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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터치를 축복 하신 예수님 ( 누가복음 8:40-56 )
02/03/2018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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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4일


                                   믿음의 터치를 축복 하신 예수님

 

말씀: 누가복음 8:40-56


    오늘 본문에는 ‘혈루증 앓는 여자’ 와 ‘회당장 야이로’가 등장합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놀라운 생명의 은총을 덧입었습니다. 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풀고자 할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떤 믿음을 요구하십니까?

 

   - 본인 문제를 안고 예수님께 손을 댄 여인 -


예수님 일행이 야이로의 딸 문제를 해결하러 가는 도중에 누가 끼어 들어 왔습니까? 43절에 “ 혈루증으로 앓는 " 여인 이었습니다. ‘혈루증’은 혈관 조직이 약하여 피가 몸 밖으로 흘러 나오는 유출병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병에 대해 ‘하나님의 징계의 결과’ 로 여겼습니다. 레위기 15: 19절에 보면 “ 어떤 여인이 유출을 하되 그의 몸에 그의 유출이 피이면 이레 동안 불결하니 그를 만지는 자마다 저녁까지 불결 할 것이요” 유대인들은 이 병을 부정하게 여겨 멸시 천대 했습니다. 레위기 15:31 절에 보면 완치될 때까지 사회로 부터 격리 되었습니다.


  그녀는 여인으로서 그런 부정한 병을 한해도 아니고 열두해 동안 앓고 있었습니다. 오랜 고질병으로 얼굴은 창백했으며 몸도 수척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병을 앓고 있으면서도 남들처럼 예수님께 도움을 공개적으로 요청할 수도 없었습니다. 스스로를 부정하게 하는 병이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이병은 레위기 15:19-30절에 다른 사람과 접촉도 금지된 병이었습니다. 그런 여인이 자신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자 했습니까? 예수의 뒤로 와서 그의 옷가에 손을 댔습니다. 그때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그녀의 고질병이 즉시 나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 열두해 혈루증 앓는 여인을 고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믿음의 텃치’를 축복하신 예수님 이십니다


         예수께서 야이로의 딸을 고치러 가실 때 누가 따랐습니까? 42b 절에 “ 예수께서 가실때에 무리가 밀려 들더라 ” 밀려드는 수많은 무리였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 중에 왜 열두해 혈루증 앓는 여인만 은총을 입은 것일까요? 44-46절에 “ 손을 대니 ” “손을 댄자가” “손을 댄자가 있도다 ” ‘손을 댄다’ 는 말이 무려 세 번 반복됩니다. 여인이 예수님께 손을 대되 믿음을 갖고 댄 것입니다. 예수님 뒤를 따른 사람들은 수없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에게 은혜를 베푸셨나요? 예수님은 수없이 밀려드는 많은 무리들 중 누가 ‘믿음의 터치’를 하는가? 그 한 영혼에 관심 갖고 주목 하셨습니다.  


       열두해 혈루증을 앓은 그 여인의 현재 형편이 어떠합니까? 마가복음 5:26절에 “ 많은 의사에게 많은 괴로움을 받았고 가진 것도 다 허비 하였으되 아무 효험이 없고 도리어 더 중하여졌던 차에 ” 그녀는 용한 병원 다 가봤지만 낫기는 커녕 증세만 더 중하여 갔습니다. 깊은 실망감이 몰려와 울고만 싶었을 것입니다.

그때 여인이 발견한 분이 예수님 일행이었습니다. 그녀도 예수님 소문은 들었습니다.


    38년된 중풍병자를 일으키시고 맹인의 눈을 띄워 주신 예수님이 바로 구약에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 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진정 메시야 이시라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나 묵상했습니다. 예례미야 30:17절에 “ 너의 상처로부터 새살이 돋아 나게 하여 너를 고쳐 주리라 ” 말라기 4:2절 “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 말씀을 떠올리며 예수님이 내 병도 고쳐주실 '치료의 메시야' 로 영접하고 믿었습니다.


     16c ‘암브로스 파레’ 라는 유명한 프랑스 외과의사의 묘비명에 이런 글이 새겨 있다고 합니다. " 나는 상처를 싸매어 줄 뿐이다. 상처를 고쳐 주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평생 이 신앙 이 마음으로 환자를 돌보았다는 말입니다.


    히스기야가 병에 걸렸다 나음을 입엇을때 이런 기도를 드립니다. 이사야 38:16절에 “ 주여 사람이 사는 것이 이에 있고 내 심령의 생명도 온전히 거기에 있사오니 원하건데 나를 치료하시며 나를 살려 주옵소서 여호와께서나를 구원하시리라 ” 그때 이사야 선지자가 ‘한뭉치 무화과 나무를 붙이면 왕이 나으리이다’ 그대로 했더니 나음을 입었습니다.


    성프란시스가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올릴때 집하인이 꼭 우물통 속에 나무 토막 넣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나무토막을 안 넣으면 통속의 물이 제 마음대로 출렁거려 반통밖에 남지 않습니다.’ 라 답 하더랍니다. 크게 깨닫은바 있어 친구에게 편지 쓰기를 ‘우리는 얼마나 자주 흔들리는 마음의 물통을 가지고 있는가? 두려움으로 흔들리는 마음, 고통으로 심하게 요동하는 마음,절망으로 부서지는 마음, 이것이 마치 심하게 흔들리고 출렁거리는 물통 같은 것이지, 그러나 거기에 십자가라는 막대기를 던져 보게나, 십자가 주님을 바라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그분을 바라 볼때마다 우리를 도우시고 우리의 고통을 함께 져 주시고 치료하시기 때문입니다.'


   한 정비사가 성실히 일해 돈을 모은 것으로 중고 자동차를 구입했습니다. 차를 뽑은날 신나게 도로를 질주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못가 엔진이 툴툴 거리더니 멈춰 버렸습니다. 그때 한 노인이 ‘제가 한번 봐드릴까요? ’ 말했지만 ‘그냥 가세요. 제가 정비사거든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고쳐도 차 시동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그때 노인이 본네트를 열고 망치로  몇 번 부속을 탕탕 치더니 시동을 걸어 보라 했습니다. 시동을 걸어 보니 브르릉 하며 걸렸습니다. 감사해서 존함을 물어 보니 ‘ 내가 이 차를 만든 헨리 포드요’ 답 하더랍니다. 차는 차를 설계하고 만든 이가 가장 잘 고치는 것이지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병들었을때 그를 가장 잘 고치시는 분은 사람을 그 뜻대로 지으신 예수님이십니다. 그가 가장 잘 치료하는 구세주이십니다. 예레미야 33:6절에 “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하고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며” 또 출애급기 15:26절에 “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 임이라 ”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약속하신 메시야는 마라의 쓴물도 단물로 바꾸시며 어떤 고질병도 낫게 하시는 ‘치료의 주’ 라는 믿음이 왔습니다. 그때 어떤 믿음이 생겼습니까? 마가복음 5:28절에 “ 이는 내가 그의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받으리라 생각함 일러라” 약속된 메시야 예수님은 나도 ‘치료 해주시는 하나님이시다’ 는 믿음이 생겼습니다. 여인이 성령님이 주신  믿음을 갖고 예수님 옷에 탓치 했습니다. 그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44 절에 “혈루 증이 즉시 그쳤더라” 혈루 근원이 마르고 곧 병이 완치되었습니다. 스스로 해결 못하고, 또 수많은 사람도 해결 못한 그녀의 12년된 고질병 혈루증을 예수님이 고치셨습니다. 이 예수님은 ‘치료의 구세주’ 이십니다. 예수님께 막 밀려든다 해서 다 은혜 입는게 아닙니다. 수많이 무리 속에서 믿음으로 터치한 여인만 은총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터치’를 하는 자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치료의 구주이십니다.


둘째, ‘고백하는 믿음’에 평강을 선물하신 예수님이십니다.


         믿음으로 치유 받았을 때 예수님이 물으셨습니다. “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그때 여자의 반응이 어떠했죠? “여자가 자기에게 이루어진 일을 알고 두려워 하여 떨며 와서 그 앞에 엎드려 모든 사실을 여쭈니” 여자가 모든 사실을 예수님께 고백하였습니다.


         고백한 여인에게 예수님이 어떤 축복을 주셧습니까? 48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 이 음성이 왜 그녀에게 고귀한 선물이 되었을까요? 율법은 그녀를 부정하다 정죄했고, 불결하다 소외시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딸아!” 불러 주셧습니다. “ 딸아!” 이 얼마나 아름다운 호칭입니까? 예수님은 이 여인을 ‘하나님 나라의 가족의 일원으로’ 감싸 안고 받아 들여 주신 것입니다. ‘구원’을 주시고 ‘평강’을 선물해 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이고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열두해 겪은 문제를 다 책으로 쓰면 몇권은 될만큼 파란만장한 일들로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볼까?’ 또 ‘부정하다 규정한 율법’만 생각하면 내면에 오금이 저렸을 것입니다.

열두해 혈루증 질병으로 고통받은 것 보다 그녀를 더 괴롭힌 것은 율법적인 생각과 부정적인 사고였습니다. 병으로 받은 고통보다 내면은 ‘죄책감’과 ‘죄의식’으로 더 어두웠습니다.


       왜 고백하는 믿음이 중요할까요? 요한일서 1:8-10 절입니다. “ 만일 우리가 죄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십니다. 따라서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입니다. 그가 빛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고백하기 전 '병나음'은 받았어도 그녀 내면에 '평강'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을 여짜온대’ 고백 후 ‘구원’의 은총과 내면에 ‘평강’의 은총이 임했습니다. 이는 세상이 줄 수 없는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샬롬!! 진정한 ‘평화’ 였습니다. ♬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수 없는 세상이 알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


- 자기 딸 문제를 들고 예수님께 온 회당장 -


    시간이 훌쩍 흘렀습니다. 가는 도중 예수님이 혈루증 앓는 여인의 문제를 돕느라 지체했기 때문입니다. 야이로는 속이 탔습니다. 그때 누가 왔습니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그가 어떤 보고를 했죠? “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 그 소리를 듣자 야이로 다리 힘이 쭉 풀렸습니다. “선생님을 더 괴롭게 하지 마소서” ‘도움을 청하더라도 딸이 살았을때 효력이 있죠? 죽었으니 이제 아무 소용없어요 그러니 더 예수님을 괴롭게 하지 마세요’ 그런 말입니다. 야이로 심정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절망이 밀려 왔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불신을 내쫒으시고 야이로의 딸을 살려 내셨습니다. 그러면 야이로의 딸을 살리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엎드려 무릎 꿇고 겸손히 간청하는 예배자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구주이십니다.


        예수님 일행이 도착했을때 회당장 야이로가 나왔습니다. 그가 예수님 발앞에 엎드렸습니다. 엎드리려면 무릎을 꿇어야죠?   야이로는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나 회당장이 되는게 아니죠? 어릴때부터 율법서 토라, 탈므드, 에즈라가 작성한 미쉬나( Misgna ) 등등 달달 암송하며 모든 율법에 통달해야 했습니다.  삶도 말씀대로 엄격하게 지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회당장까지 오른 것입니다. 그런 그가 왜 예수님 앞에 엎드려 무릎 꿇은 것입니까? 화려한 회당장 옷을 입고 나이 지긋한 어르신 회당장 야이로 앞에 30대 청년 예수님이 엎드려야 더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그게 윤리적으로 맞습니다. 그런데 엎드려 무릎 꿇은 자가 누구입니까? 회당장 야이로 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에게는 열 두살 딸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앓아 눕더니 숨이 넘어갈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야이로가 엎드려 무릎 꿇은 것은 딸의 목숨을 구해 보고자 하는 절박감 때문 입니다. 더나가 예수님의 신성한 위엄 앞에 회당장이란 포지션이 죽어 가는 자기 딸을 살리는 데 무력함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죽어가는 자기 딸을 살릴 유일한 분은 예수님이시고, 자기는 무능한 자임을 알았을때 그는 겸손히 무릎 꿇었습니다. 은혜 받기 원하면 모두 하나님 앞에 엎드려 무릎을 꿇을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은혜 받기를 바랍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리고 말씀에 은혜 받았다 말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가 진정 은혜를 받는 것일까요? 성공 했지만 예수님께 무릎 꿇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대통령 되고 나서 감옥 가거나 높은 산에 올라가 뛰어 내려 죽습니다.


      동방박사, 아기 예수께 엎드려 무릎 꿇었죠? 생수를 마신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경배드렸죠?  아기 예수님이든, 청년 예수님이든, 예수님께 엎드려 무릎 꿇고 꺽어진자, 경배하며 간청하는 ‘예배의 성공자’ 그에게 주님은 은혜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누구든 진정 은혜 받기 원하면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는 예배의 성공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둘째, 예수님은 ‘생명의 구주’ 이십니다.


       야이로는 예수님께 자기 딸을 살려 달라 간청했습니다. 그런데 야이로의 딸이 시름 시름 앓다 죽었습니다. '상황 끝' 입니다. 당연히 야이로 마음에 절망이 밀려왔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야이로에게 “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 말씀을 주셨습니다.


        ‘두려움’은 마귀가 심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 무엇이죠? 디모데 후서 1:7절에 “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 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 ” 마귀는 끊임없이 불신과 두려움을 심습니다. 그러나 이때 우리가 들어야 할 주님의 음성이 무엇일까요?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입니다.

 

       지금 이런 상황에서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는 분이 누구일까요?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습니다. 부활의 권세자만 하실 수 있습니다. “울지 말라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 이 말씀도 ‘생명의 구주’ 만 하실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요셉의 아들’로만 알고 있었죠? 그러니 '죽은자를 자는 자라니 웬 뚱딴지 같은 헛소리냐?’ ‘ 아무래도 뭘 잘못 먹은거 아냐? ’ 하며 비웃엇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셨습니다. “ 아이야 일어나라 ” 그러자 “ 그 영이 돌아와 아이가 곧 일어 나거늘 ” 헬라어 성경에는 “ τo πνεμα αuτes ” 로 나옵니다. 여기 퓨누마( πνεμα ) 는 흙으로 육체를 지으신 하나님이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어 영이 되니라 할때 ‘그 영’ 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것’은 ‘잠자는 것’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을 지으신 생명의 주로 또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신 부활의 주의 능력으로 예수님이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있는 그녀의 영을 다시 그의 육체에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살리셧습니다. 이일은 부활의 권능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만 하실 수 있으십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다시 살리신 예수님은 ‘생명의 구주 ’ 이십니다.


셋째, 인내하는 믿음을 축복하시는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딸을 살려 달라는 간청을 듣고 야이로를 따라 나섯습니다. 그런데 도중에서 엉뚱한 일이 터졌죠. 열두해 혈루증 앓던 여인을 고쳐 주시느라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이런 상황에 처하면 누구나 발을 동동 구르겠죠? 뚜껑 열리겠죠? 그러나 야이로는 차분히 기다렸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노라면 내집에 불이 난 것처럼 화급한 일을 만나고, 어떤 때는 그것이 생사를 좌우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이 우리 머리털까지도 세실 정도로 세심히 돌보고 계심을 믿습니까? 그런 확신이 있는 사람은 우리 삶 전체를 그분께 전폭적으로 맡길 수 있습니다. 그때 끝까지 낙망치 않고 인내할 수 있습니다. 신 32:9,10절입니다. “ 여호와의 분깃은 자기 백성이라 야곱은 그가 택하신 기업이로다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보호하시며 자기의 눈동자 같이 지키셨도다 “

 

   그 후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마침내 예수님이 죽은 그의 딸을 살리셨습니다. 잠자던 그 소녀가 당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예수님께서 ‘먹을 것을 주라’ 명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먹을 것’을 같다 주었습니다. 아이가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로 아이의 살아남이 공식적으로 확증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예수님께서 눅 7:11-17절에 ‘나인성 과부의 아들’ 요11:40-44절에 ‘베다니에 살고 있던 나사로’ 또 본문에 ‘야이로의 죽은 딸’을 살려 내셨습니다. 이 사건들은 예수님이 누구시라는 겁니까? 요한복음 11:25,26절 “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 예수님이 바로 ‘생명의 주’ 되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신 것입니다. 따라서 생명의 주 예수님 앞에서 우리가 어떤 태도로 살아야 할까요? 그분 앞에 '엎드려' ‘무릎 꿇을 줄’ 알아야 합니다.

 

     CTS 기독교 TV 창사 20주년 특별기획 바보의사 ‘장기려 박사’ 의 삶을 재조명한 다큐멘타리를 보았습니다. 그분은 나고야 제국대학에서 ‘맹장염’ 연구를 Dr. 학위를 받았습니다. 1943년 간암 암덩어리를 떼내는 수술을 성공하고 1945년 평양 도립병원 원장 1947년 평양 의과대학 외과교수 1959년 최초 간70% 대량 절제수술에 성공합니다. 그의 인생은 한마디로 성공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1950년 한국 전쟁이 터진 겁니다. 여기서 예수님 앞에 꺽어지고 엎드리는 인생이 됩니다. 홀로 피난을 나온겁니다. 부산 영도에서 복음 병원을 설립합니다. 이때 표어가 “건강할 때 이웃돕고 병났을때 도움받자‘ 였습니다. 그는 가난하고 소외 당한 이웃의 벗을 자처하며, 식구처럼 돌보고 사랑의 의술을 펼칩니다. 이때 에피소드가 많은데 원무과 직원 몰래 병원장이 환자를 야밤에 탈출시킵니다. 1968년 청십자 의료협동 조합을 설립 무료진료를 펼칩니다. 이 공로로 1979 년 라몬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타고, 상금 1만불을 받아 청십자 의료조합에 기탁해 버립니다.  예수님 앞에 엎드려 무릎 꿇은 사람이 준 감동입니다.   


    또 어떤 절망적인 일을 만나더라도 절대 그분에 대한 신뢰를 잃어 버리지 말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또 그분께 맡긴 일은 끈기 있게 믿고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남모르게 앓고 있는 ‘고질병’들 스스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 절망적’ 인 문제들이 있죠? 이런 고질병은 하루 이틀에 생긴 문제가 아니죠? 한해 두해 시달린 문제도 아닙니다. 그래서 불신의 뿌리가 깊습니다. 그런데 이런 고질적인 문제나 절망적인 문제는 ‘어쩔수 없다’ ‘안된다’ ‘안될 것이다.’ ‘지금 까지 안되었는데 또 한다고 되겠는가?’ 어둠을 심고 부정적인 생각을 심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오래된 고질 병이라도 고침을 받고자 하는 불타는 소원과, '믿음의 터치'로 예수님께 손댈 때 기적을 체험하고 생명을 얻습니다. 예수님은 치료의 하나님이시며 부활의 하나님이십니다.  ‘두려워 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온전한 믿음으로 예수님께 나오면 죽은 것 같은 사람이 살아나고 절망중에 희망의 꽃이 피어납니다. 어떤 고질적인 문제도 해결해 주시고 살려 주십니다. 온전한 '믿음의 터치'로 예수님께 나와 기적을 체험하는 복된 성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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