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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비밀 : 말갈족은 곧 고구려인이다
03/14/2020 1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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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

고구려의 비밀 : 말갈족은  고구려인이다

 

Naver 레알뻘짓 Blog에서 C Browser로 복사해서 펌 함.


2014. 1. 6. 22:38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 site를

click 하면 사진이 곁들여 있는 Original 레알뻘짓 Blog 삼국사 카데고리 글을 볼 수있습니다(편집자 주).


 말갈족은  고구려를 위해 목숨을 바쳤나?

 

· vs 고구려 전쟁 기록을 보면

유독 말갈족 전사들이 눈에 띈다.

 

고구려군으로 참전한 이들은 

어찌나 용맹했던지

 

중국 역사서에서는 

'동쪽 오랑캐  최강'이라는 표현까지  정도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1

 

특히  태종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645년의 침략 전쟁


말갈족 병사들이 

부신 활약을 보이자


후에 유독 말갈족 병사들만

3,300명을 집단 생매장 시키기도 했다.

 

황제가 속해 있는 부대를 

직접 공격했다는 죄목 때문이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2

 

실학자 정약용은 

이렇게 해석할 정도였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3정약용 

"이때의 충격으로 

말갈족이 발해의 건국을 직접 도왔던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가 망한 뒤로 

말갈족은 


고구려 부흥 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이들이었다.

 

고구려가 망한지 9 뒤에

고구려의  땅에 남아 있던 유민들의 저항이 드세지자,

 

당나라는 인질로 끌고갔던 보장왕을

다시 고구려  영토인 '안동도호부' 보내서 

 

그를 통해 

유민들을 통치하고자 했으니 말이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4보장왕 

"헤헤..


그러나 보장왕은 

당나라의 의도와 달리


속말말갈족과 내통하여 

고구려 복국을 도모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5

 

그리고  모의는 

사전에 발각되어


보장왕과 고구려 유민들은 

다시 강제로 중국 오지로 끌려가게 됐다.

 

그러던  696요서 지방의 영주에 끌려가 있던 

고구려 유민들과 말갈족들이

 

중국에서 내란을 일어나자

혼란을 틈타 집단 탈출하여


고구려의  땅인 

지금의 길림성 연변 부근에 '발해' 세우게 되는 것이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6

 

이때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인 걸걸중상

그리고 말갈족의 추장 걸사비우가 이들을 이끌었다.

 

이후 발해는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자신들을 고구려를 계승한 후계국으로 표현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7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내용은 

 이상하지 않는가?


 말갈족이 

고구려를 부흥시키려고 했단 말인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말갈족은 

우리 민족과는 전혀 상관없는 


언어도 다르고 문화 풍습도 전혀 다른,

여진족과 만주족의 선조 아니었나?

 

사실 그렇다.

만주족은 우리 민족과는 엄연히 다르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8

 

그런데  그들은 

한사코 고구려 부흥을 꾀하고


 새로 나라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고구려 후계자임을 자처했던 것일까

 

실로 궁금하지 않을  

없는 부분이다.


 말갈족의 족보

 

삼국사기에 보면 

고구려, 백제, 신라가 생겨날 때부터


말갈족들은 

한반도 곳곳을 휘젓고 다니고 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9

 

1세기 경에 백제를 치더니

2세기 경에는 신라를 치고


3세기에는 다시 백제를 친다.

? 이게 가능하단 말인가?

 

말갈의 지리적 위치나, 출현시기를 생각해보면

너무도 황당스럽기 그지없는 일인데..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10

 

실제로 중국 사서에 나오는말갈이라는 명칭은 

563년에 처음 나오기 때문이다.

 

따라서 삼국사기 초반에 나오는 말갈은 

 말갈이 아니다.

 

흔히 '가짜말갈'이라고 해서 

()말갈이라고 하는데,


학계에서는 

'동예' 가르키는 것으로 보고 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11

 강원도에 살던 동예족이 삼국사기 초반에 나왔던 말갈족인 것이다.

 

그러나 6세기 이후 등장하는 말갈은 

이른바 '진짜말갈'이라고 해서 ()말갈이라고 부른다.

 

이들이 거주하던 곳은 

강원도 산골짜기가 아니라,

 

백두산과 송화강, 흑룡강, 연해주의 삼림지대였다.

유목민은 아니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12 

 만주 동쪽은 대부분 타이가 숲의 삼림지대다.

 

우리는 흔히 말갈족, 여진족을 

유목민으로 생각하지만


그보다는 이들은 농경민족에 가까웠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렵·농경 민족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배도  탄다.

그래서 여진족은 '해적질' 잘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유목민족인 

거란족이나 선비족과 착각하는  같다.

 

유목민족은 만주 서쪽에 건조한 스텝지역에서 살았고

이들은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지만

 

만주 동쪽은 

숲이 무성한 타이가 침엽수림 지역으로


이곳에 살던 삼림족들은 

중세 이전까지는 상당히 낙후되게 살아왔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58

 만주 서쪽(거란족, 선비족, 몽골족)  vs 만주 동쪽 (말갈족, 여진족)

 

말갈족은 바로 

만주 동쪽에 살던 삼림민족으로


중세 이전까지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던 부족이 아니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의 계보는 이렇다.

 

상고시대 숙신 → 5세기까지 읍루 → 6세기까지 물길 → 

12세기까지 말갈 → 16세기까지 여진 → 오늘날 만주

 

 말갈족들은 어떻게 살았었나

 

실제로 시기 차이가  

여진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숙신, 읍루, 물길, 말갈은 

 가지 특징적인 공통 문화가 있었으니,

 

이들은 예맥족 등의 농경민족과 달리 

반농 반수렵의 삼림족이었다.



 

"만주의 종족은 크게, 유목민족인 동호

농경민족인 예맥, 삼림족인 숙신으로 나눠진다능."

 

중국 사서에 나오는 삼림족들의

주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았다.

 

 부여인들과 생김새는 비슷했으나 

언어가 달랐다.

 

언어가 달랐다는 것은 

 문화가 달랐다는 의미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13

 

"만주족은 유전적으로 

한국인과 가장 닮았지만.."



"언어적으로는 한국어보다는 

몽골어에 가깝다능."



"어찌보면 현대 한국어는 부여어보다 

삼한어에 가깝기 때문일수도 있겠음."

 

 

 삼림 속에서 살고 

땅을 파서 토굴을 짓고 살았다.

 

특히 이들은 반지하식 수혈주거를 하였는데

이는 겨울철 추위가 무척이나 혹독했기 때문이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14

집을 지을  지하로 얼마나 깊이 파고 들어가는가

하는 것이 부와 권력의 척도였다.

 

따라서 족장의 경우에는

사다리를 아홉개나 놓고 내려갔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군장은 없고 

읍락 수준의 촌장이 있었다.

 

전체 인구는만  이상으로 

이들은  규합되지 않고



수천명 정도의 읍락 부족들이 

이합집산을 하고 있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15

 

국가 발달 수준으로 보면 

초기 삼한의 소국들보다 못한 수준이었던 것이다.

 

 

 더럽고 냄새가 많이 나고 

변소를 집안 가운데 짓고 산다.

 

기록에 보면 집안 가운데에 변소을 두고 살았고

오줌으로 세수를 했다고 한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16

 

중국 사서에서도 말갈족들을 

대단히 지저분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반면에 고구려인들은 위생 상태가 좋았다고 하니 

이웃끼리 사뭇 달랐던 셈이다.

 

 

 문화적 발달 수준이 매우 낙후됐다.

 

 이유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변방에 있어서



중국의 선진문물이 

들어오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지역은 청동기철기 도입 시기가 

상당히 늦었고 석기를 오랜동안 사용했다.

 

그래서  지역의 특산물로 

돌로 만든 화살촉이 유명했다.



중국에 대한 조공물도 

돌화살촉과 화살이 주된 물품이었으니 말이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17 

 돌화살촉

 

 

 활을  쏘는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사냥 솜씨가 상당했던 모양이다.

 

중국 사서에는 이들은 독을 바른 화살을 이용하며

쏘는 족족 백발백중이었고 



맞으면 즉시 독이 퍼져 

죽는다고 적어 놓았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18

 

 돼지는 매우 중요한 가축이었다.

 

돼지고기를 주요한 식량으로 삼았고 

 가죽으로 옷을  입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19

 

혹독하게 추운 겨울철이 되면 

모두 지하로 들어갔는데,



이때 돼지기름을 온몸에 발랐다.

일종의 방한용 크림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돼지는 말갈족들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귀중한 재산이었다.

 

실제로 말갈족의 거주지를 발굴하면

당시 이들이 먹었을 돼지뼈가 다량 출토되곤 한다.

 

 여름철이 되면 지하에서 밖으로 나와 

 속에서 사냥을 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20

그러다 추위가 닥치면 

다시 지하 주거지로 들어갔다.

 

이들은 농경민과 달리  곳에 정착하지 않고 

이동하면서 살았지만,

 

일정한 범위 안에서 

계절에 따라 이동을 했다는 점에서



목초지를 찾아 지속적으로 이동하는 

유목민과는 성격이 달랐다.

 

 

 도둑질을 잘해 주위 나라의 근심거리였다.

 

자연 환경이 원체 열악했기 때문에

이들 역시 유목민족들처럼 이웃한 농경민족을 약탈했는데,

 

고구려, 부여, 고려, 조선시대까지

농사를 짓고 살던 우리 민족은 



이들에게 내내 

약탈을 당하곤 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21

 

 때문에 사서에는 

말갈족들은 상당히 '호전적'이라고 쓰고 있다.

 

 

 법과 풍속의 기강이 없다

 

힘이 지배하는 사회였기 때문에

경로사상이나 장유유서와는 거리가 멀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22

 

경험과 연륜을 중요시하여 

노인들이 존중받는 농경사회와는 달리

 

말갈족들은 힘이 센자가 우선시 되었으므로 

젊은이를  귀하게 취급한 사회였다.

 

 

 오곡, , 담비 털을 생산했다.

 

만주 지역은 

겨울철에는 기후가 매우 낮지만



여름에는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고온 다습한 지역이다.

 

때문에 이곳의 식생은 스텝이 아니라

대부분 침엽수림이 드넓게 펼쳐진 티이가 지대로

 

주로 숲을 태워 화전을 하는 방식으로 

경작지를 넓혀나갔다.

 

이곳에서는 오곡(기장, 보리, , , ) 생산이 

모두 가능했고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23 

 만주의 넓은 평야

 

베를 재배하여 여름철에는 삼베 옷을 입었고

겨울철에는 짐승의 털가죽을 입었다.

 

특히 담비가죽은 

이들의 주요한 특산물이었다.

 

 

 부여족과는 달리 음식을 먹을  그릇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략 손으로 먹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로 고대시대에 음식을 먹을  

도구를 사용했던 민족은 별로 없었다.

 

당시 일본도 손으로 음식을 먹었고

유럽은 무려 17세기까지도 대부분 그랬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24

 최후의 만찬 : 모두 맨손으로 식사를 하고 있다.

 

지금도 전세계 인구  

40% 손으로 식사를 한다.

 

그런데 부여족이나 삼한 사람들은 

옛부터 그릇과 도구를 사용하여 음식을 먹었던 것이다.

 

 

 이들은 부여족의 영향력 아래 있었다.

 

실제로 부여와 고구려 영토 안에는 

여러 말갈 부족들이 살았다.



고려 시대에도 많은 여진족들이 

고려 영토 내에 살았었다.

 

말갈인들이 보기에 부여인들은자신들보다 문화수준이 높고 

선진적인 생활을 하던 집단이었다.

 

그래서 때로는 힘으로 

이들의 물건을 강탈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스스로 복속하면서 

높은 문화 수준을 영유하고자 했던게 전통적인 말갈족이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25

 

그래서 발해라는 국가를 세우면서

고구려 유민(혹은 속말말갈 출신)들은 



인구의 소수를 차지했지만

지배적인 위치에서 군림할  있었던 것이다.

 

이상의 기록들은 

중국 역사서에서,



숙신, 읍루, 물길, 말갈족의 특징으로 

두루 설명하고 있는 부분들이다.

(동시대 기록을 보면 부여 > 삼한 > 일본 > 말갈 순으로 발달이   하다.)

 

 

 과연 이들의 족보가 맞을까?

 

가끔은 정설로 믿어왔던 신념들이

새로운 검증을 통해 산산히 부숴지기도 한다.

 

말갈족의 족보가 

그러하다.

 

숙신  읍루 → 물길 → 말갈 → 여진 → 만주

 족보가 과연 맞을까?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26 

 

우리는  그렇게 믿어왔지만

최근 학계의 연구결과는 그렇지가 않다고 한다.

 

특히 숙신  읍루 → 물길로 

이어지는 족보는



각자 살고 있었던 위치도 틀리고 

 같은 시대에 공존하던 때도 있어서

 

누가 누구의 조상이라는 식으로 

단정 짓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27

 

물론 동만주 삼림지역에서

숙신이 가장 먼저 생기고



읍루, 물길의 순서로 출현한 것은 맞다.

다만 직계 조상은 아니라는 뜻이다.

 

1세기부터 6세기까지

숙신과 읍루, 물길이 거주하던 곳은 대략 이러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28

 

그러나 7세기 이후 등장한 말갈은 

이들 지역을 모두 포함하되,



북쪽 지역으로  확대되는 

범위를 지칭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29

 

여기에는 숙신, 읍루, 물길 등의 후손이 

중심을 이뤘지만



그외의 부족들까지 

몽땅  포함되었던 것이다.

 

망한 나라 부여의 유민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고로 말갈은 

특정 민족을 지칭하는 명칭이 아니라,



동쪽 만주 일대에 사는 사람들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이었다.

 

이런 말갈은 아래와 같이 

크게 7 부락으로 이뤄졌는데,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30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31 

 

물론 이걸   필요는 없다.

다만 속말, 백산, 흑수말갈 정도는 알고 있는게 좋다.

 

여기서 백돌과 속말은 물길+부여의 혼혈 후손이고

백산은 읍루+옥저의 혼혈 후손이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32

 

 이들은 단순한 말갈족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피도 어느 정도 섞인 혼혈이었다.

 

 

 고구려가 말갈 부족을 흡수하는 과정

 

7세기 이전까지 동쪽 만주 일대에는 

중국의 세력이 미치지 못했다.

 

따라서  지역에서 말갈계 종족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선진 문물을 전파해  세력은 

단연 부여와 고구려였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33

특히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는 

역사적으로 인연이 깊었다.

 

3세기 이래 말갈의 거주지와 고구려의 영역은 

일정 기간 동안 서로 겹치고 있었는데,

 

이는 고구려가 말갈에 영향력을 행사하며 

·간접적으로 통치를 했었기 때문이다.

 

다만 이들 말갈족은 

단순히 지배를 받던 세력만은 아니었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34

 

고구려가 망하자 대부분의 말갈족도 

구심점을 잃고 사라지게 되는데,

 

실제로 7 말갈 부족  고구려가 망하자

6 부족이 순식간에 증발했다.

 

고구려 시절부터 독자적인 노선이 강했던 

북쪽의 흑수말갈만 따로 세력을 이룬 정도였다.

 

대체 

이유가 뭘까?

 

바로 고구려-말갈의 관계가

흔히 생각하는 지배-종속 관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35

 

말갈인들은 스스로를 

고구려의 일원으로 생각했고



토착 고구려인들 역시 말갈인들을 

차별적으로 대하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구려가 망한 뒤에도,



고구려의 피점령지였던 '낙랑지역(평안도 지역)'에서 

고구려 부흥운동이 일어나고

 

말갈인들 스스로가 고구려 부흥운동에

주도적으로  벗고 나서게  것이 아니겠는가!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36

 

이는 말갈족이 

고구려에서 얼마나 오랫동안 동화되어 



살아갔던 이들인지 살펴보면 

대충 감이 온다.

 

 

 백산말갈

 

백산말갈은 백두산 일대에 터를 잡고 살던 

말갈족들이다.

 https://m.blog.naver.com/alsn76/40204072253?view=img_37

 백두산

 

백산말갈족은 고구려 건국시기 때부터 

고구려인들과 마찰이 잦았으니,

 

초기에만 해도 

압록강 중류에 살고 있던 토착 고구려인들은 



이들 백두산의 

사나운 말갈족을 두려워했지만

 

말갈족의 침략을 성공적으로 물리친 이후로는

 이상 그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말갈족들도 

다시는 고구려를 침범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구려는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백산말갈족을 점령하게 되는데,

이때가 1세기 후반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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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세기 후반 고구려 영역 : 백산말갈은 이때부터 복속되었다.

 

이후 이곳은 600년간 

고구려의 영토로 유지되면서



고구려의 영토  어느 곳보다 

 안정적으로 운영되오던 영토였다.

 

사실 민족이라는 것은 

100년만 같이 섞여 살아도,



대부분은 

완벽히 동화를 하기 마련인데,

 

600년의 시간을 고구려인들과 함께 살았다면

백산말갈족은 그냥 고구려인이라고 봐야  것이다.

 

 

 속말말갈

 

 부여의 영토였던 곳에 

부여의 힘이 약해지자



말갈족이 

하나 둘씩 들어와 살게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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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벌판

 

4세기 이후 고구려가  일대를 편입하자,

자연스레 속말말갈족도 고구려의 지배를 받게된다.

(이때 속말말갈족은 이미 부여+말갈의 혼혈인들이었다.)

 

이들도 300여년 동안을 

고구려의 지배 속에 살게되다보니



사실상 완벽히 

고구려인으로 동화되게 된다.

 

사실 발해를 세웠던 주역들은 

상당수가 속말말갈 출신들이었는데



이는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사서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발해말갈' 대조영은 

본래 고구려 별종이다. (구당서)



발해는 본래 '속말말갈'로서 

고구려에 속했던 이들이다. (신당서)



발해는 본래 '말갈'이라 부르며 

고구려의 별종이다. (오대사)

 

신라도 발해가 건국된  

초기 100 동안 



발해를 '속말말갈'인들이 세운 나라 쯤으로 

생각했던 터이다.

 

물론 속말말갈족은 

오랜동안 고구려들과 섞여 지내면서



고구려인으로 완벽히 동화된 

사실상의 고구려인이었다

 

속말말갈이라는 뜻도 민족이 아닌

지역적인 개념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가령 전라도 사람

경상도 사람 하듯이 말이다.

(참고 : 김현숙 말갈 연구 논문)

 

 

 북부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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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영토를 확장하면서

백돌, 안거골을 점령하는데

 

이곳에는 부여 유민들도 

상당수 있었던 곳이다.



다만 이곳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간접·직접 통치를 

혼용해서 다스렸던 곳이다.

 

그리고 가장 나중에 편입하는

호실, 불열은 간접통치로 다스려



해당 말갈족에게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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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아마 이곳은 

고구려 말기까지 



고구려인들과는 

언어가 달랐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런가하면 흑수말갈은 

나갔다, 들어왔다를 반복하던 세력으로 



가장 독자성이 강하고 

고구려는 이곳을 잠시 간접 지배를 했던 수준이었다.

 

 

 말갈이 고구려 부흥 운동에 앞장섰던 이유는?

 

고구려는 말갈족을 통치함에 있어

필요에 따라 직접통치를 하기도 했지만

 

백산, 속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말갈족 부족들에게



자치를 부여하고

집단적으로 간접 통치했다.

 

그렇더라도말갈 부족 중에서는

속말과 백산이 가장 핵심적이었다.

 

  말갈은 

영토로 편입된 시기도 길었지만,

 

고구려의 중심부에서

지리적으로도 가까웠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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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이들은 

농경족인 토착 고구려인들과는 달린



말을  타고,

호전적인 기질이 있어서



평소 토지에 의한 조세는 

적게 부담하는 대신에

 

군역에 의한 의무를 

높게 부담하도록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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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당 전쟁 기간 동안 활약했던 

말갈군은 바로 이들이었다.



그리고 이들 말갈족이 스스로를 

고구려 사람이라 생각했던 것은 물론이다.

 

말갈군들이 

 중국과 맞서 그토록 처절하게 싸웠는지,

 

고구려 멸망 후에

 그토록 고구려 부흥운동에 앞장섰는지,

 

발해를 세우면서

 고구려를 계승하겠다고 말했는 지는



모두가 스스로를 고구려인이라고 생각했던 

말갈인들의 정체성에서 연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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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고구려에는 말갈족 외에도 

많은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고,



이중에는 생활 방식이 

전혀 다른 사람들도 있었다.

 

원래 고구려를 건국한 종족은 

예맥족이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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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외에 중국인, 낙랑인(중국-고조선혼혈), 백제인(한성백제),

선비족, 거란족  여러 계통의 사람들이 고구려 주민으로 살았던 것이다.

 

이는 고구려의 성장과 발전 과정을 이해한다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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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학자는 

고구려 영토에서 



순수한 고구려인은 

20%밖에  된다는 논문도 발표한  있었다.

 

심지어 당시에는 

서역인들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고분 벽화에 그려진 생활 풍속도에는 

코가  서역인들도 심심찮게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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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저총과 수박회의 서역인으로 추정되는 인물들

 

따라서 고구려는 

오늘날로 치면 다민족 국가였던 것이다.

 

현재 우리는 

한반도라는 고립된 지형에 살기 때문에



다민족이라는 말에 매우 

친숙하지 못하지만,

 

 묘주와 서역인 손님들

 

고구려의 영토는 

대륙과 연계되어 있어



애초에 많은 외래인들의 유입이 

있을 수밖에 없던 곳이다.



"대부분 국가들의 역사가 

고구려와 비슷함. 한반도가 예외적인 현상."

 

그리고 이들 다양한 구성원 가운데 

단연 두드러진 존재가 '말갈족'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수적으로도 

다수를 차지했고



생활 풍속면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이들은 수당과의 

전쟁이 일어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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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람으로서 자기나라, 자기 가족을 지키기 위해 

용맹하게 싸웠던 사람들이기도 했다.

 

 

 4세기 이후 중국인들이 고구려로 집단 망명한 이유

 

4~5세기 중국의  분열시기,

고구려 땅에는



상당수의 중국인들이 

유입되게 되는데

 

당시 중국인들이 고구려를 택했던 까닭은

가까운 탓도 있었지만



주변 국가들에 비해 

정치적으로 안정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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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구려는 소수림왕이 집권한 이후로

내부적으로 통치력을 강화하던 시기였다.

 

반면에 중국 대륙은 

여러 왕조가 명멸해 가는 과정에서



내부적으로 커다란 정치적 혼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언제 어떻게 될지   없는 

사람들의 삶은 불안해질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국인이나 선비족 정치 망명객들이 



번번히 고구려로 

이주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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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문부왕 일두귀, 북연  풍홍, 사마 동수, 유주사  

거물급 인사들이 당시 줄줄이 망명을 해왔다.

 

수십만 명의 중국인 유민들도 

집단 망명을 해왔다.

 

특히 4세기 후반 

소수림왕이 집권하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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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중국인 유민들을 

대거 수용하게 되는데,

 

 

이들 망명객들을고구려의 관습법에 따라 

지배하기에는 무리가 있어



모든 구성원들에게 적용시킬 

보편적 율령체계와

 

사상을 통일시키기 위한

고등종교가 필요하게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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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은 '율령' 반포하고

'불교' 국가적으로 진흥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고구려의 '동화 정책' 의해 



유민들은 서서히 

고구려인이   있었다.

 

한편 유민들은 정치적인 배경이 다양하고

 중국의 선진문물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때문에 발달된 제도와 

문화를 보급하여



고구려의 국력향상에 기여했음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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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수림왕 이후 고구려는 

국력이 일취월장으로 성장하게 되어



5세기 광개토대왕과 장수왕 때가 되면

최고의 전성기를 맞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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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고구려의 국력신장에는

'포용력'이 주효했다.



고구려는 유민들에게

상당히 관대했고,

 

거물급 망명자들에게는

 지위를 인정하여자율권을 부여하기도 했다.

 

특히 4세기 이후 고구려의 영토로 편입된 

'낙랑지역' 통치하기 위해서



중국인 망명 정치가들을 주로 활용했으니,

동수, 유주자사  등이  대표적이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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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주자사 (좌측), 동수(우측)

 

안악 3호분이나 

덕흥리 벽화 고분에 나타나는 



생생하고도 다양한 중국적 요소들은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당시 지방에 해당되던

평양 주변에서만 



1천기가 넘는 중국식 묘제인 

벽돌무덤이 등장하는 것도



바로 이러한 정치·사회적 환경 속에서 

나타난 것이었다.

 

고로 고구려가 넓은 영토를 획득하면서

지역적 강자로 오랜동안 자리매김   있었던 원동력은



고구려인 특유의 개방성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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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마르칸트 지역 아프라시압 궁전 벽화의 고구려 사신 ( 우측 두명)

 

이는 지독한 차별정책으로 일관하던 

신라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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