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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부인이 바라본 19세기 조선의 모습들
09/26/2018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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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조선 사람은 게으르고 무디고 어리석고 느리고 열등한 민족이라고 말들을 한다. 이는 생각 없이 겉모습만 본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조선 사람은 아일랜드 사람들과 아주 비슷하다. 이 두 나라 사람 모두 낙천적이고 태평스럽고 감정적이고 인정이 많고 친절하고 너그럽다. 좀 더 나은 생활을 할 기회와 자기 밥벌이를 할 수 있다는 신념을 불어넣어라. 그러면 그들에게서 훌륭한 시민의 모습을 찾아낼 것이다. 외국 탄광회사 사람들과 하와이 미국인 농장 경영주의 증언을 들어보라. 여태껏 고용했던 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 조선 사람들이 가장 훌륭한 노동자임을 내놓고 이야기한다." 


기독청년회(YMCA)와 연세대를 설립한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의 부인이자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던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가 1904년 펴낸 [상투 튼 사람들과 함께한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내용의 일부다. 당시 조선은 가능성이라고는 단 1%도 없는 그야말로 구제불능의 국가였다. 그러나 그녀의 생각은 많이 달랐다. 조선인은 일본인들의 경박성과 저돌적인 충동 기질이 없고 중국인들의 무딘 보수성도 없다. 이들 세 민족 중 문자를 발명하고 입헌정부 형태를 발전시킨 나라는 조선뿐 아닌가. 그녀는 "20년 동안 도시와 시골의 갖가지 환경에서 날마다 조선인들을 가까이에서 접촉하고 살펴본 한 사람의 생각이다. 조선인들과 사귄 지 한 해 만에 했던 생각과는 정반대되는 것"이라고 했다. 언더우드 부인이 오늘날 우리를 본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책은 기독교 선교활동을 위해 격동기 조선에서 살면서 겪었던 경험과 느낌을 자신의 시각으로 꾸미지 않고 솔직하게 전달한다. 처음 조선을 밟았을 때 접한 낯선 풍속과 문화는 충격의 연속이었다. 1888년 3월 처음 도착한 제물포 항구는 선창이 없었다. 해안은 돌투성이였고 나지막한 능선은 나무 한 그루 없이 헐벗었다. 서울의 집들은 모두가 끔찍하게 비위생적이고 벼룩이나 이 같은 해충이 득실거렸다. 모든 하수는 길 양쪽에 있는 도저히 말로 할 수 없을 만큼 더러운 시궁창으로 흐른다. 여러 해 동안 버려두웠던 하수 도랑의 오물은 여름에 온 비에 쓸려 내려간다. 그 비가 도시를 살려주고 있다.    


조선인들의 긴 머리털은 빗질을 하지 않아 엉망이다. 목과 얼굴 언저리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은 흉측하고 지저분해 보였다. 겉모습은 중국인이나 일본인들과 그다지 다를 바 없었으나 대체로 그들보다 키가 컸다. 여자들은 대체로 아름답지 못하다. 슬픔과 절망, 힘든 노동, 애정의 결핍 등으로 25세가 넘는 여자에게서 아름다움 비슷한 걸 찾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리고 그녀들은 모두 담배를 피웠다. 


언더우드 부인은 38세의 늦은 나이로 조선에서 남편과 결혼했다. 신혼여행으로 북부지방을 둘러봤다. 외국인이 지방을 자유롭게 여행하던 시절이 아니어서 불편함은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열악한 숙박시설은 그중 으뜸이었다. 제일 큰 여인숙일지라도 객실이 다섯 또는 여섯에 지나지 않았다. 마당에는 개, 고양이, 닭, 돼지, 오리 따위가 득시글거리며 황소와 조랑말들이 한 지붕 아래에서 요란하게 여물을 먹어대는 통에 잠을 청하기 어렵다. 온돌은 겨울에는 난방과 요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요긴한 구조이지만 여름에는 얘기가 달라진다. 쌀과 콩 따위를 끓이려면 펄펄 끓는 난로 위에서 잘 각오를 해야 한다. 호랑이나 표범이 출몰해 노숙은 가당치도 않다. 조선 호랑이는 이 외국인이 눈에 띌 정도로 흔했다. 저자는 조선에 온 뒤 서울에서만 호랑이를 적어도 한 번 이상 봤다. 서울에 온 지 몇 달이 되지 않아 집 옆에 있는 러시아 공사관에 표범이 나타난 것을 본 적도 있다. 


조선인의 호기심은 광적인 것이었다. 외국인 여자는 어마어마한 흥밋거리가 됐다. 여인숙에 들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들어 집 안을 꽉 메웠다. 문은 모조리 구멍이 났다. 황해도 순천군 은산면에서는 사내가 저자를 보려고 방문을 부수고 들어오려고 했다. 가마꾼 중 덩치 큰 사람이 사내의 상투를 잡고 내동댕이친 뒤 주먹으로 흠씬 팼다. 저자는 상투가 편리하고 효과적인 손잡이 구실을 한다고 했다. 그녀는 "미국 남자들이 머리를 이런 식으로 묶지 않는 게 참 섭섭하다"고 부러워했다. 


조선에서는 술 마시기가 아주 보편적이다. 일본이나 중국에서처럼 차를 마시지 않으며 우유도 먹지 않는다. 그들은 걸핏하면 손수 담근 과실주나 아주 독한 알코올성 음료를 들이켠다. 평안도 강계에서는 원님이 술을 마시고 언더우드의 하인들을 관아로 끌고 가 매질을 했다가 이를 사과한다며 푸짐한 선물을 보내왔으며 곧이어 숙소의 주인까지 잡아다가 매를 치라고 지시했다. 그러다가 잠시 후 이방이 찾아와 사또나리가 약주에 취해서 그런 것이라며 가벼운 장난을 눈감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녀는 자신이 모셨던 명성황후와 고종을 비롯한 왕실 인물들에 얽힌 많은 일화를 소개한다. 언더우드 부인은 왕비를 간호해달라는 명령을 받고 경복궁에 입궐한다. 명성황후의 첫인상은 좀 창백하고 아주 바싹 마른 얼굴에 이목구비가 날카로운 느낌을 줬다. 사람을 꿰뚫어보는 것 같은 총명한 눈을 지녔지만 첫눈에 아름답다는 인상을 주지는 않았다. 서로 대화를 하면서 평가가 달라졌다. 생기발랄함과 소박함, 재치 같은 것들이 그의 용모를 환히 비추었고 단순한 겉모습의 아름다움보다 훨씬 더 큰 매력을 느끼게 해주었다. 지식은 대개가 중국의 고전에서 얻은 것이었지만 정신 수준이 매우 높았다. 왕비는 질문을 많이 했고 자기가 들은 것은 모두 기억했다. 


왕비는 늘 머리에 첩지(왕실 여성이 가르마에 얹던 장신구)를 하고 있었으며 뒤쪽 쪽진 머리에 보석을 박은 황금 머리핀을 한두 개 꽂았다. 장신구에 신경 쓰지 않아 귀고리나 목걸이, 브로치, 팔찌를 찬 것을 한번도 못 봤다. 왕비는 늘 언더우드 부인을 세심하게 배려했다. 왕과 왕비가 아니면 대궐에서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없다. 언더우드 부인이 명성황후를 방문했다가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왕비는 몸소 창가로 가서 대궐 밖에 대기 중인 가마를 대령시키라고 명령했다. 주위에서 왕비의 명령을 사양하고 가마까지 걸어가 달라고 애원했다. 혼례 때 입었던 옷과 얇은 비단신이 흠뻑 젖었지만 왕비의 마음씨에 마음이 푸근해졌다고 저자는 적었다. 겨울 동안에는 언더우드 부인과 그 친구들을 모두 불러 대궐 뜰 안의 연못에서 스케이트를 타라고 일렀다. 왕비는 미국을 무척 궁금해했다. 그녀는 "아, 조선도 미국처럼 행복하고 자유롭고 힘이 있다면…"이라고 탄식하면서 "전하와 세자와 내가 모두 그곳에 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그녀가 체험했던 무수한 정치적 사건도 낱낱이 써내려간다.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해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외국인들은 자국의 공관으로, 조선인들은 시골로 피란을 떠났다. 부모들이 버렸거나 인파 속에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애들이 숱하게 보였다. 전쟁이 무자비하게 휩쓸고 지나간 평안에는 길이가 수 마일에 넓이가 몇 야드나 되는 만주군 기병대와 말의 송장더미가 전쟁이 끝나고도 3주가 넘도록 그로 방치돼 도시를 오염시켰다. 


1895년, 그해를 휩쓴 콜레라가 잠잠해지던 10월 8일 경복궁에서 대참극이 발생한다. 그날 새벽 언더우드 부인은 대궐에서 나는 총소리를 듣고 불길한 징조를 느꼈다. 오후까지는 왕비가 죽었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이후 많은 소식이 들려왔다. 공격부대는 총을 쏜 뒤 아무런 저항 없이 대궐 안으로 쳐들어왔다. 의화군(의친왕)이 총소리를 듣고 도망치자고 왕비에게 간청했지만 대비를 홀로 남겨놓고 갈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정병하가 "두 분 전하(고종, 명성황후)는 안전할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저자는 천한 사람이 왕비 덕에 출세하고 큰 은혜를 입었는데 의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암살자의 하수인이 됐다고 했다. 적의 무리는 가련한 왕비를 찾아내 찔러 죽였다. 궁녀들을 데려와 왕비의 시체를 보여주자 "중전마마, 중전마마"라고 소리쳤다. 그들의 절규를 듣고 암살자들이 득의의 미소를 흘렸다. 


이 사건 이후 고종은 독살의 공포를 느껴 음식을 거의 들지 않았다. 언더우드 부인이 음식을 만들어 임금에게 보냈다. 음식은 통에 담은 뒤 자물쇠로 잠갔다. 언더우드는 매번 자물쇠를 왕에게 전달했다. 그러던 그가 흥선대원군을 만났다. 을미사변의 주모자인 흥선대원군은 "그 좋은 음식을 왜 전하에게 드리오? 늙은 내게 그 음식이 더 필요하오"라고 했다. 2년 뒤인 1897년 10월 고종은 황제의 칭호를 사용한다. 이어 11월 27일 중전의 장례식이 치러진다. 황후의 예에 걸맞게 황제는 마지막 의식에 돈을 물 쓰듯 했다. 비운의 왕비의 마지막 호사였던 셈이다. 




서울 마포 양화진에 있는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묘비 탁본



Lillias Horton Underwood(1851~1921)=미국 뉴욕주 Albany에서 출생했으며 노스웨스턴대 의대에서 약학을 전공했다. 북장로교 선교부의 요청으로 1888년 내한한 뒤 제중원(한국 최초의 근대식 병원)의 부인과장을 지냈으며 명성황후의 마음을 사 그녀의 주치의가 됐다. 1889년 선교사였던 Horace Grant Underwood와 결혼했다. 격동기의 조선 땅에 살면서 기독교 선교 활동과 의료, 교육, 사회 사업 등에 전력하다가 1921년 서울에서 사망해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혔다. 


- 기사 원문 : 매일경제, 2017년 5월 29일,  https://m.news.naver.com/read.nhn?mode=LSD&sid1=001&oid=009&aid=0003949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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