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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는 싹’ ( 스가랴 3장 1~10절 )
12/17/201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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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7일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시는 싹’


말씀: 스가랴 3장 1~10절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대로 430 년간 애굽의 종살이 하던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 주셧습니다. 40년 광야생활 후 마침내 가나안 땅에 입성합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하나님을 잊고 가나안이 섬기던 바알과 앗세라 우상을 섬기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갔습니다.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보여주신바 대로 70년후 이스라엘을 다시 포로에서 귀환 시키셨습니다. 이 귀환은 죄로 인해 심판받은 택한 백성들을 하나님이 다시 일으켜 세우시는 회복을 의미합니다. 이 회복이 누구를 통해 어떻게 이루어 집니까?


     성경은 장차 오실 ‘메시야’를 어떤 분으로 소개하고 있죠? 8-10절을 보십시오. 첫째 싹, 둘째 종, 셋째 돌입니다. ‘싹’은 누구를 예표합니까? 이사야 11:1절에 ‘이새의 줄기에서 한 싹이 나며’ 무너진 다윗의 집에서 한 싹이 돋아날 싹입니다. 그런데 그는 인류를 구원하실 그리스도라는 사실입니다. ‘종’은 이사야 53:12절에 ‘그가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할’ 고난의 종 예수입니다. 돌은 마태복음 21:42절에 ‘건축자들이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나니 이것은 주로 말미암아 된 것이요’ 성전의 기초석이거나 모퉁이 돌입니다. '싹' 이나 ‘종’ '돌'은 다 메시아를 가리키는 다른 말입니다. 메시야가 이땅에 ‘싹’으로 ‘종’으로 ‘돌’로 오실 때 우리에게 어떤 새 은총을 베푸십니까?

 

      스가랴가 본 네 번째 환상에 누가 등장하죠? 1절에 여호수아입니다. 그는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가 아니라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제 1차 귀환자 중 유대 최고 정치 지도자는 총독 수룹바벨이고, 영적 지도자는 대 제사장 여호수아 였습니다. 여호수아의 줄인 이름은 ‘예수아’ 였는데, 여호수아, 예수아, 이 말이 ‘예수’와 같은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마1:21)’ 란 뜻입니다. 대제사장은 혈통으로 이어집니다. 여호수아 아버지는 여호사닥이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스라야 였는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멸망 당할 당시 대제사장이었습니다. 여호수아는 바벨론에서 출생해서 포로 귀환시대에 대제사장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스룹바벨과 여호수아가 힘을 합해 고래스의 명대로 예루살렘 성전 재건에 착수 합니다. 따라서 그는 8절 말씀처럼 참 성전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입니다. 


    1절 “ 대제사장 여호수아는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사탄은 그의 오른쪽에 서서 그를 대적하는 것을 여호와께서 내게 보이시니라.” 이 장면은 ‘재판 장면’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재판장이신 하나님 앞에 서 있습니다. ‘여호와의 천사 앞에 섰고” 여기서 천사는 그냥 천사가 아닙니다. ‘여호와의 사자’ 성자 하나님 이십니다. 재판의 권세를 가진 성자 하나님 앞에 여호수아가 서 있습니다. 사탄이 대제사장 여호수아를 대적합니다. 본래 ‘사탄’의 역할이 무엇이죠? 계시록 12: 10b 절에 “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자가 쫒겨났고” 사탄은 ‘참소자’‘고소자’ 입니다. 사탄의 주 무기는 ‘참소하는 것’ ‘고소하는 것’입니다. 사탄은 ‘근거 없는 이야기’ 나 때로 ‘근거’를 갖고 고소합니다. 사탄이 내세우는 근거는 바로 사람들의 죄와 허물입니다. 아담 타락 후 죄, 허물, 문제없는 사람이 없죠? 그래서 때로 사탄의 고소가 정당해 보입니다. 그러나 사탄이 고소한 내용이 아닌 재판장이신 하나님을 바라 봐야 합니다. 


    사탄이 왜 여호수아를 고소했습니까? 3절에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천사 앞에 서 있는지라”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었기 때문에 고소했습니다. 대제사장은 더러운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더럽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 세탁 안해서 더럽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물을 뒤집어 쓴 상태’를 말합니다. 대제사장에게는 율법에 따라 입도록 정해진 ‘에봇’ 이란 옷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하나님이 정한 예복을 입지 않고 오물을 뒤집어쓴 옷을 입고 있었다고 사탄이 참소했습니다.

 

    레위기 10:1절에 보면, 나답과 아비후가 다른 불로 분향 했다가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경우가 있었죠? 대제사장이 1년 한 번 지성소로 들어갈 때는 의복에 방울을 달고 발에 줄을 매고 들어갔습니다. 오랫동안 방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대제사장이 죽은 것이라고 생각하고 줄을 당겨 끌어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대제사장의 일거수 일투족은 엄하게 다스렸습니다. 그런 시대 ‘대제사장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었다’ 도저히 있을 수도 없고 납득도 되지 않는 일입니다. 율법 대로 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뿐만 아니라 대제사장 직분상 이 문제는 여호수아 개인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은 백성들을 대표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인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은 곧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 하나님 앞에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모습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습니다.


   사탄이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여호수아를 고소하는 이유는 율법이지만 동기는 저주하고 멸망시키고, 무너지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들은 사탄의 고소 앞에 무력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탄의 목적은 언제나 택자들이 거룩한 일을 포기하게 하는 것입니다. 당시 백성들은 사탄의 고소가 옳다 생각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포로에서 귀환했지만 제사장들마저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게 살고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가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는 것은 그 민족의 영적상태를 그대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백성들은 사탄의 고소에 대해 할 말이 없었습니다. 분명 여호수아가 잘못한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고소의 동기입니다.


    만약 고소의 동기가 교회문을 닫게 하는 것 이라면 그것은 사탄의 고소입니다. 반대로 한국 교회를 회복시키기 위해, 새로운 시작을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과 방법대로 노력하려는 지적과 고소는 필요합니다. 고소의 근거도 중요하지만 동기가 더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는 더러운 옷을 입고 서 있었기 때문에 율법에 의해 당연히 죽어야 했습니다. 사탄이 고소하게 된 동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호수아를 무너 뜨리려 했습니다. 고소당한 내용이 거짓이라면 대항을 하겠죠? 허나 잘못이 사실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운 시작을 하지 못하고 그 모습 그대로 머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판장이신 하나님은 어떤 뜻밖의 판결을 내리십니까? 2절 “여호와께서 사탄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예루살렘을 택하신 여호와께서 너를 책망하노라 이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놀라운 판결입니다. 대제사장 여호수아에게 무죄를 선고하고, 여호수아를 고소한 사탄을 꾸짖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모르실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그렇다면 사탄이 고소한 내용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사탄의 고소는 정당했습니다. 사탄은 율법을 근거로 고소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엇 때문에 사탄을 책망하셨을까요?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꾸짖지 않고 사탄을 꾸짖은 이유입니다. ‘여호수아에게 아무 문제가 없다. 그가 의롭다. 또 사탄의 주장에 근거가 없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로마서 8:33-34 절입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하나님은 죄와 허물이 없기 때문에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두 은혜로 선택받은 것입니다. 죄와 허물이 하나님의 택하심을 무너뜨릴 수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과 그의 후손들, 모세와 그의 백성들을 택하신 하나님은 그들에게 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아니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죄와 허물이 하나님의 선택을 취소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사탄이 결코 넘어뜨릴 수 없습니다. 사탄은 그럴 자격이 없습니다. 고소의 동기가 회복이 아니라 넘어지게 하기 위한 것이고, 구원이 아니라 심판을 위해 고소하는 사탄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을 간섭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죄와 허물보다 앞선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총입니다. 우리가 의롭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선발과 선택은 다릅니다. 하나님은 은혜로 우리를 택하신 후에 죄와 허물을 다루십니다. 죄와 허물을 내버려 두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탄의 고소로 인해 무너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 앞에 서야합니다. 하나님은 택하신 이들을 구원하십니다.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가 아니냐?’ 이 표현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상황을 잘 웅변하고 있습니다. ‘요한 웨슬레’가 여섯 살 때 목사관에 불이 나 천장이 무너지는 사고를 겪었습니다. 그런데 이웃 주민의 도움으로 간신히 목숨을 구했습니다. 그 이후 그는 ‘나는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토막’이라고 간증 했습니다. 이 간증이 주는 메시지는 주인의 은혜로 구출되었다는 것입니다. 불속에 떨어진 나무가 타도록 내버려 두지 않고 건져 냈다는 것은 무엇인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불속에서 없어질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징벌하셨습니다. 더러운 옷을 입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심판이 있은 후 이스라엘 백성들이 불에 타서 없어지지 않도록 건져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의 목적이 있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까지 하나님은 절대 포기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심판으로 끝내기 원합니다. 사탄의 역사는 저주입니다. 분열과 다툼으로 상처만 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심판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심판과 더불어 구원을 행하십니다. 새로운 일을 행하십니다.


  하나님은 택자의 그슬림을 어떻게 씻어주십니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해 죄를 지었지만 하나님은 ‘구속의 씨’ 새로운 약속을 주셨습니다. 또 노아시대때 후손들이 완전 타락해 하나님이 물로 심판하셨습니다. 이때도 하나님은 노아 가족을 살려주셨고 그의 가족을 통해 무지개 언약을 새롭게 주셨습니다. 바벨탑을 쌓고 타락하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셔서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한 만민이 복을 받으리라’는 메시야의 씨를 약속해 주셨습니다. 가나안에 정착한 후손들이 또 타락해 죄를 범했고 바벨론에 멸망 당했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포로에서 귀환시키고 새 일을 시작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보면 멸망으로 끝나지 않고 새롭게 시작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백성들의 죄와 허물에 대한 사탄의 고소를 막는 동시에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주십니까?


첫째, 더러운 옷을 벗겨 주십니다.


        스가랴서에는 모두 여덟 개 환상이 나옵니다. 앞 세 개 환상들은 모두 회복과 격려의 메시지였습니다. 슥1:3절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오신다’, 슥1:21절에 ‘주변의 교만한 나라들의 뿔을 꺾으신다’, 슥2:5절에 ‘하나님이 예루살렘의 불성벽이 되어 주시고, 눈동자처럼 보호해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가 죄나 죄책감에 사로잡혀 있으면 약속의 말씀이 주어져도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스가랴와 이스라엘 백성들도 같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포로로 잡혀가 큰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실패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격려하시고 회복시키겠다는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 마음속에는 여전히 의심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바벨론 포로 생활 70년동안 마음 깊은 곳에 우상숭배하다 선민이 포로로 끌려온 죄책감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슥1:12). 또 귀환했지만 사마리아 인의 고소로 무려 16년간 성전 건축이 지연되고 있는데 자기 집만 짓고 있었던데 대한 죄의식도 남아 있었습니다. 이런 이스라엘에 주시는 진정한 회복이 무엇일까요? 성전 건축, 주변 대적들의 무너짐, 이런 외형의 회복은 아직 진정한 회복이 아닙니다.


   사탄은 그슬린 나무를 보고 고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슬린 나무는 버립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에서 꺼낸 그슬린 나무를 깨끗하게 만드셔서 사용하십니다. 하나님은 택자를 절대 버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선택하시면 그슬린 나무라도 새로운 시작을 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포로에서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불에 ‘그슬린 나무’ 였습니다. 우리가 죄 가운데 있었을 때 우리 영혼에는 불에 그슬린 상처가 있습니다. 사탄은 그슬림을 지적하며 참소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슬림을 깨끗이 씻어주시고 하나님의 일에 사용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은 구원한 이들을 정결하게 회복시킵니다. 만약 하나님이 사탄의 참소를 막아주시는 데서 그친다면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치 자녀에게 어떤 문제가 있는데 자기 자녀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방어만 하는 부모와 같습니다.

진정한 회복은 죄와 허물 때문에 그슬린 나무처럼 마음에 자유함이 없는 죄의식과 죄책감으로부터 해방을 받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주님은 어떤 은총을 베푸시고자 하십니까?


     4a 절을 보십시오. “ 그 더러운 옷을 벗기라 ” 그러면 더러운 옷을 벗기라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4b 절에 “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하여 버렸으니” 하나님이 죄의식을 용서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순으로 오신 예수님이 우리를 죄책감에서 풀어 사죄의 은총을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진정한 회복은 택한 백성들의 영혼과 양심의 회복이 하나님 앞에서 이루어질때 입니다.


둘째, 내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리라


        더러운 옷을 벗기신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4c절에 ‘내가 네 죄악을 제거해 버렸으니 네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라” 구약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입니다. 하나님이 여호수아를 어떻게 회복시켜 주십니까?


       단순히 죄를 덮어주시는 해결이 아닙니다. 문제의 근원을 해결해 주셨습니다. ‘죄’를 ‘씻어’ 주셨습니다. 무엇으로요? 히브리서 9:12-14절입니다. “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의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 ”당신의 아들이 흘린 십자가의 보혈 희생으로 양심의 죄책감과 죄의식을 말끔히 씻어 주십니다.

로마서 3:22절에 “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롬3:25-27절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라”

하나님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택하신 이들을 깨끗하게 씻어 주사 ‘아름다운 옷’으로 입히시는 것입니다. 온전하게 구원해서 다시는 사탄이 고소할 이유가 없도록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는 세상이 줄수 없는 오직 하나님만이 베풀 수 있는 값비싼 은혜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계속 흐르는 주제가 ‘옷’ 입니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부끄러움을 가리려 했죠? 그때 하나님이 그 옷을 벗기시고 ‘가죽 옷’을 입히셨습니다. 왜 ‘가죽옷’ 입니까? 가죽에는 한 생명이 숨어있습니다. 가죽이 되려면 한 생명이 죽고 희생해야 하죠? 가죽옷이 주는 메시지는 ‘한 생명의 희생으로 죄를 덮지 않으면 내 앞에 설수 없다’는 계시입니다. 요한계시록 마지막에 새 하늘과 새 땅의 백성들을 ‘흰옷을 입은 백성들’이라 했습니다. 그들은 보혈의 피로 옷을 씻었습니다. 이것이 계시록 마지막 모습입니다. 창세기 3장 계시와 요한 계시록 마지막 계시가 일치하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려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어떤 인간의 선행이나 의로움도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워질 뿐입니다. 사람들이 만들어낸 것들은 다 아담과 하와가 입으려는 ‘무화과 나무 옷’입니다. 하나님이 덧입혀 주는 ‘가죽 옷’은 하나님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옷’입니다. 사61:10절에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공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석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진정한 의(義)는 나(我) 위에 어린양(羊)이 덮여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진정한 대제사장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본문은 장차 순으로 종으로 돌로 임할 예수님의 희생으로 회복 될 구속 사건을 증거해 주고 있습니다. 장차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어린양의 피로 하루 만에 온 세상의 죄를 씻어버리는 대 속제일이 올 것입니다. 이것이 십자가의 예언입니다. 마지막 날 천국의 안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초림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와 허물로 죽은 양심에서 죄사함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장차 재림하실 예수님은 우리 더러운 옷을 다 벗겨 주시고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실 것입니다. 순으로 종으로 돌로 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 우리 더러운 옷을 벗겨 주시고 아름다운 옷으로 입혀 주신 하나님을 높이 찬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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