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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된 메시야 ( 이사야 53:1-6 )
01/25/2020 2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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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6

 

                                                              약속된 메시야

 

말씀 : 이사야 53:1-6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라 명하셧습니다. 우상숭배 문화에서 떠나 하나님이 지시하실 땅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으로 약속을 붙들고 살라 명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명절 때 마다 본토 친척 아비집을 찾는 문화입니다. 명절 때 마다 원치 않게 우상문화와 접촉하기 쉬운 때입니다. 이럴 때 우리가 다시 한번 무엇을 기억하며 한 해를 출발해야 할까요? 바로 성경에 예언된 약속입니다.

 

오늘 본문은 구약에 증거된 약속된 메시야입니다. 이사야는 주전 700년 전후 활동한 이스라엘의 선지자입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하나님의 율법대로 살지 않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전합니다.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해 이스라엘이 멸망 당할 것을 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여 이스라엘은 해방되고, 구원받을 것도 전합니다. 오늘 본문도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될 것을 예언하는 말씀 중에 포함된 것입니다. 특히 본문은 구약의 복음입니다. 이사야는 이스라엘의 해방과 회복을 전하나 본문은 이스라엘을 뛰어 넘어 온 세상 모든 사람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여자의 후손 중에서 메시아를 보내 주시겠다 약속하셧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 메시아가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실 것인가? 밝히십니다. 구약 예언은 2000년전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다 성취되었습니다.

 

본래 선지자는 히브리어로 나비입니다. 그런데 선지자 나비는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고 말하는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보통 예언자 예는 미리 예자를 쓰죠? 그러나 진정한 성경적 예언자는 맡길 예 자를 써야합니다. 은행에 저금하는 걸 예금 돈을 맡긴다 는 뜻입니다. 그처럼 예언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는 것이고,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라는 뜻입니다. 이사야에게 무슨 능력이 있어서 앞날을 미리 알아내는 예언자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전하는 사람이 예언자입니다. 이사야는 메시아가 오실 것과 고난받아 죽으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전한 것입니다. 이사야가 전한 2700년전 예언이 예수님이 2000년전에 오심으로 이루어졌습니다. 2000년 전 당시 우리나라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세워진 때입니다. 먼 옛날, 먼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 2000년 후, 한국에 사는 나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요?

 

본문은 무엇으로 시작합니까? 1,6절에 "우리" 그리고 2,3,4,5절은 모두 ""로 시작됩니다. 여기 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시는 메시아이십니다.

 

각 나라마다 그 나라를 세운 지도자들 목숨 바쳐 헌신한 지도자들이 있죠? 그러나 그들은 나와 직접적인 관계는 없습니다. 먼나라 일이고, 과거 일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이순신 안중근 같은 지도자들이 있었죠. 감사한 마음이 드나 그것으로 끝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위대한 삶을 살았다 해도 그들이 내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해결해 주지 못하고, 내 삶을 도와주지 못합니다. 반면 본문에 약속된 구세주는 나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2절에 "그는 주 앞에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땅에서 나온 줄기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오실 메시아는 사람들 보기에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을 구하시기 위해 메시아가 오신다면 당연히 왕의 모습이어야 하죠? 큰 능력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실제 메시아는 어떤 모습으로 오셨습니까? 이사야가 예언한 후 700년 후 예수님은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본문 말씀처럼 고운 모양도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도 전혀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처녀 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성령으로 잉태 되었으나 당시 누가 그 사실을 믿고 존경하겠습니까? 되려 손가락질 받을 존재로 태어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서 태어나셨죠? 베들레헴 마구간에서 태어나 말구유에 누이셨습니다. 얼마나 초라합니까? 예수님은 깡촌 갈릴리의 나사렛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정규교육도 못 받고, 겨우 목수 일을 배워 목수로 사셨습니다.

 

30세에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십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선포하셨습니다. 일부 사람들만 예수님을 인정했고, 대부분 예수님을 배척했습니다. 시간이 감에 따라 예수님을 향한 핍박은 심해졌습니다. 겨우 병들고,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만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결국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 붙잡혀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십니다. 남긴 재산도 , 자식도 없죠? 예수님 삶 어디를 봐도 사람들이 인정할만한 점이 없습니다. 보잘것없고, 저주받은 삶처럼 보입니다. 왜 메시아가 이런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으며, 사셨으며, 죽으셨습니까?

 

누구를 위함인가요? 바로 우리를 위함입니다. 우리는 세상 모든 사람을 다 포함합니다. 만약 예수님이 왕족으로 태어나셨다면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이 예수님께 가기 힘들겠죠? 예수님은 낮은 사람보다 더 낮은 자리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따라서 가장 낮은 자리로부터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 다 예수님께 갈 수 있고, 예수님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낮고 천한 자리에 오신 것은 바로 우리처럼 낮고 천한 자리에 사는 모두를 위함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2b절 말씀처럼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비웃고, 3b절처럼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업신 여깁니다. 예수님께서 바로 나를 위해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다 는 사실입니다.

 

4절에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질고는 병으로 말미암은 고통이죠? 메시아 예수님께서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슬픔까지 당하셨다 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사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셨습니다. 문둥병, 중풍병, 혈루병, 열병 등 수많은 병자들을 치유하셨습니다. 왜 병자들을 고치셨나요? 결코 돈이나 명성 때문이 아니죠. 오직 한가지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불쌍히 여기신다단장장이 끊어지는듯한 고통, 세상에서 제일 심한 고통이죠?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보실때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병자와 같은 고통을 체험하셨다 는 뜻입니다. 당해본 사람은 고통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죠?

 

저도 수술을 받아봤습니다. 허리에 긴 주사바늘로 찔러 전신 마취를 했습니다. 그후 레이져 수술을 받았습니다. 마취가 풀리니 통증이 심해 방바닥을 뒹굴 정도로 아팠습니다. 그때 심한 고통을 체험해 보았기에 아픈 분들을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얼마나 아플까, 얼마나 힘들까 라는 것을 조금은 안다 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의 병을 고치실 때마다 그 고통을 친히 다 겪어 보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갈 정도로 심한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가시 면류관도 쓰사 큰 가시가 사정없이 예수님의 머리를 찔렀습니다. 그리고 그 손과 발에 대못이 쾅쾅 박히셨습니다. 사정없이 큰 못에 박혀 피흘리며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 고통을 누가 알까요? 누가 당한 고통이 예수님의 고통보다 심하겠습니까?

 

육체적인 고통 뿐이 아니죠? 예수님은 세상에서 3번 우셨습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 소리없이 눈물만 흘리셨습니다. 죽음 앞에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불쌍해서 우신 것입니다. 또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통곡하며 우셨습니다. 이는 멸망당할 조국의 미래를 미리 보시고, 우셨습니다. 그리고 겟세마네에서 눈물로 기도하셨습니다. 이제 자신은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면서 세상에 남겨둘 세상 사람들이 불쌍해서 우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우심으로 정신적인 슬픔까지 다 당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또 어떤 다른 고통도 있으셨습니까? 유대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도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라소리쳤습니다. 예수님이 뭘 잘못했다고 예수님을 죽이려 한단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가시는 곳 어디든지 가겠다 큰소리치던 제자들도 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그때 마음이 어떠했을까요? 왜 예수님께서 질고를 지시고, 슬픔을 당하신단 말인가요? 단 한가지 이유는 히브리서 218절입니다.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예수님께서 친히 질고와 슬픔을 당하신 것은 바로 질고와 슬픔을 당하는 우리를 도우시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메시아께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셨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메시아가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라고 생각합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질고를 지시고, 나의 슬픔을 당하셨다 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나는 예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5절에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찔림과 상함은 말로 할 수 없는 육체적인 고통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로마병정의 창에 찔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머리와 손과 발에는 가시와 대못의 찔림을 받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온 몸에는 상처 투성이였습니다. 결국 찔림과 상함은 예수님을 죽음으로 인도했습니다. 보통 찔림과 상함은 죄에 대한 징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징벌을 받을만한 죄를 저지르셨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순결하사 한점의 죄도 없으신 분입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께서 찔림과 상함을 당하신단 말인가요? 대속입니다. 남의 죄를 대신하여 벌을 받으셨다 라는 것입니다.


세상 법정에서는 대속이 있을 수 없습니다아들이 큰 죄를 지어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아버지가 판사에게 편지를 씁니다. 나는 나이가 많아 얼마 있으면 죽게 되니, 내가 아들 대신 죽겠다 유서를 남기고 자살합니다. 그렇다고 아들이 감옥에서 풀려납니까? 아니죠. 왜냐하면 세상 법은 대속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르십니다. 애굽에 하나님의 재앙이 내립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해방시키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바로왕이 순종하지 않아서 10가지 재앙이 내립니다. 그 마지막 재앙이 장자와 첫새끼의 죽음입니다.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린양을 잡아서 그 피를 인방과 설주에 바릅니다. 죽음의 사자가 어린양의 피를 보고 그 집은 뛰어 넘어 갑니다. 어린양의 피가 이스라엘 백성들의 피를 대신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대속제물이 되셨다 라는 뜻입니다. 결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죄악 때문에 찔림과 상함을 당하신 것이 아니고, 남을 위해 당하셨다 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922"율법을 쫓아 거의 모든 물건이 피로써 정결케 되나니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 말씀처럼 죄의 용서를 위해서는 누군가가 피를 흘려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양이나 소로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양이나 소가 제물이 되더라도 그 효력은 그때 뿐입니다. 매번 범죄할때마가 제물을 드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는 영원한 효력을 가집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세상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셨기에 모든 죄가 정결하게 씻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본문 5절에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내 죄와 내 허물 때문에 찔림과 상함을 당하셨습니다. 나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해 십자가의 고난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죄가 씻어짐으로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라고 말씀합니다. 나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 사이였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섬길 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피흘리심으로 우리는 원수 되었던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었습니다. 골로새서 1:20절에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말씀처럼 예수님의 피가 나를 하나님과 화평을 이루어주신 것입니다. 또 우리가 치유함을 얻게 됩니다. 병은 여러 원인으로 찾아옵니다. 그중 하나가 죄악의 결과입니다. 만약 내가 가진 병이 죄악의 결과라면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채찍에 맞으심을 믿으면 나는 나음을 입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사실을 모르고 그릇 행합니다. 6절에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제 길로 갔거늘" 말씀처럼 제멋대로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찔림과 상함을 당하신 것이 바로 나의 허물과 죄악 때문입니다. 이를 알때 세상의 구주 예수님이 나의 구주이심을 고백하지 않을수 없습니다.

 

최하진이란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는 공부를 잘해서 카이스트에 입학해 젊은 나이에 스텐포드 대학에서 20대 때 공학 박사학위를 땄습니다. 대덕연구단지에 3년간 재직하며 자력으로 아파트 3채와 개발지구 땅까지 구입해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세상 적으로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모태 신앙이엇지만 클럽 가서 술마시며 부킹하고 노름에 빠져 개차반 같은 신앙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위해서는 할줄 아는게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마가복음 10:25낙타가 바늘귀로 나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말씀 앞에 꺼꾸러져 이제까지 개차반 신자로 살았던 자기 중심적인 삶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영접했습니다. 창세기 11장에 아브람의 아버지 데라가 나오죠? 그는 갈대아 우르에서 우상장사를 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브람 때문에 거기를 떠나 가나안땅으로 가던중 하란에 장사가 잘될 듯 하니 그냥 거기 주저 앉아 머물렀습니다. 그곳에서 '205세를 살다 죽었더라' 고 나옵니다. 여기서 세상은 떠나 가는 인생이 있고, ’머물러 주저 앉는 인생이 있으며 저수지 같은 인생이 있고 샘물 같은 인생이 있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데라는 자기 힘으로 다른 열 사람 몫까지 끌어 모으기만 하는 저수지 같은 인생을 살았지만 아름답다고 보여지지 않습니다. 성경은 누가 성공한 인생이라 말합니까? 아브람이죠? 떠나 간 인생이요, 자기 한사람으로 인해 다른 사람 열명 백명 수많은 사람들에게 복을 퍼준 샘물같은 인생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한후 최하진 씨는 아브람처럼 주를 위해 살기로 결단하고 중국 선교사로 떠나갔습니다. 할빈에 가서 영혼을 구원을 위해 한국에서 번 돈을 다 썼습니다. 큰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런데 중국 공안에서 교회를 폐쇠시켜 버렸습니다. 그러자 교인들이 길바닥에서 눈을 맞으며 찬송을 부르며 예배드리기 시작했습니다. 18세 이하 어린이들은 교회를 못다니게 하는 정책에 따라 4억 학생들을 위해 허허벌판에 학교 깃발을 꼽고 건물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큰 학교 건물을 짓게 하셨습니다. 학교로 중국 한족 청소년들이 몰려왔습니다. 거기서 집에 학생들 15명과 공동생활했습니다. 돌쇠 정신 마당쇠 정신으로 그들과 함께 6개월동안 게임하고 놀자 신뢰관계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때부터 몰래 기도회, 몰래 성경공부를 시작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들 모두 다 예수님을 영접햇습니다. 주님은 안드래 같은 생각의 단순성 행동의 단순성을 축복하사 성령의 큰 역사를 이루셨던 것입니다.    


2700년전에 이사야에 의해 전해진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예언은 2000년전 이스라엘 땅에서 실현되었습니다. 먼 옛날, 먼 곳에서 이루어진 일이기에 나와는 별로 관계가 없는 일같이 보여집니다. 그러나 메사아는 바로 나를 위해 세상에 오셨습니다. 나같이 보잘 것 없는 자를 구하시기 위해 낮고 천한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또한 나의 질고와 슬픔을 대신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고난을 당하셨기에 고난 당하는 나를 도우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나의 허물과 나의 죄악을 대신 지시고 찔림과 상함을 당하셨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고운 모양도 없고, 흠모할만한 아름다움도 없다 라고 비웃었습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이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라고 오해했습니다. 더구나 그릇 행하며 내 갈 길로 가 버렸습니다. 너무 안타깝고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으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땅에 뿌리며, 호산나 호산나 외쳤습니다. 예수님께서 마지막 일주일의 고난 받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오셨다 라는 사실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나 같은 자를 위해 낮고 천한 자리에 오셨고, 나를 도우시기 위해 질고와 슬픔을 당하셨고, 나의 허물과 죄악을 대속하시기 위해 찔림과 상함을 당하셨다 라는 사실을 알아야 하고, 굳게 믿어야 합니다.

 

메시아의 오심은 분명 2000년전, 멀리 이스라엘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지금 나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임을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 때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에게 임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우리가 바로 나 자신임을 알고, 올바른 믿음의 길로 돌이켜서 놀라우신 하나님의 은혜를 충만히 받는 모두 되길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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