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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무서워 할 줄 모르는 자의 최후
12/21/2015 09: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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빚 무서워할 줄 모르는 자의 최후

사람이 살다보면 빚(채무)을 질 수도 있다. 아니 어찌보면 빚 속에서 산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집을 사려고 은행에서 빚을 내기도 하고, 매달 자동차 할부금 빚을 갚아나가고, 신용카드로진 빚을 매달 갚아 나가야 하는 것이 지금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특히 우리가 사는 이곳은 신용이 생명인 사회이기에 매달 들어가는 페이먼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지켜야 하는 바 ‘페이먼 인생’ 일 수 밖에 없다. ‘빚은 반드시 갚아야 한다’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치않는 진리이다. 이 원칙이 무너진다면 사회질서가 유지되지 못할 것이다. 금전적인 빚이든 인간 도의적인 빚이든 빚은 갚으라고 있는 것이다.


빚을 안갚는 것은 은행이나 개인이 나에게 준 믿음(신용)을 배신하는 행위이다. 즉 악업(惡業)을 쌓게 되는 것이다. 악업은 현세에 나에게 앙갚음으로 돌아오지 않으면 후대에서라도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갚게된다. 이것이 ‘인과응보’의 법칙이다. 따라서 빚을 무서워해야 한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빚을 못갚으면 잠을 못자고 고민하는 것이 보통이나 일부 강심장을 지닌 그릇된 생각에 빠진이들은 빚을 무서워하지 않고 떼먹는게 능력이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이런 강심장은 예나 지금이나 있어왔다.


아주 오래 전 이조 말엽 윤택영(1876~1935)이라는 이가 있었다. 1906년 당시 황태자 신분이던 순종의 태자비 민씨가 세상을 등졌다. 아무리 망해가는 황실이라도 태자비자리를 비워둘 수 없으니 새로운 태자비를 맞아야했다. 황실과 사돈을 맺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기에 여러 가문에서 동궁계비(東宮繼妃) 책봉을 받기위해 혈안이 되었다. 윤택영도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앉혀 보려는 욕심이 생겼다. 하지만 워낙 경쟁이 심해 자신이 없었다. 윤택영은 장안에서 제일 유명하다는 역술인을 은밀히 집으로 불러 자신의 딸 사주팔자를 대준 뒤 운세를 물었다. 역술인 왈 “대감께서 열심히 노력하신다면 따님에게 큰 복이 있을 겁니다.” 라고 하며 희망찬 대답을 주었다. 윤태영은 일생일대의 대 도박을 해보기로 결심한다.


황실에 맹렬히 로비를 시작한 것이다. 로비자금으로 여기저기서 빚을 내어 50만원(현재 돈으로 500억 남짓)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쏟아 부은 것이다. 당시 경성의 고급주택가격이 만원 남짓 했는바 고급호화주택 50채를 살 수 있는 거금을 쏟아 부은 것이다. 로비는 적중하여 윤택영의 열세살 짜리 딸이 드디이 동궁계비로 간택되었다. 당시 31세에 불과한 윤택영이 황태자의 장인자리에 오른 것이다. 행운은 연이어 터졌다. 그 이듬해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의 책임을 물어 일제는 고종을 강제 퇴위시키고 순종에게 양위하도록 압력을 가해 순종이 황제에 등극한다. 더할 수 없는 나라의 굴욕이었으나 윤택영에게는 더할 수 없는 가문의 영광이었다. 서른둘의 새파란 나이에 국구(國舅) 즉 임금의 장인이 되어 권력과 명예를 동시에 얻은 것이다.


순종즉위와 동시에 해풍부원군(정 일품상보국)에 제수된 윤택영은 일약 권력의 실세가 되었다. 하지만 문제는 빚이었다. 로비자금 50만원 거의 대부분이 빚인지라 문제였는바 웬만한 빚이라면 참봉첩지(하급관리에게 주는 임명장)라도 팔아 메우겠지만 벼슬 팔아 몇 백원 크면 몇 천원 받아야 빚을 갚기에는 택도 없었다. 고관대작들과 질펀하게 놀다가도 집에만 돌아가면 어김없이 빚쟁이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아무리 나라에 망조가 들었어도 임금의 장인이라는 지엄한 존재이니 함부로 빚 독촉을 할 수 없어 점잖은 말로 빚 갚을 것을 사정했으나 채무상환을 차일피일 미루기만하자 급기야 말이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빚쟁이들에게 시달리던 윤택영은 보통사람 같으면 상상조차 어려운 해결책을 생각해냈다.


윤택영은 다짜고짜 황제사위를 찾아가 떼를 썼다. “폐하! 장인 빚 좀 갚아 주시옵소서! 빚쟁이들에게 시달려 못살겠습니다!” 사위라고 해도 황제에게 이런 식으로 떼를 부릴 수는 없는 법인데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와 돈 달라고 보채니 남보기 부끄러워서라도 빚을 갚아주고 싶었으나 황제라도 50만원이라는 거금은 갚기 어려운 돈이었다. 당시 황실도 궁짜가 낀 상태였기 때문이기도 하다. 황실에서 돈을 안갚아주자 윤택영은 일본으로 건너가 유력자들을 찾아다니며 빚 갚을 돈을 달라고 떼를 쓰며 다녔다. 황실은 국제적으로 개망신 당하게 된 것이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있는데 윤택영이 황실과 일본통감부를 찾아다니며 떼를 쓴지 1년만에 한일강제합방이 이루어졌다.


나라 5백년 사직이 무너지는 것을 보면서 윤택영은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슬퍼서 운게 아니라 너무나 감격스러워서이다. 빚을 일시에 갚을 절호의 기회가 온 것이다. 윤택영은 황실외척으로 ‘강제합방’에 앞장선 공로를 인정받아 후작에 임명되고 은사공채(恩賜公債)-한일합방에 공을 세운 유공자에게 총독부가 내린 사례금-50만 4천원을 받았다. 이 금액은 왕족 이강, 이희가 받은 83만원 다음으로 두 번째로 많은 금액이었고 귀족 중에는 최고 액수였다. 빚을 다 갚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왔음에도 윤택영은 일부만 갚고 나머지 돈으로는 띵가띵가하며 사치를 즐겼다. 결국에는 김영규라는 채무자가 9만5천원을 갚으라며 윤씨의 동산에 압류처분을 했다. 결국 경매에 넘어가 가재도구와 옷가지 등이 낙찰되었는데 부인의 옷에 좋은 것이 많아 김영규는 1100원을 회수할 수 있었다.


집을 경매에 붙이지 못한 것은 약삭빠를 윤택영이 집이나 부동산 등을 다른 사람 명의로 옮겨놓았기 때문이다. 김영규는 연이어 윤택영을 ‘재산 은낙죄’로 경무청에 고발한다. 황제의 장인이라는 위인이 경찰서에 조사받으러 다니며 나라 개망신을 다 시켰다. 이런 개망신에도 정신 못차린 윤택영은 이런 수모를 당한지 1년도 못되어 집수리를 한답시고 또다시 주변에서 4만원을 빌려 대대적인 집수리에 나선다. 빚을 내서 호화사치 생활로 탕진하고 차압 들어오고, 경매당하고 또 주변에서 돈 빌려 이를 수습하곤 하는 생활이 10여년에 거쳐 반복되었다. 그래도 ‘황제장인’이라는 타이틀이 있어 이를 보고 돈 꿔주는 이들이 있어 가능한 일이였다. 여기저기 하두 빚을 내다보니 윤택영 자신도 자신의 빚이 얼마인지를 몰랐다. 빚쟁이들이 몰려와 차용증을 내밀면 그때서야 돈 빌린 사실이 생각날 정도였다.


조선총독부도 이런 윤택영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조선총독부에도 수시로 찾아가 돈 좀 빌려달라고 떼를 썼기 때문이다. 조선총독은 윤택영에게 사태가 좀 가라앉을 때까지 잠시 해외에 나가 있으라고 권한다. 드디어 1920년 7월8일 윤택영은 아들과 중국어통역 1명, 경호순사 1명과 함께 아무도 모르게 베이징으로 떠났다 아니 도망갔다. 16년 후 윤택영은 베이징에서 가난에 시달리다 늑막염으로 쓸쓸히 죽었다. 빚 무서워 할 줄 모르는 자의 최후였다.



자료제공 : GUDOW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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