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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南 박상수(apark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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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기구한 인생 길 인생은 이렇게 편한다.( 1 )
09/15/2019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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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의 기구한 인생 길 인생은 이렇게 편한다.( 1 )


  필자의 인생길은 험하다 나같이 파란만장의 인생을 살기도 힘들 것이다. 나의 나이 100세를 얼마 남기지 안은 시점에서 과거를 뒤돌아 보면 왜정 시절 보통학교를 입학해서 소학교 6년을 졸업 하고 가진 고생을 다하고 겨우대학원 1년의 교육이 전부다 못배운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고 내가 격은 희비고락 모두를 완전히 독자들에게 공개하여 이런 인생도 있다고 독자 중에 여러분의 인생길에 혹시 무슨 작은 도옴 이라도 될까 해서 글을 쓰다 보니 나는 양심에 가책 없이 정직 하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 내 경험 전부를 파 헤쳐서 글을 쓸려하니 평생 걸어온 길에는 남을 본의 아니계 비난 할 수도 있고 원망 할 수도 있고 한 대목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중단하고 간략하게 요점만 쓸려고 한다. 뭐 내가성공한 사람도 아니고 유명한사람도 아니고 아주 밑바닥 인생의 걸어온 길이 독자에게 넉두리 정도 라고 봐도 좋고 또 독자들 애게 적게나마 도움이 되는 대목이 있으면 그 이상 바랄 것이없다. 내글은 실패한 사람의 넉두리 이다 여러분의 양해를 구하고 이런 인생도 있구나하고 이글을 읽어주면 고맙고 안 읽어 주어도 상관 없다.


  나의 인생은 출발부터 역경이 였고 나의 인생길은 고난의 한평생이 였고 그러나 많은 노력을 한 것만은 부인 할수 없다 나의 할아버지는 포수였고 한일합병 당시 독립운동 하시느라고 집안을 안 돌보시고 가난했고 유명인사면 이름이라도 남겠 겼지만 무명에 독립투사는 자손 대대로 가난의 멍예를 써야 했다. 아버지 형제는 모두 무식이고 나는 6남매에 장남이 였기에 장남에 책임은 고생의 험한 길이였다. 나는 소학교 6년 졸업후는 아버지 보국대를 대신 가야했고 일을 해서 가정을 돌보아야 했다 아버지는 무식한 어른이시지만 정말 나는 너무도 착하신 우리아버지를 존경하고 사랑했다. 그리고 나의할머니는 할아버지대신 어린 6남매를 키우시느랴 많은 고생을 하셨고 나는 어릴때 할머니 등에서 자랐다고 한다 할머니가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늘 업고 다니시고 땅에 내려 놓치 안으셨다고 한다 그러케 대단하셨던 할머니가 60세 넘으 셨을때 눈에 연까시 라는 것이 들어가서 엣날에는 병원을 몰라 그만 앞을못 보시는 봉사가 되섰다. 나는 어린 시절 할머니 손을 잡고 친구들에게 모셔다 드리고 방 박에 통통을 비우는것은 내 몫이었다.


  나는 한평생 남의 밑에서 일 해본일이 없다 왜냐하면 나는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남밑에서 못 있고 언제나 나의 능력대로 했다 나는 여러 가지 장사를 시작으로 많은 업종에 종사했다 처음에는 야채장사 쌀 장사 포도장사 배 장사 추력 을 사서 운수업 식당 왜식 한식 중국식 다방 대한전선 대리점 쌍용 셰면트대리점 무역업 도시바 대리점 보로스 Computer 대리점 하공약품상 양계목장 한우목장 이렇게 여러 가지 업종을 하면서도 전부 남의손을 이용했다 사촌 형제 매부 친 동생 등을 관리인으로 썻다 나는 공부를 못하고 내여동생 둘은 무식이지만 나의 10년 아래 동생은 대학공부 시켜서 미국유학 보네고 그다음 여동생은 대학에 떨어져서 못 가고 막내 동생 대학까지 공부 시켰다 미국동생 빼고 시집 장가 다 시켰고 그리고 미국 동생은 미국에서 또 화학 공부를 했고 화학공장에 취 직해서 나보고 미국이 천국이라고 자기사는 모습을 보려 오라는 통에 1970년초에 내가 무역업을 한 관계로(그때는 외국여행이금지됬던 시절) 미국와서 동생은 공장생활 제수는 밤에 간호원 미국생활을 보고 고생하지말고 화학공장을 해 보라했더니 형님 돈이 어듸 있습니까. 해서 내의 무역 회사에서 자금을 마련허여 부쳐주었다.


  그랫더니 나의 동생이 공장을 시작하고 얼마후 하늘같이 모실터이니 날 미국에 오라는 방가운 소식이왔다. 나는 아버님이 살아 계섰으면 절대로 천국아니라 더 좋다 해도 미국을 오지 안았을 것이다. 그러나 75년 일월에 아버님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그 많은 사업채 부동산 할것 없이 헐값에 팔아 75년 12월 25일에 정든 땅 내 사랑하는 조국생활 48년을 마감하고 가족 다리고 미국땅을 밟았다. 운명이라는 것은 한번 결정이 천 길 낭떠러지에 떨어질수 있다. 내가 내말하고 활개치고 날던 네 고향 을 버리고 영어한마디 못 하면서 동생말만 믿고서 수만리 타국땅에 왔으니 고래가 육지에 올라와 도마 우에 누운 것과 다를바 없다. 내 나라에서 날던 내가 벙어리로 54년은 괴롭기 짝이 없는 인생길이다. 가져온 재산은 회사에 다주고 빈털터리 인생이 시작되고 나에 기대와는 정 반대에 길은 험하기만 했다. 형제도 덕을 보여줄 때와 기대는 입장은 악연으로 변한다 더구나 회사는 내가 숙직할 때 신참 대학 졸업한 멍청이같은 아이 때문에 공장에 불이나고 나는 화재가 내 책임으로 변하고 1년6개월 병원 신세를 지고 우리가족은 회사 근쳐에도 못 오계 했다 .사실 내가 불을내고 일보 후퇴에 백보잔진의 길을 터 준 셈이지만 성공은 그들의 몫이고 원망은 내 몫이였다.


  평소 동생과 같이 저 공장을 우리가 했더라면 하고 내가 말하던 실내 오토바이 경기장이장 건물이 있었는데 작은 공장이 불나고 거기로 이전 했다.그리고 동생은 신장병으로 날마다 피를 걸어가며 새로 이전한 공장 건설이다 제품 연구 다해서 무리하고 그 전에 내 여동생에게 이식 받은 신장이 제대로 일을 하지않고 고생을 하다 그러던 차에 미국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에 신장을 새로 이식 하고 회복중에 뜻 하지않게 누가 뽑았는지 모르지만 수숳한 곳에 꽂쳐 있는 호수를 뽑아서 하늘나라에 갔다. 그거나 계도에 올려놓은 공장은 제수의 노력으로 지금 까지 계속 발전하여 지금은 중국을 의시하여 세계 수십개 국에 공장이며 지점이 있다 그 이름은 창업자 박문수 회사 소재는 OHIO AIRFIELD 에 있는 이름은 TEDIA CO. 이다. 나 제수는 간호원 이고 미국 와서는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이라 나는 톡톡히 그 덕을 보았다. 그의 능력은 남자 저리가라다. 여자의 몸으로 지금 100여명에 직원을 거느리고 큰 공장을 운영하며 딸 밖에 없으니 딸이 다음 세대를 맡을 것이지만 나는 너무 아쉬운 것이 사위가 미국사람이라 다음세대는 미국회사가 될 것이 아쉽다. 나외 나의 동생이 평생을 빋쳐 기초를 만들어 준 회사가 이름 만이라도 계속해서 한국 사람이 하지못하고 성공한 회사가 그 자손이 미국사람이 안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 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무슨 욕심이 있겠나만 몆 10년이 지나도 전화 한통 없이 제 사촌끼리라도 남이 되는것이 서러울 뿐이다


  이제 나는 그래도 대리만족을 하며 산다 내나이에 무엇을 바래겠나? 내 동생이 살아 있었으면 내 팔자가 이렇치는 안았을 것을 하고 생각 하지만 다 지나간 옛이야기고 나는 그들과 혜여저 시카고 막내 동생이 직잘인 스쿠류 공장을 보고 내가 해 보았으면 하고 동생 에게 상의 했더니 제가 한다기에 포기하고 이곳 아트란다에 와서 혹인촌 구로세리를 시작했다가 마참 혹인대학 밀집지역에 옛날 극장을 하던 곳을 사서 개조하여 권총을 차고 구로소리를 하다 1972년 LA 흑인폭동 여파로 여기도 흑인대학생들의 폭동이나서 우리가개와 옆집 닉코스토아 가 공격의 대상이되고 그로인하여 하늘에는 혜리콥타 가날고 우리 가계는 부서지고 약탈당했다 경찰은 500메타 밖에서 우리가개 약탈하고 불을 지르려는 것도 보고만 있었다. 그래서 우리내외와  옆집 닉코스토아 부부 가 이층 지붕에 피신하여 있다거 폭도들이 우리보고 돌을 던지는 바람에 이왕지사 죽기는 마찬가지라 고기값이라도 한다고 이층에 쌓라둔 이층 지붕공사 하고 남은 나무토맊을 사정없이 아래로 내 전졌다 게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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