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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우드 선교사의 생애
09/15/2018 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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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는 1859년 7월 19일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12살에 그의 아버지와 함께 미국으로 왔다그의 아버지는 화학기사였다그의 부모는 경견한 사람들이었으며그의 아버지는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 가족은 뉴저지주의 어퍼 더함이란 마을에 정착을 했고 호레이스는 그곳에서 신앙을 가져 개혁교회에 가입하였다호레이스는 곧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저지시()의 하스브룩 학교를 졸업하고그는 뉴욕대학에 진학했으며 그곳을 마친 후 뉴 브룬스위크 신학교에서 3년을 공부하였다


그는 개혁교회의 목사로 안수 받은 후 뉴저지주의 폼프톤에 있는 작은 교회를 맡아 목회를 하였다그의 교회는 부흥되고 선교에 대하여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그 교회의 장로들이 그에게 선교에 대하여 너무 많은 돈을 기부하도록 충동하지 말라고 부탁하면서만약 그가 계속 그렇게 할 경우 그들은 더 이상 봉급을 드릴 수 없다고 말했다언더우드 목사의 개성적인 대답은 이러했다. “만약 그렇다면 나는 기꺼이 봉급 없이 그와 같이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기간이 지나간 후그 교회는 선교헌금이 4배로 급증했고목사의 봉급도 2배로 올랐다


언더우드 목사는 인도로 갈 계획이었다그래서 부수적 준비로써 의학공부를 시작하였다뉴욕의 대학교회는 그가 공부하는 동안에 그들의 목사로 모시고 매주 한 번의 설교와 한 번의 기도회만을 인도하고 1년에 1,500달러를 지불했다


바로 그때 조선의 문호가 개방되고 조선의 부름은 그에게 지상명령으로 다가왔다그는 즉각 조선으로 임지를 바꾸었다그러나 그가 속했던 화란 개혁교회는 조선에 새로운 선교를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그는 1884년 장로교 선교부에 들어갔다


조선에서의 첫 번째 개신교 선교사인 그의 놀라운 사역은 잘 알려져 있다우리는 이 개척자 선교사의 성품과 생애에 대하여 이야기 하려 한다그의 생애는 마치 나팔을 불어 모든 신자들이 신앙과 헌신에서 더 높은 것을 추구하도록 격려하는 것 같다



호레이스 그랜트 언더우드 목사의 가장 뛰어난 장점은 하나님과 사람들에 대한 사랑으로 흘러넘치는 위대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었다그의 생애의 처음부터 그의 인격적인 매력은 고국에서나 조선에서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호감을 주었다이것은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과 선의에서 나온 것이었다


양반들은 그의 친구였고 빈민들은 그의 형제들이었다그가 조선에 와서 행한 첫 번째 자선행위는 심한 마마에 걸린 낯모르는 유럽인을 돌보아 준 것이었다


콜레라가 유행하고 있는 동안에 그는 자주 밤낮으로 환자들을 돌보아 준 것이었다그래서 사람들은 그가 밤늦게 급하게 달려가곤 하는 것을 보고 말했다. “저 사람은 병자를 간호하기 위해 가는 예수인이다그는 우리를 사랑하기 때문에 밤낮 쉬지 않고 일한다.” 


조선의 황후(민비)가 시해당한 후 왕궁은 공포의 도가니가 되었고 일단의 분노한 민중들은 왕을 구하기 위해 궁 안으로 들어오려고 했다언더우드 목사는 미국과 영국과 러시아의 공사관을 위한 통역자였는데그는 불쌍한 왕에게 위로의 메시지와 음식을 준비해 주었다왕은 그를 감금하고 있는 사람들이 제공하는 음식에 손을 대기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언더우드 목사는 위로자조언자왕의 형제로서 왕궁을 몇 달 동안 출입하였다그는 시골의 작은 마을들을 여행하면서 남자들이 모이는 곳에 가서숨 막힐 정도로 냄새나는 곳에서도 몇 시간 동안 형제처럼 그들과 대화하면서 그들의 어려움을 인식하고반항 자들을 개종시키며 그들 사이에 평화를 심어 주었다


그는 어디서보다도 감동적인 신앙을 지닌 가난한 시골 신자들과의 친밀한 교제에서 가장 행복해 했다유럽인 거주자들과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기피하고 저주하는 사람들까지 그의 이 같은 사랑을 느낄 수 있었다


큰 비전과 강한 개성을 지닌 인물치고 반대를 만나지 않는 경우는 없다언더우드도 예외는 아니었다그도 때때로 심한 반대를 받았다그러나 그는 그의 신중한 계획들을 방해하고 오랫동안 간직해 온 꿈들을 계속 무너뜨리는 사람들에 대하여 결코 심한 비판을 가족에게 조차도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는 슬퍼했다그것은 사실이었다그러나 그는 반대자에 대해 오직 기독교 정신에 의해 행동했고 증오의 마음을 품지 않았다


나는 15년 동안 같은 선교부에서 일한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이 최근에 말한 증언을 하나 인용하고자 한다


그의 마음은 놀라울 정도로 동정적이고 사랑이 풍성했다그는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시는 사람들 중의 하나였으며예의 바르고친절하고 항상 인내심 있고 신사다웠다나는 그가 다른 사람을 해하는 말을 한 것을 들은 적이 없다그는 다른 사람 혹은 그들의 동기를 비판하거나 심판한 적이 없다내가 그를 알아온 15년 동안을 회고해 볼 때 그는 내가 여태 안 사람들 중 가장 그리스도와 같이 산 사람이었다.” 


언더우드 박사의 지적 은사는 놀라운 것이었다마치 의도적으로 그가 선택한 사역을 위한 것 같았다그는 그가 필요로 하는 언어를 완전히 습득하는 특출한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그는 그 언어를 독해할 뿐 아니라 회화도 자유롭게 하고 그 언어를 완전히 자신의 언어로 만들 수 있었다이러한 능력은 실제적인 상식과 선교사업과 조직에 대한 천재성그리고 광범위 하고 거시적인 안목과 재빠른 통찰력과 결합되었다그는 또한 열렬한 웅변의 은사를 소유하고 있었다미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입증하듯이그의 웅변은 사람들을 감동시켰고많은 선교 헌신자들을 얻었으며외국선교를 위해 막대한 헌금을 모았다


호레이스 언더우드는 성경 번역 작업과 같이 가장 엄밀성이 요구되는 문필 작업에 오랫동안 끈질기게 집중하고 종사할 수 있는 또 다른 능력을 소유하고 있었다실제로 그는 이 성경번역 작업에 많은 시간을 쏟았는데성경 원어의 의미를 조금만 변경시켜도 그 결과는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양심적인 번역자에게 있어서 성경의 번역 작업은 무거운 책임감을 감내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의 세 번째 중요한 특징은 지칠 줄 모르는 신체적 강인함으로써 그는 이 강인함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시골을 여행할 때에는그는 한국산 조랑말의 느린 걸음을 싫어했기 때문에하루에 50마일을 걷는 것이 그에게는 드믄 일이 아니었다수 마일을 걷고 나서도 그는 계속해서 모임과 회합을 열고는 했는데이런 일을 끝마치고 나면 밤 열두시 혹은 한시가 되는 때가 비일비재했다그러고 나서도 그는 다음날 새벽에 일어나서 다른 곳으로 출발할 때가 자주 있었다그는 일의 큰 중압감 속에서도 이런 일을 계속적으로 수행했던 것이다


미국에서 언더우드 박사는 가끔 하루에 세 번씩 설교를 하면서 여러 날을 뛰어다니기도 했고야간에 여행을 하면서 주일날에는 일곱 번씩이나 설교를 하기도 했다잠자는 것을 마다하고혹은 매우 필요한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가는 것도 마다하고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서 설교를 계속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이런 캠페인 속에서 그와 함께 여행했던 사람들-홀 박사애비슨 박사우드러프 할시 박사-은 해야 할 일이 있을 때에 그가 보여준 이런 굽힘이 없는 정력을 증언할 수 있다


그런데 천성적으로 그에게 주어진 이런 은사들 이외에도성령께서 그에게 부여하심으로써 다른 은사들을 완전케 하고 존귀케 한 은사들이 또 있었다이런 은사들 중에서 가장 으뜸가는 것이라면 아마 절대적이고도 동요가 없는바위처럼 굳건한 신앙이었을 것이다


그는 성경의 무오성에 대해서 뿐 아니라 장로교가 가르치는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의 그 어느 것에 대해서도 털끝만큼의 의심의 빛을 보이지 않았다다른 어느 사람보다도 가깝게 28년 이상을 그를 알고 있던 나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그의 나라의 전진에 대한 그의 꾸준한 신뢰와 확신이 조금이라도 흔들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기도에 대한 언더우드 박사의 강력하고도 지속적인 믿음은 해가 갈수록 더욱 강해지는 것 같았다그의 소망은 언제나 분명했고 밝게 빛났다동서양에서 그를 알고 있던 모든 사람들은 그를 매우 낙천적이고 행복하며모든 사람과 모든 환경을 위하여 항상 최선의 것을 믿고 소망하는 사람으로 알고 있었다


그는 결코 낙담하거나 우울해 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그가 마지막 병을 앓고 있을 때에 그를 돌보았던 의사는 그렇게도 일관되게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고 불평이 없는 환자는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자기의 주님과 그 주님의 일을 위한 이 그리스도인의 절대적인 헌신은 계속해서 사람들의 존경심을 불러 일으켰다그는 동정심과 다른 사람에 대한 관이 많은 사람이었으며성부께서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로 하여금 풍요하게 누리게 하신 세상의 좋은 것들 속에서 참된 쾌락을 발견한 사람이긴 했지만주님의 사역의 진전이나 자기의 의무 속에 세상적인 유익이나 쾌락이나 이익이 개입하는 것을 한순간도 허락하지 않은 사람이었다그는 자기의 삶을 바쳐서 헌신한 그 대의를 위해서는 모든 것 -건강가족친구시간 혹은 쾌락-을 주저 없이 포기하고 웃전으로 밀어버린 사람이었다



일 년 전그에게 절실하게 필요했던 휴식을 취하기 위하여 해변에서 생활하고 있을 때에도-이때에도 그는 병 때문에 고통을 받고 있었으며결국은 이 병 때문에 죽게 되었다-그는 시험 삼아 번역해 놓았던 이사야서의 번역을 보완하는 작업을 위하여 레이놀즈 박사와 함께 휴가 기간 내내 일을 하였다


마침내 그는 여름이 시작할 때보다도 더 지치고 병들어서 집으로 돌아왔다그리고 의사의 긴급한 충고에 따라서 미국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어야 하는 이 년 동안에도 그는 도리어 일하고 땀 흘리며 자기의 생명을 쏟아서 피어선 기념 유니온 성경하교연희 대학의 설립을 위하여 노력했으며기독교 서적 보급회, Y.M.C.A., 소년 소녀를 위한 소학교들여러 선교단체자기가 보살피던 40개의 작은 시골 교회들을 밀어 주었으며그의 저술 활동의 여러 부분들을 진척시켰으며선교부가 일본 정부와 만족스러운 관계를 맺게하기 위하여 애를 썼다


병으로 인한 체력의 소모 때문에 일을 끝내고 돌아올 때에는 창백한 얼굴에 거의 빈사상태가 되곤 하던 이 시기에도 그는 가끔 밤늦게까지 학생들을 가르치고 회합과 위원회의 모임 등에 참석하곤 했다


다른 많은 유능한 선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언더우드 박사에게도 돈을 벌 수 있는 기회가 무수히 있었다그중에는 만약 그가 수락하기만 했다면 수천달러의 수입을 보장해 주었을 제안들도 있었다한일합방 이전에 한국의 통치자들로부터 만약 그가 미국 시민권의 특권을 가지고 황제 폐하를 위하여 어떤 일을 수행해 준다면 보상을 주겠다는 제안이 그에게 주어졌다. -그 보상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기 때문에 공개적으로는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또한 선교 활동이 정부의 호의를 가장 얻지 못한다고들 말하던 초기에 공립학교들을 마음대로 운영할 수 있는 기회가 그에게 제공되었으며몇 년 후에는 장로교를 국교로 만들고 왕으로부터 모든 관리들에게까지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하겠다는 제안도 있었다그러나 이런 모든 제안들에 대하여 그는 물론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등을 돌렸다왜냐하면 이런 것들은 예수님의 십자가가 인도하는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것들보다도 더 큰 유혹이 그에게 닥쳤으니 곧 서울에 연희대학을모든 선교활동과 선교로부터 독립시켜서 설립하자는 것이었다. -이 유혹은 그에게 참으로 강한 힘으로 다가왔다이것은 그가 생애 속에서 가장 이루기를 위했던 꿈의 하나로써그는 이일을 위하여 모든 노력을 기울였고 그의 최후의 힘을 짜내었던 것이다


그는 계속적인 장애에 부딪혔으며자기의 꿈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끈질긴 반대를 견디어야 했다그런데 독립적인 대학을 짓겠다면 이 계획은 그의 꿈의 실현을 쉽게 만들어 줄 수 있었지만그는 그 계획이 자기의 선교부와 그리스도의 대의를 위한 최선의 이익에 불충실한 것이라 하여 그 제안을 거부하였던 것이다그는 그 대학이 선교부와의 협동 속에서 수행되는 연합사업의 일환으로 설립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한국의 유익을 위하여 그 교육기관을 탄생시키려는 노력 속에 자기의 힘을 모두 쏟고 그는 죽었다그러나 그는 아직까지도 그것을 위하여 일하며그것을 바라고 있으리라


그의 건강이 너무나 악화되었기 때문에 집안에서만 생활을 해야 하는 지난 겨울에도 그는 모든 교육관계자들은 일본의 국민풍습언어그리고 법률을 잘 알아야 한다는 정부의 희망에 따라서 일본어를 공부하러 일본에 갔었다건강이 점점 악화됨에도 불구하고 그는 두 명의 교사로부터 하루에 아홉 시간을 공부하고 모임교회식사 등에 참석하였고관리들을 찾아가고 교육기관들을 방문하면서 그의 영향력과 솜씨를 사용하여 동경에 있는 한국 학생교회와 Y.M.C.A.의 일들을 돌보았으며자기 자신을 너무나 돌보지 않고 일을 했기 때문에 4월에 서울로 돌아왔을 때에는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였으며환경을 바꾸기에도 너무 늦었고 최선의 치료에 의해서도 회복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의 모범을 보여 주었고그가 선택한 활동과 영역에서 사랑과 우정을 얻게 되었다그는 확고한 우정을 맺어 주었고 의혹과 적의가 들끓는 곳에 하얀 평화의 비둘기를 보내 주었다그러나 이것은 그의 생명이라는 엄청난 대가를 지불한 결과였다


한국에 있는 그의 집은 다른 모든 그의 소유와 마찬가지로 언제나 한국 사람들이나 선교사들이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는 곳이었으며또한 하나의 회합장소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곳에서는 종종 선교사들그 지역의 그리스도인들자원 봉사자들조정의 관리들지방의 지사들완자들과 높은 귀족들대학 교수들학생들혹은 교회의 위원들이 보이곤 했다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들었기 때문에 어떤 때는 밥을 먹을 시간조차 없을 것 같이 보였다


지하실의 서재는 한국의 필기사들이 사용하였다일층은 업무 사무실이 있는데 여기서는 두 세 명의 타자수와 비서들이 그의 서신 업무와 선교부의 일을 덜어주기 위하여 일하고 있었다이층은 연구실로써 언더우드 박사는 여기서 미국인 비서의 도움을 받으면서 자기의 일을 하였다거실과 식당그리고 어떤 때에는 여분의 침실까지도 각종 회의를 위하여 사용되었는데두세 가지의 회의가 겹칠 때도 자주 있었다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그리스도에게 바친 실례를 들기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하지는 않았다나는 단지 그의 성격의 현저한 요소만을 대강 보여주려고 노력했다이제 남은 일은 그의 주요 이상과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을 통하여 이루신 몇 가지 결과를 다시 요약하는 일뿐이다


그의 생애의 큰 목표는 이런 것들이었다한국이 그리스도에게로 돌아옴이 분야에서의 모든 복음주의적 종파들의 유기적 연합모든 현지 교회들의 자급 능력 확립과 모든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일반적인 성경 공부그러나 무엇보다도 연합이 그의 큰 이상이었다


그의 번역 작업 이전 수 년 동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세 가지의 세부적인 목표는 -이 세 가지는 모든 연합을 위한 소원의 일부였으며 또한 그 보조물들이었다. - 이런 것들이었다아더 피어슨 기념 유니온 성경 학교의 설립많은 선교사들이 여름에 모여서 더욱 가까이 대할 수 있는 해변 휴식처의 건축셋째로는 모든 교화에 속한 젊은이들이 훌륭한 기독교 지도자로 훈련받을 수 있는 서울 연희대학의 설립


처음 두개의 꿈은 그의 생전에 성취되었다세 번째 꿈의 성취는 그가 땅 위에서 바라보았던 선교의 비전을 하늘나라에서도 수행하면서 하늘나라에서 볼 수 있으리라고 나는 믿는다


언더우드 박사의 문필 활동은 그의 봉사에 있어서 크고도 중요한 부분이었다그는 선교부 성경 번역부의 의장이었으며또한 게일 박사와 그가 함께 작업한 스코필드 성경의 번역판을 남겨 놓기도 했다그의 활동의 초기에 그는 찬송가를 만들었으며그중의 많은 찬송가들은 그가 직접 번역한 것이다.- 문법책과 휴대용 사전도 만들었다그는 많은 소책자들을 번역했으며 한국 기독교 주간지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 주간지는 기독교인들뿐 아니라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도 인기가 있었으며 특히 농부들과 시골의 양반들에게 사랑을 받았고점점 더 많은 독자를 얻게 되었다


여러 해 동안 그는 이 선교부의 장로교 신학교에서 교수직을 맡았다이 선교부의 여러 단체들을 위하여 사람들과 돈을 구사는 일 이외에는(그는 결코 자기의 직책이나 자기 자신의 일에 해당되는 활동만 하는 법이 없었다남장로교 선교부와 캐나다 선교부기독교 서적 보급회성서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 상당한 몫을 담당했으며, Y.M.C.A.를 출발시킨 공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선교 구역을 할당함으로써 여러 선교부 사이의 우의를 돈독히 하는 일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실제로 위원회들의 기능이 정지되고모든 일들이 포기되거나 연기되어야 할 위기에 처했을 때 그의 기술과 수완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을 찾아냈던 것이다


그의 활동의 초기에 그는 서울에 고아원을 설립했고저술 활동과 전도사업을 하면서도 알렌 의사의 병원 활동을 도왔다말년에 그는 성경 학교일년제 학급그리고 연희 대학에서 가르치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도시와 시골에서 능동적으로 전도활동을 했으며자기의 보살핌을 받고 있는 40-50개의 교회가 흩어져 있는 넓은 지역을 항상 책임지고 있으면서 일 년에 한 두 번은 직접 심방하고 평소에는 편지를 보내거나 조력자를 보냄으로써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또한 선교부 실행위원회의 임원을 지내기도 했고선교지 총회의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의 사역의 중간에 그가 부름을 받았다는 것이 이상한 일로 보이기는 하지만조웻 목사의 말이 이 경우에 적합한 것이 될 것이다


나는 죽음이라는 말을 그와 관련시켜서 사용할 수는 도저히 없으며도리어 그 말을 취소시키고자 하는 마음이다그것은 오직 자기의 주인에게 헌신적인 종이 더 높고 더 자유로운 봉사의 위치로 승진 된 것일 따름이다심지어 나는 그가 선교지의 사역에서 철수했다고 생각할 수도 없다나는 그가 여전히 더 큰 비전과 상상할 수 없이 증가되는 열매와 함께 봉사의 일을 계속하고 있다고 믿을 수밖에 없다.” 


지금 그를 생각할 때에무수한 천사의 무리와천국에 기록된 먼저 거듭난 신자의 총회 및 교회와만유의 심판자 하나님과완전하게 된 의인의 영혼들과 죽음에게도 자신의 소유를 뺏기지 않는 중재자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를 보는 듯하다



- 이 글은 Mrs. 언더우드가 쓴 것으로 1916년 12월 미국 Missionary Review 잡지에 실렸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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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개신교 선교의 선봉에 섰던 언더우드 선교사 소천 100주년’(2016년)을 맞아 그의 선교적 삶을 회상해 본다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한국명원두우선교사는 1859년 7월 19일 영국에서 태어났다. 1872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1881년 뉴욕대학교를 졸업하고, 1884년 뉴브런즈윅 신학교를 졸업했다이어 목사안수를 받은 후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로 파송받아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인천항을 통해 한국 땅에 들어왔다당시 1,500만 한국인들이 질병가난무지 가운데 복음을 듣지 못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선교를 위해 미국에서 1년간 의학공부도 했던 그는 경성에 도착하자마자 의료선교사 알렌 박사를 도와 광혜원(일명 제중원)에서 병자들을 돌보면서 한국인 의학생을 양성하기 위해 물리와 화학을 가르쳤다. 1886년 초 자택 옆 건물을 500달러에 구입해 고아학교를 설립했다이 학교가 경신학교로 발전했고 민족지도자 김규식 박사도산 안창호 선생 등을 배출했다


1886년 첫 회심자를 얻어 세례를 주기 시작했던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7년 회심자 14명을 모아 한국 최초의 조직교회인 새문안 장로교회를 건립하고 두 사람의 장로를 세웠다. 1889년에는 서울기독학교를 세웠으며 기독교서회를 창설하여 기독교서적 출간과 성서번역 사업을 주관하였고한국 최초로 150장의 한국어 찬송가를 만들었다이때까지 독신으로 사역하던 그는 제중원 여의사요 명성황후의 주치의였던 릴리어스 호톤 선교사와 결혼했다훌륭한 의사인 동시에 탁월한 문필가였던 그녀는 <한국의 언더우드>라는 저서를 통해 31년간의 한국선교를 잘 기록했다


1890년에는 한영사전과 영한사전을 출판하고 외국인이 한국어를 익힐 수 있도록 영어로 쓴 한국어 문법책을 만들었다. 1897년에는 그리스도 신문을 만들고, 1900년에는 한국 최초로 YMCA를 세워 기독청년운동을 일으켰다. 1915년 경신학교 대학부를 세워 이 학교가 연희전문학교 그리고 연세대학교로 발전하는 초석을 놓았다


1916년 4신병 치료차 미국으로 돌아가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그해 10월 12일 만 57세의 나이에 소천했다


연세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그의 동상에는 세 마디 글귀가 새겨져 있다. “Messenger of God, Follower of Christ, Friend of Koreans” (하나님의 사자그리스도의 제자한국인의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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