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ncyMoore
수필가:김혜자(nancymoore)
Washington 블로거

Blog Open 04.15.2016

전체     54023
오늘방문     249
오늘댓글     11
오늘 스크랩     0
친구     21 명
  달력
 
그 남자
11/04/2017 18:05
조회  1688   |  추천   25   |  스크랩   0
IP 173.xx.xx.88

김혜자


   손가락으로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새벽잠에서 깼다. 조심스레 창문을 열어 보니 반가운 비가 내리고 있다. 며칠 동안 찌는 듯한 더위가 한풀 꺽이더니 시원한 바람과 함께 새벽 비가 내린다. 더위에 시든 잔디가 연둣빛 기지개를 펴며 생기를 되찾고 있다. 인공적으로 공급되는 물보다 하늘에서 내리는 자연 비가 더 좋은가 보다. 파릇하게 돋는 생기발랄한 모습을 보니 비를 꽤 기다렸던 모양이다. 사람이나 식물이나 꿈이 현실로 이루어지면 에너지가 넘쳐난다. 





   눈을 감고 빗소리를 리듬 삼아 먼 옛날로 돌아가 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비를 좋아했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하시던 말씀이 생각났다. 내가 세 살쯤 되던 어느 날, 창가에 앉아 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 슬퍼 울었다고 한다. 왜 우느냐는 물음에 비 맞고 전깃줄에 앉아있는 참새가 추워 보여 운다고 했단다. 그 갸륵한 마음은 나와 함께 자라 고교 시절 비에 대한 낭만을 만들었다.





  지금도 비가 오는 날이면 문득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끊어진 흑백필름처럼 희미한 기억이지만, 그 사람은 지금도 나에게 씁쓸한 미소를 남기게 한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학생 성가대 상급생이었던 한 남학생을 난 무조건 좋아했다. 그는 노래를 잘했고, 사랑의 묘약 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을 즐겨 부르던 학생이었다. 아름다운 테너 목소리를 가진 그가 좋아서 파란 경기 교복을 입은 학생만 보아도 가슴은 뛰었다. 비가 몹시 내리던 토요일 오후 성가 연습을 끝내고 버스를 탔다.




 공교롭게도 그 남학생이 같이 타고 있었다. 눈으로 인사를 하고 보니 비를 맞아 모자를 깊게 눌러 쓴 그가 참 춥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를 내릴 차례가 된 나는 그에게 용기를 내어 우산을 주고 내렸다. 나는 비를 맞고 집으로 돌아가도 되지만 그는 비를 맞으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우산을 손에 쥐여준 것이다. 버스가 떠나는 순간 내 앞에 우산이 떨어졌다. 그가 내 우산을 창문 밖으로 던져준 것이다.







  그의 우산이 되어 함께 걷고 싶었던 내 마음이 구겨질 대로 구겨졌다. 눈물겨웠던 풋사랑이다. 그 해 겨울 나는 용돈을 모아 가죽 장갑을 샀다. 그의 시린 손을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지만 봄이 될 때까지 주인을 찾지 못한 가죽장갑은 책가방에서 잠을 자야 했다. 그날 이후 그는 내 눈에 띄지 않았다. 가끔 라디오나 레코드에서 그가 부르던 곡이 흘러나오면 난 곧잘 눈물을 흘리며 그를 생각했다. 졸업 후 서울공대에 찾아갔지만 휴학계를 낸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오랜 세월 지난 후 뜻밖에 한 통의 편지가 하와이로 날아왔다. 쿠웨이트에서 보낸 그의 편지였다. 옛날 옛적 비 오던 어느 날, 가슴을 설레게 해준 한 소녀와 우산 이야기가 쓰여 있었다. 어린 동생을 보살펴야 했던 가난한 고학생의 이야기였다. 글 마디마다 지난날의 괴로움과 슬픔이 있었고 그리움과 안타까움이 있었다. 촉루(燭淚)처럼 녹아 내리는 그의 아픈 자국을 읽으며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이 밀려왔다. 20 년이 지나 때늦게 도착한 두근거리는 고백의 글 속에서 뿜어 나오는 향기가 오랫동안 나의 마음을 슬프게 만들었다. 그것이 처음이며 마지막 받은 그의 편지였다. 


  그리고도 세월이 많이 지난 후 국방부 일원으로 한국에 나가게 되었다. 공사 입찰 계약 하는 것이 내 업무였다. 서류를 정리하던 중, 세계에서도 잘 알려진 유명한 한국 건설회사 부사장으로 그의 이름과 사진을 발견했다. 가슴이 뛰었다. 그날 온종일 망설이다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걸었다. 세월이 지났는데도 마음속에 새겨진 그의 목소리는 금방 알아들을 수 있게 정다웠다.





  신라 호텔 로비에서 만난 그는 소꿉친구처럼 반갑고 즐거웠다. 잃어버린 시간을 단 몇 분 만에 뛰어넘을 수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우리는 함께 공감할 수 있는 시간대 동심으로 돌아갔다. 얼마 동안 우리의 만남은 계속되었다. 오늘이라는 현실에 충실하며 빛 바랜 추억은 덮기로 하였다. 첫 사랑은 어디 까지나 지난 사랑인 걸 알게 된 것이다. 그와 마지막 만나던 날, 그는 나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내 여고 2학년 때 찍은 사진이었다. 이젠 주인 찾아갈 때가 된 것 같다며 책상 속에서 그와 함께 지낸 내 사진을 건네주었다. 받는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어차피 인생은 만남과 헤어짐의 연속이다. 첫 사랑은 환상으로, 가슴속에서 아플 때가 가장 아름다웠다.





비 오는 날이면 문득 헤어진 사람이 어떻게 지낼까 생각해 본다. 아직도 그는 ‘사랑의 묘약’ 아리아를 좋아 부르고 있는지? 나는 그의 우산이 되고 싶었고, 그는 내가 정박한 선박의 앵커(Anchor)가 되고 싶다고 했었다. 소박했던 그 남자, 누구에게나 그리움이 있고 안타까움이 있다. 처음이었기에 가장 애틋했고 아무것도 모르고 사랑했던 남자. 많은 사람들이 첫 사랑을 평생 못 잊는다고 한다. 나는 첫 사랑을 잊지 못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했던 시간과 그 어리고 순수한 마음이 소중했던 만큼 그를 잊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옛날의 서투른 감정의 아픔과 심장의 통증도 지금은 모두가 그리움으로 되돌아오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참 무서운 것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난날은 미화되고 환상은 꽃 구름을 타기 오기 때문이다.


 



산안개 자욱한 아침.

비를 맞은 잔디가 파릇파릇 생기를 찾는다.

비는 생명의 뿌리를 내려주는 힘을 준다.

이른 아침 비에 씻겨 내려간 잔디 위에

숨결 같은 바람소리와 함께 ‘사랑의 아리아’ 가 들리는 것 같다.

이런 날은 가슴으로 마시는 한 잔의 커피 향을 타고

고향의 거리를 걷고 싶다.


 





그남자, 첫사랑, 사랑의 묘약, 김혜자
"아름다운 삶"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이 블로그의 인기글

그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