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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멸망 후(後), 당나라안에 고구리를 세운.. 이정기 장군의 산동반도 제(齊)나라...
12/20/2019 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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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리 멸망 후(後), 당나라안에 고구리를 세운.. 

이정기 장군 산동반도 제(齊)나라...

toyotaman 2006.08.30 23:32 

http://blog.daum.net/toyotaloom/8194250


서기 668년, 900년간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해 온 대제국 고구려가 멸망했다.  그 동안 고구려는 동이족의 국통을 이어 천하의 주인으로 군림해 왔다. 을지문덕, 연개소문, 양만춘 등 불세출의 영웅들이 대륙을 호령할 때마다, 고구려를 침략한 수백만 중국인의 뼈가 고구려의 산하에 묻혔다.

 

이러한 고구려가 연개소문 사후 어이없게도 자중지란이 일어나 허무하게 무너져 버렸다. 영원히 이길 수 없을 줄 알았던 고구려를 차지한 당나라는  철저히 고구려를 궤멸시켰다. 고구려의 산하에 묻힌 수백만 중국인의 복수를 철저히 했다. 그리고  고구려 황족을 비롯한 20만의 고구려인을 당나라로 끌고 하면서 다시는 고구려와 같은 강국이 생겨나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총 5 Part로 중국 대륙내 각지로 분산되었다. 중국 대륙 동쪽 끝 발해 일대와 지금의 조양시(朝陽市: 영주시) 인근, 개봉시와 서주시 일대, 중국의 남쪽인 운남성 일대, 서쪽인 감숙성과 사천성 일대이다.

 

그러나 900년 장구한 역사의 고구려가 그리 쉽게 숨을 멈추진 않았다. 서기 670년 4월, 보장왕의 외 손 안승(安勝), 검모잠 등이 칼을 들고 일어났다. (고구려 부흥운동) 뒤 이어 대중상걸, 대조영 부자가 동모산에서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하여 대진국(발해의 전신)을 세우고  당군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옛 영토를 회복하는 다물(多勿)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고구려를 멸망시키고서도 고구려의 영토를 제대로 지배해 보지도 못한 채 다시금 자신들의 나라로 쫓겨가야만 했다. 이유는 신라와 고구려와 백제 망국의 유민들과 연합으로 당나라 군과 맞섰기 때문이다. 한편, 당나라로 끌려간 20만 고구려인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은 중국 오지를 방황하면서도 고구려의 정신을 잊지 않고 당군과 싸우기도 했고, 옛 고구려 땅을 찾아 떠나기도 하였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의 모습은 점차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혹은 죽었을 것이고, 혹은 이민족과 중화 문화에 동화되었을 것이고, 혹은 1,2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어느 이름 모를 곳에서 고구려의 후손으로 핏줄을 이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역 당나라에서 망국의 한을 곱씹으며 사라져 간 고구려의 자손 가운데는 서역을 정복한 고선지 장군도 있었고, 345년 무열(武列)의 명예에 봉해진 왕 사례도 있다. 그러나 우리의 민족적 시각으로 보면 그들은 단지 뿌리가 고구려일 뿐이지 죽는 날까지 중국에 충성하며 일생을 영화롭게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정기 장군, 그는 동시대를 살았으면서도 고선지나 왕사례와는 달리 뜨거운 민족혼의 숨결이 느껴지는 인물이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중심부에 나라를 세워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58년간이나 고구려의 명맥을 이끌어 나간 주인공이다.

 

이정기의 꿈, 당나라를 멸망시켜라

  

이정기는 서기 732년에 고구려 유민의 아들로 거란국의 수도인 영주(현 조양시)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대조영이 '진(震)'을 개국한지 32년 후임.)

 

이정기는 패망한 고구려의 동포들이 당나라 사람들에게 갖은 모욕을 당하는 모습을 어려서 부터 지켜보았다. 그래서 자연히 옛 고구려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웅대한 뜻을 키워 나갔다.

 

정기는 타고난 무장으로의 재능을 인정받아 평로절도사 산하에서 비장으로 근무하였다. 이정기는 무술에 능했다. 그의 무공에 대해 중국 역사책 ‘구당서(舊唐書)’는 이렇게 전한다.

 

“(투르크계 위구르족인) 회흘 병사가 제멋대로 행동했다. 아무도 그를 막지 못했다. 그러자 이정기가 가장 센 회흘 병사에게 결투를 청했다. 사람들은 모두 ‘회흘이 이길 것’이라고 말했다. 싸움이 시작되자 이정기가 회흘의 등을 내리쳤다. 그러자 회흘은 그 자리에서 오줌을 싸버렸다.”  이 사건으로 이정기는 군인들 사이에서 일약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때는 758년, 최고의 인기를 누리며 리더십을 발휘하던 그에게 한 가지 사건이 터졌다. ‘평로’의 절도사로 있던 왕현지가 사망한 것이었다.

절도사가 죽자 관료들은 후계자를 놓고 고민에 빠
졌다. 여론은 왕현지의 아들에게 쏠렸다. 하지만 이정기의 야심은 그렇지 않았다. ‘유력 후보’만 제거하면 되는 일이었다. 26세의 이정기는 칼을 뽑았다. 왕현지의 아들을 살해한 것이었다.

이정기는 같은 고구려인이자 자신의 고종사촌인 
후희일(後希逸)을 내세웠다. 이에 당나라 조정은 당혹스러웠다. 하지만 병사들의 ‘영웅’ 이정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게다가 평로는 수만명의 고구리 유민들이 살고 있던 ‘한민족의 땅’이었다.  

 

755년 안녹산이 난을 일으켜 영주시(조양시)를 중심으로 하북지역을 장악하였. 따라서 요동에 있는 평로절도부와 장안의 당나라 정부는 양쪽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이정기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요동의 군대는 상당수가 고구려 유민들로 채워져 있었다. 이정기는 이들을 규합하여 758년 절도사 왕현지가 죽은 틈을 이용하여 평로절도부를 접수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

 

안사의 난(755년) 이후 쇠락의 길을 걷던 당은 고구려 유민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황제 숙종은 타협을 택했다. 762년 후희일(後希逸)을 평로 절도사로 임명한 것이다. 이것은 군인에 의해 절도사가 옹립된 당나라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된다.


평로를 얻은 이정기는 본격적으로 힘을 키우기 시작했다. 위덕(威德) 절도사 이보신과 하북에서 연합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그런 그에게 또 하나의 찬스가 왔다. 산동반도의 청주(靑州)에서 무장 사조의(史朝義) 가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조정은 평로 절도사에게 진압을 명했다. 선봉은 이정기였다.

이정기는 자신의 능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유주
(幽州)와 범양(范陽)에서 사조의(史朝義)의 군대를 대파시켰다. 패한 반군은 청주(靑州)로 몰렸다. 청주는 현재의 익도(益都)로, 반군의 본거지였다. 이정기는 사조(史朝義)를 끝까지 추격, 청주를 장악하는 데 성공한다. 이 공로로 이정기와 후희일(後希逸)은 평로(平盧)·치청(淄靑: 치박시와 청주시)·기주(沂州: 제남시 서족)·제주(齊州: 제하현)·밀주(密州: 제남시)·해주(海州: 연운항) 일대를 관할하게 된다. 

 

병사들은 무술이 뛰어나고 성격이 침착한 이정기를 따랐다. 그런 이정기를 시기한 것은 뜻밖에도 절도사 후희일(後希逸)이었다. 후희일(後希逸)은 고종사촌 이정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자기 자리를 뺏길까봐 불안해하던 후희일(後希逸)은 이정기에게 주었던 병마사직을 박탈한 뒤 엉뚱하게도 불탑 건립에 몰두했다. 그러자 공사에 동원된 병사들로부터 불평이 터져나왔다. 반감은 반란으로 이어졌다.

후희일
(後希逸)은 불교뿐 아니라 미신에도 빠져 있었다. 가는 곳 마다 점쟁이들을 데리고 다녔다. 그날도 그는 무당과 함께 성밖으로 나갔었다. 군사들은 그 틈을 노렸다. 후희일(後希逸)이 성을 비우자 성문을 닫아 걸고 열어주지 않은 것이다.
“성문을 열어라.”
“…….”
성 안에서는 아무 반응도 없었다.
“문을 열라고 하지 않느냐?”
“열어드릴 수 없소.”

차가운 목소리가 반응했다. 후희일(後希逸)은 그제서야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후희일(後希逸)은 분노했다. 그를 수행했던 부대는 많지 않았지만 노한 후희일(後希逸)은 앞뒤를 가리지 못했다.

 

“성을 공격하라.” 후희일(後希逸)이 명령했다. 그러나 역부족이었다. 후희일(後希逸)은 병사들의 반격에 쫓겨 도망가고 말았다. 이 반란을 이정기가 사주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지만 조정은 이정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지방에 대한 장악력을 이미 상실했기 때문이었다.


황제는 평로치청절도관찰사·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검교공부상서·겸어사대부·청주자사를 제수하면서  ‘이정기’란 새 이름을 내렸다.이 때가 765년, 이정기의 나이 33세의 일이다. 여기서 눈여겨 봐야 할 것은  ‘해운압신라발해양번등사(海運押新羅渤海兩蕃等使)’란 직위다.

 

당나라 역사상 최초로 설치된 이 관직은 당~신라~발해~왜를 오가는 모든 왕래를 총괄하는 것으로 낙양 동쪽에서 일어나는 사안에 관해 전권을 행사하는 자리였다.

무역은 ‘동양의 로마’ 당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당
시 신라는 연1회 이상 당에 조공을 바치고 있었다. 신라 사신이 당에 드나들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정기를 거쳐야 했다. 바다 교통의 요지 등주(登州)와, 육상 교통의 중심지 영주(營州: 조양시)가 모두 그의 관할이었기 때문이다.

발해도 마찬가지였다. 766~779년까지 13년 간, 발
해는 무려 143회에 걸쳐 당으로 공식사절을 파견했다. 이정기는 당~발해뿐 아니라 발해~왜를 오가는 모든 무역을 관장했다. 여기에 수반되는 음성적 상거래도 물론 그의 몫이었다. 


이 길은 훗날 장보고의 "해상의 길"로 변한다.

 

이정기의 ‘시장’에서 조정은 방관자였다. 이곳에서는 발해의 말(馬)을 포함, 당이 발해로부터 수입을 금하고 있던 금·은·동 등이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이정기가 장악하고 있던 산동은 예부터 농산물이 풍부한 옥토였다. 게다가 이곳에는 염전이 있었다. 소금은 당시 가장 값비싼 재화의 하나였다. 766~779년 사이에 당이 거둔 국고수입의 절반은 소금을 통해 얻은 염리(鹽利)였다. 이정기는 소금 판매와 회수(淮水)의 조운(漕運), 국제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富)를 축적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마련된 자금은 훗날 황제와의 싸움 가능하게 해준 밑천이 된다.

 

이정기는 위덕(威德) 절도사 이보신(李寶臣)과 힘을 합쳤다. 한 달 이상 이어진 전투에서 이정기는 전승사(田承嗣)를 격파, 그의 영역이었던 덕주(德州: 제남시 서북쪽 인근)를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해인 776년 정월, 이정기는 전승사(田承嗣)의 세력을 뿌리뽑겠다는 상소를 올렸다. 이 전투는 8개월 간 계속됐다. 그 결과 이정기는 2개의 주를 추가로 합병하고 적장 전승사(田承嗣)를 사로잡는 데 성공한다. “나이가 많은 노인이니 예의를 갖춰 대하라.” 이정기는 병사들에게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는 직접 포로 전승사(田承嗣)를 찾아가 깍듯하게 예우했다. 뿐만 아니었다. 수차에 걸쳐 황제에게 상소를 보내 전승사(田承嗣)를 용서해 줄 것을 청했다. 그리고 얼마 뒤엔 자신의 손으로 전승사(田承嗣)를 석방시켜 주었다

 

애써 생포한 전승사(田承嗣)를 이정기는 왜 풀어준 것일까? 


그가 의식했던 것은 다른 절도사들의 눈이었다. 당의 운명은 몇몇 절도사의 손아귀에 달려 있었다. 자신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전승사(田承嗣)를 공격하긴 했지만, 이정기에겐 조정보다 절도사들과의 관계가 더 중요했다. 전승사(田承嗣)는 이 일로 인해 이정기에게 감사의 마음을 갖게 된다. 전승사(田承嗣) 사망 후, 그 자리를 이은 조카 전열(田悅)이 이정기와 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해 준다. 전승사(田承嗣)를 잡았다 풀어줌으로써 이정기는 조정과 절도사들, 양쪽 모두로 부터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황제는 전승사
(田承嗣)를 제압해 준 이정기에게 ‘검교사공·동중서문하평장사’란 관직을 내렸다. 검교사공은 삼공(三公)의 지위 중 하나. 동중서문하 평장사란 이정기를 재상으로 봉한다는 의미다. 이것은 조정이 이정기의 협조없이 지방 통제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행정가로서의 이정기는 어떤 사람이었을
까?


구당서 124권 ‘이정기전’은 그의 통치 스타일 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이정기는 정사를 다스림에 있어 엄할 뿐 아니라 가혹했다. 그가있는 곳에서는 감히 여러 명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그는 치·청·제·해·등·래·기·밀·덕·체 등 10여개 주를 관장하면서 영호창(令狐彰), 설숭(薛嵩), 이보신(李寶臣), 양숭의(梁崇義),전승사(田承嗣) 등의 절도사들과 영향을 주고 받았다.” 

 

▲ 당서(唐書).

618년 당나라를 세운 '고조'부터 907년 나라를 잃은 '애제'에 이르기까지 21제(帝) 290년 간의 일을 기록한 정사(正史)다.

위의 기술은 이정기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전
제적 리더였음을 시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절도사들과 친분을 구축해 왔으며 그들로부터 인심을 잃지 않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당서 ‘양숭의전’은 “이정기·이보신·설숭·양숭의·전승사 등 5명의 절도사들이 당의 고관직을 독점했다”고 묘사하고 있다.

 

15개 주 다스리던 ‘최강 절도사’

5년 뒤인 781년 정월, 이정기와 고락을 함께 했던 
성덕군절도사(成德軍節度使) 이보신(李寶臣)이 숨을 거뒀다. 이보신(李寶臣)의 아들 이유악(李惟岳)은 절도사 지위를 세습해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황제 덕종은 단호하게 이를 거부했다.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이유악(李惟岳)을 지지하던 이정기·양숭의·전열 등 당대의 제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이들 ‘4인방’은 중대한 결정을 하게 된다.

 

당 조정을 전복시키는 쿠데타를 결심한 것이다. 당시 이정기가 다스리던 영역은 도합 15개 주. 이는 오늘날 한반도 크기에 버금가는 넓이였고, 당시 통일신라 보다 좀 더 큰 지역이었다. 백성들 수도 이정기의 지역에 통일신라의 백성들 보다 많았다.


방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일관된 법령을 적용 할 필요가 있었다. 중앙의 권력은 너무도 취약해있었고 황제의 명령은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정기는 달랐다. 발해의 법체계를 응용해 법률을 정비하고 독립된 조세제도를 만들어 엄정하고 일관되게 적용했다. 독립된 국가의 틀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다. 중국 역사책 구당서는 이 때의 이정기와 이보신을  ‘이제(二帝)’라 표현하고 있다(二帝, 指寶臣·正己也). 이 기록은 ‘최강의 절도사’로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그들을 당시 사회가 임금으로 인정했다는 사실을 뜻한다.

쿠데타를 결심한 이정기는 청주에서 운주로 거처
를 옮겼다. 운주(運州: 동평현)는 산동과 낙양을 잇는 길목. 이정기의 첫 번째 공략 목표는 제국의 ‘동쪽 수도(東都)’ 낙양이었던 것이다.

이정기는 청주의 관리를 아들 이납(李納)에게 맡기
고 낙양 공략에 몰두했다. 이정기는 이 싸움에 목숨을 걸었다. 자신이 전사할 경우에 대비, 이납에게 ‘치청절도유후(淄靑節度留後)’라는 직위를 부여 한 것이다. 이는 죽기 전에 영토를 세습한다는 의미로 황제가 아니면 행할 수 없었던 파격적 조치였다.

당 조정은 긴장했다. 가장 강력한 절도사의 병력이 낙
양의 코앞, 운주에 진을 친 것이었다. 이정기는 주야로 군사를 훈련시키며 전쟁을 준비했다. 조정도 방위에 착수했다. 낙양과 운주 중간에 위치한 변주(州;오늘날의 개봉)에 성을 쌓기 시작한 것이다.


정이 성을 축조한다는 첩보를 입수한 이정기는, 경계지역인 제음(濟陰)에 10만의 병력을 주둔시켰다. 당시 장안을 수비하던 황제 직할대의 병력은 5만. 이정기가 동원한 10만 병력은 당시로선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엄청난 수의 군사였다. 


황제는 십일세(十一稅)란 세금을 새로 거둬 전쟁 자금을 마련하는 한편, 천하에 동원령을 내려 9만 2000명의 병력을 제음 부근으로 전진 배치시켰다. 때는 781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황제군과 전투… 낙양 보급로 끊어

이정기의 계획은 치밀했다. 초반 전투에 밀릴 경우
를 대비, 제음
(濟陰)에서 140km가량 떨어진 서주(徐州)에 2차 병력을 집결시켰다. 서주는 양자강(揚子江)과 회하(淮河; 황하의 지류)의 물길을 타고 낙양으로 들어가는 수상 교통의 요충지였다.

강회(江淮; 양자강과 회하)의 물품 보급로가 끊기
면 정부군은 엄청난 타격을 입게 된다. 조정은 ‘물길’을 지키기 위해 강변의 요지인 용교(埇橋: 숙주시宿州市 )와 와 화구(渦口)에 군사를 배치하고 1000척이 넘는 배를 정박시켜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다급한 황제 덕종은 방추병(防秋兵)을 동원해 보급로를 지키도록 했다. 방추병은 토번(티베트)과 회흘(위구르족)의 침입에 대비하던 일종의 비상근 부대였다. 이를 동원했다는 사실은 북쪽의 국경 수비라인이 뚫린다는 의미였다. 이정기를 막는 것이 그만큼 위급했던 것이다.

당의 노력은 효과가 있었다. 이정기 연합군은 한동
안 강회
(江淮)를 얻지 못하고 주변에서 맴돌아야 했다. 그러나 정부군의 방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전승사의 조카 전열과 이보신의 아들 이유악, 그리고 이정기의 오랜 동지 양숭의가 병력을 이끌고 가세한 것이었다.

승자는 이정기였다. 물길의 요지인 용교와 와구를 장
악, 낙양으로 가는 수송로를 끊는 데 성공한 것 이었다. 조정은 두려움에 빠졌다. 천하통일의 큰 그림이 그려지는 판이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가 생겼다. 운명의 신도 용장을 두려워했던 것일까? 이정기가 악성 종양에 걸린 것이었다.

낙양 함락이 임박한 상황이었다. 측근들은 치료를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그러나 아무리 약을 써도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뽑은 ‘칼’을 제대로 휘둘러 보지도 못한 이정기는 781년 8월, 통한의 눈을 감아야 했다. 그의 나이 49세였다.


이정기의 죽음을 알게 된 조정은 즉각 회유에 나섰다. 황제는 죽은 이정기를 태위(太尉)로 추증하고, 관련자의 죄를 묻지 않겠다며 동맹군을 달랬다. 리더를 잃은 동맹군은 흐트러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결국 황제의 타협안을 받아들였다. 중원의 피비린내가 가시는 듯했다. 하지만 ‘억지 평화’는 오래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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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번진(藩鎭) 세력의 발호와 이민족의 침입, 환관의 횡포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다. 당시 가장 강력한 번진은 위박(魏博) 절도사인 전승사(田承嗣). 그는 자신의 아들을 황제의 딸과 결혼시킨 뒤, 황제의 명을 거역할 정도로 위세를 떨었다. 황제 대종(代宗)은 전승사를 제거해야 했다. 이 때 그가 도움을 청한 사람이 바로 이정기였다.


동쪽에는 발해가 고구려의 국통을 계승하여 나라를 세웠기 때문에 이정기는 요동에 나라를 세우지는 않았다. 대신 민족의 원수 당나라를 정벌하여 중국 본토에 또다른 고구려를 세우고자 하였다.

 

761년. 고구려인 정예군 2만 병력을 이끌고 마침내 중국 산동성에 상륙하였다. 당시 산동성 부근에는 고구려 패망 당시 당나라에 끌려갔던 상당수의 고구려 유민들이 노예처럼 살고 있었다. 영원히 망해 버린 줄만 알았던 고구려의 대군이 왔다는 소식에 산동성의 유민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웠다. 사실 2만의 군사는 극히 작은 병력이었다.

 

당나라는 1개 주만 해도 몇 만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2만의 병력은 별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2만의 군사로 중국의 한복판으로 쳐들어간 것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곳엔 수많은 고구려의 유민들이 있었다. 또한 고구려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 이정기의 고구려 군대는 10여 만의 당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10개 주를 장악하였다. 서기 777년에 이르러서는 조주, 서주 등 5개 주를 더 확보하여 총 15개 주의 광활한 영토를 통치하였다. 이때 그가 지배한 인구는 평로까지 합쳐 130만여 호에  800여만에 이르렀다. 이 해에 이정기는 당의 수도 장안을 공격하기 위해 치소를 청주에서 운주로 옮겼다.

 

781년, 이정기는 용교와 와구를 점령하여 당나라의 수송로인 대운하 영제거를 차단하였다. 대운하는 강남의 풍부한 물자를 낙양과 장안으로 이동시키는 당나라의 대동맥이었다. 그런데 이 대운하를 이정기가 점렴해 버리니 장안의 당나라 정부는 크게 당황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당나라 수도 장안을 향하여 20만의 대군으로 총 진격을 개시하였다.

 

그 중에는 신라에서 당으로 넘어와 당나라 군사인 장보고도 있었다그러나 천명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인가? 승승장구하여 변주의 20만 군대를 무찔러 성에 고립시키고 낙양으로 진격하려던 순간, 큰 별 하나가 밤하늘을 가르며 떨어졌다. 이정기의 명이 다한 것이다. 당 나라 마지막 거점지인 낙양과 장안을 눈앞에 남겨 두고, 고구려를 위해 일생을 바쳤던 이정기는 49세의 나이로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하였다. 비통함을  삼키며 고구려군은 퇴각하였다. 장안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당나라 덕종 이하 문무관원들은 기쁨에 겨워 3일 동안이나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제(齊)국의 최후

 

다음해, 이정기의 아들 이납은 운주(동평현)에서 국호를 제(齊)로 하여 황제의 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정기가 죽은 지 한 달도 안되어 그의 사촌인 서주의 이유, 덕주의 이사진, 체주의 이장경이 당에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당나라는 운하를 다시 개통하였다. 대담하고 지혜로운 이납은 아버지가 못다 이룬 대업을 완수하기 위하여 다시 한번 운하를 끊고 변주

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황하를 도강하기 위해 만들어둔 배 3천여 척이 때아닌 가을 장마에 떠내려 가 버렸다. 또 한번 중원 정복의 꿈이 좌절된 것이다. 그 후 이납은 꿋꿋이 제국을 잘 지켜 나갔지만 불과 41세의 나이로 단명하였다. 이납의 아들 이사고는 제위에 오르자 부국강병책을 써 나라와 백성을 부유하게 했다. 그러나 그도 명이 짧았다. 겨우 14년간 제위에 있다가 38세의 젊은 나이에 죽었다.


그 뒤를 이사고의 이복 동생 이사도가 이었다. 이사도는 이납이 중국인 후처에게서 얻은 아들이었다. 그래서 그의 아내도 어머니가 정해 준 중국 여인 위씨(魏氏)였다. 그런데 그녀는 제국의 대소사에 관여하기 시작하더니 자신의 친척인 중국인들을 데려다 제국의 요직에 앉혔다. 이사도의 말년에는 정무와 군무까지 독단하다시피 하였다. 이사도는 당 헌종이 제(齊)국을 침략하기 위하여 준비한 하음전운원(河陰轉運院)이라는 150칸이나 되는 큰 창고의 200만 섬의 군량미를 불질러 버렸다. 그리고 낙양성을 기습하여 궁궐을 불살라 버렸다. 또한 하남 이곳 저곳에 산책을 만들어 당나라 의 후방을 교란시키는 게릴라전도 감행하였다. 그러나 말년에 이르러 중국인들이 제국의 요직을 차지해 가면서 점차 나라의 기강과 고구려의 정신마저 서서히 병들어 갔다.

 

제국이 사양길로 접어들자 당황제 헌종은 선무, 위박, 의성, 무령, 횡해 등의 여러 절도사에게 제국 공격을 명하였다. 또 당나라는 바다 건너 신라에게 까지 원군을 요청하여 818년 7월, 당과 신라의 연합군이 제국을 총 공격하였다. 나당 연합군에 의해 고구려, 백제가 멸망한 이후 또 한번의 가슴아픈 동족상잔이 벌어진 것이다.

 

신라는 두번이나 외세에 힘을 빌려 고구려를 두번이나 멸망시킴 결과를 가져왔다.연합군 수십만이 사방에서 협공하니 한점 섬처럼 고립된 고구려인의 제국은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잠들지 않는 고구려의 혼(魂)

 

 

668년 고구려가 패망하고 100년이 지난 후, 망각의 어둠 속으로 영원히 사라질 것 같던 고구려의 불씨가 다시 이정기 장군을 통해서 되살아나 당나라와 대적한 지 58년. 이제 그 불꽃도 영원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 한민족의 혈맥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제국이 망한 뒤 장보고는 신라로 돌아와 청해진을 무대로 동부 아시아의 해상권을 장악하여 해상의 왕이 되었다. 중국천하를 지배하려 했던 이정기의 원대한 구상을 장보고가 바다에서 이루어낸 것이다.

 

그리고 다시 10년의 세월이 지난 838년, 일본의 승려 원인(圓仁)이 구법을 위해 장보고 휘하의 배를 타고 중국의 산동 지방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서 고구려 백성들이 그 때까지도 중국인으로 동화하지 않고 마을을 이루고 독자적으로 사는 것을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의 영웅 이정기! 어찌하여 이같이 찬란했던 민족의 영웅이, 민족의 정신이 1,200년 간 역사의 저편에 묻혀 있었던가? 왜 우리의 후손들에게 이 처럼 고증이 확실한 고구려의 후예들을 가르치지 않는 것인가? 이제는 과거의 친일 식민사관의 미몽에서 깨어나야 할 때이다. 중국의 신장 위구르, 티베트, 감숙성, 안휘성, 산동성, 사천성 등지에 우리 민족의 피와 땀이 밴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위 글은 1997년 10월2,3일 KBS-1 TV에서 개천절 특집으로 방송됐던 "고구리 유민 이정기의 나라 평로치청왕국"의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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