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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포도주, 새 부대 ( 마가복음 2:18-28 )
01/29/2018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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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28


                                                       새 포도주, 새 부대


말씀: 마가복음 2:18-28


         세례 요한과 예수님이 동시대에 사역할때 ‘금식 논쟁’이 불붙었습니다. 이때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었습니까? 빛의 속도로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복음 사역을 감당해 나갈 수 있을까요?

 

1. 신앙 생활의 본질을 깨달으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금식’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예수께 어떤 질문을 합니까? “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의 제자들은 금식하는데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금식하지 아니하나이까?” 왜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일까요? 당시 세상의 트랜드는 ‘유대 율법주의’ 였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의의 기준을’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삼았습니다.


      구약시대때 국가적인 큰 어려움이 있거나 하나님께 통회하며 자복해야 할 필요성이 있을때 금식하며 기도했습니다(느1:4 단6:18-20 삼상7:5- 삼하 12:6-). 레위기 16:29-31절에 보면 “너희는 영원히 이 규례를 지킬지니라. 일곱째달 곧 그 달 십일에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하고 아무 일도 하지 말되 본토인이든지 너희 중에 거류하는 거류민이든지 그리하라. 이 날에 너희를 위하여 속죄하여 너희를 정결하게 하리니 너희 모든 죄에서 너희가 여호와 앞에 정결하리라. 이는 너희에게 안식일 중에 안식일인즉 너희는 스스로 괴롭게 할지니 영원히 지킬 규례라” 했습니다. 대 속죄일에 이스라엘 백성이면 누구나 금식해야 했습니다(레 23:27, 29, 32). 하나님께서 대 속죄일에 금식하게 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베푸시는 은혜를 기억하고 그 은혜 안에 남아 있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가면서 금식하는 일이 자주 있게 되었습니다. 하루 금식(삿20:26), 7일 금식(삼상31:13), 3주 금식, 40일 금식(신9:9,18)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의 폐단은 율법주의자, 경건주의자들이 금식의 형식을 통하여 자기 의를 나타내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18:12절에 보면 “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 라고 자랑합니다.

이런 의식 흐름의 관점에서 보면 유대인이라면 ‘금식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 제자들은 그들과 패러다임과 달랐습니다. 그러니 ‘예수님 제자들은 뭔가 신앙생활을 잘 못하는거 아닙니까?’ 라고 질문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답하십니까? 19절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혼인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 신랑과 함께 있을 동안에는 금식할 수 없느니라” 예수님은 그들이 ‘신앙생활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음을 간파하셧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신앙생활의 본질을 ‘ 금식’ ‘할례’ ‘제사드림’ 처럼 ‘율법을 잘 지키는 것’으로 파악 했습니다. 아담 때부터 세례 요한때까지 구약시대에는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신앙생활의 본질이라 여긴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신앙생활의 본질을 무엇으로 보신 것입니까? 이사야 62:5절에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구원을 혼인에 비유했습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의 본질은 혼인잔치입니다. ‘혼인에서 중요한 것은 ‘관계’ 죠? 구세주로 오신 예수님은 혼인집 ‘신랑’이십니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은 혼인집 ‘신부’입니다. 그런데 결혼식에 초청을 받은 하객들이 금식 할 수 있습니까? 아니죠? 먹고 마시고 즐거워 합니다. 혼인날은 하나님이 신랑을 위해 신부를 이끌어 오사 짝지어 주신 날이므로 인생 최고 기쁜 날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2:2,3절에 보면 왕은 아들의 혼인 잔치때 아름답고 감동적인 음악, 진귀하고 기름진 음식을 풍성이 준비해 놓고 종들을 보내 사거리 까지 나가서 하객들을 다 오라 초청하였습니다. 혼일날 초청 받은 하객이 해야 할 것은 기뻐하며 노래 부르고 피로연에 참석해서 풍성한 음식을 맛있게 먹으며 혼인 잔치를 즐기는 것입니다. 언제 금식해야 하죠? 20절에 ‘신랑을 빼앗길 날’입니다. 이사야 53:8절 말씀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때 ‘금식’ 해야죠. 또 이땅에서 성도가 믿음 지키기 위해 당하는 환란과 괴로움이 있을때 금식해야 할 것입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셔 들이기 위해 금식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지금 이땅에 구원을 주러 오신 예수님은 ‘혼인 잔치날’ 이라 하십니다. 따라서 신앙 생활의 본질은 율법을 잘 지키고 금식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은 신랑이신 예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초청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신랑 예수님을 만난 기쁨을 나누고 즐거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생활을 잘하는 비결입니다. 신앙생활의 본질을 잘 깨달아야 겠습니다.


    우상숭배와 말씀을 멸시한 죄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을때 금식하며 부르짖어야죠. 그러나 지금은 예수님이 구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신부인 하나님의 자녀들은 신랑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기뻐하며 즐거워 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해 모여 공예배로 드리는 주일은 ‘혼인잔치에 초청받은 날 입니다. 그러니 주일은 ‘설레이는 날’이죠? 신랑을 만나 그분의 음성을 듣고 찬송하며 기쁨으로 순종하는 것이 기독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2. 시대를 분별하고 신축성 있는 삶을 살아라

     

    예수님은 한가지 ‘예’ 를 들어 부연 설명해 주십니다.  ‘생베 조각’은 새 생베를 쓰고 남은 조각입니다. 그것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면 기운 새것이 낡은 그것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되고 맙니다. 새 생배 조각도 버리고 낡은 옷도 못쓰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22절을 읽어봅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는 자가 없나니 만일 그렇게 하면 새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와 부대를 버리게 되리라 오직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느니라 하시니라” 제가 대학때 농화학과를 나와서 ‘포도주 만드는 법’을 잘 압니다. 극상품 포도주를 만드는 생산자들은 먼저 햇볕이 잘 내려 쪼이고 물빠짐이 좋은 남향 산비탈 등 기후와 토양 조건이 좋은 곳에서 적합한 포도 품종을 선택하여 정성스럽게 가꿉니다. 그러다 원하는 ‘당도’와 ‘산도’가 나왔을때 포도 알맹이를 수확합니다. 수확한 포도를 씻어 통에 넣고 발로 으깹니다. 알콜 농도는 수확한 포도의 ‘당도’에 비례합니다. 당도가 약한 포도는 알콜 농도가 낮은 와인이 됩니다. 그래서 재배 조건이 좋지 못한 곳에서는 알콜 농도를 높이기 위해 설탕을 첨가 하기도 합니다. 이렇게 숙성 과정을 거칩니다. 이때 ‘발효’란 포도당이 변해서 ‘알코올’과 ‘탄산가스’가 되는 과정입니다. 처음 과즙 상태에서는 단맛이 있다가 발효가 진행될 수록 단맛은 없어지고, 알콜 농도가 올라갑니다. 숙성기간이 오래 될수록 좋은 포도주가 생산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새 포도주’ 의 특성은 왕성한 ‘발효력’과 ‘신축성’에 있습니다. 그런 새 포도주를 낡은 부대에 넣으면 어떻게 될까요? 당근 낡은 가죽 부대가 터져 버리죠? 그러면 포도주와 부대를 다 못쓰게 만듭니다. 따라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는게 원칙입니다.


   이 비유에서 ‘낡은 가죽부대’는 ‘세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의 유대 율법주의 사고를 말합니다. 그들은 수많은 선지자가 예언한 구세주가 누구신지 몰랐고 그분이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새 시대가 왔는데 아직도 율법과 유전과 전통만 답습하며 고집하였습니다. 한마디로 낡은 가죽 부대였습니다. 디모데후서 3:5절을 보면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새 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세례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새인들이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에서 메시아 사상을 가지고 메시아의 도래를 바라보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안에서 여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새 포도주’는 예수님과 복음입니다. 신랑되신 예수님이 선포하신 복음은 왕성한 ‘발효력’과 ‘신축성’이 있습니다. 따라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세월이 흐를수록 어떻게 됩니까? 열역학 제1법칙은 에너지 보존의 법칙, 열역학 제2법칙은 엔트로피 법칙이죠? 즉 에너지 총량은 같고, 에너지 흐름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른다는 법칙입니다. 따라서 세월이 흐르는데 가만이 있으면 ‘새 부대’도 저절로 ‘낡은 가죽부대’가 되게 마련입니다.

 

   세월이 흘러 우리 외모는 다 후패해지죠? 그럴지라도 우리 심령은 어떻게 새 부대가 될 수 있을까요? 요엘서 2:13절에 “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마음을 찢는 ‘회개’를 통해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날 때 고린도 전서 5:17절은 “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새 피조물로 변화됩니다. 그런 심령을 예레미야 31:12b절은 “ 그 심령은 물댄 동산 같겠고" 라 표현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땅에 구세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회개하고 돌이켜 ‘예수님의 이름’을 영접하면 귀신이 떠나가고 앉은 뱅이가 일어나며 맹인이 보고 눌린 자가 자유하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남의 것 토색질 하며 죄책감에 시달리던 세리 레위가 예수님을 만나 ‘죄사함’ 을 받고 산상수훈을 기록한 예수님의 제자로 변화되었습니다. 남편 다섯을 두고도 목마르던 사마리아 여인이 ‘생수’를 마시고 '와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 외치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변화되었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눅15:18절에 탕자가 아버지 집을 기억하고 돌아왔을때 아버지께 가서 “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군의 하나로 보소서”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그 심령이 얼마나 겸손하고 나긋나긋하고 물댄 동산 같습니까? 이때 아버지가 어떻게 맞이했죠? 버선발로 달려나와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얼마나 놀라운 하나님 아버지 사랑입니까? 


    오늘 세상은 인공지능의 발달로 날마다 새로운 것이 나타납니다. 새로 개항된 인천 제2 공항에는 로봇이 길을 안내하고, 인천에서 강릉까지 KTX 로 2시간 23분만에 도착합니다. 도로에는 ‘자율운행 차’가 운행되며 하늘에는 ‘플라잉 카’ 출시를 앞두고 있습니다. 노는 것도 옛날에는 팽이치고 썰매타고 놀았는데 요즘은 AR 증강현실이나 VR 가상현실에서 놉니다. 기기만 있으면 방안에서 해외 명승지, 익스트림 스포츠 현장, 심해나 우주를 비롯한 상상 속 세계까지 넘나듭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도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가 캐치프레이즈가 되었습니다.

 

    시대는 이렇게 변하는데 우리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할까요? 내 고집이나 전통이나 유전만 주장해야 할까요? 아닙니다. 시대 변화를 읽고 신축성 있게 섬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성도들도 ‘오늘날 젊은이들의 고민은 무엇이며 그들을 살릴 길이 무엇일까?’ 깨어서 성찰해야 합니다. ‘왜 젊은이들이 현실을 외면하고 가상 세계속에서 노는지?’ 함께 아파하며 함께 풀어가야 합니다. 부모 세대는 자녀세대와 함께 영화도 보고 함께 커피숍에서 따끈한 차도 마시며 함께 여행도 같이 하고 같이 추억을 공유하며 밤이 새도록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줄 아는 열린 귀와 아량도 가져야 합니다.


    솔직히 시간이 갈수록 우리 부모 세대는 세대차가 생기죠? 그래서 젊은이들 이세들의 고민과 내면 세계를 잘 모르죠? 그렇기에 더욱 맘을 열고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고민과 문제를 이해 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늘 생각이 오픈 되어서 이세들과 소통하고자 애써야 합니다. 옛날에는 자녀는 무조건 부모 말을 들어야 했죠? 이것은 복음이 아니라 유교전통입니다. 오늘날은 부모도 고정관념을 버리고 자녀들 말을 경청하며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옛날에는 기성세대가 모든 정보를 쥐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어른들에게 배웠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정보화 시대 디지털 시대 모든 정보를 자녀들이 더 많이 더 빨리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기성세대도 겸손히 젊은 세대에게 배우고자 하는 자세로 다가서면 소통이 활짝 열릴 것입니다. 특히 4차 산업혁명이 한창 진행되는 오늘날 젊은 세대와 함께 삶을 나눌 수 있는 ‘유연성’과 ‘신축성’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복된 성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새로운 시대 주역이 누군가 가르쳐 주신 예수님


   안식일에 예수께서 밀밭 사이로 지나가셨습니다. 그때 예수님을 따라 다니며 배고픈 그의 제자들이 길을 열며 이삭을 잘랐습니다. 그러자 종교경찰 바리새인들이 째려보고 있다가 그들의 레이다 망에 걸려들자 레이져 광선을 발하며 예수께 시비를 걸었습니다. “보시오 저들이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이들은 낡은 가죽부대였습니다. 율법주의 시각과 고정관념으로 제자들을 바라보며 정죄한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제자들을 어떻게 변호해 주십니까? 25,26 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이르시되 다윗이 자기와 및 함께한 자들이 먹을 것이 없어 시장할 때에 한 일을 읽지 못하였느냐 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예수님은 구약 성경을 잘 알고 있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윗의 일’을 예화로 들으셨습니다. 다윗이 사울에게 쫒기며 시장할 때 어떤 일이 있었습니까?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대제사장 아바아달에게 먹을 것을 구햇습니다. 그때 아비아달은 율법에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되는’ 진설병을 주었습니다. 율법을 잘아는 다윗도 생사가 갈릴때 그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었습니다. 그래서 목숨을 유지하고 살아나 통일 이스라엘을 완성하고 성전 건축 기초를 놓고 큰일을 하지 않았습니까?


    구약 사건을 예화로 들며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가 무엇입니까? 27,28절을 보십시오. “ 또 이르시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 ” 핵심은 안식일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람을 위해서 안식일을 제정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주객이 전도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낡은 전통과 유전을 앞세워 그들이 유대 사회의 주인공이며 모두 자기들 생각과 행동을 따르라고 고집한 것입니다. 전형적인 낡은 가죽 부대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은 ‘안식일을 주신 목적도 사람을 위해 제정한 것이다’ 깨우쳐 주십니다. 그러면서 사명을 감당하느라 배고파 밀이삭 잘라 먹는 젊은 청년 제자들이야 말로 장차 1세기 성령사역과 세계선교 역사 창조의 주역이 될 것이라고 변호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안식일에도 주인은 예수님이시라는 진리를 선포하셨습니다.


    21세기 새시대 2018년 새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새부대가 될수 있을까요? 왕성한 ‘발효력’과 ‘신축성’이 있는 예수님과 복음을 어떻게 이 시대에 전파해 나갈 수 있겠습니까? 젊은이들과 학생들을 보는 우리 시각을 예수님 시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이시대 젊은이들 학생들이 어떤 존재들입니까? 그들이야 말로 장차 이나라와 민족 세계를 이끌어 갈 역사 창조의 주역들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시대 젊은이들이 신랑되신 예수님과 관계를 잘 맺도록 도와 주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우리부터 새 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새 포도주 되신 예수님과 복음을 담을 수 없는 낡은 가죽 부대는 찢어 버리고 우리 심령부터 신축성 있는 새부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심령이 새로워져 사랑과 애정을 갖고 젊은 세대를 이해하는 폭을 넓혀야 할 것입니다. 이제까지 우리는 이세들에게 말씀을 선포하며 ‘배우는 자’로만 보았습니다. 이제 이세들을 바라보는 시각 부터 예수님 시각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젊은 이들의 소리를 귀담아 듣고 교회 모든 일에 주역들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나가야 겠습니다. ‘젊은이들’ ‘학생들’이 우리 교회 ‘새 시대 새 주역’ 입니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배우는 ‘복음의 소비자’ 만이 아닙니다. 이들은 ‘복음의 동역자’입니다. 이들이 장차 세계 구속사에 위대한 일을 감당할 ‘주인공’들입니다. 우리 교회가 새부대가 되어 젊은 세대를 일으켜 세우며, 만민 구속 역사의 주인공들로 우뚝 세우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가 되길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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