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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 요한복음 1:14 )
12/10/2017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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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 10일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말씀: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씀은 ‘말씀 기독론’이며, 요한복음 전체의 주제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 하나님 자신이 성육신(成肉身) 인간이 되셨는데 바로 이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창조하고 만물에 생명을 주고 지혜를 주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기 원하는 사람들’마다 인간 예수님을 보면 된다는 것입니다. 요1:14절 한 절에 ‘말씀’, ‘육신’, ‘영광’, ‘독생자’, ‘은혜’, ‘진리’ 예수님과 관계된 모든 중요한 용어들이 집약되어 나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먼저, 말씀(Word)은 헬라어 "로고스"(Λ?γο?) 입니다. 그런데 로고스는 히브리 사람들에게는 ‘지혜’ 즉 ‘하나님의 아들’로, 이방인들에게는 주(LORD)로 알려졌는데,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는 1절에 태초부터 계셨고, 그는 하나님이시고, 그리고 창조주이십니다.

 

     다음, 육신, 육신 σ?ρξ(싸악스)는 영어로 ‘flesh’ 고깃덩어리 즉 인간의 ‘몸’ 육체를 말합니다. 말씀이 육체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광, 사도 요한은 간증합니다. 14b절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여기 “영광(δ?ξαν)은 glory(영화 찬미 명예 훌륭함)입니다. 사도 요한이 본 예수님의 영광은 인간으로부터 온 영광이 아닙니다. 공부나 노래 잘해서 상받고,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당선 되어 얻는 세상적인 영광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독생자만이 누릴 수 있는 ‘하늘의 영광’입니다. 그래서 요 5: 41절에 "나는 사람에게서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요 7:18절에 예수님은 ‘자기를 보내신 이의 영광을 구한다’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똑바로 예수님을 바라보는 사람들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요 17: 22에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이 말씀에 따르면 주님을 따르는 사람마다 주님이 가졌던 영광에 동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는 이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서 예수님이 누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함께 누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받고 누리는 그 영광에 대해서 옙 2:5,6절은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라고 설명합니다. 예수님 십자가 부활 승천에 연합하여 믿는 우리 영혼이 예수님과 함께 죄와 자아가 죽고, 부활의 새생명으로 함께 살고, 우리 영이 하늘 보좌에 함께 앉아있는 것입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를 보니 독생자의 영광이 있고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것입니다. 요한 1서 1:1절에는 “눈으로 본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바라" 예수가 육신이 되셨다는 것은 사도요한이 목격한 바요 확실하고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왜 사도 요한은 "말씀이 사람이 되었다" 하지 않고 ‘육신이 되었다’ 표현 했을까요? 당시 그노스틱 영지주의 이단 사상 때문이었습니다. 헬라 이원론에 빠진 영지주의자들은 ‘영은 깨끗하고 의로우나 육은 악하다’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거룩하신 하나님이 육으로 올리 없다’ 주장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가 사람됨’을 부정 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영지주의자들의 이단사상에 대항하여 ‘예수가 완전한 인간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람이나 인간 보다 훨씬 더 강하게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육신’이란 표현을 쓴 것입니다. 더나가 요한 1서 4:2-3절에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 그리스도의 영이니라” 목격자로서 분명하게 증언했습니다. “예수께서 육신이 되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이 적 그리스도” 입니다. 이렇게 증거하는 목적은 어디까지나 그리스도는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성육신의 진리는 인간의 지혜로써는 이해할 수 없는 역설(paradox)적 진리입니다. 오직 성령이 임하실 때 깨우쳐 주시는 하늘의 진리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 ‘인카네이션’ 에서 carnal은 ‘육체’ incarnate는 ‘육신을 입었다’ 는 뜻으로 ‘incarnation’ 하면 "성 육신" 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우리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 성 육신의 은혜가 무엇입니까?


첫째,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께서 높은 보좌에 계시면서 인간들에게 그 높은 곳으로 올라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의 영광과 위엄을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 홀로 전능하시고 영존하십니다. 또 거룩하십니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과 구별되고 죄와 구별된 순결하고 의로우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이런 하나님이 높은 보좌를 내 놓으시고 사랑으로 우리들에게 직접 찾아 오셨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말로 이 관계를 "대화적 관계" 라고 말 합니다. 대화적 관계란 어떤 관계입니까?


    태국에 간 어느 선교사가 그곳 스님과 함께 길을 가다가 실수로 개미의 집을 밟았습니다. 이를 본 스님이 많은 생명을 죽였다고 깜짝 놀라며 안타까워 했습니다. 선교사는 대단히 민망하여 말하길 "내가 밟고 싶어서 밟은 것이 아니라 발가락에 눈이 없어서 실수를 한 것이니 미안하오. 어떻게 하면 개미에게 사과를 할 수 있겠소?" 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스님은 다음 같이 답하러 랍니다. "당신이 죽어서 개미가 되어야겠소" 윤회설을 믿는 입장에서는 맞는 이야기입니다. 죽어서 개미가 되어야 개미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할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때 선교사님이 스님의 대답을 듣는 순간 정색 하고 " 그래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라고 예수님을 증거했다 합니다.


     어른들만 모여 있을때 ‘자 밥먹자’ 하면 다 알아듣고 식탁으로 모입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손녀에게 밥을 줄때는 어떻게 말하죠? ‘맘마’ ‘쯪쯔’ 이렇게 말하죠? 우리들이 갓난 아이와 이야기할 때는 갓난 아이들이 쓰는 언어를 써야 말이 통하죠? 이것이 대화적 존재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므로 육신이 되어 인간을 직접 찾아 오셨습니다. 내가 처한 형편, 이 현실 속에서 나를 만나 주시기 위해 나와 같은 모습으로 찾아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대화적인 존재가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육신이란 굉장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이 무력하고 죄많은 나와 대화적 존재가 되시기 위해 육신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 성육신 복음의 핵심입니다.


둘째로 성육신은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죄 많은 세상을 버리지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인간 역사에 찾아 오셔서 인간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우리가 연대를 계산할 때, 예수님의 탄생을 기준으로 기원 전과 기원 후를 쓰지요? 예수님이 세상 역사의 중심이 되셔서 역사의 의미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예수님이 모든 판단 기준, 정의 기준, 진리 기준이 되신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과학, 철학, 법학, 심리학, 예술 모두의 근원은 다 예수님을 중심으로 해서 나온 것입니다. 이태리 로마에 있는 바티칸 베드로 바울 모스크바에 있는 바실리 피터스브르크에 있는 이삭 터키에 있는 쏘피아 등 건물 중 세계적인 건물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해 지은 것들이죠? 헨델의 메시야 할렐루야 합창 바흐 작품 NO 244번 마태 수난곡 등 모든 음악, 렘브란트의 탕자의 귀향, 루벤스 등 모든 미술 등 세계적인 거작의 내용은 모두 예수님에 관한 내용 뿐입니다. 그가 오셨다는 그 사실이 역사의 의미를 그렇게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셋째로 성육신은 하나님이 우리의 문화권에 오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들은 자기들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들이 만든 그 문화의 보자기 속에 들어 가서 삽니다. 그래서 문화권이 다르면 서로 커뮤니케이션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이 히브리 문화권에 오셨기 때문에 아람어 히브리어를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우리나라에 오시면 우리를 위해서 한국말을 쓰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한국 문화권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를 만나기 위해서는 우리말을 사용하시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 문화의 옷을 입으셨다는 중요한 의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보는 성경은 전부가 히브리, 헬라 문화권에서 설명된 내용들로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로 하여금 그 문화 속에서 만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간으로 오신 것을 믿는 믿음이며, 특별히 나를 위하여 사람 되어 오셨음을 믿는 것입니다.


    14절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거하신다"의 에스케노센 ( ?σκ?νωσεν ) 헬라 원어의 뜻은 dwelt ‘천막을 친다’ 는 뜻입니다. 천막이란 영구적인 집이 아니죠? 임시 거처 장소죠? 하나님이 인간 세상에 오시어 임시로 천막을 치시고 그 천막 안에서 우리를 만나 주셨다는 뜻입니다. 이것이 임마누엘의 교리입니다.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 는 것입니다.


    주에는 수요목장 모임후 초대해서 모두 함께 김동열 이미라 집사님 아파트를 심방갔습니다. 청소가 깔끔하게 되어 있고 거실에서 과자랑 귤 초코랫을 나누며 기도제목을 나누었습니다. 예찬이가 지난 시험에서 어려운 수학에서 1등급을 맞았답니다. 이번주 기말고사인데 좋은 성적 얻기르 예승이가 고교 진학을 앞두고 7개교에 서류를 냈는데 청고에 들어가길 원한답니다. 또 미라집사님이 한분이랑 관계성을 맺었는데 성경을 공부할수 있기를 기도하고 있고 동열집사님은 약을 먹고 무좀은 나았는데 간수치가 조금 올라서 건강을 위해 기도한다고 하였습니다. 함께 간절히 기도하고 헤어졌습니다. 지난 한달 동안 사랑하는 교우집을 찾아 차를 한잔 나누며 대화를 나눌때 친밀함을 느낄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언어 속에, 우리 생각 속에 항상 함께 계십니다. 그래서 내가 만나는 모든 일 속에서 역사하고 계심을 믿는 것이 바른 신앙입니다. 넘어지거나 혹 쓸어졌다 해서 육신이 아프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께로 부터 멀어졌다고 생각 하면 안 됩니다. 우리 주님은 사건을 당한 현장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사도 요한의 위대한 점입니다.


     제자로서 3년 반 동안 예수님과 함께 동거동락 동행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먹고 자고 일하면서 가까이서 그 분의 남루한 옷을 입고 계신 것이나 육신적인 친족이나 형제들 고향사람들에게까지 배척을 당하시는 등 인간적인 기대에 어긋난 모습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것에 가리워서 예수님의 본체를 잃어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정확히 수님에게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았습니다. 우리도 성경을 보면 예수께서 병을 고치시고 물위를 걸으시고 바람을 잠잠케 하시는 내용들을 보며 하나님의 영광을 만나고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런데 만약 성경을 보며 사랑하는 제자에게 배반당하시는 모습을 보니 창피하고, 구유에서 출산해야 할 정도로 가난하면서 요셉은 약혼 했느냐? 고 따진다면 그 영광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말씀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고, 특히 나를 위하여 내 문화권 속에 내 삶의 현장 속에 오셨습니다. 이를 믿고, 그이기에 영광이 나타날 것을 믿는 것이 예수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는 기적도 있었고, 말씀도 있었고, 때로 준엄한 모습으로, 때로 인자한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요한은 그 모든 것 속에서 ‘독생자의 영광을 본 것’입니다. 우리도 성경 어느 말씀을 읽든 독생자의 영광을 보아야 하겠습니다.


    14c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선물입니다. 은혜의 반대는 공로입니다. 우리는 내 공로나 내 의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은혜로 구원받았습니다.


   개그우먼 조혜련씨는 이혼후 방송근무 마치고 집에 와서 아이들 둘 한번 안아주고 끝 바로 일본어를 공부했습니다. 한주 반은 한국에서 방송하고 후반은 일본에 건너가 방송했습니다. 하루는 딸애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엄마 와' '여기 일본이야' '그래도와'  '열이 40도인데 엄마가 와서 딱아줘''방송중이야' '엄마는 방송이 중요해 내가 중요해' 수화기를 내렸습니다. 그후 딸아이가 맘문을 닫았습니다. 그때 개그우먼 이성미가 전도하며 찬송가를 불러주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수 없도다 내가 믿고 또 의지함은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 늘 보호 해 주실 것을 나는 확실히 아네" 그때 '이쓸데 없는자' 라는 가사가 자기 와 똑 같은걸 느꼈습니다. 그런데 '내 모든 형편 아시는 주님'이란 가사가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아니 자기 속 이야기는 엄마에게도 말하지 않았는데..' 내모든 형편을 다 아시는 존재가 있단말인가? ' 이렇게 해서 3년전에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같이 교회에 가자''흥 엄마 혼자 행복해?'''엄마 혼자 구원받은것 같애?' 대화가 단절되었습니다. 그후 말로 이야기 하기 보다 자녀들에게  변화된 삶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주일날 교회에 가는데 딸애가 신발을 신으며 함께 교회 가겠다고 따라 나서더라는 겁니다. 그후 성경을 읽으라고 권했습니다. 성경을 모르면 자기가 상상한 주님을 믿게돼..

그러자 그날 에스더서에서 예레미야에서까지 읽더랍니다. 깨진 가정 깨진 자녀와의 관계 모든 형편 다아시시는 주님이 은혜로 구원해주시고 관계도 은혜로 다 회복시켜 주더라고 기독교 CTS 방송에서 간증하는 걸

들었습니다.


   범죄한 아담의 후손으로서 우리 또한 연약하고 부족하기만한 죄인들입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었습니다. 이런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통하여 은혜를 부어 주십니다. 값없는 선물!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는 우리는 하루도 숨도 쉴수 없고 살수 조차 없습니다. 따라서 은혜는 마냥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반면 진리는 한결 같고 변함이 없습니다. 진리는 거짓의 반대입니다. 참, 사실, 진짜가 아닌 것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또한 진리는 모든 무지를 제하여 버리고 밝은 지혜로 안내합니다. 어리석음과 무지 속에는 진리가 깃들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진리라고 말씀하십니까? 요 14: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은 태초부터 창조주 하나님과 함께 계시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말씀이시며, 삼라만상의 질서를 주장해오신 하나님의 지혜이십니다. 예수님이 진리이십니다. 또 요한복음 8: 32절에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하십니다. 그러니 진리를 알면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하게 합니다. 그런데 그 진리는 예수죠? 따라서 "예수를 알라, 그러면 예수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그리스도가 하나님 임을 알면 비로소 자유함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만일 예수님께 거짓이 있고, 시간과 역사에 따라 변덕이 있다면, 예수님은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실 수 없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은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진리를 온 몸으로 체현(體現)하신 진리 그 자체이십니다.

 

    사도 요한은 은혜의 본체이시며 진리 자체이신 예수님으로부터 ‘은혜와 진리가 충만’ 한 것을 보았습니다. 은혜를 찾는 자도 예수를 만나면 만족하고, 진리를 찾는 자도 예수를 만나면 충만해 집니다. 18절에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여기 ‘누구를 품에 안는다는 것’은 극진한 사랑을 의미합니다(민 11: 12; 신 13: 6 참조). 그런데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그 가슴에 안고 계십니다. 하나밖에 없는 독생자이신 예수님을 최고의 친밀감과 최고의 사랑으로 품에 껴안으신 것입니다.


    출 33: 20절, 신 4: 12절을 보면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을 직접 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합니다. 구약 최고 선지자 모세도 하나님의 음성만 들었을 뿐 하나님님을 직접 보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기자는 담대하게 선언합니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 예수님을 본 사람들마다 이제 완전한 하나님을 본다는 것입니다. 숨겨졌던 하나님의 적나라한 모습 전체를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하나님을 보지 못했지만 오직 예수님은 하나님을 직접 보았습니다(요 6: 46). 예수님은 그 근본이 하나님과 본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려면 예수님의 사랑을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알려면 예수님의 용서를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알려면 예수님의 지혜를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려면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곧 예수님이시고 예수님이 곧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위에 하나님의 영광이 있습니다. 하늘의 신령한 은혜와 진리가 그 위에 항상 충만합니다. 날마다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고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붙들고 사는 복된 성도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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