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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창지대 과연, 필요악인가?
10/06/2019 07:00
조회  646   |  추천   18   |  스크랩   0
IP 76.xx.xx.231

* 저자는,
제3부 '종족주의의 아성, 위안부'라는 장에 무려 100페이지가 넘는 지면을 할애했다.
그만큼 위안부 문제는,

한일문제에서 가장 핫 한 이슈이며 여전히 뜨거운 감자이기 때문이리라.

{여담 한자락.

꽤 오래전 일이다.
여자 경찰서장이( 도봉경찰서?) 부임해온 지역의 공창지대를 싸그리 없앤 공로로

대통령 (김영삼?) 표창까지 받았는데 그 후로 그 지역이 정화가 된게 아니라,

오히려 성범죄는 증가하고 매매춘은 독버섯 처럼 음성적으로 퍼져나갔다는 기사를 읽은적이 있다.
과연,
공창지대는 필요악일까?}

* 저자는 첫장에서,

1991년 일제때의 정신대 존재를 밝힌 김학순 할머니가 등장 함으로써

일본에 대한 적대감정이 불길처럼 고조되었음을  회고했다.

( 잠깐, 여기서 정신대와 위안부를 구분해야함.

정신대 :노동력을 충당하기 위해 공장등의 산업지대로 간 여인들.

위안부 : 말 그대로 매춘을 하는 창기를 말함.)

그때부터 '위안부'라는 말이 공식적인 행정용어가 되었다고.
일본군이 위안소를 둔 것은 1937년부터 1945년 까지의 일이라 한다
그때까진 위안부라는 명칭이 없었는데

1870 년 일본이 시행한 공창제를 토대로 하여 생겨난 것이라는게 정설이다.

 


*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진실에는,
첫째, 장병들의 성욕을 해소하고
둘째, 성병을 통제하고
셋째, 군사기밀을 막기위해

일본군은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난해에

병사 150명당 위안부 1명의 ( 하루 5명정도로 제한을 두었다한다.) 비율로

일본군이 주둔한 곳곳에 위안소를 설치 하였다.
다시 말하지만 위안소가 하루아침에 생겨난건 아니고
민간의 공창제가 군사적으로 동원되고 편성된 것이라고 봐야한다
위안소에는 여러형태가 있었다.
군이 직접 설치하고 운영한것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민간업소를 군 전용의 위안소로 지정하고 군의 세밀한 통제하에 놓이도록 하였다.
운영수칙은,

부대장이 발급한 허가증이 있어야했고
이용시간과 길이는 계급에 따라 달랐다.
병사들은 낮 시간대에.
하사관과 장교는 저녁시간이나 밤 시간대였다.

위안소 안에서 음주나 방가는 금지 되었으며 위안부에 대한 난폭한 행동은 단속의 대상이었다.



1) 함북나남의 덕천루 라는 요리옥( 주인은 일본인 창기는 조선인)
2) 박일석이라는 조선인이 샹하이 에 카페를 차린곳
이런식으로 위안소로 선정되고 지정되었다.

* 민간의 공창제에 비해 군 위안부제는 고수입 이었지만 고위험군 이었다.
(그녀들은 고향의 가족들에게 돈를 부치기도한 기록이 있다 ) 
특히,
일선에 배치된 위안부는 남태평양 버마 전선에서는 적기의 공습에 그대로 노출되었으며

후퇴하는 소속부대로 부터 버려지기도 했으며

일본군과 함께 죽기를 강요 당하기도 했다.
그 참상은 전쟁 그 자체의 참혹함 이었다한다.


* 공창지대는,

사실 15세기때부터 있어왔음을 자자는 참고문헌을 통해 밝혔다.
15세기때의 사람 박취문의, "부북일기" 라든가

1435년 군 위안부에 대한 설치를 제도화 한 사람이 바로

세종 이었음을 "세종실록" 을 통해 밝혔다.

당시엔,

천한 신분의 여인들에 대한 성 폭력은 양반들에겐 정당화되었던 사회였다

그후로도,
1951년 6,25 전쟁중의 한국군 위안부들애 대한 중언이다.


=사단에서 내려보낸 위안대가 도척하면 24인용 야전 천막에 수용되어

간이천막이를 치고 대기하고 있었고 ( 위안부 여인들)
병사들은 천막 앞에서 줄을서서 순서를 기다렸으며

티켓을 내고는 위안(?)을 받았습니다 =

* 군의 사기양양을 위해 돈을 썼으며

위안부를 전쟁수행을 위한 보급품으로 인식했다는 얘기다.

1960년대에 이르러,
전국의 모든 도시에 사창가가 형성 되었으며

그때 보건소 등에서 실태조사를 한 바에 의하면

약 4만명의 성매매 민간위안부 가 있었다한다.
별별 기구한 사연도 먾지만,

가장 큰 이유는 생활고로 인한 자발적 인 종사자 였다고 한다
군부대 천막안의 여인이나
집창촌의 여인이나 노동(?)의 수익에 큰 차이는 없었는데

미국군 (유엔군) 이 들어오면서 미군이 들어온 곳에는 기지촌이 발달되었고

그쪽애서 성매매를 히는 여인들의 수입이 민간위안부에 비해

수입이 월등 나았고 그 업에 종사 기간은 약 2년정도 였다고 한다.

( 거의가 동거를 위해 그 직업을 그만두었고 많은이가 국제결혼을 했다고한다.) 


* 내가 이렇게 구체적인 얘길 하는 이유는, 
정신나간 좌빠리 놈들이 1991년 위안부 문제가 제기되자

미군위안부 문제도 더불어 제기하였기 때문이다.
미군들이 일부 철수하고 그들이 떠난자리가 페허가 되다시피 히면서

그 업에 종사했던 여인들을 박정희 정부에서 성병을 핑계로 집단 감금하고

인권을 유린 했다고 하는것이다.

그들의 주장에 우리는 여기에서 정치적 접근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보자
사회운동가들은 미국위안부 문제가 국가의 폭력 이었다고 비판하며
박정희와 전두환 두 군사독재정권에서 챡임져야 한다며 국가의 배상을 요구하고 있다.


* 여기서 우리는
그래, 미군위안부가 정부의 책임이라면
민간위안부는 더더욱 정부의 책임이 아니냐고 반문할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번더  생각해보자 .
일본군 위안부
한국군 위안부
미국군 위안부
유독 왜 일본군 위안부 에 더 없이 분노하는가?


 그것은,
반일 종족주의 의 집단정서가 작용하기 때문이며,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밑바닥에는,
본에 대한 종족주의적 적대감정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라고 자자는 판단한다.

이래서 해방후,

'우리안의 위안부' 에 관한 고찰로 문제의식을 일깨울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음 시간엔,

"해방후 40년간 위안부 문제는 없었다" 를 함께 애기해 보고자 함. ^*^. 


군 위안부 한국군 일본군 미국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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