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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아 일어나라( 누가복음 7:11-17 )
02/19/2018 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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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2월 18일


                                                   청년아 일어나라


말씀: 누가복음 7:11-17


         집을 지을때 제일 중요한게 기초죠? 그러면 ‘인생의 기초’를 누구에게 놓아야 할까요? “ 마7:24절 ”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 반석되신 예수 그리스도 이십니다. 인생의 기초를 놓는 시기는 언제일까요? 청년의 때입니다. 따라서 ‘청년의 때’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고 그분 말씀대로 사느냐에 인생의 승패가 달린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들에게 어떤 음성을 들려 주십니까?

 

1. 울지 말라(11-13)


    오늘 말씀은 ‘그 후에’ 로 시작합니다. ‘그 후’ 란 예수님이 가버나움에서 백부장의 종을 고치신 후 를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셧습니다. 예수님 일행이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때 어떤 행렬을 만났습니까?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왔습니다. 죽은 청년은 외아들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과부였습니다. 독자를 잃은 ‘과부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땅이 꺼지고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과 아픔이 덮쳐 왔을 것입니다. 외아들의 죽음과 함께 모든 삶도 무너져 내린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외동 아들을 잃은 과부를 어떻게 위로 하셨습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 예수께서 위로 하셨습니다. “울지 말라 ” 예수님은 여인을 불쌍히 여기셧습니다. 그리고 여인의 슬픔에 깊이 공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이 흘리는 눈물을 닦아 주시는 ‘위로의 주님’ 이십니다. 외아들을 잃은 과부처럼 우리도 큰 슬픔에 빠질때가 있죠? 병이나 사고로 가까운이가 생명을 잃었을때, 마음이 아프고 쓰리고 아리죠? 이럴때 어떤 사람의 말도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누가 나의 위로가 되실 수 있을까요? 고린도 후서 1:3b-5 " 그는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오 자비의 아버지시오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나의 모든 것을 아시는 예수님, 그리고 나의 슬픔과 아픔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예수님이 우리의 진정한 위로자가 되십니다.


     예수님은 과부의 죽은 외아들 청년을 어떻게 살리셧습니까?

2. 청년아 일어나라(14-17)


    예수께서 과부를 위로하신 후 무엇을 하셨죠? “가까이 오사 그 관에 손을 대시니”  청년의 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리고 어떤 명령을 하셨나요? 14b 절 함께 읽겠습니다. “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 예수님께서 명하셧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그러자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까? 15절 “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 죽었던 청년이 일어났습니다. 말도 했다는 것은 청년이 확실이 살아났다는 명백한 증거였습니다. 그때 독자의 어머니가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꿈인가 생시인가 볼을 꼬집어 보며 기뻐했을 것입니다.  이를 목격한 모든 사람이 “큰 선지자가 우리 가운데 일어나셨다” 또 “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셨다 ” 하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예수께 대한 이 소문이 온 유대와 사방에 두루 퍼졌습니다.    그러면 관속에 누워 꼼짝 못하고 죽은 청년을 향하여 “ 청년아 일어나라 ” 명하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첫째, 말씀을 들으면 살려주시는 구주 이십니다.


       지금 관속에 누워 있는 자가 누구죠? ‘ 청년 ’ 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청년이 누어 있는 관 위에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습니다. “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


      청년은 한 가정의 미래요, 한 나라의 미래입니다.  민태원은 ‘청춘예찬’ 이란 글에서 “ 청춘(靑春)!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이다. 청춘! 너의 두손을 가슴에 대고, 물방아 같은 심장의 고동(鼓動)을 들어 보라. 청춘의 피는 끓는다. 끓는 피에 뛰노는 심장은 거선(巨船)의 기관(汽罐)과 같이 힘 있다. 인류의 역사를 꾸며 내려온 동력은 바로 이것이다. 라고 노래했습니다.

 

     이런 피끓는 청년이 꼼짝 달싹도 못하고 관속에 누워 있다니! 예수님은 피끓는 청년이 관속에 누워 있는 모습을 보시고 몹씨 안타까우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청년에게 명하셧습니다. “ 청년아 일어나라 ” 사람들은 죽은 청년을 향해 일어나라 명하시는 것은 비이성적이다 판단하고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영적인 세계가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이성의 관에 갇혀 있는 것입니다. 구약에 보면, 왕상 17:8-24절에 한창 가뭄이 들었을 때 엘리야는 사르밧 마을에 사는 한 과부의 집죽은 아이를 위하여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이 죽은 아이를 살려 주셧습니다. 왕하 4:17-37절에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가 수넴에 사는 한 부부의 집에 가서 기도하자 하나님이 그 가정에 아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다 죽습니다. 그때 엘리사가 하나님께 간구하니 하나님이 죽은 아이를 살려 주셨습니다. 신약에 예수님은 본체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청년이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그냥 지나치실 수 없으셨습니다. 단순히 ‘아프니까 청춘이다.’ 하는 값싼 위로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영혼을 살릴 권세있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청년아 일어나라 ” 그러자 미래의 주역 청년이 곧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이 말씀으로 죽은 청년을 살려 내셨습니다. 젊은이도 주저 앉아 있으면 애늙은이입니다. 그러나 노인도 예수님 말씀을 듣고 일어나면 청년정신으로 살아갈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일어날 수 있습니까? 예수님 말씀을 들을때 누구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 앉고 싶을때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왜 말씀을 들으면 죽은자도 살려주십니까?

둘째, 예수님은 생명과 부활의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나인성으로 향하는 예수님과 제자들! ‘생명의 행렬’이었습니다. ‘나인 성에서 죽은 청년을 메고 무덤으로 가는 행렬은 ‘죽음의 행렬’ 이었습니다. 생명의 행렬이 죽음의 행렬과 맟 부딛쳤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관속에 누운 시체를 향하여 명하십니다. “ 일어나라 ” 그러자 죽었던 자가 벌떡 일어나고 말도 하였습니다. 관속에 죽은 청년을 일으키신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골로새서 1:15-17절 “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오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이시니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 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안에 함께 섰느니라” 예수님은 만물을 지으신 창조주 이십니다. 또 요한복음 1:4절 “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 예수님은 모든 ‘생명’을 ‘창조’하신 생명의 ‘근원’ 이십니다. 요한복음 5:24절 “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말을 듣고 또 나보내신 이를 믿는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면 어떤 인생도 일어나 빛을 발할수 있습니다.


셋째, 예수님은 관에 누운자를 살리사 의미있는 인생을 살게 하시는 구주이십니다.


        지금 관속에 누워있는 이는 청년입니다. 이처럼 ‘관’은 청년도 가두고 꼼짝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날 청년들을 꼼짝 못하도록 누워 있게 만드는 관이 무엇일까요? ‘절망의 관’ ‘운명의 관’ ‘패배의 관’ ‘의욕 상실의 관’입니다. 1세기 과부의 죽은 아들에게 “ 청년아 일어나라” 명하신 예수님은 오늘 21세기 한국 청년들에게 “ 청년아 일어나라 ” 동일하게 명하십니다. 그 말씀이 오늘 우리에게는 어떤 음성일까요? ‘절망에서 일어나라!’ ‘운명에서 일어나라!’‘패배의식에서 일어나라!’ ‘의욕 상실에서 일어나라!’ 명하십니다.

아날로그 시대때 세계는 기술, 정보, 금융, 의사결정의 민주화로 거의 모든 분야 의 장벽들이 무너지고 ‘세계화’ 바람이 불었습니다. IMF 때 쓰러진 기업들 수없이 많았죠? 세계화는 한마디로 ‘승자 독식’ 패러다임입니다. 이로 세계 인구 1%가 세계 사람들이 창출한 부의 90%를 독차지 하면서 전세계적으로 ‘양극화’ 몸살을 앓았습니다. 디지털 시대 때부터 ‘명태’ ‘청년실업’ ‘비 정규직’ 이란 말이 회자되기 시작했습니다. 통계청 발표에 의하면 2018년 실업자 2명 중 1명이 청년이고, 청년 실업자 수가 37만 천명으로 나옵니다. 그런데 오늘 제4차 산업시대 때 ‘인공지능’과 ‘로봇’이 그나마 있던 일자리 마져 위협하고 있습니다. IMF 때는 40대, 50대가 명퇴로 직장을 잃고 방황하여 ‘고개 숙인 기성세대’라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청년 실업의 고통으로 ‘고개 숙인 청년’이란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인생의 짐’을 견디지 못하여 20대 사망순위 1위는 교통사고, 30대 사망순위 1위는 암인데, 2,30대 사망순위 2위가 자살로 나오고 있습니다. 청년들은 ‘해봐도 안된다’ 는 깊은 ‘절망’과 ‘의욕상실’에 빠져 지냅니다.   예수님은 이런 한국 청년들에게 말씀하십니다. “ 청년아 일어나라 ” ‘일어나라’는 예수님 말씀은 ‘의욕상실’에서 ‘일어나라’ 절망과 운명 그리고 ‘해도 안된다’ 는 ‘패배 의식’에서 일어나라는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평창 동계 올림픽에서 윤성빈 선수가 스켈레톤 종목에서 우승했습니다. 썰매 종목에서 금메달은 아시아에서도 첫 번째 기록입니다. 썰매 종목은 신체 구조상 하체가 잘 발달된 서양 사람들이 유리하다는 것이 통설이었습니다. 그런데 윤성빈 선수는 그런 운명적 사고나 패배의식에서 일어났습니다. 출발 순발력을 끌어올리기 위해 몸무게를 15kg 불리고, 하체 강화를 위해 '스쿼트' 무게를 240㎏까지 늘리자 그의 허벅지가 '말벅지'로 변했습니다. 마침내 최고 성적으로 피니시 라인을 통과 했습니다. 그가 우뚝 서기까지 배후에 한국체육 대학 강광배 교수가 있었습니다. 썰매종목 불모지에서 그는 오스트리아 인스브르크 유학 당시 마리오 구겐베르거 교수의 권유로 대한민국 1호로 스켈레톤을 타며, 이땅에 봅슬레이, 스켈레톤 연맹을 만들며, 선구자로서 썰매종목을 개척하고, 선수를 선발하고, 환경을 조성하여, 그 어깨 위에 후배 선수들을 세우고 비빌 언덕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청년이 예수님 말씀을 붙잡고 절망과 운명, 패배와 의욕상실에서 ‘일어나면’ 되는 것입니다.


    또 ‘정욕의 관’ ‘시기 질투의 관’‘미움의 관‘ 도 있죠? 예수님은 오늘 청년들에게 ‘정욕’ ‘시기 질투’’ ‘미움에서 일어나라!’ 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기력의 관’ ‘체념의 관’ ‘사망권세의 관’ 도 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오늘 한국 청년들에게 ‘무기력’ ‘체념’ ‘사망권세에서 일어나라!’ 명 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청년에게 명하셨습니다. “ 청년아 일어나라 ” 이 말씀은 단순히 누워 있는 관에서 일어나라! 혹은 앉아 있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라! 그런 물리적인 의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청년이 관속에 누워 있으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런데 예수님 말씀을 듣고 죽었던 자가 일어나 살아났죠? 따라서 기독 청년들은 현재 삶에 만족하고 안주할 것이 아니라 일어나 모험을 걸고 도전하여 하나님과 이웃에게 기쁨을 주고, 빛을 발하며, 좋은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 청년아 일어나라 ” 이 말씀은 “청년아 일어나 의미 있는 삶을 살아라"하시는 말씀 입니다. 예수님은 어찌하든지 ‘청년을 살려내서 의미있고 보람된 삶을 살기 원하시는’ 사랑의 구주이십니다.

 

     어느 나라나 복음이 청년들에게 들어가고 청년들이 일어나 부활의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기 시작하면 그 나라가 살아나고, 그 나라가 세상에 빛을 발하는 나라로 복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유대 땅에 복음을 허락하셨을때 다메섹에서 변화를 받은 청년 바울이 복음을 들고 소아시아와 마게도니아 유럽과 로마 땅끝까지 편만하게 복음을 전하는 ‘이방의 빛’이 되었습니다. 주님이 영국 땅에 복음을 허락하셨을때 청년 리빙스턴은 아프리카에, 27세 청년 토마스 는 1866.8.1 일 제너럴 셔먼 호를 타고 조선땅 대동강까지 건너와 복음을 전하다 박춘권의 칼에 찔립니다. 그 순간 성경책 한권을 자기를 찌른 박춘권에게 전해주며 순교당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 박춘권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아 오늘날 장로님에 해당하는 영수까지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은 영국을 태양이 지지 않는 나라 유니엔 잭이 전세계에 나붙기는 나라가 되게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미국 땅에 복음을 허락하셨을때 청년 아펜젤러 언더우드 등 수많은 기독청년들이 조선땅에 들어와 복음의 여명기를 밝혔습니다. 그렇게 청년들이 권세있는 말씀을 듣고 관에서 일어나 복음을 들고 땅끝까지 나갔을때 그나라를 제사장 나라로 귀히 쓰셨고 국력도 왕성케 복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130년전 이땅에 복음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청년들이 들어야 할 음성이 무엇입니까? “청년아 일어나라 ” 우리가 복음을 들고 관속에서 일어나 사명의 땅에 가서 생명을 살리고 그들이 역사창조의 주역이 되도록 비빌 언덕이 되는 것입니다. 그를 또 내 어깨 위에 세워 예수의 제자로 키우고자 맘 먹는 것입니다.  충북대를 나온 청년 박한나 자매가 중국 청도땅에 나가 해양대생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성령께서 인도하시자 또 비행기를 타고 베트남 하노이에 가서 복음 전파 사역을 섬기고 있습니다. 또 충북대를 다니던 청년 조한나 자매가 말씀을 듣고 운명의 관에서 일어났습니다. 복음을 듣고 중국땅에 나아갔습니다. 청도대 생들에게 예수님을 전하며  복음으로 살려냈습니다. 예수님 음성을 듣고 살아난 청도대생들이 북경대로 유학을 갔습니다. 자녀들 밥을 해먹이면서 매주 청도사방역에서 북경까지 880-920km 열차로 8-10시간 타고 가서 현지 목자를 일대일 성경공부를 해주고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그 가정이 신학을 마치고 목사 안수를 받고 북경에서 말씀을 전하는 담임 목사가 되었습니다. 세상에서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지만 개척자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사도바울도 로마서 10:15절에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되리요 기록된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증거했습니다.    


결론


   예수님은 관속에 누워 있는 청년을 살리신 ‘생명과 부활의 구주’요, 특별히 ‘청년들을 사랑하사 생명을 살려내시는 구주’이십니다. 이 예수님이 관속에 누워 꼼짝 못하는 청년들을 향하여 ‘일어나라’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청주 선교교회 청년들을 향해서도 명하십니다. “ 청년아 일어나라 ” 청주 선교교회 청년들이 현재 모습에 자족하거나 안주하길 원치 않으십니다. 오늘 우리 가정과 교회와 나라와 세계의 미래를 짊어지고 일어나길 기뻐하십니다. 무엇보다 한국 청년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일어나 복음의 ‘불모지’ 땅끝까지 나가서 예수님을 전하며 세계 만방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높이며 빛을 발하는 의미있는 인생이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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