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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트라 딥다이빙의 역사
03/18/2015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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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합기체잠수와 쉑 엑슬리
1988년 4월5일 멕시코 타마울리파스, 날씨는 덥고 태양이 밝은 날이었지만 쉑 엑슬리(Sheck Exley)는 추위에 떨면서

외로히 어둠속에 있었다.

그는 챔버 수단을 이용하거나 수면과 생명줄로 연결되거나 하지 않은 독립 다이빙으로  그때까지 달성되지 못했던 최대수심을

기록하기 위해 나시미엔토 델리오 만테 동굴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가 도달해 있던 수심은 760피트(231m)였다. 지금 그는 한 작은 문제에 부딪쳐 있었다.

그는 첫단계  예비공기가 설치되어 있는 수심보다  440피트(134m)나 더 깊게 있었다

(최대 수심의 스테이지 실린더들은 320피트/97m에 설치되었음).

그는 하강을 멈추고 그가 짊어지고 있는 트라이믹스(TRIMIX:헬륨, 질소, 산소의 혼합기체)를 모니터링 해주는 잔압계를 읽었다.

그가 지닌 트라이믹스에서 질소함량이 적다고는해도 질소부분압은 공기다이빙의 경우로 환산하면 260피트(79m)에 들어와 있는

것과 같았으므로  그는 질소마취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는 하강할 때 20분 동안 상승조류와 싸웠으므로 지체된 시간만큼 시간소요에서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었다.

"미답의 동굴 속으로 들어가는 순간 나는 하강속도가 예상보다 느렸던일이 걱정되었다.

바위 틈은 수직으로 떨어지지 않고 좁아지면서 60도 경사로 내려가 있었다.

마취증상이 이따금 뚜렸해지고 있었다.

잔압계를 다시 들여다보았더니 먼저 체크했을 때와 동일했다.

나는 게이지를 탱크에 두들겨보았다.
그랬더니 게이지 바늘이 수백 파운드나 내려갔다.

게이지의 유리판이 압력을 받아 바늘을 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또 들러붙어 있는 것 아냐?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줄을 얽어맬 수 있는 바위 돌출부가 바로 밑에 있었다(※ 동굴 다이버들의 릴 라인을 의미).

나는 그것을 통과해 더 밑으로 내려갔다.

터널은 넓어지면서 45도로 떨어졌다.
잔압계를 보았더니 1/3이 사용되었다.

잔압계가 정확할까? 나는 22분 동안 하강했다.

이제 올라갈 시간이다."

"6내지 9m 아래쪽에 라인을 묶기가 좋은 돌출부가 전지불빛에 보였다.

나는 한 번 숨을 들이키고 그 돌출부로 내려갔다.

그 때 갑자기 정신을 잃을 정도의 큰 진동이 나를 때렸다.

나는 밸브나 호스가 터졌나하고 뒤를 살폈다.

기체가 새는 곳은 없었다.

무엇인가 압력에 의해 내파된 것이 있는 모양인데 무엇일까?

나는 또 한번 호흡을 들이키고 돌출부를 향해 마지막 킥을 했다.

나는 재빨리 돌출바위 둘레에 두번 하프하치(half hitch) 매듭을 묶고  느슨한 라인을 릴을 돌려 됨감은 다음 줄을 끊었다. 

24분 10초가 경과되었다."

엑슬리는 780피트(237m)에 떠 있었는데 이 수심은 독일인 죠핸 하센매이어(Jochen Hasenmayer)가 세운 혼합기체다이빙

기록을 124피트(37.6m) 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직 상승할 길이 까마득하며 무엇인가 내파되었을 때 받은 충격의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나는 가능하면 분당 120피트(36m)의 속도로 빨리 상승하기를 원했다. 

하강할 때 나를 힘들게 했던 상승조류는 내가 언덕을 상승할 때는 도움을 주었다.

호흡이 약간 이상하게 빨렸다.

다음 호흡을 해보니 더 힘들게 빨렸다. 

기체가 바닥난 것 아냐? 나는 또 게이지를 탱크에 두들겨보았지만 이번엔 바늘위치가 변하지 않았다.

 만약 배쪽에 착용한 탱크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면 320피트(97m)에 매달려있는 첫 스테이지 실린더에 도착하는 동안의 감압은

할수 없게 된다.

나는 탱크를 바꾸는 대신 빽업 레귤레이터로 바꾸어 물었다.

 다행히 기체가 빨렸다."

바위가 갈라진 틈을따라 꾸준한 속도로 상승한 그는 520피트(158m)에서 그곳에 묶어 놓았던 재래식 수심계를 수거해 착용했다.

당시에는 그 이상 수심을 측정해내는 수심계가 없었기 때문에 엑슬리는 라인에 만든 매듭에 의해서 수심을 측정했다.

"158m나 되는 수심에서 감압정지를 하고 있자니 이상한 기분이었다. 

내가 알기로는 이 수심밑으로 내려가 본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었다.

 나는 1분간 정지해 있다가 1분당 10피트(3m)의 속도로 340피트(103m)까지 상승했다.

첫 스테이지실린더가 보였다.

내 옆에 스페어 개스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되자 마음이 놓이면서 스트레스가 사라졌다.

그러나 긴 감압과정은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다이빙 시간 24분에 대한 그의 감압 의무량은 거의   10시간 30분에 수면에서의 30분 순수산소호흡을 추가시켜야 하는 양이다.

"나는 시간의 여유가 생기자 귀가 먹을 뻔했던 폭파음의 원인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것은 내가 주전지로 쓰던  큼직한 수중전지의 플렉시글래스 배터리 하우징이 내파된 진동이었다. 

압력이 얼마나 높았던지 3/4인치 두께의 뚜껑이 케이스 속으로 밀려 들어가면서 배터리 팩을 찌그려뜨려 버렸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여전히 불은 들어와 있었다."

엑슬리는 무난하게 감압을 마치고 오후 9:30에 파죽이된 지친 몸으로 수면에 올라왔다.

몇시간 뒤에 그의 지원다이버 네드 델로치가 당연한 질문을 했다.

"이런 다이빙을 또 할 생각이십니까?" 엑슬리는 한참 생각에 잠기더니 "나도 모르겠는걸" 하고 대답했다.

엑슬리는 거의 꼬박 1년 뒤인 이듬 해 1989년 3월 28일, 40세 생일 수일 전,

동일한 동굴 다이빙에서 881피트(267.8m)를 들어가 자신의 기록을 깼다.

그는 이 시대의 가장 멎진 다이버들중 하나일 것인데 그는 동굴다이빙만 3000회 이상 했지만 동굴다이빙계와 하이테크 다이빙계

밖에서는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는 가장 거리가 깊은(수심이 아님) 동굴에 핀킥으로 들어간 기록도 보유하고 있는데 10,444피트(3,175m)로서

플로리다에 있는 칩스홀(Chip`s Hole)이라는 수중동굴이다.

그는 글도 많이 썼고 6권의 책도 냈으며 미국 동굴다이빙계에서 상도 받았다.

그러나 소위 전문가들은 그가 살아남을 수 있는 확율은 50% 이하 였다고 말한다.

780피트(237m) 다이빙에서 그가 사용한 트라이믹스 테이블은 감압생리학의 선구자인 빌 해밀튼(R.W. Bill Hamilton)이

엑슬리 개인에게 만들어 준 실험용이었다.

스테이지 탱크 16개를 비치해야 했고 몸에는 4개의 탱크를 차야했다.

그가 사용한 트라이믹스는 혼합비율의 종류가 11가지였으며 감압정지는 52회로 설계되었었다.

 881피트(267.8m) 기록잠수에서는 34개의 스테이지 탱크와 13시간 30분의 감압시간이 필요했다.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면 불가능한 다이빙이다.

공기다이빙의 딥다이빙 경쟁
엑슬리가 나타나기 전에는 혼합기체잠수 신기록은 매년 깨졌다.

그러나 1968년에 네일 왓슨(Neil Watson)과 존 구루에너(John Gruener)가 세운 공기잠수 기록은 오랫동안 깨지지 않고

유지되고 있었다.

두 사람은 1년동안 강훈련을 한 뒤에 바하마에서 437피트(132.8m)를 성공시켰다.

당시에는 지금처럼 고성능 레귤레이터와 파워인플레이터가 달린  편리한 BC가 없었으므로 왓슨과 구루에너는 상당히 불리한

조건에서 다이빙을 해야 했었다.

이 시대 다른 사람들의 도전들은 성공과 비극의 뒤범벅이었다.

잭 쿠스토의 동료인 프레드릭 듀마(프랑스인)는 일찌기 1947년에 공기다이빙 신기록을 세웠는데 307피트(93.3m)를 들어 갔었고

심한 질소마취를 경험하고 나왔다.

4년 뒤인 1951년에 마이애미 변호사 호프 루트(Hope Root)는 400피트(121.6m) 기록을 세우기위해 물이 맑은 걸프스트림으로

떠났다.

나이가 52세인데다가 깊은 수심에 별로 경험이 없었던 사람으로선 아주 잘못된 도전이었다.

루트 모험에 대해 한스 하스(오스트리아의 영웅 다이버)는 이렇게 말했다.

"육상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인간물고기들 중에도 나사가 풀린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위험성을 모르고 감히 악마에게 덤벼든다. 

그렇다고 해서 이들을 용감하다고 말할 수 없는 것이 용기라는 것은 위험성이 주는 두려움을 정신적으로 압도했을 때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호프 루트씨도 나사가 풀린 사람 범주에 들어간다."

루트의 다이빙 계획은 더블 탱크를 지고 하강줄 없이 보트에서 입수하여 조류를 따라 드리프트하면서 하강하며 보트는

루트를 따라다니며 음향 측심기로 수심을 기록한다는 것이었다.

일단의 신문기자들과 라이프 잡지의 간부들도 취재를 위해 모여들었다.

베테랑 수중사진가 제리 그린버그(Jerry Greenberg)를 포함해 여러 명의 수중사진가들도 참가했다. 

루트는 21m 수심에서 멈춘 다음 자신의 운명을 생각하는 듯  수면을 올려다보았다.

그 다음 그는 밑이 안보이는 걸프스트림의 수중계곡속으로 헤엄쳐 내려갔다.

그린버그는 30m 수심까지 루트를 쫓아 내려가 더블호스 레귤레이터에서 구름 같이 쏟아져 나오는 버블을 뒤로하며 하강하는

루트의 망령 같은 모습을 촬영했다.
루트가 90m 수심권을 넘어가자 그린버그는 루트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영원히 볼 수 없었다.

보트의 측심기는 루트의 하강을 측정하고 있었는데 종전기록 330피트(103m)를 돌파하자 함성이 터져나왔다.

루트는 마지막 운명을 향해 계속내려가다가 430피트(130.7m) 에서 약 2분을 정지했다.

놀랍게도 그는 계속 더 내려가 490피트(149m)에 도달했다.

잠깐 머뭇거리는 것이 나타나더니 그의 행적은 측심기의 측정 한계인 650피트(197m) 너머로 사라졌다.  

보트 위에서는 침묵이 흘렀다. 

루트의 시신은 영원히 발견되지 않았다.

1959년에 이탈리아의 엔니오 팔코(Ennio Falco)는 약 435피트(132m)를 내려갔다고 소문이 났으나 증거를 제시하지 못했다.

그는 소문보다 낮은 수심에 재차 도전했으나 감압도중 익사했다.

1960년 초에 진 클라크 사마젠(Jean Clarke Samazen)은
"모든 스포츠에 챔피온이란 것이 있다.

나는 스쿠바 다이빙의 챔피온이 되어야 겠다."고 선언했다.

그는 당시에 나와있던 최신형 패키지형 더블 실린더를 사용했는데 등과 앞가슴에 패키지형 더블 실린더를 착용했으므로

공기량은 대단히 큰 것이 되었다.

그는 350피트(106m)를 들어갔다 나오는데 성공했다.

당시 스킨 다이버지는
"마치 거대한 샌드위치처럼 보였다"라고 썼다.  

그 뒤 할 왓츠(Hal Watts)는 사마젠의 기록을 깨고 355피트(107.9m)를 성공시켰으며 그는 현재 딥다이빙 강사로 활동하고 있다.

미국의 동굴다이빙 파이오니어인 톰 마운트(Tom Mount)와 프랭 마르츠(Frank Martz)는 60년대 초에 325피트(98.8m)를 몇

차례 실험하다가 끝에 가서는(1965년) 360피트(109.4m) 신기록을 세웠다.

그 뒤 1967년 할 왓츠(Watts)와 먼스(A.J. Muns)는 390피트(118.6m)를 달성했다.

다시 1년뒤인 1968년에 왓슨(Watson)과 구루에너(Gruener)는 공기다이빙의 최고 정점을 다시 세웠다.

두 사람은 왓츠의 제자들이다.  

이들은 선배들이 모두 질소 마취와 산소중독에 고전했다는 사실을 알고 "적용" 다이빙을하면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두 사람은 납추를 단 케이블을 내려놓고 수심을 증명시키기 위해  클립을 붙여 놓았다.

 이들은 437피트(132.8m) 세계신기록을 수립했다. 

 두사람은 질소마취가 심해서 자신들이 케이블에 클립을 건 사실도 기억하지 못했으며  그 수심에 있을 때  느낌이 어떠했느냐는

질문에 "아무 기억도 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왓슨과 구루에너의 기록은 1971년에 비극의 도전을 받았다.

도전자들은 아치 포르파아(38세), 애니 군더슨(23세), 짐 록우드(21세) 세사람의 팀이었다.

당시 22세이던 쉑 엑슬리는 지원 다이버로 참여했다.

이들은 점진적으로 수심을 높여가는 훈련 다이빙을 많이 했으며 그중 록우드는 400피트(121.6m) 다이빙도 여러 번 했던

다이버였다.

이들은 왓슨/구루에너 기록을 깨기 위해 480피트(145.9m)를 목표로 삼고  훈련에 들어갔다.

훈련 다이빙에서 이들은 400피트(121.6m) 이상을 40번 들어 갔으며 그중 25회는 450피트(136.8m)였다

(스쿠바프로의 헬륨 수심계를 사용 했음).

이들은 연습 딥다이빙에서는 이제 마취장애를 크게 느끼지 않았으므로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하고 1971년 12월 11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포르파아는 왓슨과 구루에너가 사용했던 케이블을 사용하기로 하고 수심을 증명하는 클립은 다이버가 내려가면서

게이블을 따라 밀고 나갈 수 있는 방식을 택했다.

이들은 또 기발한 안전책을 고안해냈다. 

마취가 심해 의식을 상실했을 때  다이버는 대개 레귤레이터를 입에 물고 있으며 숨은 쉬고 있다.

따라서 의식을 잃었다 해도 수면으로 저절로 뜰 수만 있다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이 고안해 낸 것은 무거운 납을 무릅 뒷쪽에 착용하는데 다리를 꺽고 있으면 웨이트가 제자리에 있고

다리를 펴면 웨이트가 떨어져나가는 방식이었다.

즉 하강할 때 항상 BC는 크게 부풀려가지고 있으며 부력상쇄는 무릅 뒤쪽에 찬 웨이트가 해준다.
만약 기절하면 다리가 풀어지므로 다이버는 저절로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거사 당일 날 안좋은 일들이 벌어졌다.  

케이블 끝 480피트(145.9m) 지점에는 엔진 블럭을 연결시켜 놓았으나  다이빙 현장에 오기 전에 릴에 감겨져있는

케이블을 풀어보지 않았다.

막상 풀어보니 케이블이 휘어져 물에서 수직으로 유지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리하여 포르파아와 군더슨은 자동으로 떨어지는 웨이트 시스템을 포기하고 BC에 공기를 넣지 않는 방법을 택했다.

그러나 록우드는 계획대로 납을 단 파이프를 무릅 뒷쪽에 껴안는 방법을 택했다.

세 사람은 400피트(121.6m) 이하 수심에서 모두 기절했고. 록우드만 BC의 부력으로 떠올랐다.

포르파아와 군더슨은 영원히 실종되었다. 세이프티 다이버들도 어쩔수가 없었다.

22년이 지났지만 왓슨과 구루에너의 기록은 깨지지 않았고 많은 도전자들이 다 죽었으며 오직 록우드만이 살아남아 있었다.

이 때 브릿 질리엄(Bret Gilliam)이 등장한다.

질리엄은 아주 용의주도한 사람이다.

그는 거의 일년 동안 적응다이빙을 하면서 딥다이빙이 인간과 포유동물에 미치는 생리학을 깊게 파고들었다.

그는 11개월 동안 연습 다이빙을 600회나 했으며 90m 이상 다이빙을 103회나 했다.

또한 그는 400피트(121.6m)이상 수심에서 증가된 산소부분압이 어떤 증상을 일으키는지 연구하기 위해 재압챔버 다이빙을

다각도로 해보았다.

그는 지난 20년 동안 딥다이빙을 직업적으로 했으며 1958년부터 1990년 까지 세계 도처에서 1만 2천회의 다이빙을 했으며

그 중 2000회는 90m 이상 수심이었다.

질리엄은 컴머셜 및 스포츠다이빙 관련 사업체를 많이 경영해 왔던 사람이며 미해군 잠수표 제작에도 참여했던 사람이다.

그는 직업상으로 딥다이빙을 하고 있었지만 기록 다이빙에 대해서는 원래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자신이 자주 들어가고 있는 수심이 최고기록수심과 크게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기록 다이빙에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들게 되었다.

그가 기록 다이빙을 하게 된 또 다른 동기는 딥다이빙에 관해 잘 알지 못하는 다이빙계 전문가들이 딥다이빙을 멸시하거나

틀린 정보들을 말하는데 대해 화가 나 있었기 때문이다.

질리엄은 때 마침 주문형 감압표 제작자 랜디 보러를 만날 수 있어서 그로부터 500피트(152.4m) 감압표를 얻어낼수 있었다.

그러나 질리엄 자신도 감압표엔 어느정도 전문가였으므로 랜디 보러의 감압표를 더 개선하여  감압 시간도 단축시키고 안전도도

높여 놓았다.  

또한 그는 재압챔버 오퍼레이터 자격도 있고 많은 감압병 환자들을 치료한 경력도 있다.

그는 약간의 마이너스 부력으로 1분당 100피트(30.4m) 속도로 하강하기로 했다.

다이빙 전에 스노클 호흡으로 10분간 수면에 잠겨있다가 5m 수심에 들어가 수경 없이 호흡한 다음 수면에 올라왔다가 얼굴에

물기가 마를 정도의 시간을 보냈다가 본 하강을 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하고나면 그는 1분에 한번 내지 두번 호흡할 수 있고 맥박은 분당 12∼15회로 느려질 수 있다.

그는 장소를 수직절벽이 있는 로탄(Roatan)의 플래이스(Mart`s Place)로 선택했다.

1990년 2월 14일 그의 39회 생일이 11일 지난 뒤였다.

수면쪽 시야 거리는 30m, 깊은 수심에선 60m가 나왔다.

수온은 81℉(27℃), 조류는 없었다.

현장에 있는 몇명의 스텝들은 이 다이빙의 결과가 어떠할지 알고 있었다.

질리엄이 다이빙하고 나올 때 까지만 쓰겠다고 그의 금장 롤렉스 시계를 빌려 달라고 하는 사람,

TV와 스테레오를 빌려달라는 사람, 질리엄이 지휘하고 있는 큰 배의 특실을 쓰겠다는 사람, 여자 친구를 빌려달라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러나 질리엄은 시계를 벗지 않았다.

질리엄의 장비는 최소한의 그것이었다.

100큐빅피트 용량의 싱글 탱크와 DIN 밸브 그리고 고성능 호흡기, 옥토퍼스, 500피트(152.4m) 까지 측정되는 헬륨 수심계 두개,

3개의 다이브 컴퓨터가 있었다.

다이브 컴퓨터는 감압용이 아니라 수심계 기능과 시계기능이 고압에 견딜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사용했다.

그는 수중절벽 옆으로 하강을 시작했다. 90m를 정확히 3분에 내려갔다.

 이제 그는 하강속도를 약간 느리게 했다. 320피트(97m)에 도달하자 컴퓨터 하나가 에러(error)가 나면서 꺼졌다.

150피트(45.6m) 수심에서부터 쫓아오던 큰 빨판 상어가 그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빨판상어는 큰 동물에 들러붙어 다니는 고기이다).

그의 면전에서 얼씬거리는 빨판상어를 보랴 게이지를 보랴 곤욕을 치르고 있었다.

이러다간 다이빙을 포기해야 할 판이었다.

다행히 빨판상어가 그의 다리쪽으로 가더니 시야에서 보이지 않았다.

425피트(129m)에 도달했을 때 그는 BC에 공기를 넣기 시작했다.

레귤레이터가 이중고를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호흡의 공기를 빨아들이지 않을 때 BC버튼을 눌렀다.

그는 8파운드(3.6Kg)의 웨이트벨트를 버렸다.

수심 452피트(137.4m)였다.

종전 세계기록에서 25피트(7.6m) 초과였다.

그 수심에서도 자연광은 밝았다.

그는 슬레이트를 꺼내 10가지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무슨 요일인가? 지금 몇시인가? 3x10x22=?등등의 간단한 문제들이었다.

 문제를 푸는데 1분 40초가 걸렸고 그가 예상했던 것보다 긴 시간이 걸렸다.

총 경과시간은 6분 20초, 끝내야 했다.

상승은 분당 100피트(30m) 속도로 하다가 30m 수심에서는 분당 60피트(18m)로 낮추었다.

1차 감압수심은 50피트(12m)였다.

그는 1시간 16분 뒤에 수면에 올라왔고 순수산소를 20분간 마셨다.

질리엄 이렇게 말했다.  

"마취를 느끼긴 했지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장애는 개인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산소중독은 정말 아직은 뭐라고 결론내리기 어렵다.

산소중독이 겁은 났지만 문제를 일으키진 않았다. 

나는 이 다이빙에서 몸이 힘써야 할 요소를 완전히 배제시켰다.

나는 물론 체질이 예외적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러나 나의 오랜 딥다이빙 경험과 적응훈련이 가장 중요한

도움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는 내가 해낼 수 있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엑슬리와 질리엄의 신기록 다이빙들은 그 방법에 있어 많은 차이가 있다.

그러나 한가지 공통점은 혼자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만약 사고가 난 경우 책임 문제가 법적으로 일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다른 누구보다도 사전에 엄청난 준비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들의 다이빙을 무모한 것이라고 비난하는 여론도 만만치 않다.

딥다이버들도 매우 위험하다는것을 잘 알고있다.

그러나 이들은 그것이 개인적인 문제라고 항변하며 에드먼드 힐러리경이 "에베레스트산이 있으니까 올라갔다"는 유명한 말로

답변을 대신한다.

1991년 이후의 갱신 기록
질리엄과 엑슬리는 1993년과 1994년에 각각 자신의 기록을 갱신했다.

질리엄은 1993년에 475피트(144.4m) 공기다이빙 신기록을 수립했다.

1992년에는 500피트(152m)에 도전해 보겠다고 버진섬 물속에 들어간 사람이 실종되는 사고가 있었다.  

같은 해 헐리우드의 다이빙 강사는 465피트(141m)에 도달했다가 다이빙을 포기하고 나오는 도중 하향조류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도달 수심은 본인의 주장일 뿐 공인되지는 않았다.

1994년 현재를 기준으로 공기다이빙 최고기록은 1994년 3월 18일 댄 매니온(Dr. Dan Manion)이 세운 509피트(154.7m)이다. 

그가 이 기록을 세우기 전에 몇차례 490피트(148.9m)를 성공시킨바 있다.

그는 1년전부터 질리엄이나 톰 마운트와 교분을 가지면서 사전훈련을 지독히 했으며 체중을 18Kg나 줄일 정도로 피트니스

훈련을 했다.  

그러나 도달 수심은 수심계가 말해 줄 뿐 매니온 자신은 도달했던 수심이 얼마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혼합기체(스쿠바 시스템의) 최대 다이빙 수심을 기록했던 엑슬리는 1994년 그의 나이 45세 때 담수호 동굴 1000피트(304m)에

도전하다가 사망했다.

보우덴(Bowden)과 함께 들어갔었으나 각자의 라인을 사용해 내려갔었다.

보우덴은 담수 925피트(281m) 혼합기체 기록을 성공시켜 엑슬리의 종전 기록 881피트(267.8m)를 깼다.

사망한 엑슬리의 컴퓨터에는 904피트(274.8m)가 기록되어 있었다.

전문가들은 엑슬리가 HPNS(High Pressure Nervous Syndrom: 고압신경 증후군)에 의해 졸도한 것으로 믿고 있다.

 
딥다이빙 세계기록 갱신연표

오픈워터 다이빙

연도
수심(해수)
사용기체
장소
다이버(들)
1945500피트(152m)TRIMIX지중해Arne Zetterstrom
1947307피트(93.3m)공기홍해Frederic Duma
1961350피트(106.4m)공기플로리다Jean Clarks Samazen
1961730피트(221.9m)HELIOX스위스Hannes Keller와 Ken McLeish
19621000피트(304m)HELIOX캘리포니아Hannes Keller와 Peter Small
1963355피트(107.9m)공기플로리다Hal Watts
1965360피트(109.4m)공기플로리다Tom Mount와 Frank Martz
1967390피트(118.6m)공기플로리다Hal Watts와 A.J. Muns
1968437피트(132.8m)공기바하마Neil Watson과 John Gruener
1971440피트(133.8m)공기바하마Ann Gundersom(여성비공식기록)
1988345피트(104.9m)공기플로리다Marty Dunwoody(여성기록)
1990452피트(137.4m)공기로탄Bret Gilliam
1993475피트(144.4m)공기샌살바도르Bret Gilliam
1994490피트(149m)공기나쏘Dan Manion(현재 최종 신기록)


동굴다이빙


연도
수심(담수)
사용기체
장소
다이버(들)
1955210피트(63.8m)공기프랑스잭 쿠스토
1956250피트(76m)공기플로리다Gary Salesman과 Wally Jenkins
1965315피트(95.8m)공기네바다James Houtz
1969335피트(101.8m)공기로데시아Frank Salt
1970415피트(126m)공기플로리다Hal Watts(94년현재 남성 최고기록)
1970400피트(121.6m)HELIOX플로리다Hal Watts
1983656피트(199.4m)HELIOX프랑스Jochen Hasenmayer
1987656피트(199.4m)TRIMIX멕시코Sheck Exley
1988780피트(237m)TRIMIX멕시코Sheck Exley
1988400피트(126m)TRIMIX멕시코Mary Ellen Eckhoff
1993554피트(168.4m)TRIMIX멕시코Ann Kristovich(94년현재 여성 최고기록)
1989881피트(267.8m)TRIMIX멕시코Sheck Exley
1994925피트(281.2m)TRIMIX멕시코Jim Bowden(남성 혼합기체 최고기록)



                                         출처 :스쿠바다이버지 2001/01/0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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