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雲南 박상수(apark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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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복구 그리고 군대생활 (4)
09/04/201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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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후 복구 그리고 군대생활 (4)


  인민군이 점영 하고 있을적에 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진주는 많은 피해를 입었고 사천도 우리 큰집은 잿더미로 변했다. 그때 나는 장지골 에서 일한 덕택에 강씨 집안에 시집온 같은 박씨 를 의 누이로 삼고 잘 놀려갔다 그 집 시아버지도 나를 잘 대해주어서 나는 누님이 없고 누님도 동생이 없어 누님 동생으로 지내기로 했다. 나는 그 동리에서 일 하면서 동리사람 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밭았다. 어린 목수가 일도 열심히 하지만 일 하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동리 사람들의 보기에 귀여웠든 것 같아 그래 누님에게 큰집이 불타고 새로 지어야 하는데 큰일이라고 걱정을 했더니 누님이 못 도와주어서 마음고생을 했다 그를 보고 시아버지께서 부탁도 안했는데 자기산판에 집 지을 나무를 베어서 집을 지으라 는 것이었다. 너무도 고맙고 무아라고 감사해야 할지 몰랐다. 세상에 그리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매부도 거들고 해서 나무를 베여서 사천으로 가져와서 집을 지어드렸다 그러나 그 후 그 고마운 분들의 은혜를 값지 못해 가슴 아프다. 나는 금곡에서 사천으로 이사 하자고 아버님에게 말씀드렸다 내의 장래를 위해서는 그래도 사천이 나을 것 같아서 였다. 사천 비행장에 한국 공군이 주둔하고 군에서 필요한 사무용품을 입찰해서 공급 밭았다 그대 내 나이가 너무 어려서 입찰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그러나 계속 입찰에 참여해서 입찰을 따냈고 그 자본금은 먼저 말대로 돈 가진 영감님을 찾아가 소액을 빌려서 쓰지 않고 이자 붙여 갔다 갑고 또 빌리고 해서 신용을 만든 다음이라서 쉽계 돈을 빌려 낙찰한 물건을 우리집 조그마한 야채밭을 이용하여 공장이라고 직원 모집해서 책상이며 서류함 등 낙찰한 물건을 만들어서 납품했다


  전쟁은 점점 심해지고 갔다. 그러나 계속해서 날아오는 소집영장은 내가 집에서 일하도록 내 버려두지 않았다. 우리 집은 내가 없으면 생계가 어려웠다. 밤에 영장을 들고 나를 찾아오면 나는 자다가 안해 에 등을 타고 다락에 올라 숨기도 했다. 나의 처지를 딱하게 본 공군 경리과에 근무하는 백상요 소위가 나를 좋아하고 나는 형 같이 지냈다 그때 한번은 그들 부부가 자는 방에 나를 재우면서 까지 나를 보호해 주었다. 그후 그가 강능 비행장으로 전출명령이 났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그를 따라 나도 가능으로 공군 추럭을 타고 갔다. 나는 목수일 을 할수 있기에 강릉비행장 비행기 정비대대 소속 문관으로 일했다 그때 전투가 한창이라 매일 출격하는 비행기를 정비병은 모두 나와 손을 흔들며 무사귀환을 빌었다 전투가 끝나고 돌아오는 비행기 소리가 나면 모두 밖에 나가 비행기 숫자를 센다 그러나 비행기 숫자가 모자라면 모두가 긴장하여 있다가 자기비행기가 안 오면 정비사들은 목 놓아 운다 장교 사변 할것 없이 울음 바다가 된다. 그 슬픔 을 어찌 말로 하겠나.......


  그당시에 강능은 과부 천지였다. 아군이 밀면 청년은 아군으로 가고 북한군이 점령하면 인민군에 잡혀가고 해서 비행장 건너 동리에서 여름 아낙들이 강가에 목욕하면 간 건너 군이들은 고함을 치며 야단을 했다. 그러다가 나도 안 되겠기에 공군에 현지입대하고 대전 가서 훈련을 받고 있는데 전투가 끝나고 휴전이 되였다 훈련이 끝나고 배속이 서울 여의도 비행장으로 오계 되였다 다른 사람은 자기 고향 가까운 곳으로 희망 했지만 나는 운명에 맡기고 신경쓰지 안았다 왜냐하면 내가 내 돈 주고 이곳 져곳을 구경 할수 없을 바에야 군데에 있으면서 세상구경이나 하자는 생각이었다 내가 공군에 가면서 아버지에게 부탁을 드렸다. 더 이상 목수일은 하지않을 것이오니 가지고 있는 공구는 빌려달라는 사람이 있으면 빌러주시고 다시 회수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고 군에 갓다. 그것이 내 생애에 목수일은 끝이 였다


  근무지가 여의도 비행장에서 보초병으로 그리고 김포 비행장 미군과 합동근무 를 하계 되여 밤참을 먹기 위해 미군 식당에서 매식기에 넘치도록 음식을 담아 서로 웃으면서 먹곤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여의도 기지대대에 근무 했다.공군 근무 4년6 개월을 마치고 서울에서 살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이상더 목수일 하기가 싫었다. 당시 내 고종누나가 서울에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 군대생활에서 기합 이라는이름으로 매를 많이 맞아보았다 선임 병이라는 그가 원수 진일도 없는데 몆일 을 때려서 지금도 그 이름도 잊지 않고 있다 그 이름은 라수복이다 그러나 나는 군 대생활 4년6개월 동안에 누구에게 뺌 한차려 때려 본적 없다. 옛날에는 군에 먼져 입대 한 것이 무슨 특권인양 기합이란 이름으로 그렇게 행패를 부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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