밝은 태양과 함께 푸른 하늘 세계의 하늘 궁전에 계시는 ‘환인’ ‘환웅’ ‘단군’의 3신을 통합하여 대표적으로 ‘단군’을 조상신으로서 숭배하는 신앙이다.


단군신앙에 의하면, 환인은 ‘하느님’(上帝)에 해당한다. 환웅은 하느님(환인)의 아들로 하늘 궁전에서 태어나서 홍익인간(弘益人間)하고 재세이화(在世理化)하라는 소명을 갖고 지상으로 내려왔기 때문에 신인(神人, 天王)이다.


단군은 지상에서 ‘곰족’과 혼인한 환웅의 아들로 태어나서 나라를 세워 ‘홍익인간’ ‘재세이화’의 원리로 백성을 교화시킨 지상의 직계 조상인 인간 왕검(王儉, 天帝)이다.


단군신앙의 우주관은 우주를 3차원 세계로 나누었다. 하나는 ‘하늘’(天) 세계이다. ‘하느님 단군’은 푸른 하늘(靑天) 가장 높은 곳 하늘궁전(天宮)에서 만물을 창조하시고 지상의 후손들(고조선·고조선문명권 사람들)과 모든 인간을 굽어살피시면서 후손과 모든 인간을 항상 보호하고 도와주시며 치유해 주신다.


삼신뿐만 아니라 삼신의 부인이신 ‘삼신할머니’는 후손의 잉태·출산·양육·건강을 점지하고 보살펴 주신다고 단군신앙은 생각하였다.


다음 세계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지상(地上) 세계다. 사람들이 가족을 이루고 생업을 하며 단군의 가르침에 따라 다른 사람들과 조화롭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곳이다. 지상 세계에서 국왕과 황제도 단군의 후손으로서 단군신(檀神, 天神)에 의하여 백성을 도와주도록 소명을 받고 국왕이나 황제가 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동이족 지역 산동반도에서 출생, 성장한 공자(孔子)의 천명(天命) 사상의 기원은 고조선 이주민(동이)의 단군신앙의 천명사상에 기원한 것일 수 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은 흙에 묻히지만 정신은 분리되어 살아서 조상신인 단군신이 계신 곳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승천할 수 있다.


그다음 세계는 지하(地下) 세계이다. 지하 세계의 사람은 ‘얼’이 없으며, 체온이 따뜻하지 않고, 숨도 쉬지 않는다. 그러나 생활양식은 지상 세계와 동일하다고 생각하였다. 지하 세계를 관리하는 ‘신’(神)도 있다고 생각하였다.


이 3세계를 소통하는 통로는, 지상과 하늘을 연결하는 것이 ‘나무’와 ‘새’이다. 신성한 ‘나무’인 신단수(神壇樹)와 신성한 ‘새’(새 토템)가 영적으로 하늘 세계 조상신인 단군신과의 통로가 된다. 또한 지상 세계와 지하 세계를 소통하는 것은 ‘나무’와 ‘물’이다. 신성한 나무의 뿌리와 신성한 강물은 지하 세계와의 통로가 된다.


지상 위 산·강·성스러운 사람·성스러운 동물·나무도 신(神)이 될 수 있어서 山神·水神·地神·木神 등이 있으나 그것은 아주 작은 신으로서 유일한 천신(天神, Sky God)인 ‘단군신’의 절대적 지배를 받는다. 단군신(天神)이 최고의 유일한 절대신이다. 그러므로 단군신앙은 사실상 인류 최초의 일신교(一神敎, monotheism) 신앙이었다.


지상 세계에서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단군신(하느님이면서 동시에 조상신)의 가르침·교화를 잘 받아야 한다. 단군신앙의 교화 원리는 ①‘홍익인간’ ②‘재세이화’ ③‘단군8교’에 특징이 요약되어 있다. 홍익인간은 문자 그대로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한다”는 원리 원칙이다.


홍익인간의 내용을 분절해서 보면, 여기서의 ‘인간’은 자연에 대한 인간 우선, 인간 중심과 함께 신분과 성별, 종족을 초월한 ‘모든 인간’을 의미한다. 홍익인간의 ‘인간’은 신분 차별·남녀 차별·부족 차이를 초월한 ‘모든 인간’을 모두 한 가지 하나로 보아 보편적으로 이롭게 한다는 뜻이었다. 현대어로 표현하면, 짙은 인본주의·휴머니즘이 정립 관철되어 있었다.


‘재세이화’는 문자 그대로 “세상에 있으면서 이치로 교화한다”는 원리 원칙이다. 재세이화의 내용을 분절해 보면, ‘이화’는 폭력과 무력, 전쟁, 억압, 강제로 교화하지 않고, “‘조화’ ‘화합’ ‘평화’ ‘이치’ ‘교육’ ‘설득’으로 교화한다”는 의미다. 재세이화를 때로는 ‘이화세계’(理化世界)로 표현한 경우도 있었는데, 이 경우에도 주변 환경인 세계에 ‘조화’롭게 ‘이치’로 교화한다는 동일한 의미였다.


‘홍익인간 재세이화’를 합쳐보면, 이것은 단군의 정치이념일 경우에는 “모든 백성을 차별 없이 모든 부문에서 필요한 것을 공급해주고, 도와주며, 폭력과 강제가 아니라 이치와 조화, 설득, 동의로 백성을 교화시킨다”는 원리 원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 상형문자 한자의 기원인 갑골문에서 최초의 ‘聖’(성) 자는 나무 위에 새가 앉은 글자이고, ‘桑’(상)은 나무 위에 세 마리의 ‘새’를 올려놓은 글자라고 신용하는 주장한다.


단군신앙은 고조선의 국교(國敎)가 되었을 뿐 아니라 고조선문명권 전체에 전파 보급되어 고조선문명권의 보편적 신앙과 국교가 됐다. 그러므로 고조선에서는 특정 지역에 소도(蘇塗)라는 별읍(別邑)을 설치하여 신성시하면서, 단군신앙의 종교의식을 담당하고 백성을 교화시키는 직책으로 천군(天君)을 두었다.


중국의 고문헌 ‘삼국지’ ‘후한서’ ‘진서’ 등에는 진(辰)과 삼한(三韓) 지역에서는 국읍(國邑)에 각각 천신에 대해 제사를 주재하는 책임자를 두는데 이를 천군이라 한다고 기록하였다. 여기서 ‘天神’(천신)은 ‘檀神’(단신)과 동일하며, ‘단군=하느님’을 한문자로 의역한 것이다. 이것은 고조선 후국들에서 단군신앙이 제도화되어 있었음을 알려주는 기록이다.


소도는 내용을 볼 때 “큰 나무를 세우고”라고 했으니, ‘솟대’의 한자 음역으로 추정된다. 여기서 ‘큰 나무’는 신단수와 같은 신성한 나무다. 솟대 끝에는 나무로 만든 ‘새’를 부착해 놓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새는 토템으로 존중된 영매조(靈媒鳥)로서 단군신(天神, 단군)과 인간(人間) 사이의 뜻을 전달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반도와 만주, 동몽골, 연해주 등 고조선문명권의 고조선 사람들은 단군신앙을 공유하고 있었고, 단군신앙의 교화처인 솟대별읍과 솟대문화를 갖고 있었다. 고조선·진국(辰國)의 소도(솟대)별읍의 성역 특징은 고조선 이주민의 후예인 (고중국) 상(商) 지식인들이 갑골문 한자를 처음 만들 때 ‘성’(聖) 문자의 고안에 적용됐다. 허진웅에 의하면, 갑골문 최초의 ‘聖’ 자는 나무(솟대) 위에 새(鳥)가 앉은 그림이었다.


필자는 고대 동양에서 고조선을 가리켜 ‘해가 떠오르는 나라’(land of sunrise)의 의미로 사용한 ‘부상국’(扶桑國)의 ‘桑’(상)도 ‘솟대’의 상형문자(그림글자)라고 본다. 이 글자는 “나무 위에 세 마리의 ‘새’(鳥)를 올려놓은 글자”이다. 진국의 ‘솟대’를 형상화한 것이다.


‘扶’(부)는 ‘밝음’ ‘불’ ‘부여’의 음차 표기이다. ‘檀’(단) 자도 ‘밝달나무’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밝달’족을 표시한 것이고, ‘桑’ 자도 뽕나무를 표시한 것이 아니라 동쪽 ‘솟대나라’를 표시한 것이다.


‘회남자’(淮南子)에서는 “扶桑(부상)이 아침 햇살을 받고 해가 우주를 비추면 소소한 빛은 사해(四海)를 비추게 된다”고 하였다. 부상국을 ‘아침 햇살을 맨 먼저 받고 우주를 비추는 아침의 나라’로 기록한 것이었다. 부상국은 ‘고조선’을 가리킨 것이었다.


고조선 연방제국의 서변 후국들이었다가 BC 108년 고조선 국가 해체 후 서방이동을 감행한 흉노(Huns)족, 마자르(Magyars)족, 아발(Avars, 柔然, 大檀)족, 불가르(Bulgar, 불도하, 불령지)족, 투르크(丁零, 突厥)족들은 중앙아시아에 이동하여 장기간 정착한 시기에 단군신앙을 국교로 갖고 생활하며 발전하였다.


그들은 발칸반도 및 중부 유럽에 들어간 후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다른 종교로 개종하기 전까지 모두 단군신앙을 국가종교로 신앙하면서 발전하였다.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족은 대체로 13세기까지는 단군신앙을 국가종교로 갖고 있다가 셀림 1세가 이집트까지 정복하여 오토만 제국이 거대한 제국으로 발전하자 아랍민족들의 통치와 통합을 목적으로 14세기에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판노니아 평원을 점령한 훈족과 마쟐족의 국교도 단군신앙이었다. 아틸라를 포함한 훈족의 족장들은 모두 단군신앙의 신봉자였다.


발칸반도에 들어가 불가리아 제1제국을 세운 불가르족의 국교도 단군신앙이었다. 불가리아 제1제국의 막강한 오므르타그 칸은 비잔틴 동로마 제국으로부터 거액의 조공을 받기로 하고 30년간 평화조약을 체결했는데, 이때 동로마 황제 레오 5세는 불가리아의 전통에 따라 불가리아의 유일신인 ‘단군신’(Tangra)에게 평화협정 준수를 맹세했다.


라인강 양안을 200년간 통치한 아발족(Avars)의 국교도 단군신앙이었다. 몽골족도 단군신앙을 국교로 신앙했으며, 12세기 칭기즈칸도 단군신앙을 신봉한 대칸이었다.


단군신앙의 발상지인 한반도·만주 지역에서는 고구려가 소수림왕 2년(AD 372년) 불교를 용인 권장하기 이전까지는 단군신앙이 역시 국교였다. 백제·신라도 동일하였다. AD 4세기 말부터 지배층에 의해 단군신앙이 ‘불교’ 등으로 교체됐다


단군신앙과 ‘샤머니즘’은 다른 것이다. 단군신앙은 투르크족의 오르혼 비문에 쓰여 있는 바와 같이 국왕과 온 국민이 신앙하는 정치 통합과 도덕 교육의 체계적 원리를 갖춘 ‘국가종교’였다.


반면에 샤머니즘은 단군신앙이 국가종교의 지위를 상실한 후, 퇴화된 민속으로서의 ‘당굴’(일종의 무격)들이 행하는 질병 치유 등의 ‘굿’을 지칭한 것이었다.


19세기에 서양 문화인류학자들이 이 만주 몽골·시베리아 등지의 단군신앙 해체 후 퇴화된 유제를 샤머니즘이라고 호칭한 것이 일반화되어서, 이제는 단군신앙과 샤머니즘을 혼동하기에 이른 것이다.


단군신앙은 소련 지배 시대 중앙아시아에서는 금압당했다. 현재는 카자흐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에서는 민족 전통의 하나로 부흥운동이 일고 있다고 한다. 옛 고조선문명권 후예의 후손이 세운 카자흐스탄의 국기는 단군신앙을 그들의 민족 전통으로 상징화한 것으로 보인다.


인류 초기 문명은 모두 독자적 신앙·종교를 창출했는데, 수메르문명·이집트문명은 모두 다신교(多神敎)였다. 반면에 동방 고조선문명의 ‘단군신앙’은, 지금은 거의 잊혀버렸지만, 거대한 고조선문명의 정신적 통합과 생활 도덕의 교화를 담당했던 인류 최초의 일신교 세계 종교였다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15. 고조선 문명권 종교 - 태양·하느님이 단군신앙으로 통합… 흉노·투르크 國敎로도 발전 / 문화일보,2020.4. 22.


16. 10진법 창조·전파

- 3만9000년前 한반도 눈금돌… 10진법으로 발전해 동방에 퍼졌다


▲ 하진리에서 출토된 ‘줄새김 자갈돌’.


한민족 문명학

○남한강 유역 하진리서 발견한 줄새김 자갈돌

… 고조선 계승해 농경 기념비·별자리 돌판·토기·돌검 제작 활용

○조선 ‘천상열차분야지도’ BC 511년 별자리 그린 것

… 1년 365일 주기·24절기 정립했고 달력도 만들어


인류사회의 모든 초기 문명은 각각의 셈법 체계를 사용했다. 메소포타미아 수메르문명은 12진법(進法)과 60진법을 만들어 사용했다. 고조선문명은 어떠한 셈법 체계를 형성해 문명을 창조했을까?


문화재청과 한국선사문화연구원은 2014년 6월 16일 남한강 유역인 충북 단양군(수양개) 하진리의 남한강변 구석기 유적 발굴작업 도중에 3개 층으로 구성된 구석기 유적의 최하층(제3문화층)에서 ‘줄새김 자갈돌(눈금돌)’을 비롯해 총 1만5000여 점의 유물을 발굴했다고 발표했다.


이 가운데 ‘줄새김 자갈돌’이 출토된 제3문화층의 연대 측정은 두 기관에서 39,930bp와 39,680bp(CAL)로 측정됐다. 즉 남한강 유역 단양 하진리에서 약 3만9000년 전 옛 한반도 말기 구석기인의 ‘줄새김 자갈돌’이 출토된 것이다.


이 ‘줄새김 자갈돌’에는 21개의 줄이 1개 눈금 평균 4.141±0.326㎜의 간격을 두고 있다는 사실이 계측됐다. 이 유물을 발굴한 고고학팀은 이 ‘줄새김돌’을 말기 구석기인들이 분명히 의도적으로 같은 길이를 계산하고 만든 눈금 선이라고 보고, 이 ‘줄새김 자갈돌’을 구석기 말기∼초기 신석기인들이 어떠한 용도로 사용했고, 자갈돌에 새겨진 숫자는 무엇을 의미하는지 자갈돌에 대한 연구를 학계에 요청했다.

▲ 하진리 ‘줄새김 자갈돌’의 눈금 계측.


필자는 이를 검토 분석해 고조선문명 형성의 첫 기반인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의 ‘10진법 척도(尺度, 자)’라고 판단했다. 일부에서는 구석기 말기에 어떻게 숫자의 개념이 정립되고 길이 측정의 척도까지 만들 수 있었겠는가 의아해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스와질랜드와 남아프리카공화국 사이에 위치한 르봄보(Lebombo)산에서 약 4만4200년 전∼4만3000년 전의 원숭이 종아리뼈에 29개의 줄을 새긴 ‘르봄보 뼈(Lebombo Bone)’가 호주 고고학자 보몽(Peter Beaumont

)에 의해 1970년대에 발견됐다. 학계에서 이 눈금돌을 길이의 척도로 해석하기도 한다.


또한 1937년 체코슬로바키아 모라비아 지방 베스트니츠 마을에서 발견된 약 3만 년 전의 7㎝ 크기 어린 늑대 정강이뼈에 새겨진 55개의 눈금은 5개씩 무리 지어 배열되어 있어서 구석기인들이 약 3만 년 전에 셈법의 개념을 정립했음을 알려주었다.


또한 아프리카 나일강 상수원의 하나인 에드워드 호숫가의 이샹고(Ishango)에서 1960년 벨기에 브뤼셀대 교수인 지질학자 하인젤린(1920∼1998)에 의해 발견된 약 1만9500년 전의 짐승 뼈인 ‘이샹고 뼈(Ishango Bone)’에 그려진 세 개의 행에 새겨진 눈금을 두고 세계 학계가 아프리카의 말기 구석기인의 숫자 개념 형성과 후일 이집트문명의 ‘10진법(decimal system)’ 형성의 기원까지 논하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옛 한반도 남한강 유역 하진리 ‘줄새김돌’이 ‘길이의 척도’임은 다음의 사실에서 확인된다.


첫째, 하진리 ‘줄새김돌’의 21개 줄의 ‘눈금’ ‘사이 길이’가 평균 0.4141㎝로 균일하다.


둘째, 하진리 ‘줄새김돌’의 자갈돌 전체 길이는 20.6㎝인데, 중앙에 새겨진 눈금칸 20개의 총 길이는 8.2816㎝에 불과하고, 좌우(또는 상하)에 10㎝ 이상의 긴 여백이 남아 있다. 이것은 눈금을 30개 이상 새길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20개 눈금칸만을 새긴 것으로서, ‘20개 눈금칸’을 1단위로 한 8.2816㎝의 자 ‘척(尺)’(즉 1尺)을 사용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셋째, 수양개 6지구 하진리 ‘줄새김돌’은 이 지역 구석기인들이 ‘표준척’을 채택해 사용한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셈법 언어(수사·數詞)의 구조는 잘 변하지 않는 것인데,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셈법 언어는 당시 용어로는 알 수 없고, 고대·중세 및 현대 한국어에 그것이 남아 있으므로, 이를 통해 추적해 볼 수 있다. 즉 한국어(고대·중세·근대·현대 포함)의 셈법은 정확하게 ‘10진법’ 체계로 구성되어 있다.


1부터 10까지는 각각 숫자의 독립된 명칭을 갖고 있고, 11부터는 ‘위치’를 한 단계 격상해 옮겨서 1단계의 끝자리의 명칭에 다시 1∼9까지의 명칭을 붙여, 20이 되면 새로 독립된 명칭을 만든 후 또 위치를 한 단계 격상해 옮겨서 1∼9까지의 명칭을 붙이는, 매우 정확하고 기계적인 ‘위치적 10진법(positional decimal system)’ 체계를 가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국어의 정확한 ‘위치적 10진법’의 셈법 표시는 백(온, 百)·천(즈믄, 千)·만(만, 萬)을 넘어서 무한대로까지 10진법을 적용하는 과학적, 기계적, 논리적 체계를 갖고 있다.


남한강 유역 말기 구석기인의 10진법은 그 후 1만2000년 전 지구가 온난화되어 구석기인들이 동굴에서 나와 신석기문화를 만들면서 신석기인으로 진화하자, 이 지역 신석기인의 ‘10진법’으로 계승·확산되었을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남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에서 동아시아 최초의 신석기시대 농업혁명이 시작되어 옛 한반도 전체와 북위 40도선 이북의 새 개척지에도 전파되었으므로, 남한강 유역의 ‘10진법’은 옛 한반도 신석기인 문화유형의 이동과 확산에 동반해 전체 동아시아에 전파되었을 것임을 논의하는 것도 또한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이 옛 한반도 신석기문화의 ‘10진법’이 ‘고조선문명의 10진법’으로 발전될 수 있음은 당연한 문화 전승 귀결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조선문명의 첫 기반인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에서 수양개 ‘눈금돌’ 척도를 계승한 10진법의 ‘척도’를 계속 사용했다는 증거는 한강문화 고고유물에서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먼저 충북 옥천군 남곡리에는 신석기시대 농업경작의 업적을 기린 기념선돌이 남아 있다. 남곡리 1호 선돌(남곡리 개미재 선돌)은 기념하는 업적 내용을 선돌 표면에 논밭 고랑 45개를 등간격의 줄로 새기어 표시했다.


위의 직삼각형 부분을 제외하면 고랑줄의 길이는 약 41㎝이고, 줄의 간격은 3∼4㎝이며, 줄의 깊이는 최대 1㎝로서 모두 끌(돌끌)로 쪼아서 새긴 것이었다. 농경생활 건축물 제작에 사용한 것이다.


또 충북 청주시 청원의 아득이 고인돌 유적 가운데, 사암을 손질해 편평한 네모꼴(32.4×25×5㎝)로 돌판을 만들고 그 위에 크고 작은 금을 파서 북두칠성·용자리·곰자리 등의 별자리를 새긴 돌판이 발굴됐다.


한강문화 지역에서는 중요한 토기(예: 의례용 토기, 붉은 간토기 등)의 제작에서는 하진리 ‘눈금돌 척도’와 같은 길이의 척도를 사용한 흔적이 보이기도 한다. 고조선문명의 첫 기반인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에서는 돌검 등 무기의 제작에서도 남한강 유역 수양개 하진리 출토 ‘눈금돌 척도’와 동일한 ‘길이 척도’가 사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신석기시대 ‘한’족의 한강문화·대동강문화와 ‘맥’족의 홍산문화, ‘예’족의 신석기문화가 BC 30세기∼BC 24세기 고조선 국가의 건국을 계기로 합류하고 통합되어 인류 최초 5대 독립문명의 하나인 ‘고조선문명’을 창조하는 단계에 들어서자, 고조선문명은 당연히 한강문화의 ‘10진법’을 계승, 채용해 한 단계 더 높은 문명을 창조했다.


▲ 자(尺)를 들고있는 고조선 이주민족장 복희의 상징 초상.


또한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은 옛 한반도에서 건국된 고조선 국가의 영역이 만주의 요동·요서 지역으로 확대되고, 그 이후 더욱 영역이 확대되는 데 비례해 고조선문명권(圈)의 보편적 셈법으로 전파 확산됐다고 해석된다.


고조선 사람들이 국경을 넘어 산동반도와 황하 및 회수 사이의 옛 중국 동해안에 이주해 정착하고, 일본 열도의 규슈(九州) 지방 등에 이주해 정착하자,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은 이 지역에도 고조선 이주민들과 함께 전파·확산되었음을 추정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중국 고대학자들이 약 6000∼5800년 전에 동방 진(震·辰)국으로부터 황하 유역으로 이주해 와서 문명을 가르쳐 주었다고 기록한 고조선 이주민 태호(太호)의 족장 부부의 문장으로 태양 아래 족장 머리 위에는 ‘자(尺)’를, 족장 부인의 머리 위에는 ‘가위’를 그렸다.


태호족 족장이 고(古)한반도 고조선 진(辰)국 지역에서 갖고 이주한 상징 그림 머리 위의 ‘자(尺)’가 고한반도 수양개 하진리 출토 10진법 ‘눈금돌 자’의 연속선상에 있음은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산동지역에 처음 고조선 이주민들이 세운 고대국가 가운데 박(밝)국은 점차 발전해 상(商)국이 되었고, 상국은 ‘10진법’을 사용했다. 상의 ‘10진법’은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이 전파된 것이다.


필자는 고중국 황하문명의 10진법, 12진법, 60진법 혼용 가운데서 10진법은 고한반도 고조선 이주민인 태호족과 상의 건국 세력이 고조선문명에서 가져간 것이라고 본다.


옛 한반도에서는 이미 3만9000년 전에 ‘10진법’의 길이 ‘표준척’이 고안되었으며, 이를 계승한 신석기시대 한강문화와 뒤이은 고조선문명에서는 이집트문명과는 다른 별도 고한반도 기원에서 그 이전에 ‘10진법’이 사용되었음이 증명되는 것이다.


이집트문명의 10진법에는 1만9500년 전의 이샹고 뼈의 10진법 유물이 배경에 관련되어 있다. 고조선문명의 10진법 배경에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3만9000년 전의 하진리 ‘눈금돌’ 10진법 척도가 출토되어 있다. 고중국문명의 10진법은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이 태호족·소호족과 상의 건국 세력을 통해서 전파된 것이다.


현재 세계 학계의 인류문명사 연구는 10진법이 이집트문명에서 형성되어 세계에 전파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설명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인류문명의 최저변의 과학적 기초가 된 10진법은 2개의 기원을 갖고 있음이 판명됐다.


그 하나는 동방에서 고한반도에서 탄생한 고조선문명의 10진법이다. 동방의 10진법은 고중국문명을 포함해 모두 고조선문명에서 전파된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이집트문명의 10진법이다. 서양의 10진법은 이집트문명의 10진법이 전파된 것이다.


인류문명 진보의 3단계 법칙을 일찍이 정립했던 오귀스트 콩트는 인류의 문명 창조 지식이 수학·천문학·물리학·생물학·사회과학의 순서로 체계화되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고조선문명에서도 이 체계적 진화가 뚜렷하게 보인다.


고조선문명은 10진법과 햇빛살, 돌 건축물을 기하학적으로 도안·설계하는 놀라운 기하학적 지식, 고인돌 판에 새긴 해·달·별들의 그림, 광물의 여러 가지 합금 기술에서 매우 우수하고 독특한 문명의 시작을 유형화해 나가고 있다.


대한민국 국보 228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天象列次分野之圖)’는 고구려의 석각 탁본을 이성계의 명으로 돌에 새긴 전통시대 세계 최고의 정밀한 성좌도이다. 이 유물은 1467개의 별을 북극성을 중심으로 3개의 원 울타리와 28개의 분야로 구획해 별자리를 정확히 그린 별자리 지도이다.


현대 천문학은 북극성으로부터의 거리와 각도만 있으면 별자리의 연대를 정확히 알아내는 ‘공식’을 정립했다. 자연과학자들이 ‘천상열차분야지도’의 별자리를 이 공식에 그대로 대입해본 결과, 이 별자리는 BC 511년의 하늘을 그린 것이었다.


즉 고조선 시대 고인돌 뚜껑 등 돌에 새긴 별자리를 고구려가 탁본 뜬 것을 이성계가 다시 비석에 새긴 것이었다. 서양 고대의 별자리 관찰은 점성술로 정립되었는데 고조선의 천문학은 해와 달, 별자리 운행의 규칙성을 장기간 관찰해 1년 365일 주기와 24절기를 정립하고 ‘달력’을 작성해 농업 등 과학적 생활에 응용하는 과학으로 크게 발전했다.


강화도 마니산의 고조선 유적 참성단은 제천과 함께 해·달·별을 관측하는 천문대 유적이었다. 고중국에서 ‘은역(殷曆)’ ‘상역(商曆)’이라고 말하던 달력이 ‘고조선 달력’이었다. 중국 고문헌 ‘삼국지’ 예(濊)전은 “(예족은) 별자리 움직임을 보고 농사의 풍흉을 예견했다”고 기록했다.


자연과학자들이 정밀하게 밝혀내겠지만, 고조선문명은 10진법과 과학·기술에 기초해 성립된 인류 5대 문명의 세 번째 탄생한 최초 독립문명이었다.(문화일보 4월 22일자 14면 15회 참조)


■ 용어설명


천상열차분야지도 :

조선 태조 4년(1395) 음력 12월 석판에 새겨 만든 천문도(天文圖).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전천(全天) 천문도 중 하나로 문신 권근, 천문학자 류방택과 서운관 직원 등 모두 12명이 만들었다.


이는 하늘의 모습을 12차(12次·목성의 운행을 기준으로 설정한 적도대의 열두 구역)와 분야(分野·역대 왕조에 대응하는 땅의 영역)로 배열해 놓은 그림이다.


천문도에는 성도(星圖)와 함께 24절기에 따른 혼효중성(昏曉中星·초저녁과 새벽에 남중하는 별), 해와 달, 동양의 우주구조론, 천문도 제작 경위, 제작자에 관한 내용 등이 적혀 있다.


[출처] : 서울대 명예교수: <신용하의 인류 5대 고조선문명> - 16. 10진법 창조·전파 - 3만9000년前 한반도 눈금돌… 10진법으로 발전해 동방에 퍼졌다 / 문화일보,2020.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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