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할머님
08/16/2015 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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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할머님


오늘은 문득 외할머님 생각이 난다어제 나의 바로 손위 넷째 누님과 오랜만에 통화하면서 외할머님와 함께 하였던 아름다운 추억들을 더듬어서 그런가 보다.


외할머님은 전형적인 양가규수 (良家閨秀)로서 몸가짐이나 행실 그리고 기품이 당시 어린 국민학교 (지금의 초등학교) 학생이었던 나의 눈으로 보아도 가히 범상치 않은 분이셨다항상 옷매무새나 머리가 한점 흐트러짐이 없고 매우 깨끗하셨다아직도 나의 기억에 새벽에 홀로 일어나셔서 조그만 거울을 앞에 높고 참빗으로 머리를 아주 가지런히 빗으신 다음 조그만 유리병에 동백기름을 찍어서 머리에 윤이 나도록 정갈스럽게 바르시고 () 비녀를 꼽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철부지였던 나와 남동생은 한창 신체적으로 쑥쑥 커나가고 있던 때라 아무 죄없으신 외할머님을 졸라 용돈을 타내곤 하였다외할머님께서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이고, 조마니 (‘주머니 사투리) 불난다, 불나!”하시면서 수십년 (아마 시집 오실 가져오신 것인지도 모르겠다.) 금실 (金絲) 수가 놓인 비단 조마니에서 돈을 내어서 둘에게 용돈을 주시곤 하셨다둘이는 좋아라 하고 그길로 가게로 달려가 이것저것 군것질을 하다가 들어오기 일쑤였다.


어느 가을날에 우리집에 정말로 커다란 그러나 아직 익지 않은 홍시감을 가지고 어떤 감장사가 외할머님께 왔었다특히 먹성 좋은 손자들인 나와 동생이 것을 아주 먹고 싶어 하는 것을 보시고는 자리에서 감장사가 가지고온 모든 감을 주라고 하시며 조마니에서 돈을 내시며 사시는 것이었다원래 외할머님은 부잣집 딸로 크셔서 그런지 손이 매우 크셨다그저 사시면 통크게 한꺼번에 많이 사시는 것이었다그리고 나서 많은 감들을 홍시로 만들기 위해 뒤주에 있는 속에 모두 묻어 놓으셨는데, 나와 동생은 감들이 익기도 전에 하나씩 하나씩 모두 먹어버린 기억이 난다외할머님께서도 이러한 우리들의 고약함을 아셨지만 배가 고픈 손자들을 절대 나무라지는 않으셨다.


저녁이 되어 잠이 들려하거나 오후 3-4시경 무료해지면 외할머님의 품에 머리를 대고 졸라대면서 옛날이야기를 많이 부탁드렸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외할머님께서 주셨던 모든 재미있었던 이야기들을 기록해 놓았거나 녹음해 놓았으면 좋았겠었다는 생각을 지금도 본다외할머님께서는 때로는 판소리로 때로는 창으로 목소리 구성지게 노래도 하시고 해학적인 표현도 풍부하셔서 나로서는 가끔 그러한 예술적 기질이 어머님에게 전해져 우리 형제들에도 조금은 유전되지 않았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어머님의 오빠들 (나로해서는 외숙님들) 모두 일제시대에 많은 교육을 받으셔서 의사라든가 사업가, 경찰관 등으로 일을 하셨는데, 여자는 배움이 필요없다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귀여운 외동딸인 나의 어머님께서 공부하실 있도록 외할머님께서 노력해 주셨다 한다학비는 곳간에 있는 쌀가마니들을 처분하여 충당하였고아주 옛날 이야기 이지만 나도 어머님 생전에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있다외할머님께서는 교육의 중요성을 익히 알고 계셨고, 여자도 남자처럼 같이 사회에서 대우받고 살아야 한다는 확고한 신념이 있으셨던 분이었다.


말년에 여러가지 이유로 거처가 마땅치 못하여 여러 곳을 옮기며 사셨는데, 내가 어렸을 적에 몇년간 우리 집에서 사위 (나의 아버님) 외동딸 (나의 어머님) 그리고 철없던 손자들과 사셨던 때가 그래도 조금은 행복하셨겠었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외할머님께서 어디론가 다른 친척집으로 가시고 (나는 어려서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어느날 나는 외할머님의 부음 (訃音) 갑자기 듣게 되었는데, 어린 마음이었지만 외할머님과 함께하였던 즐거웠던 나날들을 생각하면서 홀로 한없이 슬픈 마음을 가누기 힘들었다 수많은 세월이 흐르고 대학생 때이던가 나는 고향 해남에 있는 외할머님의 산소에 형제들과 함께 성묘갈 기회가 있었는데 불효손 ()으로서  외할머님의 한없고 따뜻한 사랑과 생 ()의 마지막날들에 외할머님께서 홀로 느끼셨을 견디기 힘든 고독감 (孤獨感)’을 혼자 생각하며 내 머리속에 만감 (萬感)이 교차하였다.                      

     

언제나 다시금 한송이의 국화꽃에 술 한잔이라도 부으며 외할머님의 산소에 성묘할 수 있는 날이 오게 될지 아득하기만 하다


2011 10 25


솔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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