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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원수 갚으려다 얼떨결에 왕이 된 남자
02/13/2017 0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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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원수 갚으려다 얼떨결에 왕이된 남자                           

경석은 일찍 부친을 잃었다. 차경석의 아버지 차치구(車致九)는 갑오농민 전쟁당시 혁명군의 정읍(井邑) 접주(接主)로 활동하다가 일본군에 체포되어 분살형(焚殺)을 당해 끔찍하게 죽었다. 차치구의 장남으로 태어난 차경석은 부친의 억울한 죽음을 복수하려 여러가지 방안을 모색하다가 증산교의 창시자 강일순(姜一淳, 1871-1909)을 만나 그를 추종하게 된다. 그러나 그를 추종한 기간은 2년에 불과했다. 강일순의 추종자였던 차경석(車京石, 1880-1936)은 자신의 이종사촌누이 고판례(高判禮)를 천거하여 그의 두 번째 부인이 되게 하였는데, 교주 강일순이 갑자기 사망하자 그를 신으로 받들던 신도들은 실망하여 뿔뿔이 흩어졌는데 고씨 부인이 갑자기 졸도하였다가 깨어난 뒤 강일순의 언행을 비슷하게 하기 시작함으로 ‘강일순의 성령이 고씨 부인에게 옮겨졌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추종자들이 다시 모여들게 된다.

종단에서 말하는 ‘고씨부인 졸도사건’이 이것이다. 참여자의 수효가 늘어나자 고씨는 1914년 강일순을 교조로하고 자신을 교주로 하여 선도교(仙道敎) 일명 태을교(太乙敎)라는 명칭으로 교단을 창립한다. 그런데 이종사촌 동생인 차경석이가 교권을 점차 장악해 나가기 시작한다. 연령도 어리고 지식수준도 떨어지며 신도가 된 기간도 겨우 2년에 불과한 그가 교권을 장악하자 강일순의 추종자들은 그의 법통성(法統性)을 부정하고 종단을 이탈하여 별도의 종단들을 세워 나가기 시작한다. 이종사촌 동생에게 교권을 빼앗긴 고씨 마저 태을교(太乙敎)라는 종단으로 갈라져나가 미륵불교, 중산대도교, 제화교, 박공우의 태을교, 문공신파 교단, 도리원파 등등 수없이 많은 종파로 갈라지게 된다. (필자가 자주찾는 책방의 주인 아저씨도 상당한 독서인인데 그분의 종교도 중산교의 일파인것 같은데 기회가 되면 물어봐야겠다)

이렇게 많은 중산교의 분파 중에서도 차경석의 종단은 가장 급속한 성장세를 나타냈다. 그러나 종교든 기업이든 국가든 세가 날로 커지면 문제가 나타나는 법! 차경석은 자신의 카리스마를 강화하는데 주력하여 자기 자신을 급격히 신격화하기 시작하여 이른바 천자등극설(天子登極設)로 극대화된다. 이른바 3.1운동의 실패로 정신적 구심점을 상실한 민중이 새 왕조의 탄생을 원하고 차경석이 새 왕조를 건설하고 천자로 등극하여 태평시대를 열 것이라는 황당무계한 논리였지만, 신도들은 급속히 늘어만 갔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차경석을 차천자(車天子)로 불렀고, 그의 교단을 차천자교로 호칭하였다. 그의 심복들은 그를 폐하(陛下)라고 불렀다.

이러한 소문은 천자등극설이 내포하고 있는 반일적 성향과 민족주의적 성격, 가난과 궁핍으로 벗어나고자 하는 하층민들의 열망 등이 겹쳐져 가능했던 일이다. 더욱 황당한 것은 차천자가 발급하는 교첩(敎帖)에 따라 새 왕조에서의 벼슬이 보장된다는 소문으로 이 교첩을 얻기 위해 재산을 바치고, 어서 차경석이 천자로 등극하기를 기원하는 현세기복적인 욕구와 일치하여 신자의 수가 급증하였다. 차경석은 교단조직을 60방주(方主)로 개편하고, 1921년 9월경 경상남도 함양군 황석산(黃石山)에서 천재를 올리고 황제즉위식을 가졌고, 국호를 시국(時國)으로 하고 교명을 보화(普化)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이 천재는 단순한 종교의식이 아니라 새로운 왕조의 탄생을 알리는 황제 즉위식이었다.

이후 보화교의 신자수는 600만명에 이르고 간부의 숫자만도 557,700명에 이르게 된다. 이러한 엄청난 교세확장에 놀란 일제는 보화교에 대한 수사와 체포활동을 강화하자 차경석은 애비의 원수를 갚으려던 초심에서 변심하여 친일적인 성향으로 돌아선다. 이 변화가 차경석의 몰락서곡이 된다. 그는 1922년 교명을 다시 보천교(普天敎)로 개명하고 1924년 기산조합이라는 신자들로 구성된 노동단체를 조직하여 일제의 징용사업에 적극 응하고 친일사절을 일본정부에 파견하고 거액의 후원금을 총독부에 바치고 동양인들의 일본을 중심으로한 대동단결을 강조하는 시국대동단(時局大同團)을 조직하여 친일강연회를 연일 개최하기 시작하였다. 차경석의 이런 전향은 교단 내에서 심한 반발과 내분을 일으키는 요인이 된다. 보천교 교단내에서 보천교 혁신운동이 일어났고 교단간부들이 이탈하여 새로운 종단을 만들어 독립해나갔다.

이때 갈라져 나간 종파는 신현천의 태을교, 동화교, 서울대법사, 삼성교, 천인교, 객망리파 교단, 수산교, 홍로교, 김환옥의 보화교, 여처자의 선도교, 무을교, 임무교, 금산사 미륵불교 포교소, 인천교, 원군교 등등 수없이 많았고, 이곳에서도 또 분파가 되어 증산교는 1백 여개가 넘는 교파로 분화되게 된다. ‘달도차면 기운다’는 말처럼 1938년 조선총독부의 유사종교해산령이 내려 진후 차경석의 보천교는 급속하게 교세가 약화되어 차츰 시들어갔다. 일제에 대한 복수심으로 길을 찾던 차경석이 강증산을 만남으로서 그의 인생에는 큰 변화가 있었고 일개 백성에서 천자로까지 등극하였으나 후일의 변신으로 쓸쓸한 종말을 맞는다. 차경석의 후손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경찰에 투신하여 지리산 공비토벌 대장을 한 차일혁 총경이 있으며, 차일혁 총경의 아들로 일반인에게 구명시식을 통해 널리 알려진 차길진 법사가 후암 미래 연구소와 대학로에 후암 극단을 운영하며, 필자와 마찬가지로 여러 언론매체에 칼럼을 쓰며 활동하고 있다. (이곳 미국에서 보니 스포츠 서울 USA에 차길진 법사의 칼럼이 가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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