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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연합 전쟁때 항복 후 당나라에 가서도 이름을 떨친 비운의 장수 흑치상지
12/20/2019 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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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연합 전쟁때 항복 후 당나라에 가서도

이름을 떨친 비운의 장수 흑치상지

흑치상지

 

백제 출신의 흑치상지(黑齒常之, 630?~689)에 대해서는 중국의 [신당서]에 자세히 실려 있다. 우리의 [삼국사기]에도 ‘열전’에 전기가 실려 있다. 한편 1929년 중국의 낙양에서 흑치상지와 그의 아들 흑치준의 묘가 발굴되었는데, 거기서 그들의 생애를 일러주는 기록이 나왔다. 이는 앞의 두 책에 없는 새로운 사실들이었다. 조국을 버리고 원수의 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산 사람에게 내리는 후세의 평가는 엇갈린다. 그는 배신자인가,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아니면 비운의 장수인가.

 

 

흑치상지가 살아간 시대, 조국 백제의 멸망기

흑치상지는 백제에서 태어났다. 무왕이 다스리던 서기 630년이었다. 상지의 가문은 대대로 달솔이라는 벼슬을 했는데, 백제의 멸망으로 백제의 부흥운동을 하다가 당나라로 고종의 항복 권유로 당나라에 껄려가서 당나라에 가서도 장수까지 되어 나중에 병부상서 그러니까 지금의 국방부차관 같은 꽤 높은 자리에 올랐다. 실제로는 왕족 가문이었고, 그의 이름이 상지인데 당아라고종이 흑치의 공을 인정하여 얼굴이 검다고 흑치로 봉해져서 이 성을 썼다. 할아버지는 현덕이었고, 아버지는 사차였으며, 모두 달솔을 지냈다. 상지는 키가 180센티미터가 넘었고, 동작이 빠르고 힘이 세고 꾀가 넘쳐났다. 약관 스무 살에 달솔이 되었는데,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이 들어선 지 9년째 되는 649년이었다. 어려서부터 고상한 생각을 가졌고, 기질과 정기가 재빠르고 뛰어난 사람이었다.

 

의자왕은 무왕의 큰아들이었다. 왕자 때의 그는 용맹하고 담력이 있고, 부모에게 효도하며 형제 사이에 사랑으로 지냈다. 그러기에 그는 ‘백제에 태어난 증자(曾子)’라는 평을 받았다. 이렇듯 자질이 훌륭한 사람이었음에도, 의자왕의 말년은 술과 여자에 깊이 빠졌다가, 끝내 나라를 잃은 마지막 왕이라는 불행한 이력을 남기고야 말았다. 상지는 이런 왕의 밑에서 달솔을 지냈다.

 

이 무렵 백제의 왕족 가운데 복신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도 일찍이 많은 군사를 거느렸는데, 660년, 사비성이 함락되자 승려 도침과 함께 주류성에 자리를 잡고 끝까지 당나라에 저항했다. 그는 일본에 가 있던 왕자 부여풍을 모셔 백제 부흥운동을 꾀하였다. 복신은 스스로 상잠장군이라 일컬었다. 점점 힘이 세지자 복신은 도침을 죽이고 군사의 명령권을 한 손에 쥐었다. 왕에 오른 부여풍은 그저 복신의 말만 따를 뿐이었다.

 

그때 흑치상지는 어디에 있었을까? 그 또한 달솔이라는 높은 자리에 있었으므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었다. 소정방사비성을 함락시켰을 때, 상지는 부하들을 데리고 임존성으로 갔다. 그러자 열흘이 못되어 그에게 찾아든 사람이 3만 명이나 되었다. 상지에 대한 당시 백제인의 신임이 상당히 두터웠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상지는 주류성에서 복신이 활약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하여 복신과 연합하고 마침내 2백여 성을 다시 찾았다. 백제가 다시 살아나는 듯했다.

 

 

조국 부흥의 꿈은 물거품이 되고

그러나 부흥운동은 그다지 오래가지 못하였다. 복신이 너무 설쳐대자 부여풍이 앙심을 품고 그를 죽여 버리고 말았다. 상지는 고민했다. 663년, 상지의 나이 서른네 살이었다. 이때 당나라 고종은 상지가 백제에서 가장 뛰어난 장군인 줄 알고 사신을 보내 설득했다. 항복하면 후하게 대접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상지는 깊이 고민하면서 친구인 지수신과 의논했다.

 

“내가 이제 당나라 황제의 말을 들으면 항복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으면 백성은 더 고생할 것이니, 이를 어쩌면 좋을까?”

 

“상황이 이러니 다음을 기약하도록 하세.”

 

결국 두 사람은 당나라 장수 유인궤에게 가서 항복하였다. 유인궤는 상지를 보고, “이 사람을 보건대 충성스럽고 지혜가 있다. 기회를 얻으면 공을 세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상지와 지수신은 부여풍이 지키는 나머지 성을 빼앗았다. 그렇게 부흥운동은 막을 내리고 말았다. 상지는 당나라로 가기로 했다. 그러나 지수신은 식구들을 버려두고 고구려로 가버렸다.

 

상지는 마침내 당나라에 들어가서 양주자사가 되었다. 많은 공을 세웠고, 신임을 얻어 664년 웅진성(부여)으로 잠깐 돌아와, 남은 성안 사람들을 보살폈다. 모두 좋아했다. 그리고 이듬해 다시 당나라로 돌아갔다. 


 

 

백제 출신이지만 당에서 승승장구하다

흑치상지의 이름이 다시 들리는 것은 그로부터 6년 뒤인 672년, 마흔세 살의 나이로 충무장군이 되었다는 소식에서이다. 그는 충실한 이민자가 되었다. 어쨌건 겉으로야 당나라에 대해 제 나라를 멸망시킨 원수의 나라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듯하다. 비록 당나라의 신하가 되었지만, 그가 일하는 방법은 늘 똑같았다. 상지는 아랫사람들에게, “나는 공평한 것을 나의 소임으로 삼고, 사사로움을 잊어버리기로 했다.”라고 말하였다.

 

황제가 이를 아름답게 여겨 좌령군장군으로 옮기고, 더 큰 마을에 땅을 내려 주었다. 사람들은, ‘장군은 무거운 문빗장을 들어 올릴 수 있었으나 힘센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지혜로는 외적을 막아낼 수 있었으나 지혜 있는 것을 떠벌리지도 않는다,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데도 오히려 드러난다, 우직하게 인격을 닦는 사람’이라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상지의 행실은 산처럼 똑바로 서서, 모든 사람이 그를 우러러보았다.

 

그러는 동안 상지에게 기쁜 일이 생겼다. 아들 준(俊)이 태어난 것이다. 676년, 상지의 나이 마흔일곱 살 때였다. 물론 그러는 상지를 시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들이 태어난 다음 해, 상지는 서도(청해) 지방에 있으면서 큰 공을 세웠다. 그러자 당나라 사람 이경현은 황제의 대사가 되어 그의 지휘권을 빼앗았다. 하지만 이경현이 군대를 지휘하면서 싸움마다 지는 것이었다. 황제도 그 같은 사실을 알게 되어, 상지를 좌무위장군으로 옮기고, 이경현을 대신하여 대사를 시켰다. 전쟁터에 출정하면 칭송이 뒤따랐고, 전쟁터에서 개선하면 노래가 절로 나왔다.

 


 

상지에게도 슬슬 불행의 그늘이 다가왔다. 쉰여섯 살 때인 684년, 서경업이라는 자가 반역을 일으키자 상지는 나가서 이를 평정하였다. 여기까지는 좋았다. 그로부터 얼마 후 상지는 연연도대총관이 되어 돌궐을 격파하였다. 돌궐의 장수 골졸록은 상지와의 싸움에서 크게 졌다. 이 일로 상지는 우무위위대장군(右武威衛大將軍) 신무도경략대사(神武道經略大使)라는 벼슬을 받았다. 절정의 순간이었다.

 

그런데 이때 상지는 동료 장군인 보벽과 의견 충돌을 빚었다. 보벽은 과감한 공격을, 상지는 신중한 처리를 주장하였다. 황제는 보벽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러나 보벽 혼자 진공하다가 오랑캐에게 패하여, 이 때문에 온 진영이 무너지고 말았다. 보벽은 처형당했다. 그러나 상지도 온전할 수는 없었다. 당나라에 와서 겪는 첫 시련이었다.

 

불행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689년, 상지가 예순 살을 앞둔 해였는데, 조회절이라는 자가 반역을 일으켰다. 평소 상지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품고 있던 무리가 황제 앞에서, 상지가 반역의 무리에 끼었다고 모함하였다. 처음에 황제는 곧이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나 제 나라를 멸망시킨 당나라에 충성을 다하는 그이야말로 의심스럽다는 신하들의 말에 황제도 귀가 솔깃했다. 그들은 상지가 반드시 신임을 얻어 옛 원수를 갚으려는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의심은 마치 명백한 사실인 양 되었다. 상지는 옥에 갇혀 죽으면서, “내가 내 고향 백제를 버리고 여기까지 왔다만, 이런 누명을 쓸 줄이야 몰랐구나.”라고 한탄하였다.

 

흑치상지는 배신자인가, 아니면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흑치상지가 억울하게 죽은 뒤 10여 년이 흘렀다. 아들 준은 이제 스물세 살의 어엿한 어른이 되었다. 준은 아버지의 누명을 벗기려 했다. 그래서 아버지를 억울하게 죽인 당나라를 떠나 이웃 나라로 갔다. 사람들은, “의로움은 목을 끊어 죽는 것과 같았고, 애처로움은 독약을 마셔 자살하는 것과 같았다.”는 말을 하였다. 황제는 이 말을 들었다. 사신을 보내 준에게 돌아오라고 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사실무근의 유언비어에 연루되어 옥에 갇혀 심문을 받았더니, 분함을 품고서 세상을 떠났지만, 아직 누명을 벗지 못하였구나. 이제 다시 살펴보니 반역하였다는 증거가 없도다. 마땅히 분함을 씻고 죄를 면하게 하여, 무덤 속의 영혼을 위로할 수 있기를 바라노라.” ([신당서]에서)

 

드디어 준은 아버지의 묘를 낙양의 북망산으로 이장하였다. 황제는 장례에 드는 물건과 일할 사람을 보내주었다. 그 뒤 불과 7년 뒤인 706년, 상지의 아들 준이 낙양에서 죽었다. 겨우 서른한 살의 젊은 나이였다. 사람들은 아버지와 같은 북망산에 장사지냈다.

 

흑치상지와 그 아들 준에 대해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면 늘 따라다니는 질문이 있다. 그들은 배신자인가, 이민세대의 성공자인가. 조국을 멸망시킨 나라에 들어가 벼슬을 산 것을 보면 배신자요, 출중한 능력으로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보면 성공자이다. 세운 전공이나 올라간 벼슬로 흑치상지는 당나라의 7대 장수로 손꼽혔다. 더는 어찌해 볼 수 없는 백제부흥운동의 끝자락에 희망을 접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이였다고 해야 옳을까. 마지막에 모함을 받은 것은 지나치게 높이 올라간 벼슬 때문에 당한 견제였다. 그렇다면 배신자도 성공자도 아닌 비운의 장수였다고밖에 말할 수 없겠다.

 

상지가 얼마나 아랫사람을 인자하게 다스렸는지 유명한 이야기는 [삼국사기]에 실려 있다. 한번은 병사가 상지의 말을 때린 적이 있었다. 이를 보던 어떤 사람이 상지에게 엄히 처벌하라고 건의하였다. 그러자 상지는, “말도 소중하고, 병사도 소중하지. 그러나 사사로운 실수이거늘, 어찌 병사를 매로 다스리겠는가?”라고 말하였다. 그는 자기가 받은 상을 아래 거느리는 부하들에게 남김없이 나누어 주었다. 자기에게 남는 것은 없었다. 상지는 그런 사람이었고, 그러므로 그가 죽자 사람들은 모두 그의 억울한 죽음을 슬퍼하였다.


* Daum blog '초동급부'에서 펌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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