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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XX족의 태양 김대중선생 (3편)
06/26/2020 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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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정치꾼-사기꾼 시절

 1959 6, 36세가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 지구에서 국회의원에 출마 했다가 낙선했다.  바로 다른 횡령사건이 발각된다. 선거기간 투개표 입회원이었던 문수룡이라는 사람이 돌연 급사하자, 민주당에서는 문수룡을 순직으로 처우하고, 중앙 간부가 조의금 30만원을 모아 김대중을 통해 유족에게 건네 주도록 했다. 그런데 김대중이 이중 12만원만 유족에게 건넸을 나머지 18만원을 착복한 것이었다. 사실을 당시 민주당원 김재동, 백응기등 네명이 김대중의 파렴치한 횡령행위를 비난하고 민주당에서 탈당하여 버렸다.

김대중의 조의금 착복사실이 널리 당내에 퍼지자, 당내는 물론이고 선거구 전체의 비난이 집중됐다. 그래서 궁지에 몰린 김대중은 반대로 탈당한 김재동, 백응기등 네명을 명예훼손으로 고발했다. 고발당한 네명은 김대중을 횡령과 무고 (허위신고) 대항, 고소하는 사태로 까지 발전했지만 사건은 유야무야로 끝났다.

1960, 37세가 김대중은 서자로 국회의원에 출마하는 것이 불리함을 알고 4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의부 김운식과 그의 본처 김순례에게 호적상 이혼을 강요한 다음 그의 생모 장여인을 본처로 입적시켜 자신을 김운식의 차남으로 조작해 강원도 인제군 북면 원통리로 분리 전적했다.

1960 7 29, 4.19 혁명으로 실시된 국회의원 선거에서 김대중은 강원도 인제군에서 민주당의원으로 출마했다. 7명의 후보가 난립한 가운데 4.19 혁명으로 쓰러진 자유당의 이름을 내걸고 선전한 전형산씨가 김대중을 누르고 당선했다. 김대중은 상대방 후보를 모략하기 위해 여러가지 기지를 발휘했다.

자신의 선거참모를 자파 당원으로 하여금 구타하게 , 상대당원이 테러했다고 역선전 하기도 했고, 자신의 선거운동원에게 상대방의 완장을 두르게 하고 고무신을 배급하여 유권자의 반감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고, 상대방 당원을 가장하여 유권자들에게 회식이 있다고 초청하는 허위선전을 상대방 후보에 대한 반감과 불신감을 갖게 했으며, 김대중의 사인을 받아 오는 자에게는 돈을 주게 하여 자신의 인기를 조작하기도 했다.

이렇게 했는데도 낙선하자 김대중은 400명의 데모대를 조직, 군청 개표소에 난입하여 투표함 22개중 15개를 강탈한 전씨의 사퇴를 강요하는 연좌데모를 벌였다. 민주당 정권이 전씨를 공민권 제한 대상자로 만들어 의원자격을 박탈하자 김대중은 1961 5월의 보궐선거에서 일방적으로 당선되었다.

민주당 국회의원이 김대중은 1961 7월부터 민주당 선전부장이 됐다. 때에도 김대중은 다른 횡령사건을 저질렀다. 선전부장으로서 학원공작을 구실로 조달한 선거자금 37백만원 7 70만원을 횡령한 혐의로 구속되어 검찰에 송치되었다.

1962 10, 39세가 김대중은 이희호씨와 중매로 결혼했다. (전처 차씨) 김대중은 국회의원 시절에 이씨를 자신의 비서관으로 등록, 해외 여행에 동반하기도 했다.       

9) 반정부 활동

1971 49세가 김대중은 대통령 후보 유세도중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 오던 중에 당했던 교통사고를 박대통령측이 저지른 암살음모라고 뒤집어 씌웠다. 김대중은 집안에 폭발물을 설치해 폭발시켜놓고 공화당에서 자신을 암살하려 했다고 주장했던 적도 있다. 7 국회의원 당시에는 8 국회의원 공천을 준다고 속여 박종태로 부터 5백만원, 김세종으로 부터 3850만원, 이원형으로 부터 1백만원 4450만원을 사취했던 기록도 있다. 후에도 국회의원이란 직위를 악용하여 호남제분, 동아건설, 대한농산, 삼양수산 대표들로 부터 거액의 정치자금을 받아 사실도 밝혀졌다.

김대중은 대통령 선거에서 박정희에 패하자 그는 신병치료차 일본으로 건너갔다. 1971, 도꾜 플라자 호텔에서  김병식 부주석으로 부터 20 달러를 받았다는 기록도 있다. 1972 유신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국회가 해산되었다. 이에 김대중은 일본과 미국을 왕래하며 한국에 대한 미국의 경제원조와 군사원조의 중단, 망명정부 수립, 김일성 정권과의 접촉시도 반국가적행위를 감행했다.

1973 4월에는 미국 하버드대 코헨교수에게 한국의 박정권을 타도하기 위해서 미국이 군사원조를 중단하고 주한 미군을 철수시키도록 미의회 지도자들에게 압력을 넣어 달라고 호소했다.또한 미국에서 북한을 방문한 친북분자들을 만나 반국가 단체인 한민통을 조직했다.  시기에 그는 자민당 출신이면서도 좌파의원인 우쓰노미야 의원등 일본 국회의원들의 지원을 받는 한편 반국가단체로 규정된 한민통 조직하여 의장으로 앉는 일본을 무대로 반정부 운동을 벌였다.

1973 88, 그는 도꾜 팔래스 호텔에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납치되어 129시간만에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에 대해 박정권은 국내 야당 지지자들의 강한 반발과 주권침해라는 일본의 비난에 직면했지만 미국의 주선으로 일본정부와 막후접촉을 벌여 주일 한국대사관 1 서기관 김동운을 해임하고 김대중의 해외체류중 언행에 대해 책임을 묻지 않기로 하고, 김종필 총리의 방일 사과 등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로서 사건은 86 만에 정치적으로 매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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