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mexico
Choice(4mexico)
California 블로거

Blog Open 12.26.2008

전체     354863
오늘방문     69
오늘댓글     0
오늘 스크랩     0
친구     348 명
  달력
 
아이다 스커더(Ida Scudder)
02/04/2016 23:05
조회  2638   |  추천   30   |  스크랩   0
IP 187.xx.xx.151



    비록 마지못해 가문의 전통에 따라 의료선교사가 되었지만, 

    가문 누구보다도 더 큰 업적을 이룬 한 Woman Missionary 


아이다 스커더(Ida Scudder)

- December 9, 1870 - May 23, 1960 -





역사상 가장 훌륭한 의료선교사 가문이 스커더 집안이었다. 스커더 집안의 의료선교사로서의 출발은 John Scudder로부터였다. 그는 뉴욕에서 젊은 의사로 활동했는데 선교사로 헌신하라고 하는 작은 책자를 읽고, 1819년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실론으로 건너갔다. 스커더 가족은 실론과 인도에서 36년을 봉사하였다. 그 기간에 13명의 아이들이 태어났으며, 그 중에서 9명이 장성하기까지 생존했다. 그리고 장성한 9명 중에서 7명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료선교사가 되었다. 스커더 집안은 4대에 걸쳐 42명이 선교사로 헌신했는데, 그 기간을 모두 합치면 1,000년이 넘었다. 아이다(Ida)는 그 42명 중 죤 스커더의 막내아들인 죤의 딸이었다. 아버지 죤(John Scudder Jr.)은 할아버지 죤(John Scudder Sr.)과 마찬가지로 인도에서 의료선교사로 헌신한 사람이었다.


아이다(Ida Sophia Scudder)는 1870년 인도에서 태어나 선교사 가족의 모든 아픔 -특히 사랑하는 가족과 헤어져 있어야 하는 것-을 겪으며 자라났다. 그녀가 어렸을 때 가족은 안식년을 맞아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버지만 혼자 인도로 돌아갔다. 2년 후 어머니는 아이다를 시카고의 친척에게 맡기고 아버지께 합류하였다. 그녀의 전기에 의하면 그것은 매우 고통스러운 추억이었다고 한다. “그날 밤의 기억을 돌이켜보면 아픔이 저려온다. 밖에서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 14살 난 소녀의 외로운 슬픔을 말해 주는 듯하였다. 심지어 그녀는 영국으로 떠나는 어머니를 전송하기위해 역에 나가는 것까지 허락되지 않았다. 떨어지지 않으려 매달리는 딸을 어머니는 눈물로 뿌리치고 떠나갔고 그녀는 어머니 없는 텅 빈 가슴을 안고 다락방에 올라가 밤새도록 흐느껴 울었다. … 날이 가고 달이 지나며 고통스런 외로움은 진정되었지만 결코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녀는 고등학교를 마치고 Massachusetts의 Northfield Seminary에서 무디(Dwight Moody)가 운영하고 있는 “Young Ladies' Seminary”에 입학하였다. 그녀는 가족의 전통을 이어받아 선교사가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졸업 직후인 1890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았다. 몇 주 후 아이다는 “무덥고 먼지와 소음이 많으며 냄새가 역겨운 인도”로 향하는 배를 타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의 간병만이 목적이었으므로 병간호가 끝나면 미국으로 돌아가 자신의 꿈을 실현시키리라-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다는 예정보다 더 오래 인도에 머물게 되었다. 어머니의 간호 말고도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다. 여학교에서는 교사를 필요로 했으므로 아이다는 곧 68명의 학생들을 떠맡았다. 그리고 유아세례를 주는 일도 떠맡아야 했다. 유아세례는 아버지가 행하는 것이었으나 보조자가 필요하였다. 아이다의 전기에 의하면 “아이들에게는 대개 코코야자 기름을 발랐기 때문에 미끈미끈하여 잡고 있기가 힘들었다. 혹시나 아이들을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스커더 부인은 아이들을 흰 천으로 감쌌다. 그렇게 흰 천으로 감싸주는 일이 아이다의 몫이었다.


가족들과 같이 있는 것은 행복했지만 마음이 편하지 못한 점도 있었다. 그녀는 거의 모든 가족들 -삼촌들, 사촌들, 심지어 부모들까지-로부터 압력을 받았다. 선교사로 봉사하는 스커더 가문의 전통을 깨뜨리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이다는 선교사의 무거운 짐을 결코 짊어지고 싶지 않았다. 또 가족의 전통이라는 것도 자신에게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녀가 선교사로 헌신한 것은 사실이라기보다는 우화와 다름없는 이상한 경험 때문이었다. 그것이 곧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의료선교의 “소명”이었던 것이다. 어느 날 3명(브라만, 힌두교 성직자, 이슬람교인)의 방문객이 밤중에 그녀를 찾아와 난산을 하고 있는 산모를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종교 관습상 낯선 이성은 가까이 할 수 없었으므로 남자 의사인 아버지의 도움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아이다는 지옥보다도 더한 악몽의 밤을 새웠다. “나는 너무 두려워서 잠을 잘 수 없었다. 내 손을 거친 아이들 중에서 3명의 여아가 돌보아줄 사람이 없어서 죽었다. 나는 원망과 기도 속에서 뜬 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나는 인도에 있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내 친구들은 나에게 미국으로 돌아와 재미있는 생활을 즐기자고 편지했었다. 나는 밤새 기도한 후 새벽에야 잠이 들었다. 아마 내가 하나님과 그렇게 가까이 한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간 내내 하나님께서 나를 선교사로 부르고 계심을 느꼈다. 아침에 마을에서 ‘둥둥’ 북소리가 들렸다. 나는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죽음을 알리는 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알아보라고 하인을 보냈더니 그가 와서 그들 모두가 밤에 죽었다고 전해주었다. 나는 다시 무릎을 꿇고 인도 여인들의 비참한 현실을 깊이 생각하며 기도를 드렸다. 많은 생각과 기도 후 나는 부모님께 미국에 가서 의학을 공부하고 선교사로 다시 인도에 와서 그런 불쌍한 여인들을 돕겠다고 말씀드렸다.”


다음해 아이다는 미국으로 건너가 1895년 가을, 미국 최초의 여성 의료선교사인 클라라 스웨인이 다녔던 필라델피아의 Women's Medical College에 입학하였다. 그러다 1898년 코넬의과대학(Cornell Medical College)이 여성들의 입학을 허용하자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기위해 전학을 했다. 그녀는 거기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공부를 마치자 아이다는 새 병원을 지을 돈 1만 달러(어느 부유한 부인이 헌금한 것임)를 가지고 노스필드에서부터 친구였던 Annie Hancock을 데리고 인도로 돌아갔다. Annie Hancock은 아이다의 의료 사역과 연결하여 복음 사역을 할 계획이었다.


아이다의 처음 의료사역은 무척이나 실망스러운 것이었다. 아버지 후광을 입고 인턴 과정을 하려고 했지만 아버지가 갑자기 암으로 돌아가시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다. 일이 꼬이느라 인도인들은 의사의 도움이 필요해도 아이다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한동안은 찾아오는 환자가 없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실력도 서서히 늘어났다. 그러나 인도의 다른 의사들이 겪었던 것과 똑같은 좌절을 겪어야만 했다. 미신적 치료행위가 계속 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치료가 무위로 끝나는 일이 많았던 것이다. 어떤 축제기간에는 모든 의학적인 치료가 금지되었다. 그리고 환자는 개처럼 끌려 다니며 귀신을 몰아내는 의식을 하였다. 한번은 심한 부상을 입은 환자를 데려다 환부를 깨끗이 소독하고 붕대를 감아주려고 잠깐 자리를 떴다가 돌아와 보니 상처를 “거룩한 재”로 범벅을 해놓아 잘못했으면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있었다. 환자가 협조적인 경우에도 무지 때문에 문제가 생겼다. 언제 얼마만큼의 약을 먹으라는 의사의 지시는 그들에게 어려운 시험 같은 것이었다. 한번은 아이다가 귀를 막을 솜을 주니까 먹어도 되느냐고 묻는 환자도 있었다.


아이다가 인도에 도착한 직후 벨로어(Vellore)에 병원 신축 공사가 시작되었는데 그 공사는 그녀가 미국을 떠나기 전에 완성되기를 바라던 것이었다. 그러나 막상 원주민들 가운데서 일하다 보니까 병원으로는 충분치 못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인도인들, 특히 인도 여성들에게 필요한 것은 의료에 대한 무지에서 벗어나 기본적인 의학 상식을 갖추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인도 여성이 직접 훈련을 받아 계몽 사업을 펼쳐야만 했다. 그리하여 그녀가 당면한 최대의 목표는 인도 여성을 위한 간호대학을 세우는 것이었다.


이런 일을 위해서는 기금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녀는 모금운동에 열중했다. 휴가를 받아 미국에 갔을 때 그녀는 대부분이 여성인 청중들 앞에서 인도 여성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소개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집회 때마다 헌금이 들어와 학교를 세우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돈이 모금되었다. 정부 당국의 비협조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간호대학을 시작했다. 영국 군의관은 만약 6명의 입학생이라도 모이면 성공을 거둔 것이라며 그녀를 무시하였다. 그는 단 3명의 입학생도 얻지 못할 것이라고 했지만 151명이 몰려들었다. 그녀는 그 중에서 18명을 뽑았는데 14명이 4년 과정을 수료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정부의 자격시험이었다. 대개 그 시험은 5명중 1명꼴로 합격하였다. 그래서 아이다는 학교의 졸업생이 한 명이라도 합격하리라는 기대는 하지 말라는 충고를 들었다. 그러나 합격자 발표 결과 14명 전원이 합격하였으며, 1등부터 4등까지를 그녀의 졸업생이 휩쓸었다.


의료사역이 중요하였지만 아이다는 자신이 대하고 있던 사람들, 특히 의학 수업을 쌓고 있던 젊은 여성들에 대한 영적 사역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녀는 바울 사도와 바울서신에 관한 4년 과정의 성경공부를 실시했는데 이는 학생들 간에 매우 인기가 높았다. 그래서 몇 번이나 그 코스를 되풀이 하였다. 하루에 16시간을 일해야 하는 중노동의 의료사역에도 불구하고 성경공부를 빠트리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의료사역이 Annie Hancock에게 복음사역의 문을 열어주었다는 것이다. Hancock은 벨로어에 흩어져있던 마을 사이에서 복음사역에 전념하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에 아이다와 함께 인도에 왔을 때 인도인들은 그녀를 집안에 들여 주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이다의 명성이 높아지자 그녀의 신망도 함께 올라 이제는 어디에서나 환영을 받게 되었다.


병원과 학교 및 마을 진료소를 운영하는 일 외에도 아이다는 그 지역의 형편상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고아원을 운영하였다. 20명도 더 되는 집 없는 아이들이 스커더의 가정에 들어오게 되었다. 아이다는 그들을 보살피면서 자주 한두 명씩 회진에 데리고 다니기도 하였다. 이런 중에 1925년 86세의 나이로 어머니가 타계하자 그 슬픔은 비할 수가 없었다. 63년전 이 강인한 여성은 선교부로부터 지원을 거절당했는데, 그 까닭은 인도에서의 어려움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자 아버지가 어머니에 대한 책임을 지기로 자청하였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25년 동안 어머니는 계속 사역을 감당하였다.


아이다의 사역의 범위가 넓어지자 많은 비용을 감당하고 새로운 설비를 구입하기위해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었다. 4개의 다른 교단에 속한 여성 단체들이 후원했지만 그것으로는 불충분하였다. 1920년대 초 록펠러재단으로부터 만약 200만 달러를 다른 곳에서 모금할 수 있다면 인도에 있는 기독교학교 지원에 그녀의 활동을 포함시켜 그녀에게 100만 달러를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다. 그래서 아이다는 다시 미국에 돌아가 마음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300만 달러의 모금운동을 벌였다. 그리고 거기서 모금된 돈은 대부분 벨로어에 새로운 종합의료시설들을 건립하는데 사용하였다.


새로운 시설에도 불구하고 벨로어의과대학(Vellore Medical College)은 독립한 새 정부의 요구조건을 수년 동안 충족시킬 수 없었다. 1937년 신임 보건부 장관은 모든 의료시설은 전부 마드라스대학(University of Madras)에 소속해야 한다는 시행령을 공포하였다. 아이다에게 “애정이 가득 담긴 의과대학을 포기하는 것은 죽으라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미국이 사상 최악의 불황을 겪고 있을 때 기금을 모은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겠는가? 상황을 변경시킬 수는 없을 것 같았다. 남자 기독교 의과 대학들은 그래도 형편이 나았다. 그래서 이사회는 학교를 병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아이다는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여자 의과대학이 달리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남녀공학을 하면 어떻겠는가? 1938년 인도를 방문한 모트는 그와 같은 해결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 제안은 현실적으로 가장 타당성이 있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이에 호응하였다. 어떤 사람은 벨로어가 이상적인 장소라고까지 제안하였다.


아이다는 그 제안에 대해 본국의 후원자들과 부지런히 의견을 교환했지만 뾰족한 수는 없었고 오히려 전에 겪어보지 못한 논쟁만 가열되었다. 수천 명의 여성들이 인도에 여성을 위한 의과대학을 세운다고 해서 헌금을 했는데 남녀공학으로 만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벨로어 의료시설 이사진의 한 사람이었던 Hilda Olson은 격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항의하였다. “벨로어의 모든 사역은 어떤 사람의 말처럼 하나님의 일입니다. 그러나 나는 ‘여성을 위한’ 하나님의 사역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이런 처음의 목적에서 빗나간다면 그동안 모금한 모든 헌금을 다시 기부자들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입니다.”


이사회의 의견도 완전히 갈라졌다. 그동안 아이다의 가장 강력한 지지자였던 Lucy Peabody는 가장 날카로운 반대파가 되어, 선교회가 하는 모든 일에 아이다는 불충실했다고 비난했다. 그리고 많은 이사들이 Lucy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아이다에게는 참으로 괴로운 기간이었다. 그러나 결국 격론 끝에 이사회는 문을 닫는 것보다는 차라리 남자의 입학을 허용하기로 결정했다. 그것이 유일한 대안이었다. 이제 벨로어는 새로운 남녀공학 기독교 의과대학의 터전이 되었다. 일이 이렇게 결론나자 아이다는 오히려 기뻐하였으나 Hilda Olson과 Lucy Peabody가 화가 나서 이사직을 사임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벨로어가 남녀공학으로 바뀐데 대한 비판의 소리도 높았지만 아이다가 이룬 업적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 아이다와 인터뷰를 했으며, 그녀에 대한 기사가 거듭해서 쓰였다. 그러한 기사 중 <Reader's Digest>의 기사는 아이다에 대한 칭찬일색이었다. “72세의 하얀 머리를 가진 이 비범한 노인은 걸음이 기운차고, 눈에 생기가 있으며, 숙련되고, 강인한 45명의 의사를 거느리고 있다. 그녀는 18년 동안, 인구 200만 지역의 의료연합의 지도자였다. 인도 전역의 의사들은 가장 어려운 산부인과 환자의 수술을 그녀에게 맡긴다. 여자와 아이들은 단지 손이라도 잡아보려고 그녀에게 올 정도로 그녀의 명성은 대단하다.”




Ida S. Scudder with Mahatma Gandhi, 1928 




아이다는 1946년 75세의 나이로 은퇴하였고, 수제자인 Hilda Lazarus 박사에게 모든 책임을 물려주었다. 전기에 의하면 그것은 매우 복된 것이었다고 한다. “일생동안 지도자의 역할-어떤 사람은 이를 독재라고 했지만-만 해오다가 이제는 지도받는 역할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은퇴한 후에도 10년 동안 정력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녀는 남녀 학생과 의사를 대상으로 매주 성경공부를 지도하였고, 의사들에게는 어려운 환자에 대해 조언하였으며, 그녀의 아름다운 인도식 저택인 Hill Top에서 손님과 고관들을 만나거나 테니스 게임을 즐겼다.


아이다는 65세 때와는 같지 않았지만(그녀는 토너먼트를 할 때 마다 2세트 게임에서 10대 소녀들을 사정없이 물리쳐 게임이 끝난 후 “할망구”라는 소리를 자주 들을 정도였다) 83세가 될 때까지 규칙적으로 운동을 했는데 그녀의 전기에 의하면 “여전히 날카로운 서비스를 넣었다.”고 한다.


1950(1958년의 오기?)년 그녀가 죽기 2년 전, 아이다의 인도사역 50주년 기념행사(Golden Jubilee)가 벨로어에서 열렸다. 그날은, 비록 마지못해 스커더 가문의 전통에 따라 인도의 의료선교사가 되었지만, 스커더 가문 누구보다도 더 큰 성공을 이룬 한 여인을 기리는 날이었다. 처음 그녀는 조그만 방에서 몇 명 안 되는 환자들을 데리고 시작했지만 이제는 100명의 의사에 484개의 병상을 갖춘 종합병원과 60개의 병상을 갖춘 안과 병원을 가진 현대적 의료 단지를 이룩해내었다. 그리고 그 병원은 많은 이동진료소가 딸려있으며, 20만 명 이상의 환자를 치료하는 한편 매년 200명의 학생들을 배출하고 있다. 그녀가 얼마나 유명한지 편지 겉봉에 “인도, 아이다 박사”라고만 써도 3억 인구의 대륙에서 그녀에게 편지가 정확히 배달될 정도였다.



- 루스 터커(Ruth A. Tucker), <선교사 열전(From Jerusalem to Irian Jaya), 크리스챤다이제스트>에서

https://en.wikipedia.org/wiki/Ida_S._Scudder - 사진 2장과 일부 참고 










아이다 스커더, Ida Scudder,
이 블로그의 인기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