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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 이사야 43장 21절 )
09/04/2016 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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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9월 4일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씀: 이사야 43장 21절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어디에 있습니까? 웨스트 민스트 소요리 문답에는 ‘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이뇨?’ 묻고 ‘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종일 토록 그를 즐거워 하는 것이니이다’ 답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사43:21절에는 “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말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찬양에 대하여 생각할 때 가장 많이 증거 되는 말씀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 우리가 무엇을 발견합니까? 이스라엘을 지으신 목적이 이스라엘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 자신을 위해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최상의 목적이고 최고의 일이다’ 라고 생각게 됩니다. 이때는 주로 교회에서 찬양 예배 드릴때나 찬양 사역자들을 양성할 때 찬양의 중요성을 말하며 찬양을 많이 해야 한다고 증거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 ‘성가대’나 ‘찬양대’가 되라는 말씀일까요? 하나님은 보좌에 앉으셔서 찬송가 테이프를 틀어 놓으면 한 시간 내내 찬송만 나오듯이 계속 택한 백성들의 ‘찬송’만 들으려고 사람을 지으신 것일까요?


    본문이 ‘찬양’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왜 하셨는지 문맥을 주의 깊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중요합니다. 또한 성경이 찬양 할 것에 대하여 명령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본문이 말하는 것이 우리가 드리는 찬양 즉 노래 자체를 하는 것이 지으신 목적이냐 하는 것입니다.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라’ 애서 ‘하려 함니라’는 ‘선포하다’는 뜻입니다. 직역하면 그들이 나의 찬송을 계속해서 선포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또 ‘이야기하다’ 라는 뜻도 있습니다. 아버지들이 자신의 자녀들에게 계속 이야기해 주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의 내용은 하나님의 찬송에 대하여 입니다.


   여기서 찬송은 노래하는 것 차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 칭찬할 만한 행위 ’ 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행하신 일들 즉 칭찬받아 마땅한 훌륭하고 아름다운 행위에 대하여 칭송하게 하려 지으신 것입니다.


     문맥을 살펴 봅시다. 이사야 13:14절에 “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압제 속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16,17절에 “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 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이렇게 행하신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칭찬 받아 마땅한 분이십니다. 그런 그분의 행위를 계속해서 이야기하며 선포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은 하나님의 선하신 행위 그의 칭찬 받아 마땅한 구속 행위를 칭송하며 널리이야기 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분이 택한 백성에게 행하신 놀라운 구원에 관한 하나님을 생각하고 있는가? 그 하나님의 놀라운 일을 이야기하며 말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이를 신약에서는 어떻게 말씀하죠? 엡1:12절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는 이사야 43:21절이 말하는 내용과 일치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속하신 목적이 ‘그의 영광의 찬송이 되게 하는 것’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찬송하는 자들로 부름을 받은 사람 입니다.


    잘못하면 우리가 찬양하며 노래하는 것에 집중하다 더 중요한 것을 노치고 잊을때가 있습니다. 성경은 노래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이 담고 있는 내용이 무엇이냐에 더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찬양은 원어로 ‘테일라’로 ‘노래하다’ 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데 입으로 ‘노래’로 하면 찬송이고, 펜으로 써서 ‘글’ 로 하면 시편이고 손발로 하면 ‘봉사’고 ‘삶’으로 하면 예배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존재하시죠? 이를 증명하려면 누군가 나서서 그분을 인정할 때입니다. ‘당신 하나님 맞습니다. ’ 그때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이 입증되죠? 예수님이 주 되심이 어떻게 입증 되었습니까? 베드로가 ‘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시인하고 고백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로봇을 만들어 자신의 존재를 인정하도록 할 수 있으십니다. 보턴만 누르면 ‘ 하나님은 살아 계십니다 ’ ‘하나님은 존재 하십니다 ’ 앵무새 처럼 반복 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이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로보트가 아니라 사람으로 하여금 ‘당신 하나님 맞습니다. ’ 라고 인정하며 고백하고 찬송하게 하려고 사람을 지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려면 인간에게 ‘자유로운 선택 능력’이 주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인간을 지으실 때 ‘자유 의지’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주면 인간은 반드시 자유 의지를 사용해서 하나님을 배반할 것도 아셧습니다. 그러나 인격체 이신 하나님은 로봇 으로부터 인정 받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자유 의지가 있는 사람으로부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 받기 원하셧습니다.


    그래서 이사야 1-39장 까지 내용이 무엇입니까? 소나 나귀도 주인을 알건마는 사람은 주인을 알지 못하고 우상숭배로 떨어져 타락했다는 내용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과의 관계가 파괴되고 인간은 바닥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런 죄인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으로 등장하십니다. 그러나 이사야 40-43장은 타락한 인간을 본래 창조 목적대로 회복시키시는 하나님의 구속과 사랑을 다루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 이십니다. 또 타락한 인간을 구원하시는 구속주이십니다. 이 하나님께서 창조 목적대로 인간을 회복하신 후 주신 말씀이 이사야 43:21절 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 인간을 지으신 것이죠?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죄로 인간이 하나님을 떠났지만 하나님은 십자가 사건으로 구속을 준비하셨습니다. ‘십자가에 흘리신 하나님 아들의 피’가 바로 나같은 죄인을 위해 흘린 ‘보배피’임을 마음으로 받고 영접하면 ‘의롭다’ 칭하십니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하사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이제 하나님께 돌아와 택한 백성이 해야 할 바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인간 창조 본래 목적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가 중요하고 죄용서가 소중한 복음입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은 나중에 천국 갑니다.


   그런데 그간 우리가 놓치고 있는 중요한 사실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님 믿고 교회에 나오는 목적이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즉 ‘구원받고 천국 가기 위해서 ’ 라는 프레임 ‘고정틀’에 갇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 믿는 순간 바로 천국으로 데려 가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왜 천국 가기까지 성도로 하여금 신앙 생활을 하게 하는 것일까요? 예수님 믿고 의롭다 함 받고 끝 이라면 기독교의 구원은 뭔가 알맹이가 빠진 것입니다. 성화가 나타나지 않는 구원! 영화로 연결되지 않는 구원! 은 값싼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의롭다 함 칭의에 머물고 끝이 아닙니다. 성도가 구원 받은 후에는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죠?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이 땅에서 나를 지으시고 나를 구속해 주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며 찬송하게 하려 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죄사함 받고 구원 얻는 것은 하나님께 돌아오는 과정입니다. 천국 가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회복 되었을때 당연히 주어지는 결과 입니다.


   죄 용서의 더 중요한 의미는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회복입니다. 복음은 죄사함을 통해서 하나님께 다시 돌아온 택자들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말씀에 순종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고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 보배피로 구속을 받은 성도가 이땅에서 해야 할 일, 사명이 무엇일까요?


첫째,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회복 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신 것은 나를 위해서가 아니죠? 나를 지으신 하나님! 나를 구속하신 하나님을 찬송하게 하러 나를 지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찬송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죠? 에베소서 1:12절에 ‘우리가’는 ‘그리스도 안에서 전부터 바라던’ 자들입니다. ‘전부터 바라던’은 먼저 소망하던 또는 신뢰하던 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찬송은 하나님께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에 의해 자녀가 된 자들만 선포할 수 있으며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배나 찬송은 아무나 드릴 수 없습니다. 이사야 1:12절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하나님께서 예배하러 나오는 자들을 책망하십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러 나왔는데 왜 책망을 받고 있습니까?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왔다’고 합니다. ‘보이러 왔다’는 수동형입니다. 이 단어에는 목적이나 의미가 없이 나타남을 가리킵니다. 그냥 얼굴 한번 비친 것 뿐입니다. 마치 지나가다 얼굴 한번 비치고 그냥 가는 것과 같습니다. 왜 왔는지 무엇 하러 왔는지 전혀 모르고 그냥 얼굴만 비치고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보이러 오는 행위를 누가 요구했냐고 따지십니다. 도대체 누가 너희더러 이렇게 하라고 한 것이며 이렇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느냐 라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것이며 요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셨냐고 물으십니다. 이는 자신이 하셨다는 사실을 모르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보이러 오는 의미 없는 행위를 누가 요구했냐는 질문입니다. 이는 바른 예배가 아니며 잘못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마당만 밟고 가는 것은 잘못입니다. 예배에 흔적만 남기는 것입니다. 마당만 밟고 간다는 뜻은 마당을 짓밟는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이 마당을 자신의 마당이라 하십니다. 그래서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즉 짓밟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며 하나님께 수치를 당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이사야 당시 이스라엘의 제사는 하나님께 제물과 예물만 드리며 마음에 경외함은 없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를 자신의 마당을 짓밟는 것이라 책망하십니다. 이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그 대상이 살아계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의 존전 앞에 서는 것이 예배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예배 가운데 임재 하시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살아 계심과 여기 계심을 인식하지 않고 또 그같은 믿음을 가지지 않고 예배하는 행위는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코람데오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예배를 짓밟으며 더럽히는 행위입니다.


    참된 예배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에 대한 확신 가운데 또 그분의 임재에 대한 확신 가운데 드려집니다. 이같이 찬송 또한 하나님에 대한 확신과 믿음 가운데 드려지는 것입니다. 우리 찬송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둘째,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한 성도는 이 땅에서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데 씌임 받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과연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 ‘성령님은 보혜사이시다’ 외치고 고백하고 인정함으로써 하나님을 높이고 찬송하게 하려고 우리를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이유요 목적 입니다


    이사야 43:21절은 우리가 하나님을 찬송할 목적으로 지으심 받았다는 것을 선포합니다. 더나가 ‘그 목적 대로 살고 있는가?’ 를 묻고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을 찬송하기 위해서 내가 즐겨 이야기하고 내가 기뻐하고 말할 수 밖에 없는 나의 찬송이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은 그 내용에 진실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찬송할 내용을 갖추어야 합니다. 출애급때 이스라엘은 홍해를 건너게 하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스룹바벨 시대 이스라엘은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시키신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이처럼 찬송의 내용을 갖춘다는 것은 하나님을 경험하며 그분과 만나는 만남이 있어야 비로서 가능합니다. ‘나의 찬송을 부르려 한다’는 말은 지속적이며 계속적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을 향한 찬송이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매 순간 하나님을 경험하는 사람은 매일 새 찬송을 부르게 마련입니다. 어제 찬송이 아닌 오늘 찬송을 부르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오늘 내가 경험하고 만나며 교통하는 하나님을 통해 나는 또 다른 찬송의 내용을 가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날마다 우리의 삶에서 새 찬송의 내용을 주십니다. 그 뿐 아니라 그 찬송을 부르도록 역사하십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일 어떤 찬송을 부를까 걱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일은 하나님께서 내게 어떤 찬송을 부르시게 하실 것인가 기대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자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찬송하도록 지으심을 입었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시고 그 목적에 따라 날마다 하나님을 찬송하는 일에 힘을 다하십시오.


   이를 위해 성도는 교회 사회 직장 가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새벽 첫시간 하나님을 만나는 일에 집중하십시오.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고 성삼위 하나님과 교제하는 것입니다. 하루 삶에서 돈 깨끗하게 사용하고 말 정직하게 사용합니다. 이웃 사랑을 실천합니다. 작은 한가지라도 남 돕는 일에 동참합니다. 세상은 남을 밟아야 내가 밟히지 않는 다는 법칙대로 살아갑니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사람들 하는대로 따라가지 않는 자입니다. 성도는 우리 주 예수님을 본 받아 살아 가는 것입니다. 성도는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 십자가에 피흘리신 예수님 처럼 ‘희생’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냄새 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드리 헵번은 8살 때 부모님이 이혼했습니다. 그때부터 엄마랑 네델란드에 가서 같이 살았는데 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 나치에 점령당합니다. 전쟁으로 인한 죽음의 공포 굶주림으로 고통스런 어린 시절을 보냅니다. 발레를 하고 싶었는데 돈이 없어 발레학교를 못 다닙니다. 그래서 돈 벌어 발레 학교에 가려고 아르바이트로 모델을 하려다 24세에 발탁되어 ‘로마의 휴일’ 이란 영화로 아카데미 여주연상을 받고 세계적인 스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녀를 더 유명하게 만든게 무엇입니까? 그녀는 말년에 불쌍하고 소외된 어린아이를 돌보다 세상을 떠난 것으로 더 유명해 졌습니다. 1988년 유니세프 친선대사로 임명되면서 그녀는 무관심속에 고통받던 에디오피아 수단 소말리아 방글라데시 베트남 빈민 촌을 다니며 아이들을 먹이며 교육 시키며 돌봤습니다. 이로 그녀는 ‘아프리카의 천사’ 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아들에게 남긴 유언 한토막입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너는 알게 될 것이다. 네가 두 개의 손을 갖고 있음을.. 한손은 너 자신을 돕기 위해 그리고 나머지 한손은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우리에게 손을 둘 주신 것은 하나는 나를 위해서 하나는 남을 위해서 살라고 주셨다고 말을 한 것입니다. 이처럼 그녀는 막 10:45절을 요절로 ‘섬기러 오신 예수님’의 삶을 실천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성도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보여 주고 도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 와 성도가 이땅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성도는 이처럼 날마다 매 순간마다 그분을 경험 하는 것입니다. 아침 새벽에 무릎꿇고 기도하며 나에게 들려주시는 세미한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입니다. 성경을 읽으며 하나님의 선한 뜻을 발견합니다. 하루 일상 생활을 하면서 받은 한 말씀을 따라 주님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때 성령의 인도하심을 체험합니다. 나의 삶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 이것이었구나’ 깯닫게 됩니다. ‘그래 하나님은 정말 살아 계셔!’ ‘우리 하나님은 정말 사랑이셔!’ 이것이 나에게 인격적으로 찾아오신 주님의 임재이고 살아 있는 신앙 체험이고 간증인 것입니다. 우리 삶에 순간 순간 하나님을 향한 힘찬 새 찬송이 넘쳐 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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