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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서 깨진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02/13/2020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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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에서 깨진 바가지 밖에서도 샌다.

 

  몇 년 전 신문에서도 심각한 가정폭력으로 보도된 바 있는 Q씨와 관련된 사연이다. Q씨는 한국에서 인쇄기술자로 지냈던 분이다.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어린 두 동생과 함께 끼니 잇기도 어려운 처지에 있던 Q씨를 불쌍히 여긴 Q씨의 먼 친척 어른이 Q씨를 당신이 운영하던 자신의 인쇄소에 취직을 시켜주어 인쇄기술자가 될 수 있었다. 예전에는 모든 물자(物資)가 귀했지만 그 중 인쇄물은 더욱 그러했다. 특히 연말에 찍어대는 달력은 그 중 귀한 인쇄물이여서 당시에는 연말연초의 귀한 선물이기도 했다. 따라서 인쇄기술도 고급기술에 속해 인쇄기술자는 당시 대우가 무척 후했다. 일류 인쇄기술자의 경우 여기저기서 모셔가려고 하다 보니 이른바 귀하신 몸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열 대 여섯 살에 시작하여 이십대 중반이 되자 기술자가 될 수 있었고 나이 서른 무렵에는 일류기술자 대우를 받게되었다는 Q씨의 술회였다. 덕분에 Q씨는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어린 두 동생도 시집장가까지 보냈으나 정작 자신은 짝을 찾지 못한 노총각 신세였다. Q씨가 부인을 만난 것은 모 인쇄공장에 근무할 때였다. 일류기술자 대접을 받다보니 인쇄소 사장이 특별히 대우를 해주었고, 집에도 종종 초대해서 식사대접도 해 주곤했는데 사장 댁을 종종 드나들다보니 당시 여대생이었던 주인집 따님과 서로 눈인사를 주고받게 되었고 급기야 우연한 기회에 가까운 사이가 되고 말았다. 하지만 둘 사이엔 큰 장벽이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당시 여대생은 흔하게 볼 수 있는 신분도 아니었고 이른바 부잣집 막내딸이였는데 아무리 일류기술자라해도 학교교육도 제대로 못 배운 손기술만 좀 있는 하급노동자인 Q씨를 사장님 내외분이 자신의 막내딸 배우자로는 가당치도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둘 사이에는 열 살도 넘는 나이차가 있어 사장님 내외분 입장에서 귀한 막내딸의 사윗감으로는 Q씨는 가당치도 않은 사윗감에도 못 미치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바닥조건의 신랑감이자 완전 날 도둑놈이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집안이 발칵 뒤집어지고 나서 자신의 딸이 벌써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우여곡절을 겪으며 둘 사이가 극적으로 인정되었다. 이 과정에서 사장님 집안 식구들에게 여기저기 끌려가 매 맞은 일만도 여러차례였다. 이렇게 어렵게 결혼하였고 떡두꺼비 같은 첫 아들을 낳고 이어 딸까지 연년생으로 두게 되었다. 이때가지만 해도 남매 키우며 둘은 행복했다. 헌데 원체 끼 많던 부인이 같은 동네사는 자칭 사진예술가라는 사진관 김씨와 바람이 나면서 행복은 깨졌다. 두 년 놈을 요절내고 싶지만 어린남매 생각을 해서 거꾸로 Q씨가 빌고 빌었다. 사진관 김씨를 잊고 가정에 충실하라고...

 

하지만 다시는 사진관 김씨를 만나지 않겠다는 맹세는 그때뿐이고 둘은 계속 밀회를 즐기는 눈치였다. 고민 끝에 장인장모에게 사정을 말씀드릴 수밖에 없었다. 펄펄뛰며 장인은 집안 청년들을 끌고가 옛날 Q씨를 팰 때처럼 사진관 김씨를 죽도록 두들겨 팼다. 전치 6주의 중상을 입은 김씨는 경찰에 장인을 고소했고 장인은 청부폭력으로 구속되었다. 결국 Q씨는 장인을 구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진관 김씨를 간통죄로 고소할 수밖에 없었고 사진관 김씨와 Q씨는 서로의 고소를 취하하는 조건으로 합의하게 된다. 이런 개망신 속에서도 뻔뻔한 Q씨 아내는 별로 부끄러워 하지 않았다한다. 끈질긴게 인연이라고 이런 난리굿과 개망신을 당하고 나서도 사진관 김씨와 음란녀  Q씨  부인의 만남은 그치질 않았다.

 

결국 가족회의결과 장인장모가 적극 권유하여 아예 이참에 사진관 김씨가 쫓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떠나자는 결론이 났다. 그래서 온 미국이민이었다. 미국에 이민와서 처음은 잠잠했다고 한다. 그런데 몇 달이 지나지않아 사진관 김씨와 전화를 주고받는 눈치였다고 한다. 태평양도 갈라놓을 수 없는 끈질긴 불륜의 집요함에 Q씨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결혼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쌍욕한번 안하고 참으며 부인의 바람기를 잠재우려 인내에 인내를 거듭했던 분노가 갑자기 터져버린 것이다. 정신없이 부인을 두들겨 패다보니 경찰이 들이닥쳤고 꼼짝없이 붙잡혀 끌려갔다. 불법무기 사용에 의한 살인 미수죄가 적용됐다. 어마어마한 죄명이었다. 화가 순간적으로 폭발한 것이지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으나, 폭행의 정도로 보아 이 죄가 성립된다고 변호사는 설명했다. 하지만 몇 년 만에 겨우 감옥을 빠져나왔지만 추방재판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산도 다 부인에게 빼앗기고 아이들까지도 빼앗겼다. 순간의 화를 참지 못한 것이 Q씨의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트린 것이다. 하지만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Q씨가 감옥에서 고생하는 동안 사진관 김씨가 미국에 건너와 Q씨 마누라(이제 존칭은 생략하자)와 살림을 합쳤고, 정식 결혼까지 했으며 남매의 아빠역할을 하며 살고 있다는 점이였다. 피눈물을 흘리며 남매를 어렵사리 만나 보았지만 아이들은 Q씨에게 냉담했다. 엄마가 세뇌를 시켜 아빠는 세상에 제일 나쁜 인간쓰레기라는 인식을 강하게 심어준 결과였다. 필자와 상담을 하며 피눈물을 흘리던 Q씨의 말이 생각난다. “제가 바보 멍청이였습니다. 계집이 그년하나 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참고 참으면서도 가정을 지키려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애들도 크면 다 소용없는 것을 왜 이제야 깨달았는지 정말 모르겠습니다. 제가 살아야합니까? 죽어야 합니까?”

 

절망에 몸부림치는 Q씨를 설득하느라 애를 먹었던 기억이 난다. 결국 Q씨는 추방이 아닌 자진출국의 형식을 거쳐 빈 몸뚱아리로 한국으로 돌아갔다. 인쇄환경도 예전과 너무 다르게 바뀌어 Q씨의 옛날 인쇄기술은 쓸모가 없어졌고 Q씨 역시 나이가 들어 취직하는게 어려웠다. 결국 Q씨는 노숙자 신세가 되었고 자신의 몸을 분노와 술로 망가뜨렸다. Q씨 마누라년과 사진관 김씨는 끝까지 행복했는가? 결코 아니다. Q씨 마누라가 또다시 다른 젊은 사내와 바람이 났고, 사진관 김씨도 다른 젊은 여자와 눈이 맞았다. 개판이 된 것이다. 개같은 년놈의 더러운 러브스토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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