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실험
09/08/2015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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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n River, Photo : Greenbird  Sep.7.2015


















마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현실이 된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이를 관찰자 효과 (observer effect)라 부른다


 
 
 
 
손가락으로 유리를 문지르기만 하면 음악도 듣고,
영화도 보고, 물건도 사고, 알고 싶은 것은 뭐든지 가르쳐 주는
신기한 물건이 있다. 바로 스마트폰이다. 100년 전으로 돌아가 옛날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면 까무러치게 놀랄 것이다.
그런데 스마트폰을 만드는 데 반드시 필요한 학문이 있다. 바로 양자물리학이다.

양자물리학은 만물의 최소단위인 원자 이하의 물질을 다루는 학문으로
양자물리학을 모르면 반도체를 만들 수 없고 반도체가 없는 현대문명은 상상할 수도 없다.

컴퓨터, 인터넷, 비행기 등 오늘날 우리가 누리고 있는 문명의 혜택은
양자물리학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를 다루는 양자물리학의 정확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양자물리학으로 계산한 이론적 예측 값과 실험에서 얻어낸 결과값을 비교하면
그 오차는 0.00000000001 이하로
사실상 제로에 가깝다.

이제 그 수소원자 하나를 야구장 크기로 확대해보자.
야구장은 텅 비어 있고 운동장에 야구공 하나가 떨어져 있다.

그 야구공이 바로 미립자다.
만물의 가장 기본이 되는 미립자는 그야말로 상상 할 수 없을 만큼 작고도 작다.

과학자들은 물질의 최소단위인 미립자가 어떻게 움직이는지 알아보기 위해 한가지 실험을 했다.

"이중 슬릿 실험"으로 불리는 이 실험은 과학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실험으로 불린다.

실험 방법은 다음과 같다.
어두운 방에 스크린을 하나 준비하고 스크린 앞에 틈이 하나 있는 널빤지를 준비한다.
그리고 널빤지 앞에서 빛 알갱이 즉, 광자라는 미립자를 하나씩 쏜다.
널빤지에 틈이 하나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서 스크린에는 서서히 하나의 선이 보이게 된다.
여기까지는 당연해 보인다.
이제 널빤지에 틈을 두 개 만들고 똑같은 방식으로 미립자를 쏜다.
틈이 두 개이니 당연히 스크린에는 두 개의 선이 보일 것 같지만
실제로 스크린에는 얼룩말 무늬처럼 여러 개의 선이 나타났다.

두 개의 틈을 통과 했는데 여러 개의 선이 보인다는 것은
미립자가 물이 물결을 치며 흘러가듯
, 파동의 성질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해가 어렵다면 실험실 바닥이 물로 채워져 있고
미립자를 쏘는 장치 대신 손바닥으로 물을 쳤다고 가정을 해보자

물은 파도가 치듯 동심원을 그리며 파동 형태로 퍼져나가다 두 개의 틈을 통과할 때
각각의 틈에서부터
또다시 파동을 그리며 물결이 퍼져 나간다.

그렇게 두 개의 파동이 중첩 되어 가다가 뒤에 스크린을 만나면서 여러 개의 무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미립자는 분명히 입자의 성질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파동의 성질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중슬~1.JPG

여기서 말하는 파동은 확률파동을 말한다.
손오공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가짜 손오공을 만든 후 두 개의 문을 동시에 통과 한 것과 비슷하다.
차이가 있다면 손오공이 머리카락을 뽑아서 자기 분신을 여러 개 만들어도 그 중 하나만 진짜고
나머지는 가짜지만
미립자는 모두가 진짜고 확률적으로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확률적으로 동시에 여러 곳에 존재한다는 이 말은 SF소설에 나오는 상상이 아니라
정확도 99.99999999%의 과학적 사실이다.

상상 속의 물질이 아니라 우주의 기본을 이루는 물질이
여러 곳에 동시에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과학자들은 미립자가 통과하는 두 개의 슬릿 앞에 관측장비를 설치하고
미립자가 어느 구멍을 통과하는지 자세히 들여다 봤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여러 개 무늬가 나던 스크린에 단 두 개의 선이 나타났다.

미립자는 자기가 관찰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더 이상 파동의 성질이 아닌 입자의 성질을 보였던 것이다.

자신의 정체를 알아 보려는 관찰자가 없을 때는 확률적으로 여러 곳에 동시에 존재하다가
관찰자가 관측하는 순간 미립자는 그 의도를 알아채고 더 이상 여러 곳에 확률적으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지점에 100%의 입자로 존재하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에서는 이를 관찰자 효과 (observer effect)라 부른다.

과학자들은 미립자가 그런 특징을 보인다는 것만 알지 왜 그런 특징을 보이는지 아직 모르고 있다.
그래서 양자물리학은 현대과학의 딜레마다. 믿지 않기에는 너무도 정확하고 믿기에는
너무도 미스터리 하기 때문이다.

양자물리학을 기초로 발전한 현대물리학에서는 최근 들어 평행우주론, 다중우주론을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의 우주가 유일한 우주가 아니라 무수히 많은 우주 중 하나이고
다른 우주에서 나는 과학자이기도 하고 정치인이기 하고 연예인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미립자가 여러 곳에 동시에 확률적으로 존재하듯
나 역시 여러 우주에 동시에 확률적으로 존재하고 있고 내가 선택을 하는 순간마다
여러 우주가 갈라진다는 것이다.

이 이론이 처음 나왔을 때는 공상과학이라며 배척을 당했지만
재미있게도 지금은 서서히 과학계의 주류를 형성해 가고 있다.

언제 우주의 비밀이 모두 밝혀질지 사실 아무도 알 수 없다.
그러나 양자물리학에서 말하는 세계관은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 동안 무수히 많은 성공철학자, 동기부여가들이 성취의 비결에 대해 가르쳐 왔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설명을 하지 못했다.
상상 속에서 자신의 소망이 이미 이뤄졌다고 생각하고 그 이미지를 생생하게 그려내면
반드시
그 소망이 성취된다고 했지만 왜 그렇게 되는지는 몰랐던 것이다.

마치 답을 가르쳐주는 수학공식은 알지만
그 공식이 어떻게 유도 되었는지 공식의 원리를 모르는 것과 비슷하다.


수 많은 가능성으로 존재하다가 관찰을 하는 순간 현실에 발현하는 미립자의 성질을 보면
소름 끼칠 정도로 신기하다.

그런데 우리 몸뿐만 아니라 이세상 모든 것이 결국 미립자들이 모여서 만들어 졌기 때문에
과학자들이 말하는 평행우주, 다중우주의 가설이 언젠가 정설로 받아들여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만약 수 많은 우주가 존재하고 또 다른 내가 다른 우주에 여러 확률로 존재 한다면

현재의 나는 내가 선택했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것이 된다.

내가 마음속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내 삶이 현실에서 발현 되어 비로소 오늘의 내 삶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디서 한번은 들어 봄직한 이 말은 사실 새로울 것도 없고 이미 수 많은 성공학자들이

오래 전부터 주장해 왔고 가르쳐 왔던 사실이기도 하다.


마음속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곧 현실이 되었던 사례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발명왕 에디슨이 수 많은 발명품을 만들고 큰 사업체를 운영하며 유명인사로 이름을 날릴 때의 일이다.
변변찮은 노동판을 떠돌던 번즈라는 사람이 어느 날 에디슨과 동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의 머릿속에는 에디슨과 중요한 일을 상의하고 에디슨의 회사를 공동으로 경영하는 자신의 모습으로
가득 찼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그때까지 에디슨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고
에디슨의 연구소가 있는 뉴저지주 이스트 오렌지까지 가는 기차표를 구할 돈이 없었다는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에디슨을 만난 번즈는 이렇게 말했다.
"에디슨씨 나는 당신과 공동 사업을 하고 싶어 먼 길을 찾아왔습니다."

에디슨은 부랑자처럼 허름한 옷차림의 남자가 처음 보는 사람 앞에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먼 곳을 찾아온 성의를 생각해 일자리를 하나 마련해 주었다.


그 후 번즈는 공장의 부속품처럼 에디슨 회사에서 일개 직원으로 허드렛일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5년 동안 번즈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번즈는 에디슨의 동업자가 되는 자신의 모습을 한시도 잊지 않았다.

아니,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음속 눈으로 바라본 자신은 이미 에디슨의 동업자였다.
그렇게 자신이 원하던 모습을 마음속으로 바라보던 어느 날 마술 같은 일이 벌어지기 시작한다.
발명과 사업에 열중하던 에디슨이 어느 날 "축음기"라는 신제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에디슨이 야심 차게 만든 신제품에 영업사원들은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

신기한 제품이긴 하지만 잘 팔리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모두들 시큰둥 했던 것이다.
번즈는 기회가 왔다고 생각하고 에디슨에게 그 신제품을 자신이 팔고 싶다고 했다.
판로를 찾지 못해 고심하던 에디슨은 흔쾌히 허락했다.

그런데 영업사원이 못 팔던 이 제품을 번즈는 불티나게 팔아 치웠다.

여세를 몰아 이 제품에 대한 전 미국의 판매권을 획득한 번즈는
얼마 후 엄청난 부를 손에 검어지게 되었다.

불과 몇 해전까지만 해도 무일푼 부랑자였던 번즈는 어느덧 백만장자에 에디슨의 공동경영자가 되었다.
그가 늘 생각하던 모습이 마침내 현실에서 발현된 것이다.
관찰을 하는 순간 가능성의 형태로 존재하던 미립자가 현실에서 발현되듯
마음의 눈으로 생생히 바라보면 신기하게도 현실에서 그 모습이 발현되는 사례는 너무도 많이 있다.
 
생각이 현실이 되고 내가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결국에는 성취되는 이 놀라운 원리를
그 동안 수 많은 사람들이 활용해 왔고 지금 이순간 누군가는 활용하고 있을 것이다.

누구는 이것을 "잠재의식의 힘"으로 부르고,
누구는  "자기암시의 힘"으로 "기도의 힘"으로 "긍정의 힘"으로 부르기도 한다.

또한 누군가는 이 원리를 잘 사용하고 있지만 누구는 이 원리를 잘못 사용하고 있다.
부정적인 모습을 바라보기 보다 긍정적인 모습을 바라봐야 보자.
원치 않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모습을 상상해보자.
내가 원하는 삶이 있다면 이제부터 그 삶을 마음속 눈으로 선명히 그려보는 것이다.

마음속 눈으로 그것이 이미 이뤄졌다고 선명하게 그리면
확률로 존재하던 삶의 모습이 현실에서 발현 될 테니 말이다.





















 


괴물 같은 마음의 소유자, 존 휠러

                                                                      평행우주』미치오 카쿠/박병철, 2006/9 초판

 

 

 


아인슈타인과 보어를 제외하고,

황당한 양자역학과 가장 치열한 사투를 벌인 사람은 아마 존 휠러일 것이다.

 

혹시 우리가 알고있는 물리적 사실들이 모두 환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양자적 평행우주는 정말 존재할까?

 

휠러는 이러한 양자적 역설로 골머리를 앓기 전에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개발에 참여했고

블랙홀 연구의 새로운 지평을 연 물리학자였다.

양자전기역학을 완성한 물리학자이자 한때 휠러의 제자였던 파인만은 그를 가르켜 마지막 거인,

또는 '괴물 같은 마음의 소유자'라고 불렀다.

 

1967년, 천문관측 역사상 처음으로 맥동성이 발견되었을 때,

NASA의 고더드연구소에서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논문을 발표하던 휠러는

검은 별을 '블랙홀'이라 칭함으로 새로운 신조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

 

어린시절 남달리  조숙했던 휠러는 또래친구들이 한창 뛰어노는 동안 미적분학을 섭렵했고,

과학이론에 관한 책이라면 닥치는 대로 읽어댔다.

특히 그는 그 무렵 최대의 화두로 떠올랐던 양자역학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는데,

닐스 보어외 하이젠베르크,슈뢰딩거 등 당대의 석학들이 양자적 세계의 비밀을 풀어내는 현장을

생생하게 목격하면서 물리학자의 꿈을 키웠다.

 

사실, 몇 년 전만 해도 에른스트 마흐의 추종자들은 원자론을 강하게 거부하고 있었다.

그들은 원자가 실험실에서 단 한 번도 관측된 적이 없으므로,

사람들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허구의 개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열역학의 아버지로 통하는 위대한 물리학자 루트비히 볼츠만이 1906년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도,

원자론을 주장하면서 수많은 학자들에게 지독한 비난과 멸시를 받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 때문에 자살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부분적인 원인을 제공한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1925~1927년 동안 원자와 관련된 새로운 발견들이 홍수처럼 쏟아져나왔다.

현대물리학 역사상(아인슈타인이 특수상대성이론을 발표한 1905년을 제외하고)

단 3년 사이에 이토록 커다란 진보를 이룬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 것이다.

 

휠러는 이 황금 같은 시기에 자신도 물리학의 첨단에 서서 업적을 남기고 싶었으나,

그가 보기에 미국은 결코 물리학의 선진국이 아닌 것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당시에 세계적으로 명성을 날리던 물리학자들 중 미국인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래서 휠러는 오펜하이머처럼 미국을 떠나 코펜하겐에서 닐스 보어의 지도하에 물리공부를 시작했다.


그 무렵에 실험물리학자들은 전자가 파동적 성질과 입자적 성질을 모두 갖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실험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니 일단은 믿을 수밖에 없었지만, 이것은 정말로 신기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하나의 물체가 어떻게 입자도 되고 파동도 될 수 있다는 말인가?

 

이 신기한 이중성은 한동안 물리학자들을 괴롭히다가 결국 양자역학에 의해 전말이 드러나게 되었다.

원자핵의 주변에서 양자적 춤을 추고 있는 전자는 신비한 파동을 동반하고 있는 입자였다.

1925년 오스트리아의 물리학자 슈뢰딩거는 전자에 동반된 파동의 운동을 서술하는 방정식을 제안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슈뢰딩거의 파동방정식'이다.

 

이 파동은 전자와 원자의 행동을 거의 완벽하게 설명함으로써 물리학의 새로운 혁명에 불을 당겼다.

 

 

폴 디랙은 이렇게 말했다.

 

 "물리학의 발전 덕분에 화학은 공학의 범주에 귀속될 것이다. 물리학과 화학의 모든 법칙들은

이미 완벽하게 알려졌으므로, 이제 남은 일은 현실세계에 응용하는 것뿐이다.

단, 방정식이 너무 복잡하여 정확한 해를 구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남아 있다."
 
  
슈뢰딩거가 제안했던 파동함수ψ는 미시세계의 현상을 거짓말처럼 정확하게 서술하고 있었지만,
파동함수의 정확한 의미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1928년에 물리학자 막스 보른Max Born이 마침내 그 의미를 알아냈다.

파동함수는 주어진 장소에서 전자가 발견될 확률을 나타내는 함수였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전자의 위치를 100% 정확하게 결정할 수 없으며,

단지 파동함수를 통해 '그곳에 있을 확률' 만을 계산할 수 있을 뿐이었다.

 

원자물리학이 '전자가 어떤 특정위치에 존재할 확률' 만을 계산할 수 있고,

또한 전자가 둘 이상의 장소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면,

전자의 진정한 위치를 어떻게 알 수 있다는 말인가?


마침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원자와 관련된 실험데이터를 완벽하게 재현하는 '양자조리법 안내서'를 완성하였다.

 

파동함수는 전자가 이곳 또는 저곳에 있을 확률만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파동함수가 특정 위치에서 유난히 큰 값을 갖는다면,

전자가 그 위치에서 발견될 확률이 그만큼 높다는 뜻이고,

파동함수의 값이 작은 곳은 그곳에서 발견될 가능성이 그만큼 낮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사람을 나타내는 파동함수를 눈으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실제 사람의 외형과 거의 똑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을 것이다.

또한, 파동함수는 주변으로 갈수록 값이 작아지기 때문에 사람이 달에서 발견될 확률은 지극히 작다

(실제로, 한 사람을 나타내는 파동함수는 우주전역에 걸쳐 분포되어 있다).


나무를 나타내는 파동함수는

나무가 서 있을 확률과 쓰러질 확률을 구체적인 수치로 우리에게 알려줄 수 있지만 나무가 쓰러질 것인지,

아니면 서 있을 것인지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는 없다. 그러나 현실세계의 나무는 서 있거나,

아니면 쓰러져 있거나 둘 중 하나이다. '서 있으면서 동시에 쓰러져 있는' 나무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파동의 확률과 상식적인 존재 사이의 차이점을 해결하기 위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는

다음과 같은 가정을 내세웠다. "파동함수가 외부의 관찰자에 의해 관측되면 단 하나의 값으로 붕괴된다.

" 다시 말해서, 이런저런 가능성을 모두 갖고 있던 파동함수가 '관측'이라는 행위에 의해

단 하나의 값(관측결과)으로 단순화된다는 것이다.

 

아무도 바라보지 않는 나무는 서 있는 상태와 쓰러진 상태가 파동함수 속에 공존하고 있지만,

누군가가 나무를 바라보는 순간에 단 하나의 상태(대부분은 서 있는 상태)로 결정된다.

이 논리에 의하면 관측행위는 전자의 상태를 결정한다.

 

과거의 물리학자들은 전자의 상태가 이미 결정되어 있고,

그것을 확인하는 행위가 관측이라고 생각했지만

양자역학의 세계에서는 관측이라는 행위 자체가 물체의 상태를 결정한다.

전자를 바라보는 순간에 전자의 파동함수는 붕괴되고,

그 순간부터 전자는 명확한 특성(관측자가 알고자 했던

특성)을 갖게 된다. 즉, 관측이 일어난 후로는 더 이상 파동함수로 전자를 서술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보어를 필두로 하는 코펜하겐학파의 가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1. 모든 에너지는 양자quanta이라 하는 불연속 다발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빛의 양자는 광자photon이고, 약력의 양자는 w, z-보존이며  강력의 양자는 글루온, 

중력의 양자는 중력자이다.  단, 중력자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2. 물질은 점입자로 표현되지만 입자가 발견될 확률은 파동으로 주어진다.

그리고 이 파동은 특별한 파동방정식을 만족한다(슈뢰딩거 파동방정식).

 

3. 관측이 행해지기 전에, 물체는 모든 가능한 상태에 '동시에' 존재한다.

이들 중 어떤 상태에 있는지 확인하려면 관측을 행해야 하고,

관측행위는 파동함수를 붕괴시켜서

단 하나의 상태만이 관측결과로 얻어진다.


즉, 관측이 행해진 후에야 비로소 물체는 확고한 실체가 되는 것이다.

파동함수는 물체가 특정한 상태에서 발견될 확률을 나타낸다.


  
 
결정론인가, 불확정성인가?

 

과학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이론으로 꼽히는 양자역학의 절정에는 표준모형이 자리잡고 있다.

표준모형은 수십 년간 축적되어온 실험데이터를 완벽하게 재현함으로써 양자역학을 물리학의 왕좌에

올려놓았다. 이론적으로 계산된 물리량들 중에는 실헙값과의 오차가 100억 분의 1에 불과한 것도 있다.

아무튼, 표준모형은 원자규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설명하는 가장 정확한 이론임이 분명하다.

 

양자전기역학이 자신의 타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얼마나 혹독한 테스트를 거쳤는지,

그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최근에 실시된 실험에 의하면 전자의 자기능률은 약 1.00115965221 ±4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이론적으로 계산한 값은 1.00115965246 ±20이다.

이 두 가지 값들 사이의 오차가 얼마나 작은 것인지

실감하려면 다음과 같이 생각해보라.

 

자기능률의 값을 LA에서 뉴욕까지의 거리에 비유한다면,

그 오차는 머리카락 굵기 정도에 해당된다.

지난 50년간 양자전기역학은 이론 및 실험적 계산 결과를 토대로 이 정도의 엄밀한 검증을 거쳐 왔다.

 

지금 예를 든 것은 하나의 숫자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양자전기역학은 여러가지 물리량들을 이 정도로 정확하게 계산해낼 수 있었다.

그 계산은 지구 크기의 백 배나 되는 스케일로부터

원자의 백분의 일만큼 작은 영역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했다.

이쯤되면 이 이론이 그다지 빗나간 이론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양자역학이 이토록 큰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이론 자체가 파격적인 가정을 내세우고 있기 때문에

지난 80여 년 동안 철학적, 종교적으로 수많은 논쟁을 야기했다.

 

특히, 코펜하겐학파의 2번째 가정은

"누가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가?" 라는 질문과 함께 종교계의 커다란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 등장하는 뱅코는 자신의 운명을 한탄하며 다음의 명대사를 읊는다.

 

     만일 그대가 시간의 씨앗을 들여다볼 수 있다면
    어떤 종자가 싹을 틔우고 어떤 종자가 싹을 틔우지 못하는지
    나에게 알려 다오 … .                                         (1막3장)

 


세익스피어가 이 작품을 쓴 것은 1606년이었다.

그로부터 60년 후, 또 한 명의 영국인 아이작 뉴턴은 이 유서 깊은 질문의 해답을 구했다고 호언장담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은 모든 미래가 원리적으로 미리 결정되어 있다는 결정론을 믿었다.

 

뉴턴과 아인슈타인에게,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개척한다"는 인간의 자유의지는 환상에 불과했다.

 

 

아인슈타인은,

 

우리가 만질 수 있는 물체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상식적인 관념을

'객관적 진실'이라고 부르면서, 진리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피력했다.

 

나는 결정론을 주장하는 사람이지만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다.

문명화된 세상에서 살아가려면 자신의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철학적 관점에서 볼 때 사람을 죽인 범죄자는 자신의 죄에 책임이 없다고 하지만,    

그런 사람과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싶지는 않다.

 

지금까지 나의 인생은 내가 제어할 수 없는 다양한 힘에 의해 결정되었으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자연이 나의 길을 미리 만들어놓은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헨리 포드는 이것을 '내면의 소리'라 했고 소크라테스는 '신령'이라 불렀다.    

무슨 이름으로 부르건 간에, 이들은 인간의 의지가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하찮은 곤충부터 거대한 별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힘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다.

… 인간과 식물, 우주의 먼지 등 모든 만물은 보이지 않는 존재의 지휘에 맞춰

신비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춤을 추고 있다.

 


신학자들도 이 문제를 놓고 오랜 세월 골머리를 앓아왔다.

대부분의 종교단체들은 전능하고omnipotent, 어느 곳에나 존재하며omnipresent,

모르는 것이 없는omniscient 신을 숭배하면서 숙명론을 어느 정도 받아들이고 있다.

 

심지어는 태어나기도 전에 천당행과 지옥행의 여부가 이미 결정되어 있다고 믿는 종교도 있다.

그들은 하늘의 어딘가에 모든 인간의 이름과 생일, 그들이 겪게 될 좌절과 성공, 기쁨과 슬픔, 사망날짜,

그리고 죽은 후의 행선지까지 일목요연하게 기록되어 있는 '운명의 책'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1517년에 마틴 루터가 가톨릭교회에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발표하면서

교단 분리를 선언할 때에도 숙명론은 하나의 원인을 제공했다.

그는 교회에서 발행한 면죄부가 천국에 가고 싶어하는 부자들로부터 받아 챙기는 뇌물에 불과하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마도 루터는 다음과 같이 생각했을 것이다.

 

"신은 인간의 운명을 이미 결정해놓았다. 그런데 인간이 뇌물을 바친다고 해서,

신이 한 번 내린 결정을 수정하겠는가? 턱도 없는 소리다!"

 


확률이론을 받아들인 물리학자들에게는 3번째 가정이 가장 큰 문제였다.

 

이것은 물리학자뿐만 아니라 철학자들에게도 커다란 화두를 던져주었다.

사실, 관측이란 물리적으로 정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게다가 현대물리학은 두 가지 형태로 분리 적용되는 것처럼 보인다.

 

즉, 하나의 전자가 두 장소에 동시에 존재하는 것을 허용하는 양자역학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일상적인 세계에 적용되는 뉴턴의 고전역학이다.

 

보어는 원자규모의 미시세계와 우리에게 친숙한 거시세계를 분리하는

'보이지 않는 벽'이 있다고 생각했다.

원자적 세계는 괴상한 양자역학을 따르고, 벽 너머 세계에 있는 거시 세계는 파동함수가

이미 붕괴되어 있기 때문에 고전역학의 법칙을 따른다는 것이다.


양자역학의 창시자로부터 물리학을 직접 배운 휠러는 이 문제를 논할 때 비유적 표현을 즐겨 사용했다.

그는 '야구경기의 판정기준에 대해 토론을 벌이고 있는 세 사람의 심판'을 예로 들었는데,

각 심판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루심 : 나는 야구공을 보면서 판정을 내린다.
    2루심 : 나는 야구공의 현재 위치로 판정을 내린다.
    3루심 : 내 눈으로 보지 않는 한, 야구공은 아무 의미도 없다.

 

휠러가 볼 때,

2번째 심판은 "절대적 진리는 인간의 경험과 무관하게 존재한다"고 믿었던 아인슈타인이었다.

누구나 인정하는 진리는 어떤 경우에도 인간의 방해를 받지 않고

항상 같은 모습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인슈타인의 생각이었다.

 

3번째 심판은 보어인데,

그는 관측이 행해진 후에야 비로소 진리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숲속의 나무

 

 

로마시대 정치가 키케로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바보같이 들리는 말들은 모두 철학자의 입에서 나온 것이다."

물리학자들은 가끔씩 철학자를 비난할 때 키케로의 대사를 인용하곤 한다.

 

평소 '바보 같은 개념에 고명한 이름을 지어주는 행위'를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폴란드 수학자

스타니슬라프 울람은 이렇게 말했다. "광기란 다양한 종류의 헛소리를 세분하는 능력이다."

 

 

그런가 하면, 아인슈타인은 철학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모든 철학서적은 잉크 대신 꿀로 써놓은 것 같다. 처음 읽었을 때는 매우 그럴듯해 보이지만,

다시 읽어보면 싸구려 감상밖에 남지 않는다."

 


또한, 물리학자들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출처불명의 이야기가 떠돌고 있다.

어느 대학 총장이 물리학과와 수학과 그리고 철학과의 예산신청서를 받아들고

몹시 분개하여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니, 물리학과 교수들은 시험기구를 살 때 왜 이렇게 비싼 것만 고집하는 거야?

대학이 무슨 봉인 줄 알아? 수학과 교수들을 보라구. 이 사람들은 연필과 종이 값,

그리고 종이를 버릴 쓰레기통 값만 청구했잖아.

그런데 철학과 교수들은 더 맘에 드는군. 이 사람들, 쓰레기통 값은 아예 신청하지도 않았어!"

 


그러나 현재의 상황으로 볼 때,

물리학자와 철학자가 논쟁을 벌인다면 철학자가 이길 가능성이 높다.

 

양자역학은 그 체계가 아직 불완전한데다가, 철학적 기초도 그리 탄탄하지 않기 때문이다.

양자적 논쟁에 몰입하다보면 18세기 철학자 조지 버클리주교의 생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는 "모든 사물들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을 봐주는 관측자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했다.

이러한 관점을 유아론唯我論, 또는 관념론이라 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숲속에서 홀로 쓰러진 나무는 진정으로 쓰러진 것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쓰러지는 나무를 양자역학적으로 재해석해야 한다.

관측이 행해지기 전에는 나무가 서 있는지, 또는 쓰러졌는지를 알 길이 없다.

나무는 모든 가능한 상태에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그것은 타버렸을 수도 있고 쓰러졌을 수도 있으며

장작이 되거나 톱밥이 되어 바람에 날아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관측이 행해지면 나무의 상태는 단 하나로 명확하게 결정된다.

 


파인만은 양자역학에 대하여 이런 말을 남겼다.

 

 "양자역학은 상식적인 관점에서 볼 때 정말 터무니없는 방법으로 자연을 서술하고 있으며,

그 모든 것은 실험결과와 완전히 일치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연이라는 것 자체가 원래부터

터무니없는 존재였음을 사실로 인정해야 한다."

 

물리학자를 꿈꾸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들려주면

모래 위에 집을 짓고 있다는 느낌을 갖기 십상일 것이다.

 

 

스티븐 와인버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평생 아무도 이해하지 못하는 물리학이론을 개발해오면서

마음 한구석에 찜찜한 느낌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전통적인 과학에서,

관측자는 연구대상과 가능한 먼 거리를 유지하면서 공정한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양자역학의 등장과 함께 관측자와 관측행위를 분리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처음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막스 플랑크가 말한 대로,

 

 "과학은 자연의 궁극적 신비를 결코 풀지 못할 것이다.

자연을 탐구하다보면 자연의 일부인 자기 자신을 탐구해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오기 때문이다."



과학역사상, 가장 불가사의한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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