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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南 박상수(apark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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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폭동. 과 사업전환. 정부와의거래. 금전거래. 인간관계.
09/21/2019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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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 폭동. 과 사업전환. 정부와의거래. 금전거래. 인간관계. 


  시카고에서 어디를 갈까 망설이다 이 넓은 천지에 어디를 가야 할지 막막했다 그때 시카고에서 아는 친구가 애트란타 로 이사간 사람이 있어 나도 그를 따라 애트란타로 이사했다 무었을 하냐하고 망설이다 복덕방 소개로 그랜우드 에 그로세리를 하나 삿다. 그래서 해 보니 마음에 맞지 안아 흑인대학 촌에 페허가 된 극장이 있어서 그것을 사서 고쳐서 영업을 시작 했지만 뻬 빠지게 온 가족 고생만 했지 이익은 보지 못했다. 흑인 촌 이라 좀도독에 신경 쓰느라고 진짜 도독을 생각 못했다 진짜 도독은 캐시야 였다 나는 2층에서 점포 전처를 감시했다 그 종업원은 계산기 우에 손거울을 언쳐 놓고 내가 안볼 때는 도둑질 했다 나는 그 거울이 자기얼굴을 보기위한 것인 줄 알고 오랜 세월 그른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 많이 도적질 하는 것 을 몰랐기 때문이다 또 고깃간에 종업원 태만으로 화가 난 나는 시범을 보인다고 하다 손 까락 마디 하나를 절단한 일이 있고 도적놈을 잡았다가 주먹으로 맞아서 기절한 일도 있다. 흑인 폭동이 나서 가계는 박살이 나고 우리는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지만 시장 상대 소송을 4년6개월 해서 승소하여 시장 사과와 피해배상 이며 소수민족 보호법에 판례를 남겠으며 그 판례는 미국이 존재 하는 한 우리소수민족이 보호 받을 수 있는 법이다. LA는 그렇게 많은 피해를 보아도 법적으로 소송해서 이긴 사람은 없다. 그 이유는 나는 911으로 수차전화를 해서 도움을 요청한 기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사건 후 나는 사람을 상대하는 업종이 싫어서 옛날 내가 한국에서 한우목장 과 양계목장을 한 관계로 아텐스 에 농장을 돌아보고 축산을 하려고 했는데 토지 150 에이카 에 소 120두와 궁전 같은 좋은 집이 있는 농장을 살려고 하니 외진 곳 이라 도둑놈이 와서 때려죽여도 누구도 두움 청할 때가 없어 이웃에서 농장할 친구를 찾았으나 찼지 못해 그만두었다. 한국 88 오림픽 때 내가 가지고 있는 서울대학 영내에 땅에 오림픽 당구 경기장을 만들려고 교섭이 들어왔는데 상계동 땅 1.000평을 막교환 하자는 것을 버티다 시기를 놓쳐고 정부에서 강제수용으로 시가의10/1 가격으로 수용되고 그 대금을 밭기위해 전라도 광양에 가서 5억3.000만원을 받고 말았다 그때가 바로 김대중 대통령 출마했던 때라 얼마나 지역 감정이 심한지 경상도 사람은 전라도에서 자동차 기름도 안 팔아서 김대중 선생 만세 삼창을 불러야 기름을 넣어 주었다. 그 시기가 IMF 로 한국주식이 바닥을 칠때 그 돈으로 내 친구 증권 전문인 에게 부탁해서 한국대기업 주식을 살려고 했다가 그 친구가 자기도 증권에 손해를 보아서 책임 질수 없다고 말을 듣지 않아 그만두었다 그때 주식을 사두었으면 지금의 내 형편이 달라졌을 것이다.


  그후 나는 한국 중고 자동차를 캄보디아로 수출하기 시작했다 한국 중고차 장사를 하고 있던 때 캄보디아에 정변이 일어났다 훈센 반대파와 서로 총질을 할 때 나는 다른 외국 사람들과 같이 이름을 잊었지만 그곳 제일 큰 호텔 에서 피난해서 정쟁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그때 거기 땅값이 지금의 1.000/1 정도로 쌋다. 그러나 외국인이라 살수없었지만 주식회사로 만들면 가능 했는데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얼마후 일제차가 들어와서 차 장사를 그만두고 거기에 천년고무 생산지라 캄보디아 고무를 한국으로 수출했다 한국 진주에 신흥타이야 (자전거 티이야 와 승용차 타이야 생산공장 ) 나의 사촌 처남이 공장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공장은 내가 1972년 한국 박정희 대통령이 재일동표 기업 유치를 위해 노력할 때 내가 일본 오오사카에 가서 신흥 타이야 공장을 한국에도 지사을 내여 나 와 동업하자고 설득하여 유치한 공장이다. 그가 공장을 짓기 위해 한국에 왔을 때 그의 족하가 제 삼촌을 설득하는 바람에 나와 의 동업은 실패했다.


  일제 중고 자동차 판매가 시작되고 나서 일제와 경쟁할려니 힘들고 해서 그 사업을 접고 거기서 생산하는 천년고무수출로 업종을 바꾸고 고무수출을 하면서 호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때 옆방에 삼한섬류 이회장 과 자주만나니 이런 저련 이야기하며 친해졌다 그는 예의바른 사람이다 나보고 항상 어르신 어르신 하면서 잘 지냈다. 그가 하는 사업은 섬유공장이며 종업원이 10.000명이 넘는 큰 공장 이였고 정부에서도 알아주는 한국 기업이며 한국 KBS 가 위대한 한국인이라고 해외에 나가있는 기업가를 방송한일도 있다. 그가 내 사무실을 자기공장이 넓으니 그리 옮기면 편리 할거라고 내 사무실을 옮기라고 간곡히 말해서 그곳으로 사무실을 옮겠다. 10.000명이 만드는 의류의 양은 대단했다 그런데 가끔 자금이 부족 하다고 나 보고 돈을 좀 빌려달라고 해서 가끔식 5만불 10만불식 융통해 주었다 그는 한국에도 생산 공장이 있었고 쾌 유명한 회사다. 나는 남을 도움주는 일을 하고 싶었다 나의유년시절 어렵게 산사람이라 IMF때 캄보디아 어려운 교민에게 쌀(60K) 1oo 가마이상을 주면서 그들이 자존심 상할까바 사람을 시켜서 내가 가지 않고 나누어 주기도 하고 있빨 없는 젊은이에게 이도 해주기도 하고 현지인 병원을 찾아가서 환자들에게 소액 현금을 나누어 주거나 시골에서 맨발로 장에 오는 여자들에게 스릿빠를 사서 나누어 주기도 하면서 나 지신 보람을 느끼기도 했다.


  삼환 이 회장은 바뿐 사람이라 사장을 해병대 동기인 김 사장을 대리로 시키고 한국과 캄보디아로 양쪽 일을 보았다. 공장은 잘 운영되어 하루 생산되는 의류의양을 매일 공장 밖에 세탁공장에 위택 해서 빠라 왔다. 그렇니 공장안에 세탁 공장이 필요 했다 그것을 나보고 공장안에 건물을 지어 주겠으니 세탁공장을 해보면 어떻겠는가 하는 상의가 들어왔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 세탁양이 많았고 수익 또한 나쁘지 않아서 그래 해보자고 했다 그들이 공장을 짓고 나는 한국에 나가서 공업용 세탁기와 건조기를 사왔다 통관세도 적지 않아 공장이 직수입 하는 것으로 해서 세금 없이 통관하여 공장에 설치하고 세탁 종업원을 35명을 채용하고 아주 영어도 잘하고 불란서어도 잘하는 공장장을 은행장 소개로 채용했다. 그는 유식했고 종업원 을 잘 다루었다. 그런데 삼환회사는 늘 자금에 시달렸고 그때마다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케 이럭저럭 80만불의 자금을 융통해 주계 되었다.나는 현금을 그곳에 한국진료 회사가 운영하는 은행에 거래했고 은행장하고는 친하계 지냈다. 그 은행도 삼환에 120여만불의 융자를 해주었다. 어찌된 일인지 경영은 점점 어려워 져서 이제 누구도 돈을 빌려주지 않고 나도 빌려 달라 해도 빌려주지 않차 경리과장 이라는 자가 자기가 책임지고 갑아 드릴 터이니 8만 불만 빌려달라는 것이었다. 하도 사정하기에 약속을 단단히 하고 빌려주었다.


  공장이 어려우니 우리 돈을 빋기 위해 나와 은행장이 합동하여 경영을해서 때로는 필요한 자금은 은행에서 빌려서 정상화 될 때까지 희사를 운영하여 정상화 되면 돌려 줄 터이니 우리 두사람에게 경영권을 넘겨 달라고 했다 그렇나 적극적으로 반대하여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얼마나 공장관리가 억망인지 수출할려고 만들어 놓은 물품을 공장 밖으로 도둑질하여 갔다 그래도 못 본체 하고 있기에 알려주어도 단속을 하지 않았다 너무도 이상하지만 보고만 있었다. 그랬더니 어느 날 자기들이 임대하고 있는 옛날 캄보디아 정부직영 타이아 공장을 하다 중지한 넖은 회사를 삼한이 임대하고 있는 것을 나보고 해 보겠는가고 회장이 물어보랴 한다고 김사장이 나보고 물어서 내가 빌려준 돈에 액수와는 큰 차이가나지만 나 혼자서 하기에 좀 벅차서 은행장 보고 이름만 빌려주고 같이하자고 하니 반대하여 할 수 없이 못 하겠다고 했더니 얼씨구나 하고 김 사장이 그 공장을 자기사위를 시켜서 섬유공장으로 개조하고 현재에 하고 있는 공장에 물건을 빼 돌려서 그쪽 새 공장에 옮기고 본 공장이 더 어려워지면서 부도가 났다 그 액면이 미화 천삼백만 딸라 였다 그러니 은행에서 차압이 들어오고 회사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현지 한인회장 선거가 있어 출마하고 있는 중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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