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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시습 기념관에는 금오신화가 있습니다 .
11/06/2018 1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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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에서는 매월당 김시습 기념관도 잊지 말아야 할 고택입니다 .



평생을 꿈꾸는 선비로 살아온 매월당의 풍모가


삼국지 속 영웅의 풍격과 닮았습니다 .





꿈꾸는 사람으로 천년 후에도 그 이름을 알아주길 바란 매월당의 소원은


이 시대에도 모든 작가들의 소망이어서 동감합니다 . 글을  쓰는 사람은 항상


환상의 세계에서 가장 행복하기에 ...이런 기원을  글로 남기셨을 거라 상상합니다 .





몽유도원도 같은 금오신화의 세계가  동화적이며 아름답고 사랑스럽습니다 .




자 그럼 네이버 지식인에게 물어볼까요 ?




매화를 좋아하신 분 그래서 이곳은 매월당입니다 .




내용

이 작품이 창작된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30대의 어느 작자가 경주의 금오산 용장사에 은거하면서 지은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시되고 있다.

이 작품의 창작배경으로는 우선 문학사적 전통을 들 수 있다. 나말·여초의 문헌에서부터 보이기 시작하는 전기() 또는 전기소설()이라 불리는 일련의 작품들에 의해 마련된 서사문학적 전통이 그것이다. 또한 창작 당대에 있었던 사회사 및 사상사의 새로운 전개가 창작배경이 되기도 했다.

조선왕조의 건설자들은 주자학을 새로운 지도이념으로 채택해서 지배질서를 확립하고 전제개혁()을 단행하여 집권층의 생활기반을 확립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역사적 운동의 과정에서 이른바 신진사류로 불리는 일련의 소외된 지식인들은 민중의 처지에 동조하면서 새 왕조의 이념적 모순과 사회적 폐단을 비판하고 새로운 사상을 모색했다.

그 대표적인 사람으로 김시습을 들 수 있는데, 그는 이()를 만물의 본질로 보는 주자학의 주리론()이 지배체제를 합리화하기 위한 명분론이라고 공격하면서 기()를 만물의 본질로 보는 일원론적() 주기론(), 곧 기일원론()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사상을 수립하고, 이에 입각하여 만물을 객관적·합리적으로 인식하고자 했다.

여기서 개인과 사회의 대립이 중요한 문제로 제기되면서 그것이 작품 창작의 또 하나의 배경으로 제공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상적인 면에서는 불교사상 및 도교사상 등 다른 사상과의 관련성도 무시될 수 없으며, 따라서 크게 보면 유자()·선승()·방외인()으로서의 김시습이 상호 이질적인 다양한 사상적 근거 위에서 나름대로의 글쓰기 방식을 개척하고 정립하는 과정에서 ≪금오신화≫가 창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외래적 요인으로서 명나라 구우()가 지은 ≪전등신화 ≫의 영향도 고려될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향설은 한때 필요 이상으로 강조되어 ≪금오신화≫는 ≪전등신화≫의 단순한 모방작품 정도로 처리되기까지 했으나, 계속된 새로운 연구에 의하여 그러한 영향설은 크게 극복되었다.

≪전등신화≫의 영향이 있기 이전에 이미 우리 문학사 자체 내에 ≪금오신화≫가 창작될 수 있는 충분한 여건과 요인이 형성되어 있었으며, ≪금오신화≫는 ≪전등신화≫의 수준을 크게 능가하는 문학적 성취를 보여준다.

≪전등신화≫와 ≪금오신화≫ 사이에 소재 및 내용상의 유사성이 있어 영향이 일단 인정되지만 유사성을 모두 영향의 결과로 볼 수는 없다. 한편 ≪금오신화≫는 일본 소설 <가비자 >에 영향을 주었다.

≪금오신화≫에 수록된 다섯 작품이 지닌 공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 우리 나라를 배경으로 하고 우리 나라 사람을 등장인물로 하여 한국인의 풍속·사상·감정을 표현하였다. 둘째, 소재와 주제가 특이한 관계로 결합되어 훌륭한 문학적 가치를 발휘하고 있다.

소재에 귀신·염왕·용왕·염부주·용궁 같은 비현실적인 것이 많은데, 이러한 소재가 작품의 가치를 하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독특한 수단으로 작용하면서 오히려 주제를 효과적으로 부각시키는 구실을 한다.

김시습은 귀신이 산 사람처럼 나타나서 행동한다든가, 현실 밖에 별도의 세계가 존재한다든가 하는 민간 속신을 논설을 통해 일체 부정했을 뿐 아니라, 작품구조에서도 그런 것이 실재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 않다. 그는 작품에서 귀신을 통해 귀신의 존재를 부정하고 별세계를 통해 별세계의 존재를 부정했다.

비현실적 소재를 교묘하게 이용함으로써 궁극적으로는 현실적인 것의 의미를 더욱 생생하게 표현하고, 거기에 내포된 주인공과 세계의 대결을 더욱 날카롭게 부각시켜 문제의식을 부여했다.

이러한 방법은 고도의 창작기교의 하나인 역설법이며, 그것은 주인공의 요구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세계의 횡포와 거기에 맞서 세계를 거부하고 개조하여 세계와의 화합을 이루고자 하는 주인공의 간절한 소망을 동시에 반영한다.

≪금오신화≫는 작자가 신비주의적·미신적 세계관을 부정하고 합리주의적·과학적 세계관을 수립하면서, 그의 현실주의적 사상체계와 철학적 투쟁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셋째, 결말의 처리방식이 특이하다. 주인공들은 끝에 가서 하나같이 세상을 등지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대부분의 고전소설에서 종결부가 행복한 결말로 처리되어 있는 것과 좋은 대조를 이룬다.

주인공이 세상을 등지는 것은 운명에 대한 순종이나 패배가 아니라 그릇된 세계의 질서를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비장한 결단의 표현이다. 여기에 작품의 비극적 성격과 초월의 의지 같은 것이 내포되어 있다.

넷째, 표현형식에 있어서 유려한 문어체 문장이나 시에 의해 대상이 서정적으로 미화되고 섬세하게 묘사되어 있으며, 구성 또한 단편소설적인 정교함을 지니고 있다.

다섯째, 시가 대량 삽입되어 인물의 심리와 분위기 표현에 독특한 효과를 낳고 있다. 시의 대량삽입은 서정시가 국문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던 조선 전기의 문학적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의 삽입이 소설에 있어서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지만, 서사적 성격이 강한 서정시가 있을 수 있듯이 서정적 성격이 강한 소설도 있을 수 있으니, 시의 삽입이 장르 자체의 본질을 파괴하는 것은 아니다.

여섯째, 이 작품은 작자의 생애와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작자 김시습은 학문적 능력은 탁월하면서도 정치·경제적 기반은 취약한 15세기 후반의 신흥사류로서 현실과의 심각한 갈등 속에서 극히 불우하고 고독한 생애를 보냈는데, ≪금오신화≫는 그러한 그의 생애와 아주 밀접하게 관련된 자서전적 성격이 농후하다.

한편, ≪금오신화≫는 이른 시기의 소설인 만큼 소설장르로서의 한계 또한 없지 않다. 경이적인 세계관을 보여주는 전설적 요소가 남아 있다든가, 소설에서는 바람직하지 못한 작품 외적 요소, 이를테면 기자조선의 멸망과 같은 역사적 사실이나, 용궁·염부주 같은 특정한 민속적 사실이 생경하게 개입되어 있다든가, 서정시의 과다한 삽입과 갈등의 미약성이라든가 하는 것은 초기소설이 지닌 장르적 불안정성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금오신화≫는 내용·기교·작가의식에 있어서 훌륭한 문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으며, 이론이 없는 바는 아니지만 한국소설의 출발점을 이룬다는 점과 후대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문학사적 의의를 지니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오신화 [金鰲新話]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금오신화;


조선 전기에 김시습()이 지은 한문 소설집.

한국 전기체 소설()의 효시이다. 〈만복사저포기()〉 〈이생규장전()〉 〈취유부벽정기()〉 〈용궁부연록()〉 〈남염부주지()〉 등 5편이 수록되어 있다.

원래는 이 5편이 작자가 지은 전부가 아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이 5편밖에 전해지지 않고 있으며, 그것도 국내에는 필사본밖에 없고 일본에서 간행된 것이 1927년 《계명()》 제19호에 최남선()에 의하여 소개되었다.

《금오신화》의 소설적인 특성은 첫째, 주인공들이 한결같이 재자가인적() 인물이라는 점, 둘째, 문장 표현이 한문 문언문()으로 사물을 극히 미화시켜 표현한 점, 셋째, 일상적·현실적인 것과 거리가 먼 신비로운 내용을 그린 점 등인데, 이는 전기소설()의 일반적인 성격이며 이런 점에서 중국소설 《전등신화()》의 영향이 있었음을 보게 된다. 나아가서 이들 작품 세계는 인간성을 긍정하고 현실 속에서 제도()·인습()·전쟁·인간의 운명 등과 강력히 대결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이 작품을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한편, 한국 소설의 발달과정에서 볼 때, 그때까지 조신설화(調)에서 최치원() 설화를 거쳐 《국선생전()》에 이르러 소설의 단계에 접근하였으며, 《금오신화》에 이르러 소설이라는 문학양식을 확립시켰고, 새 출발의 전기를 맞게 되어, 그 이후 소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네이버 지식백과] 금오신화 [金鰲新話] (두산백과)




보다 더 정확한 공부를 하기 위해 네이버 지식인의 도움을 받아봅니다 .


김시습;

본관은 강릉. 자는 열경(), 호는 매월당(), 청한자(), 동봉(), 벽산청은()·췌세옹(), 법호는 설잠(). 김주원()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무반 계통의 충순위()를 지낸 김일성()이고, 어머니는 선사장씨(?)이다.

생애

김시습은 서울 성균관 부근에서 태어났는데, 생지지질()이 있었다 할 만큼 천품이 영민하였다. 3세 때 이미 한시를 짓기 시작하였는데, 보리를 맷돌에 가는 것을 보고 “비는 아니 오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른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 (무우뇌성하처동 황운편편사방분))”라는 시를 읊었다 한다. 5세 때까지 이미 『정속()』·『유학자설()』·『소학()』·『중용()』·『대학()』을 배웠다. 신동()이라는 소문이 당시의 국왕인 세종에게까지 알려져 장래에 자못 크게 쓰겠노라는 전지까지 받았다 한다. 그 뒤 13세까지 전 성균관대사성 김반()에게서 『논어()』·『맹자()』·『시경()』·『서경()』을 배웠고, 또 이웃집에 살던 윤상()에게서 『주역()』과 『예기()』를 배웠다. 그리고 여러 역사책과 제자백가는 스스로 읽어 알았다. 그의 이름인 ‘시습()’도 『논어()』「학이편()」 중 ‘때로 익히면 즐겁지 아니한가’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라고 한다.

15세 되던 해에 어머니를 여의고 외가에 몸을 의탁했으나, 3년이 채 못 되어 외숙모도 별세하여 다시 상경했을 때는 아버지도 중병을 앓고 있었다. 이 무렵 훈련원도정() 남효례()의 딸과 혼인한 후 과거 준비로 삼각산 중흥사()에서 수학하였다.

21세 때 수양대군이 단종을 몰아내고 왕권을 잡은 소식을 듣고 보던 책들을 모두 모아 불사른 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전국 각지를 유랑하였다. 29세 되던 1465년(세조 11) 경주 남산에 위치한 금오산실()에서 성리학과 불교에 대해서 연구하는 한편,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곳에서 6~7년을 보낸 후 다시 상경하여 환속하였다. 다시 안씨()를 아내로 맞이하고 서울 성동()에서 농사를 직접 짓고 살았다.

1485년(성종 16) 51세 때 폐비 논의가 훈구대신들에 의해 제기되자 다시 승려가 되어 방랑의 길에 올랐다. 주로 관동 지방에 은둔, 전국을 방랑하다가 충청도 홍산() 무량사()에서 59세를 일기로 일생을 마쳤다. 시호는 청간()이다.

학문과 사상

조선 전기의 사상계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유·불() 관계의 논문들을 남겼다. “심유천불()”이니 “불적이유행()”이라는 평을 들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김시습의 사상은 유교를 근본으로 하면서도 불교적인 요소가 혼효된 듯이 보인다. 선가()의 교리를 좋아하여 체득해 보고자 노력하면서 선가의 교리를 유가의 사상으로 해석하기도 하였다.

김시습은 불교에 관계된 논문들을 다수 남겼다. 부처의 자비정신과 마찬가지로 군주()가 그 백성을 사랑하여 부도덕한 정치를 제거할 수 있다고 보았다. 불교의 천태종에 대해서는 선적()인 요소를 강조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실의 문제를 논하는 데 있어서는 김시습은 「신귀설()」·「태극설()」·「천형()」 등을 통하여 불교와 도교에 나타나는 신비적 성격을 배격하면서 적극적인 현실론을 전개하였다. 이는 현실에 근거하여 인간사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유교적 사고방식의 발로이다.

한편 김시습의 성리사상은 유기론()에 가까운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귀신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파악하지 않고 자연철학적으로 인식하여, 기()의 이합집산에 따른 변화물로 보았다.

저술

『탕유관서록(西)』, 『탕유관동록()』, 『탕유호남록()』, 『금오신화』, 『매월당집』이 있다. 17세기 초의 문인 기자헌()은 노수신이 배접한 김시습의 친필 유고를 1604년(선조 37)에 얻어 보고, 다른 유고를 더 모아 김시습의 ‘기행’ 시를 중심으로 『매월당시사유록()』을 엮었다.

작품

탁월한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김시습의 작품으로 역대 시선집에 뽑힌 것은 20여 수에 이르고 있다. 대표작으로 「산행즉사()」·「위천어조도()」·「도중()」·「등루()」·「소양정()」·「하처추심호()」·「고목()」·「사청사우()」·「독목교()」·「무제()」·「유객()」 등이 있다. 우리나라 역대 시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많은 염정시()를 남긴 시인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 최초의 한문소설인 『금오신화』를 지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으로는 「만복사저포기()」 등 5편이 전부이며 이 작품들은 김시습의 사상을 검증하는 좋은 재료로 인정되어 왔다. 그러나 「남염부주지()」를 제외한 것들은 모두 감미로운 시적 분위기로 엮어진 괴기담이다.

묘소

죽을 때 화장()하지 말라는 유언을 하여 무량사 옆에 시신을 안치해 두었는데, 3년 후에 장사를 지내기 위해 관을 열어 보니 모습이 살아 있을 때와 같았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부처가 되었다고 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를 하여 유골을 모아 부도에 안치하였다.

상훈과 추모

한산이씨 명문가의 문인이었던 이자(?)는 김시습이 죽은 후에 그 시문을 처음으로 모았다. 선조 연간의 문단에서 대가로 손꼽혔던 노수신()은 김시습의 친필 시 17수를 모아 첩()으로 묶어 후세에 전했다. 훗날 허목()은 그의 시첩을 보고 발문을 남겼다. 김시습은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63번지에 있는 창절사()와, 충청남도 부여군 홍산면 교원리 190번지에 있는 청일사() 등에서 제향되고 있다.

참고문헌

  • 심경호, 『김시습평전』(돌베개, 2003)
  • 『증수임영지(增修臨瀛誌)』(강릉문화원, 1997)

    [네이버 지식백과] 김시습 [金時習]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강릉에는 유명한 명소가 많이 있습니다 . 이곳도 잊지 말고 찾아가 보면 뭔가 가슴에 뭉클한


감회가 있습니다 . 항상 꿈꾸는 사람이었기에 금오신화를 남겼고 그 소설이 있었기에


21세기 .현대에도 판타지 소설 , 우주공상 영화가 상영되는 것 아닐까요 ?


제가 강릉에 다녀오니 참 유식해 진 것 같습니다 .

김시습 ,매월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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